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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1.3박 4일의 답사를 느끼며
2.스승을 위한 마음, ‘명재고택(明齋古宅)’
3. 호서학맥과 노론의 심장 ‘돈암서원(遯巖書院)’
4.리포트를 마무리하며
5.참고문헌
6.답사 사진전
20135344 역사학과 박서영
1.3박 4일의 답사를 느끼며
공주를 향해 여정을 떠날 25일의 아침은 흐렸다. 곧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비가 오면 어찌하나’하는 걱정이었다. 답사를 기획하는 입장에서 비라는 요소(要素)는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일정을 소화하면서 부상의 위험을 높이면서 다른 일정에도 차질(蹉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가 올까 조마조마 하면서 진행을 했고 결국 국립공주박물관(國立公州博物館)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볼 수밖에 없었다. 길이 위험하고 개방 시간이 제한적이었던 공산성(公山城)을 결국 포기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미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피로함을 풀 숙소에 도착하였다. 첫날 여독(旅毒)에 지친 이들을 쉬게 해 줄 숙소는 ‘한옥(韓屋)’이었다. 한옥이 가지는 고즈넉한 정취(情趣)와 어우러진 탓일까, 처음 비가 왔을 때는 당혹스럽고 미웠던 것이 고요하고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했던가. 조급했던 마음이 평안(平安)해지자 종일 느꼈던 무기력함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작은 일상의 경험에서도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답사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던 둘째 날의 아침. 비록 비가 계속 왔으나 마음만은 여유를 찾은 채 2일차의 일정을 시작했다. 하늘이 도운 것인지 2일의 첫 일정에서는 비가 그쳐 마음을 놓고 다닐 수 있었다. 백제(百濟)의 도읍지(都邑地)라 추정되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아침동안 둘러보고 점심 이후에는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렸던 아픈 역사의 현장인 정림사지(定林寺址)를 방문하였다. 이후 무량사(無量寺)에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1)의 흔적을 되돌아보고 옛 백제의 절터인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까지 둘러보았다. 2일의 마지막이었던 궁남지(宮南池)에서는 수면에 비치는 일몰(日沒)이 절경(絶景)을 이루었고, 일행을 배웅하는 듯 저물어가는 해를 뒤로한 채 길을 나섰다. 비가 구름을 데려가서인지 맑은 하늘에서 고즈넉이 떠 있던 달을 바라보며 잠이 오지 않던 부여에서의 밤을 보냈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3일차, 백제 중흥(中興)의 꿈과 간절한 염원(念願)을 담았던 능산리 사지(陵山里 寺址)와 고분군(古墳群)을 선두(先頭)로 많은 민(民)들의 염원(念願)을 들었을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던 대조사(大鳥寺)와 관촉사(灌燭寺)를 들렸다. 그 후 조선의 기네스북에 오른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의 기억이 남은 명재고택(明齋古宅)과 당대 걸출한 인물들을 모신 돈암서원(遯巖書院) 그리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의지가 깃든 개태사(開泰寺)2)를 마지막으로 3일차의 일정도 마무리되었다. 명재고택의 정원에서 봄이 만연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돈암서원의 응도당(凝道堂)에서는 옛 선비들의 고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3일차의 경우에는 사찰과 대형 불상을 대표로 한 불교 유적과는 다른 유교적 공간의 향취를 느낄 수 있어 더 특별했다.
맑은 하늘이 일행을 반긴 4일차. 속리산(俗離山) 기슭을 걸어 오르며 ‘속리’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속세(俗世)를 떠났을 때 비로소 법이 있을 것이다.’ 속리산 법주사(法住寺)가 가지는 이름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다다른 법주사에서 여러 부처님들을 만났고, 산 자체가 불법(佛法)을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음으로는 우금치에서처럼 보은에서도 동학 농민군의 강인한 의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험한 산 위에 성을 쌓아 평안하게 지키고자 했을 선조들의 정신을 마지막으로 춘계 정기답사를 마쳤다.
정기답사는 끝이 났지만, 봄을 여는 특별한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정하라면 논산의 명재고택3)과 돈암서원을 정하고 싶다. 불교가 중심이 되었던 답사에서 그 사원들과 다른 향취를 느끼게 해 주었던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유교와 관련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재고택의 주인은 명재 윤증으로 소론의 중심적인 인물로 사후에 경종(景宗)때 건립된 서원에 추향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이와 달리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을 배향(配享)하고 있는 17세기 노론의 중심적인 서원이다. 본래 같은 서인(西人)세력으로 호서 학맥(湖西 學脈)의 계통(系統)을 잇던 두 세력이 나뉘어 붕당정치의 정수를 보여준 역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공간에 스며든 역사를 되돌아보았으니 이제는 답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답사 때 경험했던 것에 추가적인 조사를 덧붙이고자 한다.
2.스승을 위한 마음, ‘명재고택’
명재고택은 명재 윤증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나 수업시간에 박경하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바에 따르면 명재선생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지었다는 스승을 위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투영된 곳이다. 그런 이유로 원래 고택(古宅)이 아니라 고택(故宅)이라 불렸다고 하니 스승을 공경(恭敬)하는 마음은 오늘날의 사제관계(師弟關係)에서도 본받아야한다 느꼈다. 제자들이 학문을 배웠고 손님을 맞이하였을 사랑채(舍廊-)에 올라 인공 섬과 연못의 경치를 바라보니 절경에서 공부를 하고 시(詩)를 나누었을 이들이 부러워졌다. 선비들의 공간을 벗어나 규수(閨秀)들의 공간인 안채로 들어서니 아내들을 배려한 요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채의 중심지에서 바깥의 이가 귀가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보이게 한 문의 구조는 남성중심의 사회라고만 생각했던 조선에서 아녀자를 배려한 섬세함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햇빛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지붕의 높이와 담 너머에서도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도록 조경한 것들도 이 고택이 여성이 살기 좋았던 곳이라는 생각을 들게 해 주었다. 또한 고택의 내부에 들어서자 사진을 보여주시며 박경하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말씀하셨던 윤증고택의 과학성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굴뚝을 낮게 해 외부에서 밥을 하는지 보이지 않도록 하면서 동시에 연기를 낮은 곳에서 통하게 해 벌레를 쫓았다던 사실과 곳간을 찬바람이 부는 북쪽에 두어 상함을 막았다는 것 등의 내용들을 상기하면서 선조들의 기술력과 과학에 다시금 감탄하게 되었다. 이렇게 답사지에서 느꼈던 감정적이고 현실적인 경험만으로는 명재고택에 대해서 다 아는 것 같지 않아 그 주인이었던 명재 윤증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윤선거(尹宣擧)4)와 어머니 공주 이씨(公州 李氏)의 사이에서 태어난 윤증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5)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6)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7)과 동문수학(同門修學)했던 유학자였다. 허나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 문제와 주자학 및 경전의 해석문제로 인해 송시열과 충돌했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分黨)되는 결과를 초래(招來)하였다. 동문수학했던 이라면 친밀하고 깊이 교감했을 터인데 정 반대의 길로 갈라섰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할 수 가 없었다. 허나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사회에서 사이가 급격히 틀어졌을 때에는 그에 상응(相應)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조사해보니 본래 좋았던 윤선거와 송시열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것은 윤휴(尹鑴)8)의 학문에 대한 입장차이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송시열 또한 윤휴의 학문의 깊음을 예찬했으나 후에 주자의 학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윤휴가 제시하자 이에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에 긍정적으로 대하였고 이는 송시열과의 급격한 관계악화로 이어졌다. 결국 회니시비(懷尼是非)9)로 인해 노론과 소론이 분당되었고 소론의 중심이었던 윤증은 그의 학문이 뛰어났음에도 노론 집권기에는 서원에 추향되지 못하고 숙종 13년인 1687년에는 오히려 관직이 삭탈(削奪)당하고 문집이 훼판(毁板)되었다. 허나 사후인 경종(景宗)대에 이르러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노강서원(魯岡書院)10)에 추배되는 등, 소론 집권기에 다수 추향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에 대해 조사를 해 보니 회니시비라는 당대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 연관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박경하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효(孝)를 최우선으로 두었던 시대에 아버지의 묘갈명에서 그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 송시열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오늘날의 효에 대해서 재고(再考)하게 되었다. 또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더라도 시대에 맞지 않고 그 집권층의 의견에 반하면 그 위대함이 초야에 묻힌 채 방치될 수 있다는 것에 결론이 이르자 오늘날의 개방적인 사회에 감사해야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3.호서학맥과 노론의 심장 ‘돈암서원’
전형적인 아름다운 고택이었던 명재고택을 방문한 다음의 순서여서인지 돈암서원의 첫 인상은 고택과는 다른 느낌의 단아함이었다. 따스한 햇빛이 비추던 명재고택과는 달리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 것도 학구적인 선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돈암서원 측에 사당을 열어 달라 부탁하는 동시에 답사지를 드리기 위해 관리실로 가보니 다른 학교의 학우들이 돈암서원에 대해 공부하러 답사를 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답사지를 교환하고자 했으나 민속학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라 답사지의 성격이 다르다 얘기하는 통에 원하던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허나 같은 인문학이자 역사와 관련된 학문을 하는 이들이라 생각되니 동지의식이 생기는 듯 했다. 답사를 마치고 떠나는 이들을 뒤로한 채 응도당(凝道堂)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아쉬움과 설렘이 함께했다. 응도당은 본래 학문을 가르치는 강학의 공간이나 건물의 외양이 아름다워서 뇌리에 새겨졌다. 선비의 건물이라 단아하고 곧은 것만 생각했으나 의외로 화려한 멋도 가진 듯 느껴져서 낯설기도 했다. 허나 응도당이 세워짐으로써 제향(祭享)기능 뿐 만 아니라 학문적 측면으로서의 서원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배움에 대한 추구(追究)가 화려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응도당을 보고 사계 김장생을 주향(主享)으로 제향하고 있는 사당에 이르렀다. 전체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그늘이 많았던 강학의 공간과는 달리 사당 쪽은 오후의 따스한 햇빛이 잘 들고 있었다. 존경하는 학자들에게 밝은 빛을 바치고 싶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사당에 인사를 드리고 돈암서원을 나섰다. 역사학도로 서원에 방문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 서원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돈암서원이 어떤 곳이었는지, 이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등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돈암서원은 인조(仁祖) 12년인 1634년에 사계 김장생을 제향하기 위해서 충청도 연산지역에 건립된 서원이다.11) 돈암서원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김장생이 주향으로 그 아들인 김집과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12)이 함께 배향되어있다. 이는 돈암서원이 노론의 중심 서원이자 16~17세기의 호서사림을 이끈 서원임을 방증한다. 앞서 회니시비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시비로 인해 서인계 학맥이 분화되고 결국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졌다는 것을 언급했었는데 이 돈암서원과 윤증을 거두로 하는 소론 세력의 거점인 노강서원을 통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 돈암서원을 건립할 때는 노론과 소론이 분당되기 전이며 사계의 문인으로서 파평 윤씨인 윤선거가 참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조 24년인 1646년에는 윤선거가 송시열과 함께 돈암서원에 모여 열흘간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13) 이를 통해 설립 당시와 초기에는 서인의 중심 서원으로서의 돈암서원의 면모가 드러난다. 또한 노강서원을 설립할 당시에도 돈암서원 측에서는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서인세력간의 분당이후 이 두 서원이 각 세력의 중심지로 작용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유대는 앞서 말했던 앞서 말했던 우암의 묘갈명 문제 등으로 인해 숙종 6년인 1680년부터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계층은 윤증을 서인 분열의 원인제공자이며 회니시비의 주인공이라 혹평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숙종 13년인 1687년에는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윤증 부자의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고 게다가 노강서원의 사액이 철거되기도 하였다. 이때는 노론의 집권기로 우암 사후 그를 추향하는 서원이 노론세력에 의해 다수 건립되었다. 허나 숙종 43년인 1717년 다시 윤증부자의 관직과 시호가 복구되었고 소론이 집권했던 경종 1년인 1721년 이후에 윤증에게 시호인 ‘문성’이 제수되고 그를 추향하는 서원이 다수 건립되었다. 이 두 세력이 서원을 건립했던 것은 지방에 그들 세력 중에서 걸출했던 인물을 모시는 곳을 기반으로 그들 세력을 키우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위대한 인물을 통해 자신들 세력의 뛰어남을 알리고 세력의 기반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 일종의 지방에 대한 각 세력의 접근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암서원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면서 당대 지배 세력들은 서원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와 영향력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원이라는 곳은 배움과 학문의 전당으로 지식의 전승(傳承)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 지식과 학문이 사람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원을 중시했을 것이라는 스스로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돈암서원을 통해 당대 지배층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지게 되니 괜히 내 자신이 서인의 한 구성원이 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돈암서원을 조사하면서 얻는 경험이 적지 않아 다음 답사에서도 더 열심히 조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4.리포트를 마무리하며
2학년이 되어 맞이한 답사는 분명 철없던 1학년 때의 답사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일정을 소화할 때에도 주최자의 입장에 서 보니 다른 때 보다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역사는 사료를 통해 과거의 양상을 추적하는 학문이다. 허나 사료만으로는 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는데 이는 사료의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필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적인 필드에서의 경험을 통해 문헌 사료의 한계를 극복해주는 계기가 바로 답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답사리포트를 쓰면서 답사의 좋았던 기억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학문적 만족감을 다시금 떠올라 가을이 빨리 와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주신 박경하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5.참고문헌
<단행본>
서정호, 『한옥의 美』, 경인문화사, 2010
이진경, 『한국의 고택기행』, 이가서, 2013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현암사, 2002
최완기, 『한국의 서원』, 대원사, 1991
한국고전용어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논문>
이해준, 「호서지역 서원의 지역적 특성과 정치적 성격 : 숙종대 노, 소론계 서원을 중심으로」, 『국학연구』 Vol.11 , 한국국학진흥원, 2007
<사진>
돈암서원 홈페이지 http://www.donamseowon.com/
6.답사 사진전 (한글파일에서 사진1은 본문에 위치해 있으니 참고해 주십시오.)
사진1. 돈암서원의 정경. 사진 출처 : 돈암서원 홈페이지 http://www.donamseowon.com/
사진2. 명재고택의 부분적인 모습
사진3. 교수님이 말씀해주셨던 낮은 굴뚝의 사진
사진4. 밖에서 들여다 본 안채의 모습. 외부에서는 안채를 잘 들여다 볼 수 없으나
안채에서는 밖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잘 보였다.
사진5.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고택의 신비 중 하나. 분명 같은 건물이나 정면을 어디로 두고 보느냐에 따라 평행한 정도가 달랐다. 만약 모르고 봤다면 지나쳤겠지만 수업 때 말씀해 주셨기에 볼 수 있었던 작지만 큰 매력이었다.
사진6. 돈암서원 응도당 앞, 답사부원들과 한 컷!
각주
1) 1435~1493, 조선 전기의 학자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을 바탕으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 외에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등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후 정조 6년인 1782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어,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2) 개태사라는 절의 명칭은 태평한 시대를 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본래 윤증고택이었으나 근래에 명재고택으로 정식 명칭이 바뀌었다.
4) 1610~1669, 조선 중기의 학자로 호는 산천재(山泉齋)이며 시호 문경(文敬)이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켰으나 함락되자 평민을 가장하여 탈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강화에서 탈출한 것을 자책하며 사직하고 충청도 금산으로 낙향하였다. 성리학과 예론에 뛰어났고 송시열과 절친했으나 윤휴의 학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사이가 멀어졌다. 사후의 회니시비로 인해 서인이 노론과 서인으로 분당되었다. 1715년에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론과 소론이 싸움을 벌여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경종 2년인 1722년에 복구되었고 영의정에 추서되기도 하였다.
5) 1548~1631,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었으며 예학(禮學)사상가였다. 인목대비 폐모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자 낙향하여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김류(金瑬)등에 의해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등이 있고, 사후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6) 1574~165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공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의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인 김장생과 더불어 예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고종 20년인 1883년에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문집에 《신독재유고》가 있다,
7) 1607~1689, 조선 중ㆍ후기의 문신 겸 학자이자 노론의 영수로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자학에 뛰어났으며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했고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저서에는 《송자대전》 《우암집》등이 있다.
8) 1617∼1680,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북벌론자였다. 종래의 주자(朱子)의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당대 가장 혁신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평가되었다.
9) 조선 중ㆍ후기의 서인 세력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간의 불화를 말하는데, 송시열의 거주지는 회덕(懷德)이고, 윤증의 거주지는 이성(尼城)이기에 회니시비라 불린다. 윤증은 윤선거의 묘갈명을 청하며 송시열에게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行狀)과 윤선거의 생전에 쓴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함께 보냈다. 이에 송시열이 박세채의 행장에 일부만을 수정하고 끝내 개찬하지 않아 윤증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후 숙종 6년인 1680년에 남인의 처벌문제에 있어 서인이 분열되었는데 이 때 윤증이 송시열을 비난하면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분당되게 되었다.
10) 숙종 원년인 1675년에 김수항(金壽恒)의 발의로 윤황(尹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후 숙종 8년인 1682년에 ‘노강’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석호 윤문거(石湖 尹文擧)를 추가 배향하였다. 숙종 43년인 1717년에는 사액현판이 철거되었다가 경종 2년인 1722년에 회복되었고 이듬해에는 명재 윤증과 윤선거를 추가 배향하였다. 돈암서원과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소 서원 중 하나이다.
11) 이해준, 「호서지역 서원의 지역적 특성과 정치적 성격 : 숙종대 노, 소론계 서원을 중심으로」, 『국학연구』 제 11집, 한국국학진흥원, 2007, pp33~34.
12) 1606 ~ 1672, 호는 동춘당(同春堂). 조선 중기의 문신 겸 학자로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했으며 서인에 속해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13) 같은 책, p40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더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겠습니다 :)
수정1) 전년도 수업때의 답사기들이 통합게시판에 올려져 있어서 통합게시판에 올렸었는데 다른 학우들이 모두 리포트 게시판에 올렸기에 다시금 리포트 게시판으로 옮겼습니다!
첫댓글 명재고택과 돈암서원에 대해서 심도있게 탐구하면서도 다른것과 비교하여 교훈점을 찾는것이 정말 좋은것 같습니다. 잘 읽었어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사를 통해서 공간에 깃든 역사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행부로서 답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데 수고한 경험이 담겨있네요. 윤씨가문과 송시열간 시비들을 조리있게 잘 정리해 주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역사와 답사가 유기적으로 버물려있어요. 본문의 '조선의 기네스북' 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잘 봤습니다!
조선의 기네스북은 교수님께서 수업때 말씀해주시기도 하셨고 용안을 보지않고 많은 벼슬에 임명되었다고 조선의 기네스북에 이름올렸다 이런식으로 나와있답니다:) 인터넷에 보시면 더 자세하게 아실 수 있을것 같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다르네요.
답사부 차장이라 그런지 저와는 다르게 아주 알차게 쓰신 것 같네요^^
아니에요 동기님 제가 많이 부족하죠^^..동기님의 성에 대한 지식에 매번 놀란답니다! 잘 읽어주시고 답사 때 많이 도와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