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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상담의 개척자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인경스님
전현자
기자: 스님께서는 송광사로 출가를 하셨죠?
스님: 네. 송광사로 출가를 했죠.
기자: 은사 스님께서는?
스님: 현자 호자 스님(현호스님)입니다.
기자: 송광사에서는 얼마나 계셨었죠?
스님: 송광사에서 6년 있었는데 출가하면 바깥으로 못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은사 스님께서 보조사상상연구원을 맡아서 해라고 하셨어요. 당시 불일암 스님께서 원장이셨는데 ‘법정스님이 원장을 그만두시겠다고 해서 난관에 봉착했으니, 네가 서울에 와서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하면서 해라.’ 그래서 93년에 서울로 왔죠. 그 후로 계속해서 서울에서 살았죠.
기자: 송광사를 승보종찰이라 하고, 한국불교에는 원효대사, 보조국사 그 외에도 훌륭한 국사들을 비롯한 큰 스님들이 계셨지만, 이 두 스님에 의해서 한국불교가 이어져 내려왔다고 합니다. 특히 보조국사를 기념하여 만든 보조사상연구원을 맡으셔서 일하실 때에 승보종찰의 승려로써 보조사상연구를 맡으셨을 때에 스님께서 보조사상을 전승을 한다거나 현대화 한다는 생각이 있으셨을 것인데 스님의 원력 같은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스님: 방금 설명을 했듯이 나는 산에서만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울로 갑작스럽게 왔지요. 보조사상연구원에서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보조사상이 지금 평가로도 마찬가지인데 보조국사의 정신에 의해서 결사대로 살고 있는가 반성을 하게 되었지요. 고려시대 말에 혼란했던 시기에 정혜결사를 하신 보조국사의 정신대로 살고 있는가? 이런 부분들에 대한 평가를 지금 시점에서 한다면 그대로 살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계초심학인문』은 보조스님이 지은 한국불교 청규입니다. 우리는 강원에서 치문을 배우거든요. 근데 그 치문은 중국 청규이지요. 청규는 승려들이 살아가는 생활규범을 정리 한 것이죠. 보조스님이 정예결사공동체, 수행공동체 운동을 하시면서 송광사를 본 도량으로 만드셨잖아요. 송광사에 오셔서 사시면서 그 도량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활을 하라하는 지침이 필요했고 그 지침이 『계초심학인문』입니다. 오늘날 송광사 청규는 전국 출가 수행자들에게 가르치는 기본 교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학자들은 『계초심학인문』을 한국 선원청규라고 하지요. 한국 전통사찰의 청규,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그 청규가 송광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스님들이라면 마땅히 배우는데 그런 점에서는 우리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보조사상을 이론적으로 사상만 연구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보조스님이 강조했던 정혜(定慧), 혹은 간화선 수행을 실제로 해야 된다는 거잖아요. 근데 보조사상연구원은 연구 목적으로 더 많이 했지 실천부분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그걸 맡아서 일하면서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보조사상연구원이 형식적인 부분에 더 치중이 되었지 실질적으로 실천하고 수행공동체운동을 하고 이런 부분들은 많이 부족했다는 반성을 해요.
기자: 스님께 보조국사는 누구셨는지요? 그것을 한마디 해주시면 감사하겠고요. 그런 반성이 바탕이 돼서 명상심리상담원을 만드셨다 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노력도 많이 하셨을 것이고 책도 쓰시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반성이 지금 스님이 활동하시고 현대화하고 실제화 하는 것 그리고 세상이 변하는 것에 의해서 스님들의 생활이 변하더라도 굳이 마음까지 변해야할 필요가 있는가요? 다시 스님께 보조국사는 누구신지요?
스님: 저는 송광사에 출가를 했는데 행자시절에 청소를 하러 16국사 영정을 모시는 국사전을 갔어요. 그래서 보조국사의 큰 영정을 처음 마주대하고 굉장히 마음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같이 갔던 행자님들도 나를 닮았다 그러는 거예요. 아마도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이후로 보조국사를 통해서 새롭게 안목을 키웠고, 역사를 배웠습니다.
보조국사사상연구원을 하면서 했던 일을 나름대로 정리를 하면, 첫 번째는 전산화 작업을 했어요. 보조국사의 모든 어록들을 컴퓨터 파일로 입력해서 학자들에게 공개를 했어요. 그게 성과였고 16국사에 대한 조명작업 같은 것도 생각이 나고. 보조사상연구원이 돈점논쟁 즉 돈오와 점수에 대한 논쟁을 대중화, 일반화 시키는데 역할을 했지요. 그 다음 송광사에 내려오는 문서가 있어요. 그게 파스파 문자라고 종이 한 장 접어서. 그게 왜 박물관에서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는지 몰라서 그걸 우리가 밝혀내서 문화재로 지정 받은 일. 그런 작업도 좀 했어요.그것이 파스파문자가 아니고 티벳 문자였지요. 내용은 이렇지요.
고려 말 몽고가 침입해 와서 송광사가 몽고에 의해서 장악됐어요. 그때 당시 송광사가 동양 최대 최고 사찰이었거든요. 그 때 몽고 황제의 스승이 티베트불교 승려인 라마승이예요. 몽고가 세계를 장악할 때 티벳 승려를 자기들 스승으로 삼았어요. 근데 지금 중국은 티베트를 장악해서 라마를 몰아냈잖아요. 달라이라마가 지금 인도에 가있잖아요. 근데 몽고인들은 라마 승려를 굉장히 존경해서. 그 문서가 황제의 스승이신 라마승이 보내신 공문서예요.
예전에는 라마승이 한국에 오면 국왕이 접대를 나갔데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옴 마니 반메훔 진언을 한국으로 가지고 왔죠. 지금도 옴 마니 반메훔으로 명상하지요. 당시 몽고족은 송광사가 고려불교의 정신적 지주라고 생각하고 송광사를 군대로 눌러버린 거죠.
송나라를 몽고족이 멸망시켜버리고 전부 라마 불교로 만들었어요. 국내도 마찬가지고. 그 다음에 일본 정복을 할 때 군사기지를 삼은 곳이 전라도 땅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신풍이라고 하는 태풍을 만나서 여몽 연합군은 일본 정복을 못했어요. 그때 군사적 작전을 하고 군비를 준비했던 게 전라도였어요. 당시 송광사의 6대 국사가 중국 외교관 출신의 원감국사였든가요. 그분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청원을 했어요. 송광사를 본래로 되돌려 달라고. 종교를 왜 군사로 피폐화 시키느냐. 이 공문서가 그것에 대한 답장으로 온 거예요. 그때 상황을 파악하기에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서인데 그걸 박물관에서 종이로 접어서 파스파 문자라고 했어요. 일본에는 황제 직인만 연구하는 학자가 있는데. 세계적으로 제사의 직인이 서른 몇 군데에서 이것이 발견이 됐나 봐요. 근데 그게 송광사에서 발견이 되니까. 그래서 그런 작업들을 했지요. 연구원 일을 하면서 보람 있었고 나도 역사적 안목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런 점에서 좋았고, 반성하는 부분은 너무 문헌학적이었다는 것이죠. 너무 과거 문헌에 대해서 해석하고 주석하는 작업에 너무 몰두해있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현실은 불교계에 끊임없이 뭔가를 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 불교학자들이 너무 문헌을 중심에 두고 있고 현실문제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반성을 하면서 저도 학술발표를 끝내고 나면 공허감이 오더라고요. 과거의 이야기고 현실감이 없으니까.
그래서 2000년도 학위를 간화선으로 했고 학위를 끝냈을 때, 불교와 심리학자의 모임이 구성이 되었어요, 당시에 가톨릭대 윤호균 교수, 서울대 권석만 교수, 덕성여대 김정호 교수를 비롯해서 심리학전공 교수들과 만나서 한 달에 한번 씩 워크숍을 했어요. 법련사에서. 그걸 하면서 불교가 고답적이고 전통적인 문헌 연구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현장에 뿌리를 내려야 되는데. 그러면 현장에 뿌리를 내리면 뭐가 좋을까. 심리학과 결합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어떻게 그분들을 만났는지 기억은 안나는 데, 그분들하고 인연이 됐어요. 그분들과 워크숍을 하면서 느낀 게 있어요.
그분들은 친 불교적 성향의 심리학자들이라 그때 7-8분의 심리학자들인데 그분들은 명상에 관심이 있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심리학적인 전문가이신데 불교 쪽은 초보단계시더라고요. 반대로 불교학자들은 너무 문헌에 메여있어요. 이걸 현대화하느냐는 작업에 애를 먹고 있고. 만나긴 만났는데 서로간의 소통이 잘 안 돼요. 그 어떤 한계가 있었어요. 불교 문헌학자들은 문헌 애기는 잘하는데 심리학자들은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반대로 심리학자들은 불교에 보석이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고 그런 틈 사이에 제가 끼어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그걸 학회로 발전 시켜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분들은 거기까지는 원하시지는 않더라고요.
불교와 심리학, 두 분야가 만나긴 만나야 되는데 만나고 보니까 서로 낯설기만 하고, 초창기잖아요 2000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니까. 그때 당시는 MBSR이라던가 ACT라던가 그런 게 전혀 소개가 안 되었던 상황이니까. 장현갑 선생님도 마찬가지고. 먼저 심리학 쪽에서 명상에 대한 미국 분위기를 알았던 것이죠. 미국에서는 90년대에 이미 명상치료가 대두가 됐는데 심리학자들은 그 느낌을 받은 거죠. 국내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황인데.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a와 b가 만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a와 b가 만나서 새로운 c를 만들어야겠다. 근데 아직 c가 없다. 둘이 만나서 생뚱맞게 서로 같이 만나서 공유하고 수행하고 연습도 했지만 아직 새로운 통합된 c가 없으니까 본격적으로 이 부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2002년에 근데 그때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볍련사에서 나와야 했어요. 종단 전체적으로 그때 아주 혼란스런 상황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법련사에서 더 이상 보조사상연구원에 지원을 못 하겠데요. 불일회보도 발간했는데 그것도 송광사의 지원이 필요한데 그 혼돈 속에서 지원을 못 받게 되니까 2000부터 2004년 동안 제가 독자적으로 그걸 했어야 했어요. 그 전까지는 법련사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걸 끌고 바깥으로 나온 거죠. 그래서 길바닥에 나왔죠.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그전에는 지원을 받아서 했는데 송광사와 법련사 양쪽에서 지원이 끊어져버리니까. 그 당시에 저도 그만 둘려고 했는데, 누가 대신 맡을 사람도 없고. 그래서 우리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 선생님들하고 회의를 해서 바깥으로 나오게 됐어요.
그러면서 문헌연구만으로는 현실 문제를 대응하기는 어렵다. 제가 현실적으로 또 그런 상황에 부딪히니까. 바깥으로 나와서 아파트나 사무실로 들어가야 되는데. 사무실 이름을 붙여야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명상하고 상담을 결합해야겠다. 사무실 이름을‘명상상담연구원’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그전에는 문헌연구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이 있었고, 현실적으로 나와서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수입을 내야 되는 구조에 내몰리니까 문헌연구로만으로는 안되더라고요.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걸 운영해서 수익구조를 만들어 내야하는 그런 상황이 됐죠.
그 후에 법련사도 안정을 찾았죠. 새 주지스님도 오고. 은사스님도 미국에 가셨다가 돌아오시고. 은사스님 입장에서는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은사스님 뿐만 아니라 불교계 전체가 그 사건으로 힘들었죠. 그래서 그 후로 불교계가 제도화되야겠다. 그래서 만들어진게 선거제도예요. 총무원장뿐만 아니라 주지도 선거로 뽑고. 모든 게 제도화가 된 거죠. 좋은 점도 있어요. 밀실에서 회의를 해왔는데 힘 있는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니까 그러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대중의 의견을 물어서 하자 그것이 민주적 절차다. 그래서 그렇게 됐죠. 결과적으로는 우리 종단이 크게 변모한 시기였고.
그러면서 은사스님이 복귀가 됐죠. 저를 다시 법련사로 불렀어요. 근데 저는 가기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맡았던 출판사 연구원을 전부 법련사 새 주지스님께 이관했어요. 저는 재정 부담을 더 이상 못 하겠다 했어요. 계속 감당하긴 어렵다고 했죠. 지금은 법련사에서 보조사상연구원도 지원하고 법련사 주지하는 사람은 무조건 지원을 한다는 합의가 됐어요. 법련사로 다시 이관하고 나는 홀로서기를 했어요. 법련사 주지는 안하겠다고 했지요. 은사스님에게 이제 10년 약속 지켰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독립을 한 거죠. 밖에 나와서 하니까 할 만하더라고요.
인경스님의 목우선원 입구
기자: 어려운 과정도 많으셨는데 한국에 명상과 상담을 연결해서 더욱이 그 둘을 아울러서 또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선구자적인 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님께서는 간화선으로 학위를 하셨고 한국불교가 그러하듯이 송광사는 간화선 수행이 위주인데, 구체적으로 명상수행을 하시게 된 계기가 뭔가요?
스님: 제가 고등학교 때 송광사를 처음 방문했고. 육영수 여사가 저격 받은 날, 그날이 처음 방문 했어요. 저격 사건과 관련해서 항상 기억이 있네요. 그 후 송광사 수련회를 열심히 다녔어요. 구산스님이 수련회에 와라 학생들이 많이 오니까 너도 와서 수행하고 가라. 구산스님에게 간화선 지도를 받았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집 나와서 출가한 적이 있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오라고 하셔서 승려가 못됐어요. 그때 출가했으면 구산스님 제자가 됐을 텐데. 군대문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지요. 송광사 수련원을 고등학교 때부터 다니면서, 교사 근무하면서 구산스님이 입적하시기까지 10년을 계속 송광사에 다녔었고 그때마다 수련대회를 다녔죠. 그때는 10일 코스도 있었고 일주일 코스도 있었어요. 당시 현음스님이 지도하셨어요. 20여 년 전에 입적하셨지만 당시 인도의 위빠사나를 배워오셔서 수련원에서 그걸 했어요. 저는 현음스님에게서 위빠사나를 배웠고, 간화선은 구산스님께 지도를 받았지요.
송광사가 외국문화 받아들이는데 굉장히 빠르잖아요. 70년대 말 80년대 초니까 얼마나 빠른 거예요. 국내에 위빠사나가 확장되지도 않은 시기였고.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라는 고엔까의 위빠사나 책도 현음 스님이 권해서 번역을 하셨어요. 제가 송광사에 출가해서 뭘 경험했냐면, 간화선의 선방하고 수련원의 방식을 노선을 가지고 갈등이 일어났어요. 아주 많이 갈등했어요. 제가 출가하기 전에도 목격을 했고 현음스님이 지도 하는데 다른 스님들이 와서 이따위 걸 하냐고 막 공격했어요. 나중에 제가 출가하고 나서는 선방에서 회의를 하는데 수련원 가지고 계속 문제를 제기해요.
수련원에 매년 7~800명씩 오니까. 문제는 여기는 간화선 도량인데 왜 위빠사나를 하냐는 거예요. 그게 우리 한국 불교 저변에 흐르고 있는 갈등인데 저는 송광사에서 경험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80년대부터 시작된 갈등이 90년대부터 본격화된 거죠. 2000년 이후까지. 제가 보기에는 한 20 년 동안. 제가 가는 곳마다 이런 갈등이 계속 문제가 되는 거예요. 십대 이십대 때 직접 경험하고 느꼈던 갈등인데 이게 우리 전반의 문화더라고요. 따지고 보면 간화선도 밖에서 온 거고 위빠사나도 밖에서 온 것인데. 우리 한국 명상 수행이론이란게 뭘까 했을 때, 무엇이 한국 명상인가 정체성 논란이 일어나잖아요. 나는 불교가 뭔지도 모를 때부터 간화선을 했기 때문에 간화선이 어떻게 와서 한국에 왔고 역사와 사상이 궁금해 져서 박사논문도 썼고.
명상도 그 무렵에 반대로 고등학교와 대학교 이십대 때 명상에 관심이 있으니까 명상 서적을 많이 탐독하잖아요. 기본적으로 라즈니쉬도 누구나 다 알잖아요. 그리고 남방불교과 관련된 책들도 그때는 거의 다 읽었었고. 당시에 불일암 스님께서 송광사 수련원장이셨는데 그때는 구산스님 계시고 구산스님이 불일암 스님을 오시라했어요. 그래서 쌍두체제가 균형을 이루었는데 구산스님도 입적해버리니까 수련원 방향기조가 약화되는 거죠. 왜냐면 전통적인 간화선의 세력이 더 강하니까. 그 무렵에 현음스님도 돈현스님도 떠나시고 불일암 스님도 강원도로 떠나시고 수련원이 그런 분들이 수련원의 기조였거든요.
불일암 스님은 초기불교를 강조했어요. 숫타니빠타도 번역도 하시고. 간화선도 포용을 하면서 남방불교를 긍정적으로 수용을 하면서 대중화 시키는데 공헌을 하셨지요. 그런데 구산스님 가시고 스님의 제자들이 송광사를 주도를 하다보니까 불일암 스님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강원도로 들어가시고, 그래서 그때 느낀 게 갈등이예요. 이 두 가지에 대한 통합이 또 필요한 거예요. a가 b를 만나서 c를 만들어야 되는데. 그래서 나는 간화선도 명상이라는 입장인데요. 이걸 강력하게 선방에서는 반대하고 있잖아요. 제 생각엔 그것도 선이다. 선이라는 낱말이 자나(jhana)에서 왔고 이 말을 영어로 메디테이션이라 하지요. 간화선도 간화 메디테이션, 화두 메디테이션이라고 하구요.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쓰고 있어요. 화두 메디테이션, 즉 화두명상이라고 쓰지요.
물론 전통적인 선과 선학을 강조하는 이들은 간화선이 어떻게 명상이냐고 반박을 하지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화두 메이테이션이라고 쓰지 않으셨냐고 했지요. 직역하면 화두명상이지요. 명상영역에 간화선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심리학영역에서 자아초월이나 영성이라든가 심성에 관한 부분은 중요하고, 간화선이 주로 본성, 심성을 주로 다루니 명상영역에 넣어야지 명상을 축소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대중들의 관심이 다양하니까 명상도 다양한 입장을 받아들이자. 저는 간화선도 명상의 영역에 포함합니다. 어떤 이들은 간화선 전공자가 어떻게 명상을 하냐는 질문을 해요. 근데 저는 기본적으로 간화선도 명상의 한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기자: 감사합니다.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도 이미 그렇게 사용하고 있고요. 스님 내면에서의 갈등은 없었나요? 간화선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에서의 내면적 갈등은 해결되셨으니 이렇게 말씀하시겠네요?
스님: 호흡명상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잖아요. 호흡에 주의를 두는 것. 호흡을 사띠하는 거죠. 그때 주제는 호흡이잖아요. 그러면은 화두하고 어떻게 내면에서 갈등이 있을 수 있죠?. 어떨 때 호흡명상을 하고 있으면 나는 호흡 명상자지 간화선 명상가는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요. 근데 두개를 꼭 내면에서 분리할 이유는 없어요. 호흡을 하다가 호흡하는 이놈이 무엇이고 호흡과 같이 통합해서 수행할 수도 있죠.
기자: 호흡을 관하고 관하는 이놈은 무엇인가? 이뭐꼬?
스님: 내가 몽산덕이의 간화선을 연구했는데, 몽산덕이는 염불의 정토하고 임제종의 간화선을 통합했거든요.‘염자시수(念者是誰) 염불하는 이놈은 누구인고?’명본 스님의 경우에도 사띠 없이는 간화선을 할 수 없다고 하셨거든요. 과거 우리 선배들도 그렇게 운영해온 사례가 있어요.
기자: 감사합니다. 명쾌한 설명과 답변이네요. 마지막 하나하면 끝날 거 같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스님의 프로그램이 민간자격증 인증을 받으셨다던데요.
스님: 보건복지부가 주무부처로 하는 자격증입니다, 제 기억에는 2013년 10월 6일자로 발효가 됐어요. 그전에는 자격증 발급을 임의로 할 수가 있었는데 자격기본법이라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가 됐어요. 만약에 국가에 등록하지 아니하고 자격증을 발급할 경우에 처벌 조항이 들어있어요. 국가에서 2만개의 분야에서 새로운 직업 창출을 목적으로 자격증을 발행해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 소식을 접하고 등록 작업을 시작했죠. 2013년에 시작해서 2014년에 됐으니까요. 심사기간이 엄청 길더라고요. 신청이 폭주를 해서. 그전에는 그냥 됐는데 쉽게 안 되니까요.
기자: 그렇게 많은가요?
스님: 우리가 5920번인가. 우리가 그 정도 되요. 그게 작년 14년 10월이었지요. 그러니까 엄청 자격증을 내주었죠. 앞으로는 너무 많이 해주니까. 이것도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담당자 애기를 들어보니까 조금 더 엄격하게 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자격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려서 한 것이지요. 주무부처가 교육부에 넣었는데 교육부에서 심리상담은 보건복지부가 아니냐고 해서 그래서 그쪽으로 가는 바람에 3개월이 더 늦어졌어요. 보건복지부를 주무부처로하고 주관은 직업능률개발원이라는 데서 해요. 등록이 되면 감사를 받아요. 그전에는 자격증 발급을 해왔는데 지금은 감사를 받기 때문에 시험을 쳐야 되요. 시험문제 내야 되고 출제위원 선정해야하고. 관리위원회를 두어서 공식화 된 거죠. 자료를 보니까 우리가 210명 정도 발급을 했더라고요.
기자: 명상상담지도자 인가요?
스님: 사람들이 심리를 넣자고 요청을 해서 지금은 명상심리상담사가 되었죠. 명상에 기초한 상담사이지요. 미술치료나 미술심리상담. 미술에 기반한 심리상담이고, 음악인 경우도 음악에 기반한 심리상담인 것처럼 우리는 명상에 기반한 심리상담이죠. 세 영역이죠. 명상역역, 심리영역, 상담영역이 통합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커리큘럼이 좀 많아져요. 3년 6개월 정도 과정을 밟아야지요.
기자: 훌륭한 일을 해내셨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보조사상연구원, 명상과 심리, 또 새로운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아울러짐 속에서의 공통점. 갈등상황이 아니라 우리사회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민하시고. 마지막에는 명상심리상담자 자격증을 발부하는 지도자를 양성 하는 데까지 오신 스님은 누구입니까?
스님: 제가 누구인 거 같아요?
기자: 이것이 마지막 질문입니다. 스님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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