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김홍도로 돌아오면 그는 18세기 시의도의 유행에서 명수 중의 명수로 손꼽아야할 화가이다. 시의도 제작수가 남보다 월등히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감칠맛이 있는 표현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는 자신의 생활과 풍류를 유명한 시에 빗대 그림으로 녹여낸 듯한 이색적인 것도 있다. 테마는 매사냥이다.
단원의 전기에는 오점으로 여길만한 기사가 하나 있다. 1795년에 정월에 현감직에서 파직된 것이다. 단원은 1791년 정조어진 제작에 참가한 공으로 그해 12월말에 충청도 연풍(延豊) 현감에 제수됐다. 연풍은 풍광으로 이름난 곳이어서 현감 자리는 중년의 실력 있는 화원에게는 더없이 자랑거리가 될 만한 지방관 자리였다. 재수가 없는 사람은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고 풍광 좋다고 이름난 곳이지만 부임하자마자 가뭄이 시작돼 3년이나 연속됐다. 그런 와중에 김홍도가 파면된 것이다. 김홍도는 기근 대책으로 파견된 호서위유사 홍대협의 탄핵을 받았는데 이유는 사냥을 한다는 명목으로 군정을 부당하게 징발했다는 것이다.
이 일로 해임된 김홍도에 대해 비변사에서는 엄벌을 주장했으나 1월 중순 정조가 그를 특별사면하면서 일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정조가 김홍도를 특별 사면한 것은 그 전해부터 시작한 화성 건설사업에 김홍도를 쓸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 이해 음력 2월초순에 거행된 혜경궁홍씨의 수원 회갑연 행사를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 의 삽화제작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렇고 그가 연풍현감에서 쫓겨난 이유가 된 사냥이란 다름 아닌 매사냥이었다. 매사냥은 고려때 원나라로부터 전해져 조선시대 사대부들 사이에도 매사냥은 호협한 풍류놀이로 여기지며 사랑을 받았다. 단원도 지방관으로 나가 이를 제법 즐긴 듯 이를 그린 그림이 2점 전한다.
김홍도 <호귀응렵(호귀응렵)> 지본담채 28.0x34.2cm 간송미술관
그 중 하나는 <호귀응렵(豪貴鷹獵)>으로 어느 가을날 나무가 앙상해진 들판에 매사냥에 몰두하는 일행을 그린 것이다. 그림 한 복판에는 꿩을 물어뜯는 매가 그려져 있으며 그 주위도 사나운 사냥개 두 마리가 컹컹대는 모습이다. 말 탄 사람은 원님인 듯한데 사냥행차가 매우 성대하다.
구종배 외에 말 뒤쪽으로 뒤따르는 갓쓴 이가 하나 더 보이며 옆에는 일산을 든 하인과 술상을 인 찬모, 짐을 진 시동 등이 있다. 또 이미 잡은 사냥감을 지고 있는 몰이꾼도 둘이나 보인다. 매우 성대한 사냥 장면임에도 그림 내에는 화제도 낙관도 없어 화첩 속에 들었던 한 점인 것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필치는 매우 무르익고 유연하면서 원숙한 50대 이후의 그림으로 보인다.
매사냥을 그린 또 한 점의 그림은 <귀인응렵(貴人鷹獵)>으로 앞서 그림보다 한 사이즈 크다. 잘 치장한 말에 올라탄 매 사냥꾼이 한 손으로는 고삐를 웅켜쥐고 다른 한 손에는 매를 올려놓은 모습을 그렸다. 얕은 산언덕을 돌아가며 고개를 돌려 덤불속을 살피는 순간을 포착했다. 타고 있는 말곁에는 단원 그림에 낯익은 사슴이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사슴도 그렇지만 귀인의 복장도 앞서 그림과 달리 오사모를 쓴 중국식 복장이다.
김홍도 <귀인응렵(귀인응렵> 지본담채 31.7x51.5cm 간송미술관
과연 왼쪽에 쓰인 제시는 중국 성당때 대시인 왕창령(王昌齡, 698-756)의 「관렵(觀獵)」이다. 왕창령은 이백과 동시대를 살았던 시인으로 7언절구를 잘 짓는 것으로 이름났다. 여성들의 규원(閨怨)을 테마로 한 시는 널리 인구에 회자됐는데 그 외에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의 향수나 풍물을 노래한 시도 유명하다. 「관렵(觀獵)」은 호탕한 매 사냥 장면을 지켜보면서 읊은 시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角鷹初下秋草稀 각응초하추초희
鐵驄抛鞚去如飛 철총포공거여비
少年獵得平原兎 소년엽득평원토
馬後橫鞘意氣歸 마후횡초의기귀
가을 풀 듬성등성한 사이로 매 내려앉으니
철총마는 고삐를 뿌리치고 나는 듯 달려가네
들판의 토끼를 잡은 소년
말 뒤에 채찍 비껴들고 의기양양 돌아오네
각응은 매를 가리키고 철총은 검푸른 털 무늬가 박힌 말을 말한다. 공(鞚)은 재갈이며 초(鞘)는 채찍을 뜻한다. 시의 앞 두 구는 매가 하늘을 날아 사냥감이 있는 풀밭에 내려앉는 모습과 말을 몰아 그를 뒤따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다음 두 구는 사냥감을 말에 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가는 모습이다.
단원 그림을 시의 내용과 연관시켜 다시 보면 다분히 뒤쪽 두 구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린 듯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말안장에 올라앉은 인물은 당나라 때 호기로운 젊은 귀족이 아닐 수 없다.
김홍도 <서성우렵(西城羽獵)> 일부 견본담채 97.7x41.3cm 서울대 박물관
들판 토끼로 의기양양하게 나아가고 있지만 사냥꾼은 사냥꾼이라 덤불 속 움직임을 그냥 놓칠 수는 없는 법. 찰나적 움직임을 재현하는 단원의 특기는 여기서도 다시 한번 재연되고 있다.
단원은 정조에게 사면을 받은 뒤 화성관련 화사(畵事) 작업에 참가하며 그린 그림 중에도 사냥 장면을 그린 것이 있다. 이 사냥 장면 역시 매사냥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그림이 이를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y)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