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녹간마을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풍요롭고 성스러운 영목(靈木)으로 섬겨져 왔다. 뒤로는 축륭봉이 주산이며 동쪽으로 목마른 사슴이 물을 마시는 형상을 하고 있고 청룡날로 감싼 마을에 자리한 노거수 은행나무 둘레는 9m 30cm이고, 높이는 35m 정도로 전국에서 유일한 나무이기도 하다.
이 영목은 해방 전후만 해도 수형이 너무도 좋았고 하절기면 무성한 그늘을 만들어 인근마을 노인들까지 몰려들어 만장을 이루었다. 나무그늘은 아침에 방석을 펴고 앉으면 종일토록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했다. 옛날부터 매년 음력 7월 17일 백중날이면 주민이 다 모여 나무밑을 흙으로 돋우고 하루종일 백중놀이를 즐기곤 했다. 전국에서도 유일한 영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이곳 주민들이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부여군 노거수로 지정을 받은 후 충청남도 노거수로 지정을 받았으며 1982년도에는 국가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320호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관에서 주변을 정화하여 주위를 자연석 석축을 한 후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그러나 나무가 점점 노쇠하여 나뭇가지가 고사 지경에 이르자 주민과 관청에서 전전긍긍하였다. 다행히도 나무병원에 진단 의뢰하여 외과수술 및 영양제 비료를 시비하였고 영양제 주사를 주입해서 이제는 소생의 여지가 보이고 있다. 주민 모두가 완전히 울창한 수세로 소생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영목의 전설유래 또한 심령스럽다. 과연 이 나무는 언제 어느 분이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 첫째 전설로는 백제 제26대 성왕 때의 맹좌평이란 분과 관련된다. 마을 뒤편 승각골에 약 1,000평 정도의 밭 한 자락이 있었는데 이 밭은 맹정승 집터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는 주춧돌과 말구유, 기왓장 등이 돌담에 매몰되어 있다. 그것을 근거로 맹정승이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나무의 수령을 약 1,500년으로 추정한다. 이 나무를 주민들은 옛부터 영목으로 섬겨 왔으며 나뭇가지 하나 꺾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에 부러진 가지도 절대로 화목이나 재목으로 쓰지 않았다. 이 나무를 영목으로 기리고자 매년 음력 정월초 길일을 택하여 야경에 행단제(杏亶祭)를 지내는데 제관은 초하룻날부터 매일 목욕재계를 하는 등 정성을 다하여 동민의 안녕과 연중 오곡백과의 풍작, 축산의 번식을 기원해 왔다. 그러나 만약 제(祭)가 부정했다면 야밤에 맹호가 나타나서 나무 주변을 돌며 포효하므로 다시 날을 가리고 제관을 선택하여 제를 지냈다 한다.
이러한 영감으로 각종 전염성 질병이 유행할 때도 이 마을에는 절대 질병이 침범치 않았고, 우역(소병)이 심하여 이웃마을에서는 농부들이 쓰러져가도 이 마을에는 우역이 침범치 못하였는가 하면 이웃마을의 소도 은행나무에 끌어다 매놓으면 병이 나았다하여 나무 밑에는 소가 만장을 이루었다 한다.
전설의 한 구절로 은산면 각대리에 승각절이 있었는데 절을 개축하게 되자 절 주지가 은행나무 가지를 대들보 감으로 베어가다가 중도에 졸도하여 절 개축을 중단했다고 하며 가지를 벤 곳에 구멍이 뚫리고 얼마 후 그 속에 혹이 달리었는데 그 혹을 두드리면 농악소리가 나므로 아이들이 들어가서 농악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고 한다.
두번째 전설로는 고려 말엽의 장군인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등극하기 위하여 전국의 명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당시 외산면 아미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전국의 38개 산신 중 은행나무 목신도 초청하였다. 그날 잔치에 참석하기 위하여 축륭봉 산신이 은행나무 목신을 찾아 동행하자 하였으나 마침 은행나무 밑에는 지나는 과객 한 사람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목신은 나는 손님이 와 있어서 못 가니 친구가 잘 다녀와서 결과나 알려달라고 하였다. 축륭봉 산신은 혼자 잔치에 참석하여 진수성찬의 대우를 받고 돌아오다 목신에게 경과를 말했다. 잔치대우도 잘 받았고 이성계 장군의 인품도 훌륭해서 등극을 시키기로 하였다고 일렀다.
그 말을 들은 과객은 이성계 장군에게 그 사실을 고하였다. 이 장군은 그 말을 듣고 하졸을 불러 극진히 대우하라 명하였다. 과객은 2, 3일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후 이 장군은 하졸을 불러 과객을 투옥한 후 처형토록 명하므로 과객은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이성계 장군은 조선조를 세우고 태조왕이 된 것이다.
또한 경술국치 이후로 일제치하에 모집, 징용, 징병 등으로 많은 젊은이가 끌려갔으나 이 마을에서는 한 사람도 불행한 이 없이 모두 무사히 귀가했다. 그리고 일제치하에는 은행나무 터가 논이었으며 일본인인 진전씨의 소유였는지 진전은 자기 땅에 서 있는 나무이니 자기 나무라 하여 용재로 베어간다 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울분하여 주민의 뜻을 모아 도지사에 진정 탄원한 바 일본인인 도지사는 주민의 뜻을 수렴하여 진전을 불러 철회토록 했다.
이 영목은 해방을 맞이하기 며칠 전 무풍천지에 우연히 남쪽으로 뻗친 큰 가지가 부러졌고, 6·25 사변 당시에는 북쪽의 나뭇가지가 부러졌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해시에도 아름드리 가지 하나가 부러진 것이 현재까지 걸쳐져 있다. 이것은 바로 은행목의 큰 영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목은 수많은 전란을 겪어왔고 국란과 주민의 미래전망을 직시하고 예고하여 국태민안의 길을 밝혀주고 계신 영목이라 생각하여 주민들은 엄숙한 행단제를 계속해서 올리고자 매년 음력 정월 초이틀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주민 전원이 참여하여 마을행사로 치르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320호인 이 영목이 천추만대까지 무성(茂盛)하여 국태민안과 주민의 안녕을 지켜 주시기를 염원한다. 글 / 이 수 복(녹간마을 행단제 보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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