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사도행전 13장 4-12절
설교제목 : 성령의 인도
재난의 한복판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폭우가 쏟아져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있었습니다. 장비를 챙기지 않고 수색작업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해병대 장병 소식은 가슴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둑이 붕괴되면서 지하차도에서 물이 차서 생을 달리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슬픔을 당한 이들에게 위로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이런 사건들을 마주할 때마다 기본적 안전 수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게 합니다. 또한 위기의 상황을 포착하고 시의적절한 분별과 결단이 생사를 판가름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웠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인간의 힘과 의지로 어찌할 수 없지만, 많은 재난은 적절한 대처와 기본준비로 막을 수 있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가 나름의 적절한 위기 재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개인은 위기의 순간에 분별하고 대처할 수 있는 기본기가 필요할 듯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기
초대교회는 들불처럼 퍼지며 꺼지지 않는 불의 역사였지만, 그 역사는 피로 점철되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세례를 베풀었고, 이방인에게 구원의 지평이 확장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로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번성할수록 거센 핍박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기존의 체계는 새로운 체계가 침투할 때 기존의 삶의 방식과 태도,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새로운 정신적 내용들에 대하여 저항하고 말살하려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정신과 사회 시스템, 종교적 체계의 변화는 오랜 시간 무르익어야 하고, 어떤 정점에서 획기적 도약을 통하여 변화되어집니다.
이런 핍박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베드로를 도왔고, 적극적으로 핍박하던 헤롯왕도 주님의 천사가 심판하여 죽임을 당합니다(12:6-7, 23). 보이지 않는 힘이 핍박 속에서도 그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핍박의 상황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였지만, 제자들의 가슴에 불이 꺼지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어려운 조건과 예기치 않는 사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돕고 계시고, 당신의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에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은 나무에 물주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서 아버지인 알렉산더가 아들인 고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이름은 팝베였지.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단다. 그리고 제자 조안 코롭에게 말했지.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같이 물을 주도록 해라. 어째든 조안은 매일 이름 아침 물통에 물을 담아 산에 올라가서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는 저녁에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지. 그렇게 3년 동안 물을 주던 어느 날 그는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단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만약 매일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늘 꾸준하게, 의식과도 같이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거다.[2018년 4월 29일, 김기석 목사 설교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곡진하게 성실히 반복하다 보면 기적의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수행한다면, 어떤 도전과 어려움에도 기적인 하나님의 손길로 인생의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제자들은 핍박에도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소명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길을 내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들의 인생 배후에 주님은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심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드러나는 거짓
13장 1절에 보면 안디옥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양한 인종과 계급이 있었습니다. 이는 안디옥교회 공동체가 모든 차별과 경계를 넘어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연대의 모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들이 예배하고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맡기려하는 일이 있다(13:2)”고 말씀하십니다. 이리하여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고, 그들은 1차 선교여행을 시작합니다. 이런 떠남도 4절에 보면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갔습니다. 편하게 안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말씀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길을 나선 것입니다. 자아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고자 반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지시하심을 따라 75세에 모험을 떠난 것은 그의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비합리적이기에 납득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를 벗어나 전혀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 일종의 모험은 납득하기 힘든 과정입니다. 심리적으로 의식의 계획과 의지를 넘어서 무의식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방식입니다. 이는 우리가 꿈의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매이리 밤 하나님의 음성과 메시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어제 꿈의 한 장면에서 어디에 주차해 있다가 차를 끌고 나오려는데 우회전하는 순간에 차가 갑자기 빨리 돌아서 앞 차와 부딪히려 했고, 또다른 차가 가까이 다가와 간신히 피했지만 벽에 거의 닿은 듯 한데 긁힐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런 꿈은 리비도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 상태이고, 주위에서 오는 많은 추동력과 계획들을 살피라는 신호일 것입니다. 이 꿈은 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게 하고 살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2000여 년전에 성령의 활동은 여전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성령의 말씀하심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조심스런 숙고의 태도로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귀기울임과 용기가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가 살라미에 이르러 전도하고 온 섬을 가로질러 바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총독은 서기오 바울이었습니다. 행정을 담당하는 총독으로 집정관을 지낸 자였습니다. 공화정 시기 로마는 투표를 통해 행정을 담당하는 집정관과 군사를 담당하는 집정관을 뽑았습니다. 이 총독을 총명한 사람이라고 본문은 소개하는데, 시민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니 당연하기도 합니다. 이 서기오 바울 곁에는 제법 영향력 있는 유대 사람이 있었는데, 마술사이자 거짓 예언자인 바예수였습니다. 아무리 현명해도 알 수 없는 내일이나 어둠의 사건과 혼돈 상태에서 그것을 명확히 하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충동일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앞 일을 예견하는 예언자가 늘 권력자 곁에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풍수지리설에 의거하거 관저를 옮기고 어떤 주술 행위를 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습니다. 바예수는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하려고 훼방을 놓았습니다. 이런 방해는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거짓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주입하고 그것을 맹신하도록 조장합니다. 그러나 참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의 실체를 드러내고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책임적 존재로 살아가도록 안내합니다. 어쩌면 바예수는 자신의 실체와 존재의 무력함을 드러낼까봐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사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마술사 바예수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사울을 가리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라고 다시 소개합니다. 큰 자에서 작은 자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정체성의 변화, 바울이란 정체성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과 욕망을 쟁취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겸손히 이행하는 자로서 삶을 자로서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한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보아라 이제 주님의 손이 너를 내리칠 것이니, 눈이 멀어서 얼마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10-11).”
바울은 총독의 비호 아래 있고 신망있었던 바예수를 향하여 단호하게 꾸짖습니다. 그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바예수를 때려잡기 위해 화를 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신비를 가장하여 사람들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한 것을 단호히 꾸짖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악한 영을 꾸짖고 거짓된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처럼 단호합니다. 거짓과 불의 앞에서는 이런 단호함으로 용기있게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불의를 꾸짖기보다 권력에 편승하려고 애쓰고, 오늘날 설교의 강단은 사회와 개인의 거짓됨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성공만을 외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없어서 불행한 세상이 아니라 어쩌면 있어서 불행한 세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바울의 책망은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채찍이며, 우리 개인에게도 던지는 엄중한 경고일 것입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을 꾸짖을 수 있는 내적 힘과 용기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