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의 지천(주자동천)을 따라서(8)
◇ 조선총독부의 터 : 중구 예장동 8번지
- 한국 국정 전반을 지휘, 감독하면서 한국의 식민 통치조직을 운영하던 침략기구
남산 입구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탈취하기 위하여 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1906년부터 1926년까지 침략기구 통감부(統監府)와 조선총독부가 있었다. 1905년 8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통감으로 부임, 침략 공작을 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에는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어 1926년까지 이곳에 있었다.
개항 후부터 밀려오기 시작한 일본인은 차츰 남산 밑 충무로, 필동 등에 주택과 상가를 짓고 자리 잡아나갔다. 한편, 갑신정변(1884) 이후에는 경운동의 공사관이 소실되자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일본공사관을 세웠다.
청국과 러시아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한 일본은 1904년 5월 31일 내각에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내용으로 하는 대한(對韓) 방침을 결정했다. 이러한 방침은 1905년 4월 8일과 10월 27일에 보다 구체화하였다.
일제는 1905년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에서의 정치 · 군사 · 경제상의 우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 장악하였다. 이와 함께 서울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 통치를 통감에 예속시켜 독점적인 지배를 감행하게 되었다.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의 진두지휘하에 11월 17일 한국의 박제순(朴齊純)과 일본의 하야 시(林權助) 사이에 5개 항의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박탈당하고, 통감부의 통감에 의해서 외교 사무가 대행되었다. 특히 일본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서 한국 신민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규정하여 사실상 한국은 주권 상실의 상태가 되었다.
1905년 12월 20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理事廳官制)가 공포되어 주한일본공사관은 1906년 1월 31일로 자연히 폐쇄되었다. 1906년 2월 1일에는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여(실제 이토는 3월에 부임했고, (그동안은 한국주차 군사령관 하세 가와(長谷川好道)가 대리함.) 이른바 시정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한국 국정 전반을 지휘, 감독하면서 한국의 통치조직을 체계적으로 해체해 갔다.
1906년 2월, 남산 임시청사에서 통감부는 즉시 본청사의 건축에 착공하여 다음 해인 1907년 2월에 준공하였다. ‘왜장 터’에 세워진 통감부 건물은 곧이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건물로 변신하였다. 이어서 일본공사관은 총독 관저가 되고, 인근에 정무총감의 관저를 지어 한국을 지배하였다. 이 당시 통감부 청사는 벽돌 2층에 회칠로써 석조 모양을 낸 평리원의 건축과 비슷하나 규모가 더 큰 절충식 건물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에 경복궁 내에 총독부 청사가 준공되어 이전하자 1929년 4월부터 이른바 은사과학관(恩賜科學館)이 되었고, 광복 후에도 과학관으로 사용되었다. 1956년에는 그 자리에 한국방송공사(KBS)가 건축되어 사용하다가 여의도로 옮기자, 한때 통일부가 사용하였다.
◇ 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던 주자소(鑄字所) 터 : 중구 (구)주자동 4~7번지 일대
- 활자를 주조(鑄造)하여 책을 인쇄하던 관아 터
주자소는 조선시대에 활자를 주조(鑄造)하여 책을 인쇄하던 관아였다. 이에 따라 주자동(鑄字洞)이란 동명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고려시대의 서적원(書籍院)을 이어받아 1403년(태종 3), 왕명에 의해 승정원 직속으로 주자소가 설치되었다. 이 당시 궁궐 내의 교서관(校書館)을 내관(內館), 주자소를 외관(外館)이라 하였다. 이해 2월부터 수개월 동안 ‘계미자(癸未字)’ 약 10만 개의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인쇄하였다.
1405년(태종 5)에 한양에 다시 천도하면서 이곳 주자동에 주자소를 두었다가 1435년(세종 17)에는 경복궁 내로 이전하였는데 1460년(세조 6)에 교서관에 병합시켰다. 인쇄 업무는 승정원이 관장하였는데 장소가 궁궐 내외에 서로 떨어져 업무 연락에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였기 때문에 1435년(세종 17) 9월에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주자소의 옛 건물에는 책판을 두고, 교서관이 관장하게 하였다. 주자소의 소관 업무는 승지 2인이 주관하고, 따로 2품 이상의 문신 1인과 승지 1인을 제조(提調)로 삼았으며, 그밖에 교서(校書)·교리(校理)·참외(參外) 등 2, 3인을 두어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주자, 인쇄는 그 업무가 중요하므로 유능한 관리를 배정하고, 또 자주 바꾸면 업무가 소홀해져 인쇄 업무에 착오가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만기가 되어야만 교체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뒤 1460년(세조 6) 5월에 교서관으로 소속을 옮기고, 동시에 전교서(典校署)라고 개칭하였다. 그것은 주자 인쇄 업무가 본래 교서관의 소관인데, 그 업무의 중요성에 따라 확장, 설치한 데 지나지 않으므로 합친 것이다.
활자를 주조하는 경우는 주자 도감을 임시로 설치하거나 지방 감영 또는 수어청(守禦廳) 등에 명하여 만들어 냈지만, 그 주자는 교서관으로 보내져 인쇄에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주자소가 교서관에 합속, 운영되어 오다가 조선 초기와 같이 따로 분리, 운영된 것은 정조 때이다.
정조는 조선의 문예를 일으킨 학문을 좋아하는 임금으로서 새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내각으로, 그리고 교서관을 외각으로 삼고, 관찬서의 편찬 및 간행 업무를 촉진했다.
이에 1794년(정조 18)에 규장각과 책을 출판하는 교서관이 떨어져 있어 불편함으로 교서관을 돈화문 밖으로 옮기게 하고, 주자소를 분리해 창경궁의 홍문관 자리에 설치하고 활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이곳에서 ‘정리자(整理字)’로 큰 활자 19만 자와 작은 활자 14만 자를 구리로 주조하였다.
1857년(철종 8)에 화재로 ‘정유자’ 등의 활자가 불타버리자, 그 이듬해에 ‘한구자’, ‘정리자’를 다시 주조하였다. 그리고 교서관에 두었던 임진자(壬辰字)와 함께 조선말까지 인쇄에 사용하였다. 이들 활자를 비롯한 그 밖의 활자 일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래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책을 출판하던 교서관(校書館) 터 : 중구 남산동2가 26-8
- 조선시대에 서적의 출판, 출납에 관한 일을 맡은 관아 터
예관동의 명칭이 유래된 교서관(校書館 : 예관)은 조선시대에 서적의 출판, 출납에 관한 일은 물론 제사를 올릴 때 필요한 향축(香祝) ‧ 도장을 새기는 인전(印篆)의 관리 등을 맡았다. 이 교서관은 내관(內館)과 외관(外館)이 있었다.
경복궁 안의 사옹원 남쪽에는 내관이, 외관인 주자소는 남부 훈도방(薰陶坊), 즉 충무로2가에서 남산동으로 들어가는 어구에 있었다. 이 부근 역시 교서관동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고, 후에 중부 정선방으로 옮겼다.
교서관이 훈도방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 정조 때에 지은 한경지략에 예관, 즉 교서관이 있던 곳은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옛 집터로, 예관 부근에 있는 부군당에는 임경업 장군의 신상(神像)을 모셨다고 하였다. 임진‧병자 양란으로 인하여 파괴된 서울을 재건할 때 교서관도 훈도방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병역세를 관장하던 균역청(均役廳) 터 : 중구 충무로 3가 60-1번지
- 조선 후기에 병역세(兵役稅)를 관장하던 관아 터
현재 「퇴계로」변에는 극동빌딩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 1750년(영조 26)에 창설된 병역세(兵役稅)를 관장하던 관아인 균역청이 있었다.
영조는 양민들이 부담하던 군역(軍役)이 과중해 보이자, 그 대책으로 균역청을 설치하고, 종래까지 베[布] 2필을 바치던 것을 1필로 줄였다. 그 대신 부족한 재정은 어·염·선세(魚․鹽․船稅)와 징집 대상자에게 부과하던 베인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와 군량미 조달을 위한 공미(貢米)에 덧붙여 받던 결작(結作)의 징수로 보충하게 하였다. 해당 관청에 대한 급대(給代)를 총괄하기 위해 옛날의 수어청 자리에 균역청 청사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양민들의 부담이 반감(半減)되고, 종래까지 왕권을 견제하던 신권(臣權)을 억누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국가 재정의 균형을 바로잡게 되었다.
그러나 균역청은 국가 경비의 절약책으로 3년 뒤인 1753년(영조 29)에 선혜청에 합병되었다. 대체로 영조 때 균역청의 1년 수입은 돈으로 환산하여 약 60여만 냥이 되었으므로 호조(戶曹)의 1년 예산을 웃돌았다.
조선 말 임오군란(1882) 때는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인들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 집을 습격하고 선혜청 창고로 사용되었던 전 균역청에 몰려들어 쌓여있던 곡식을 나누어 가기도 하였다.
균역청 자리는 1880년대 일본인들의 자치 조직인 총대역장(總代役場)이 세워져 일인 거류민 집단지역이 되었다. 국유지로 편입되면서 1889년에 일본인의 2세 교육을 담당하기 위한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에 일신국민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다.
그러나 도심의 학생 수의 감소와 「퇴계로」의 확장 등으로 인해 1973년 폐교되면서 부지가 민간인에 불하되어 재개발로 지상 22층의 업무용 빌딩이 건립되었다. 이 일대는 처음에 남학동 지역이었으나 법정동 경계의 재조정으로 충무로 3가에 편입되었다.
◇ 물맛이 맵던 후추 우물[椒井] : 중구 충무로 3가 · 초동 · 을지로 3가 일대
- 우물의 물맛이 맵고 톡 쏘는 것이 마치 후추를 탄 것 같은 우물
초정(椒井)골에는 후추 우물[椒井]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이 우물의 물맛이 맵고 톡 쏘는 그것이 마치 후추를 탄 것 같다고 하여 후추 우물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의 탄산수로 볼 수 있다.
이 우물은 조선시대에 위장병의 특효라고 하여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였으나 1906년 일본인들이 진고개를 8척이나 파내고, 높이 5척이나 되는 방추형(紡錘形) 수멍을 묻고 나서는 물빛이 흐려지고, 맛도 보통 물처럼 되어서 효능이 없어졌다고 한다.
초정은 냉천욕(冷泉浴)의 일종으로 조선시대에 애용되었다. 조선 초 세종은 자신의 안질(眼疾)을 치료하기 위하여 1444년(세종 26)에 청주 목의 초수(椒水)에 행궁(行宮)을 수선하고 왕비와 함께 행차하였으며, 충청도 목천현(木川縣), 전의현(全義縣)의 초수(椒水)가 효력이 있다 하여 내섬시(內膽寺) 인원을 보내어 행궁을 건조하게 하였다.
◇ 화류장을 파는 시전이 있었던 하랑교(河浪橋) 터 : 중구 입정동 5번지, 북쪽
- 붉은색의 작은 옷장인 화류농장(樺榴籠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전이 있었던 다리 터
중구 입정동, 필동천에는 하릿교 또는 하랑교(河浪橋)가 놓여 있었다.
이 다리의 유래는 남부 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던 하남위(河南尉)의 집 왼쪽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 다리 부근에 붉은색의 작은 옷장인 화류농장(樺榴籠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전(市廛)이 있었기 때문에 화류장롱교라 하다가 화류교(樺柳橋)로 줄어들었으며, 다시 하릿교, 하랑교, 하교(河橋), 화교(花橋) 등의 이름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돌다리인 이 다리의 서쪽 시렁 측면에는 ‘임신개조(壬申改造)’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이 다리를 개축한 연도를 추측할 수가 있으나 청계천의 복개 공사로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