네 친구의 곡절있는 옛 이야기
2011
우리는 이제 6학년 4반. 몇 달 만에 서울에서 삼척공전 친구들이 만났다. 동기동창에다 한 반에서 5년이나 같이 공부했으니 얼마나 좋아? 제일 반가운 게 동창이지. 오늘 열 한 명이 모여 시끌벅적 술잔을 돌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거기서 나온 얘기.
첫째 친구 정진우 얘기 좀 들어보자.
진우는 천재가 확실해. 중학교 때 공부 딱 3개월 밖에 안 하고도 우리가 들어간 기계과에 철커덕 붙고, 수업 끝나고 집에 가면 밤새기로 노가리 일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는데, 아침에는 별 일 없었던 양 학교에 가고, 학교에 도착해서야 겨우 잠을 잤다네.
거기 학교에서 ‘겨우’가 아니라 ‘비로소’지. 쉬는 시간에 친구 봉선이가 잠자는 진우를 흔들면서 그랬다나.
“야 진우야, 쉬는 시간에는 쉬고, 이따 수업시간에 자라”.
맨날 노가리 속에서 일하며 살았으니, 늘 교복에서 노가리 냄새를 풍겼던 진우는 학교에 오면 잠자는 게 수업이었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한 번은 수학시험에 빵점을 맞았다는데, 교수님이 부르시더래.
“네겐 도저히 D학점도 못 주겠다”고. 그래서 진우가 “다음 시험에 제가 100점을 맞으면 합쳐서 D학점은 주세요”라고 했는데,
진짜 100점 맞아서 D학점을 받았다는 거 아이가. 공부만 하면 100점인 진우. 그 천재도 하늘이 시샘하여 노가리 일을 하면 재능을 발휘할 시간을 안 주신다니까 글쎄.
그 때 우리가 학교 다니던 때 삼척에는 세 척의 ‘강 배’가 있었지.
하나는 지금 동양시멘트 공장 앞 오십천 강 배고, 두 대는 정라진 항구에 있었어. 발전소 후문 쪽 하고 어판장 쪽하고.
그 강 배 타고 내가 진우네 집으로, 진우는 우리 집으로 몇 번 놀러 오가던 그 시절, 내 기억에 아마도 그 무렵 언제, 진우가 아주 두꺼운 수학 참고서 – 그 땐 참 비싼 책 – 를 한 권 내게 주었어. 나더러 공부 잘하라 하면서.
이번 만남에서 내가 얘기했더니 진우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더군.
오늘 진우가 내게 한 말.
“그 때 수형이 니가 참 부러웠어. 왜냐고? 니는 니가 공부할 수 있는 거 다 했잖아”였지.
그 소리에 나는 내가 그랬다고 말 하지 않았어.
“그 때 난 단칸방에서 6남매와 부모님이 이불 한 개 같이 덮고 잤다”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공전 졸업할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진우가 그랬다.
“난 너 그런 줄 몰랐다.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그 때 진우네는 노가리 사업으로 돈에 대해서는 그리고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런 말을 해주는 진우는 참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가 만약 좀 넉넉했다면 나도 그렇게 말 할 수 있었을까? 자기는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비싼 참고서를 보지도 못하고, 그 책을 친구에게 줘야 했던 그 심정. 그 심정. 그 심정. 그 심정.
둘째 친구 김봉선 얘기.
점심 못 먹고 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 내게 자기 도시락을 건네주던 친구였지. 지는 배탈이 났다고 핑계대면서. 몇 번 받아먹다가 아무래도 수상해서 도시락을 주고 교실 밖을 나가던 그의 뒤를 밟아 보니 그는 철봉대에 매달려 운동을 하는 게 아닌가? 철봉대가 화장실인가? 그런 그가 공전 1학년 때의 김봉선이다.
“왜 내게 도시락을 주느냐?”고 물으니 봉선이 지보다 내가 더 공부 잘 해서 그런다고. 야! 씨X 지나 내나 겨우 한 등 차이로 입학했는데, 더 잘 하기는 원 얼어 죽을…!
그 후 봉선이네 집 형편이 급속도로 나빠졌어. 덕분에 애석하게도 나까지 도시락을 못 얻어먹게 되었지만….
북풍한설 몰아치던 정라진 항구 어판장. 싸늘한 시멘트 바닥엔 눈보라가 몰아치고….
하지만 밖은 암만 추워도 잘 사는 집의 가정교사 방은 따뜻했지. 아버지가 직공으로 일하시는 이발소 주인집 아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뜨뜻한 방에서 공부 가르친다고 하지만, 내 공부는 못하니 재미가 없어 꾸벅꾸벅 졸기도 하던 시간에, 예나 지금이나 바이브레이션이 특이한 목소리가 찬 공기를 뚫고 들려왔지.
“찹싸알 떠억”.
졸던 나는 정신이 버쩍 들었지. 즉시 학생 옆구리 콕 찌르면, 이 아이가 엄마한테 가서 돈 얻어다가 봉선이한테 가서 찹쌀떡을 사 왔어. 몇 번 그렇게 계속 하니, 봉서이 그만 멀찌감치서 바라보던 나를 발견해버렸지.
들킨 그 날 날더러 “값 싼 동정하지 말라”고 몰아치더군. 에이 씨X랄, 난 친구한테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지금이나 예나 그의 까칠한 성질머리는 못 말리지.
그 먼 통배기에서 정라진 판장까지 그 추운 겨울에 찹쌀떡 팔던 봉선이, 그 시간에 난 뜨신 아랫목에서 가정교사랍시고 팔자 좋게 늘어져 졸고 앉았고, 진우는 얼음 물에 손 담가가며 노가리 씻어 덕장에 걸고 있었겠군. 진우가 날 부러워할만했어.
셋째 친구 정광조 얘기.
광조가 어릴 때 삼척에서 맹장염 수술을 받았는데, 며칠 후 그 후유증이 커서 재수술을 하게 되었다네.
원래 수술한 의사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자기는 자신이 없다고 강릉에 있는 큰 병원에 가 보라 하더라네.
그 때 강릉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다섯 시간 걸렸다.
요즘 같으면 1시간이면 닿을 삼척-강릉 간이 그 땐 무려 다섯 시간이 걸렸는데, 비포장 도로에 터덜거리며 강릉에 도착해서 보니 아픔이 싹 가셨더라고.
이 무슨 조화인지! 의사 선생님에게 “희얀하게 안 아파요”라고 말했더니, 그게 맹장 수술하고 봉합할 때 마구 구겨 넣었던 창자가 꼬여서 아팠는데, 버스에서 다섯 시간 터덜거리다 보니 창자가 출렁거리면서 제 자리를 찾아버렸다고. 허허.
넷째 친구인 나의 얘기.
내 딸 명원이를 출산하던 날 삼척의 OO병원 의사가 내 아내 배를 슬슬 만지면서 쌍둥이가 들어있다고 했지.
아니, 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쌍둥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우냐? 큰 걱정을 하는 가운데, 애기가 나왔는데도 정말로 아직도 아내의 배가 불룩하더라고.
의사가 아내의 배를 또 슬슬 만지면서 왈, “하나 더 들어 있다”고.
그런데 두 번째 애가 잘 안 나오는 거야. 시간은 흘러가고 아내는 위험해지고….
급한 나머지 의사가 일어서서 완전히 초주검된 아내를 등에 걸치고는 마구 꾼들어대는 거야. 배를 출렁거리게 해서 애가 밑으로 내려가게 하려고 말이지. 돌팔이 의사가 중력의 법칙은 알아가지고서리….
씨름 끝에 결국 나온 건 보통보다 훨씬 커다란 태반 덩어리였지.
그런 얘기하면서 그날 우리 친구들 참 많이 웃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