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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모던포엠 원문보기 글쓴이: 전형철
생명기표(記標)의 감응과 틈새 좁히기
-김건희 시인의 시적 변주와 감성의 일상화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주간)
1. 감성의 빛남과 생명의 교감(交感)
일반적으로 미적 주권이 확립된 순수서정에 의한 「생명기표의 감응과 틈새 좁히기-김건희 시인의 시적 변주와 감성의 일상화」는 비교적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과 소통에 기인(起因)한 시적 정감을 조화로움의 연계선상에서 ‘존재의 간극 좁히기와 자존감’으로 자잘한 일상의 감응 또한 말끔 정화하고 극대화시킨 정신작업의 결과물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차지에 <두근두근 캥거루>, <프린트기>를 포함한 10편의 시편으로 『모던포엠』 통권 201호의 「모던포엠 포커스」 대상자로 논의될 김건희 시인은, 2016년 「동서문학」 신인상 수상자로 현재 형상시학회, 대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인 존재감 빛나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다.
여기서 A·하우저가 "작가는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만족할지 모르지만 자기시대의 주인 노릇을 하려면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라고 시사(示唆)하였듯, 성숙된 화자(persona) 자신의 정신적 표상에 결부된 결과로,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열정을 태우는 주체와 타는 대상의 차별성을 무화시키며 융합과 상승의 역동성을 좌우하는 예감의 작위(作爲)는 소중하다. 그간에 평자 나름의 일관된 항변이지만 소외된 인간의 관계성 회복을 위하여 ‘듣고 말하되 집착하지 말 것’은 무론하고, 서로 간 경계의 벽을 헐어가기 위해 타자의 피멍든 손을 잡아주거나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는 틈새 좁히기의 일상화를 누구보다도 역설해 왔지만 하나 같이 직면한 참담한 현상에서 언어적 모순은 이율적인 배반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삶은 귀항을 서두르는 뱃길로도 예견되기에 “산언덕에 올랐으면 뗏목이 필요 없거늘 그대는 어찌 사공에게 길을 묻는가?”라는 선적(禪的) 물음 앞에서 만물의 영장은 무기력하게도 코로나 19의 총체적 공포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라는 이율배반적인 개념과 부디기며 불확실한 삶의 일상에 처해 있다.
모름지기 시적 작위의 과정은 개인적인 창조활동이기에 ‘특정한 시인이 현재적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며, 어떻게 생존하는가?’의 문제는, 어쨌거나 그 자신의 창작물을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고 조응함에 따라 그 명료성이 점차 확증되는 것이다. 기실 ‘신의 작은 대언자(代言者)’로 일컬어지는 당사자가 비록 위대한 성직자나 수행자는 아닐지라도 일상에서 접하고 체득한 자잘한 정감을 ‘밤낮없이 덜컹거리는 카페 오아시스에 앉아 캥거루를 기다리는’ 묵언의 응시 끝에 “바짝 마른 야자수 잎처럼/허물어지는 모래 위를 쿵쿵 뛰어다니는/나는 너의 캥거루이고 싶죠//들어 올린 오른손 뛰는 가슴을 느끼죠(두근두근 캥거루)”의 보기나 또는 ‘섬광처럼 번뜩이는 팔만대장경 활자의 신호들’ “밀실 빠져나온 펜타곤 기밀/기억하고 싶어졌다//곰팡이와 거미줄의 성곽/금은보화보다 귀한 재산은/한 줄 글귀임을 당신은 알까(프린트기)”처럼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놓은 정제(整齊)된 시편들은, 현란한 존재의 꽃으로 생명의 호흡과도 같은 끊임없는 자신의 내적 발현(發現)이기에 더없이 경이롭다.
이와 같이 중국 송나라의 엄우(嚴羽)가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시는 천기를 희롱하고 현조를 빼앗을 때, 경지에 이른다.”는 천기론(天氣論)은 허균(許筠)이 지적한 ‘정(情)의 문학론’과도 그 맥이 잇닿아 있기에 갈등과 대립, 그리고 이분법에 의한 암울한 현재성에서 다소 어설픈 지론이지만, “토닥여주던 불두화도 떠나고/위로가 추궁이 될 때/온통 암호들로 어지러워진 마을은/가시만 남긴 시의 문장이다//가지에는 아이들이 날리던 연이 걸리고/몸 안에 쟁여 넣은 길/풀지 못한 암호로/녹슬고 있다(촘촘한 공중)”에서 확인되는 ‘풀지 못한 암호의 기표’일지라도 결코 망설임 없이 ‘민족의 혼이며 역사인 한글의 세계화’는 심도 있게 모색할 문제다. 바로 그것은 문화의 지역구심주의를 맞아 ‘지역문학의 자리매김과 가치’가 끝내 소중한 것은 신선한 감동의 회복에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각론하고 서정적 미감과 지극선(至極善)의 추구를 위해 주의 집중한 삶의 일탈은 아름다움과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확장하기 위한 투자의 시간대기에, 김건희 시인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론은 언제나 시 쓰기에 빠져 들다보면 어느새 새벽과 만나게 될 사고(思考) 가능성이 짐짓 감지되는 탓이다. 마치 그것은 두 개의 미적분 포물선이 교차하는 공집합 속에서 파악되는 천상이라는 모성회귀(母性回歸)로 종종 풀이된다. 모처럼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인 우리가 고독한 본질 앞에서 삶의 충만감으로 차오르는 ‘감사와 감동’은 까닭모를 심연(深淵)과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시키려는 끊임없는 실천궁행을 통한 황홀함에 견주어지기에, 비록 예감치 못했던 이미지의 형상화가 주어질지라도, 묵언의 응시로 작동될 그 자신의 감성을 일관되게 닦아가는 뼈아픈 통찰에 의한 자극은 충동적이다.
앞서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헤르만 헤세가 “작가는 독자가 아니라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는 지적처럼 삶의 매순간 ‘꽃향내 묻은 푸른 식물성언어로’, 15세기 어느 선사가 “오! 놀라운 지고, 내가 샘물을 긷고, 장작을 패다니!”를 선시로 읊어내었듯, 소중한 연(緣)이 잇닿아 부푼 기대감으로 감동을 회복시켜줄 담백한 시격을 지닌 시인과의 조우(遭遇)는 불확실한 현재성에 비춰 더없이 감사할 일이다. 그 같은 연유로 ‘공간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기드슨 르페브르의 지적은 ‘생성된 공간’의 개념으로 해석되어지기에,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인 시의 형성과정에서 내면인식과 결부된 시적 응시와 자아의 변주에서 비롯되는 시의 틀 짜기와 합일의 공간을 상오 접목시킨 시인의 의식과시편의 분할․통합은 본질적으로 유의미하다.
2. 사유의 감응과 모순(矛盾)의 해법
모름지기 객관화된 고정 체를 소통의 도구인 기능주의의 매체로 자유롭게 교신하는 시적 형상화는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와 관계성을 맺는다. 일단, 21세기의 화두인 ‘더불어 함께(inter-being)’라는 공동체인식에서 비롯된 지극히 건강한 비판정신에 의한 고정인식의 전환이 요청되는 불가피한 시간대인 까닭에, ‘존재의 정체성과 서정시학의 특이성’에 관한 논의에 있어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생명의 기표(記標)인 언어에 대한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한 사람의 특정한 시인에게 「사유의 감응과 모순의 해법」에 관한 심층적 논의는 그 나름의 독자적 의미성을 지니기에 위대한 창조적 영혼은 새삼 투명하게 입증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참담한 현실적 상황으로 고통 받는 우리는 자연의 이법을 다시는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기실 거대한 숲이 사라지면 새의 울음도 불행하게도 사라질 것이나 보다 명백한 것은 새는 자신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지 아니한다는 사실이다. 보다 놀라운 사실은 ‘날아가는 새도 지나치게 생각하는데 열중하면 추락하는 것’처럼 비로자나불(Vairocana)은 『화엄경』에서 시방제불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법신불로 ‘허공과 같이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에 유념할 때, “너무하다/한곳만 응시하느라 뒤틀린 몸통에서/뚝뚝 소리가 새어나오는데도/기름칠해주지 않는 당신//꽃가지들이 그림자로 퍼덕여도/궁금해 말고 잠자코 있으란다(비로자나불)”에서의 그 합리적 해법에 있어 균형과 배려에 의한 관망과 자기성찰이 응당 주어지기에, 자신의 아집이나 분별력이 없는 행동은 이제 끝내야 한다. 이 같은 관조의 세계에서 새삼 목적전도현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관된 삶의 목적 아래 최소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되 합리적으로 시적 절제미와 균형을 짜 맞춰야 한다. 아울러 삶의 일상에서 자기존재 확인의 인식은 매순간 생명의 충만감에 의한 온전한 삶의 행위로 변주되기에, 이처럼 시적 교감은 놀랍게도 영혼의 울림으로 전도(顚倒)되고 있지만 지극히 합목적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 같이 합리적 해법에 의한 시적 변명은 지극히 담백한 품격으로서, 그 자신이 시적 이미지를 엄격히 통제하고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풀어 보인 ‘합리성, 그 모순에 대한 사유’의 감수성에 연계성을 지니기에 한층 더 민감하다. 까닭에 여백의 틈새를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시의 틀 짜기로, 우리가 접하는 세계와 물상은 일정한 패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지향한 파상(波狀)이며 변전임은 주지할 바다. 한편의 시는 내면의식의 증상이기에 미학의 발전을 역사진화와 진리추구의 중요 인자(因子)로 강조한 아도르노(T.W.Adorno)가 서정시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양적 진화의 측면에서 그 자신이 펼쳐 보이는 시의 본말(本末)인 서정시는 아직은 이 같이 건재하다.
그렇다.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그 나름의 세계고(世界苦)를 지혜롭게 감당하기 위하여 여백의 틈새를 비집고 좁혀나가는데 몰두하는 김건희 시인은, ‘그렇게 무던히 쌓기도 하고 하염없이 허물기도 하는’ 시편 <돌탑>의 보기에서나 ‘정진, 존재, 선(禪)의 세계, 수행자’와 같은 즉물적 현상을 지대한 관심사로 인식하여 홀로 성찰하고, 시각화의 기법에 의한 시적 발상은 불심(佛心)에 깊이 뿌리내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존재감과 결속을 짓고 있는 연(聯) 구분 없이 처리된 <두 뿔의 간극>에서 명백하게 확인되는 극명한 관심사(關心事)는 특이성이 빛나는 경향이다.
노을의 혀가 차오르는 강물에게 건네는 말/차곡차곡 씹어 올리다 보면/돌탑이 된다//
닳아가는 말 알아들어/포개어지는 말 알아들어/한 권의 시집을 엮을 수 있다면/강의 바닥을 제대로 읽었다 말할 수 있으리//
-<돌탑>에서
봄볕에 말랑말랑 달궈진 진흙 마당은/쫀득한 심장을 맞받아 주겠다고/두근두근 밀어 올리는 초록의 뿔/아직 돋지 않은 그 뿔 보겠다고/웅크리고 앉았던 스님 한 분/화들짝 독락당 문 밀치고 나선다/척추에서 척수를 뽑아내듯/공중과 땅 두 뿔이 만나는 간극에서/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내 초록의 봄은 공중부양/방울방울 종종걸음이다//
-<두 뿔의 간극>에서
위에 인용한 지극히 선적인 사변성(思辨性)에 기인한 시편인 <돌탑>, <두 뿔의 간극>의 시적 작동은 순수서정을 미적 주권으로 확대할뿐더러 가식 없는 진정성은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주는 시적 기법에 ‘깨달음이 선행되고 수행이 뒤따르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상이 투영되어 감동을 회복시켜주는 역동성을 지닌다. 한편 「미당문학상」신인상의 당선시편인 <돌탑>은 심사평에서 논의되었듯 ‘노을 같이 번져오는, 강물처럼 흐르는 그리움을 돌탑처럼 쌓아올린 단정한 형태임’은 기억할 바다
또 하나 갈등과 대립의 이분법으로 절망의 끝을 확인할 수 없는 시간대에 자연의 이법에 따라 조락(凋落)의 계절에,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 푸른 생명의 언어로 영혼을 정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한 그 자신의 서정성이 수용된 시편은 ‘평이하되 구체적, 체험적이며 리듬과 자유로운 양상’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생명의 변주에 의한 신선한 감동을 충격적으로 일깨워준 시적 행위는 캇슨의 지적처럼 ‘새가 사라진 거대한 숲의 그 참담한 침묵’에 시적 상상력 또한 결부시켜야 한다. 특히 지상에 나직이 갈앉은 시적 정조(情調)와는 상이하게 격한 감정의 색조가 짙은, 비극적 역사의 그 현장을 시적으로 형사(形似)하여 “거미줄에라도 목 걸고 싶었을 이제항위안소/진열장에는 찾았거나 아직 찾고 있는 온갖 증언과 자료/뜨거운 질문을 던져온다//오직 살아서 밝히고 싶었던 성 노역의 악몽/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원시림/눈 뜨고 싶지 않은 거미가 살고 있었다(살아야 하는 이유)”와 같은 기행시초(紀行詩抄)에서, 1937년 일본이 남경(南京) 점령 후에 설치한 이제항 위안소유적지(利济巷慰安所遗址)와 새삼 클로즈업되는, ‘슬픈 귀향의 위안부’ 박영심 할머니의 더 깊어질 수 없는 처연(悽然)한 피눈물도 그러하지만, 같은 여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치욕, ‘핏대 솟구친 내 목에 피멍 빛 노을을 수혈 할지라’도 살아야하는 모진 목숨은 감당키 어려운 심사(心事)다. 위의 시편에서 점철되는 ‘소외된 외로움이 묻어난 슬픈 자화상’의 배경이랄까? 섬세한 정감의 소유자인 그 자신이 체득한 현재성은 타자와의 관계층위에서 세심한 분별력은 항상 주위의 이들과도 격 없는 교감이기에 응당 참작할 바다.
차지에 ‘이미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미래의 시간인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사유의 화소’로 변형시키지 않으면, 눈부신 꿈과 이상을 결코 실현할 수 없기에, 진리와 자유를 수호하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창조적 행위를 온전히 수행하여야 한다. 차지에 상생과 통섭의 시세계를 구축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며 시적 현상을 위한 해체와 재창조를 반복하는 ‘창조적 시학과 우주와의 교감’도 그렇지만, 시인의 차별화된 시세계와 연계한 공간과 시각, 그리고 정신풍경에 의한 통합의 시론을 탐색하는 작업은 비장감이 묻어있다. 여기서 미적주권이 확립된 순수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간대에서 매순간 ‘푸른 생명의 언어로’,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주는 담백한 시격은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에 그만의 타당성을 지닌다.
3. 관조적 담론(談論)과 합리적 해법
특히 서정시 쓰기가 어려운 작금의 사회현상에서 「관조적 담론과 합리적 해법」은 어설픈 시적 담론으로 치부될지라도, 삶의 중량감을 확장하기 위해 불확실한 삶의 격랑에서도 끊임없이 고뇌하는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을 놓고 생명기호인 소통의 도구에 관한 통일된 체계성의 유지와 정체성의 확증은 새삼 요청된다. 까닭에 우주의 신비를 캐어내는 지속적인 가치추구를 위해 응축 미와 긴장감은 끝내 늦출 수 없다. 그 중에서 응당 기억해야할 스키마(schema)라면 질서의 무너짐과 으깨어진 서정성의 불감증이다. 따라서 그 자신의 시세계를 분할·통합하려고 숨죽여 가슴 조이는 김건희 시인이 일탈의 정신에 즉물적 현상을 대비시킨 시적 수사는 그 특이성이 다채롭다.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삶의 시간대를 시적 응시와 형사의 빛남을 위해 쌓기와 허물기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인간의 본질적 고독 앞에서 마침내 “고개 드는 죄성罪性들, 자르고 잘라도/삐죽하다, 방치된 수풀 여름공원/꼬리 살랑 흔들어대는 바람 지나간 뒤에도/풀은 하늘과녁을 향하는 자세였다//아니다, 깃털을 구름 쪽에 둔 걸 보면/어쩌면 땅으로 내리꽂히는 중이다(과녁 향하는 풀)”의 보기도 그렇지만 “그냥 목이 허전해서 두르고 나선 꽃목걸이를/다시 내리는 비가 시샘할 때도/따끔거리는 입술은 감추려합니다//몽고반점처럼 어두워진 길로 물컹한 발자국을 떼어놓습니다(무화과꽃목걸이)”와 같은 시적 발아(發芽)를 통한 즉물적 현상과 목숨의 바다에서 무한공간으로 비상하고 싶은 충동을 블레이크식 발상의 신비성으로 그의 시적 흥취와 묘미는 다양성을 지니나 유독 독자적이다. 일단 <무화과꽃목걸이>를 통한 시적 해법에 있어 여성상징으로서 식물성인 꽃은 그 자체로 심미와 관상의 대상이기에, 그 이면에 생존과 종(種)의 보존이라는 명백히 숭고한 결정체로서 꽃을 피워내어야 한다. 가뜩이나 금속성이고 동물적인 언어공해가 심각한 사회현상에서 꽃을 시적 질료로 선택하여 푸른 식물성언어를 기대 이상으로 즐겨 사용하는 점은 지극히 매혹적이다.
이 같은 시각에서 에밀 슈타이거(E.Steiger)는 서정의 본질을 회감(Erinnerung)으로 정의하면서, ‘시인은 자연을 회감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고 제시하였듯이,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일상의 개아적 서정성은 ‘따끈따끈한 밥이 될 아련한 추억에 솥 안에 물 부어 쪄내는 일로 마음엔 윤기가 흐르는 삶의 즐거움’으로 시적 행간이 보다 따뜻한 배려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틈새를 좁힌 끝에 “저울 눈금이 봉긋하도록/택배로 보내온 40kg 쌀자루/첫사랑이 건넨 브로치 증표 같다//끝내 할 말 다 못한 여름이/저렇게 단단히 주둥이 묶인 걸까//묶인 자루 매듭 풀고서야/너의 첫 마음 하얀 상처였음을 본다(햅쌀 택배)”의 정황 처리로 즉물적 현재성에 있어 화자인 그 자신의 동일자적 시 인식의 작동의 결과물로 대치되고 있다. 비로소 동일자적 욕망에 의해 대상을 응시함으로써 타자 중심의 사유를 관통해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그 당위성을 확장할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소포클레스가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앞서간 그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소망하던 내일이다.”라는 그 소중한 목숨의 시간에 의한 절박한 심사(心事)로 뼈아픈 성찰과 엄숙한 삶의 일깨움을 요청한다. 모쪼록 시의 본질인 성스러움 앞에서 지속적인 변화·발전을 위해 고뇌 속에서도 경계의 벽을 허물며 극명한 삶의 좌표를 향해 역풍을 가로지르며 끝내 목숨의 바다에서 비상하여야 한다. 확고한 집념으로 역사 앞에서 시대적 소임을 당당하게 수행하는 존귀한 실체로서 삶의 잠언을 감응하는 그 정체성(Identity)을 보다 확정 시켜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서 시대적 그 소임을 온전히 수행할 일이다. 아울러 지극선한 심성의 소유자로 영감의 비의(秘義)를 해명하는 ‘서정성의 초병(哨兵)’으로서 ‘대륙의 심장’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한(限) 지극히 충격적인 실험시의 작업을 일체의 주저함 없이 몸소 수행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