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카 고하도 승강장 아래 공생원별관 옆으로 난 숲길을 통해 일제 강점기 감화원 터를 찾아 가는 길. 목포대교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람 없는 한적한 길을 지났다. 누군가 전기톱으로 나무들을 벤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넝쿨과 가시덤불이 뒤덮은 폐건물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계단 입구에는 옛우물이 보였다. 식수를 위해 만든 저수조 시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오싹오싹했다. 고하도 감화원은 1923년 ‘조선감화령’에 의해 소년범죄자 수용시설로 1938년 만들어져 39년 ‘국립목포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태평양 전쟁 기간이었고,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얼마나 열악했을지 뻔하다. 더구나 이곳에는 소년범죄자가 아닌 저능아와 고아들을 주로 수용했다. 흡사 감옥 같이 외딴 섬 감화원에서 진짜 감화가 이루어졌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고하도에 흩어진 진지와 방공호와 목화밭에 동원되지 않았을까?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하지만 67년 폐쇄될 때까지 이곳에서 인권 없는 감옥 같이 학대와 폭행은 자행되었고, 섬에서 탈출하다가 바다에 빠져죽은 아이들도 있었다. 62년 경향신문은 그때의 사건을 보도하였다. 세상에서 지워진 듯 존재했던 이곳의 폭력 또한 파시즘의 얼룩으로 남아있다. 1980년대에는 이 일대가 공생원의 별관부지가 되었다. 그때 이후 최근까지 사용되었던 현대 건물들도 세워져 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살림을 살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빠진 것이 있다. 기억에 대한 노력이다.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여기서 희생된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사연을 안고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진실은 일제의 의도대로 시퍼런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망각의 바람과 바다만이 출렁일 뿐이다. 나는 요즘 장화홍련을 생각하곤 한다. 어쩌면 이곳 감화원 아이들의 억울한 한 때문에 목포대교 교각이 더 추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