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 니까야의 ‘무아’ 개념의 비판 2. 대승 경전의 ‘무자성’ 개념의 비판 3.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불교의 ‘무자성’의 인연법적 해석 4. 아함경의 ‘무아’와 ‘공’의 개념 |
나까야에서는 ‘무아’를 ‘자아가 없음’으로 정의하고, 대승 불교에서는 ‘공’을 ‘자성이 없음[무자성]’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니까야와 대승 불교에서는 ‘무아’와 ‘공’의 성품을 ‘무상’ 등의 개념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니까야의 ‘무아’의 정의로는 ‘무아’의 기본 의미인 ‘<나>가 없음’을 드러내지 못화며, 대승 불교의 ‘공’의 정의로는 ‘공’의 기본적 의미인 ‘비어 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공’을 ‘스스로 비어 있음’으로 정의하는데, ‘비어 있음’은 무엇이 어떤 성품을 가졌다거나 가지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무아’는 ‘공’에 포섭되는 것으로 본다. ‘공’과 ‘무아’를 이렇게 정의하면, 니까야나 대승 불교의 ‘공’과 ‘무아’의 정의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사라지게 된다.
1. 니까야의 ‘무아’ 개념의 비판
니까야의 <공경>에서는 무아와 공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의 내용은 니까야의 문맥을 고려하여 보충한 것이다.
(1) 눈은 무아이고 무아이므로 공하다. (12입처ㆍ18계ㆍ5음, 곧 세계는 무아이고 무아이므로 공하다.)
니까야의 ‘무아’는 ‘자아’의 부정이다. 따라서 니까야의 ‘무아’는 엄밀히 말하자면 ‘무자아’이다. 니까야의 ‘자아’와 ‘무아’는 다음과 같다.
(2) 니까야의 ‘자아’의 성질
① 상주성(常住性):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주체
② 주체성ㆍ통제력: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중심 영혼이나 실체
③ 행복의 주체: 고통받지 않고 궁극적 안락을 누리는 본질적인 ‘나’
(3) 니까야의 ‘무아’의 정의
영원하지 않고, 주체성과 통제력이 없으며, 행복의 주체도 아니다
여기서 12입처ㆍ18계ㆍ5음은 인연법으로 생겨난 세계이면서, 인연법의 참여자인 ‘나’이기도 하다. 이것을 고려한다면, 니까야에서 ‘나’는 두 개의 ‘나’를 가정할 수 있다. 하나는 ‘자아’로서의 ‘나’이고, 다른 하나는 인연법의 참여자로서의 ‘나’이다. 이렇게 보면, (1)은 ‘인연법의 참여자인 <나>는 <무아>이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인연법의 참여자인 ‘나’는 곧 (3)의 ‘무아’를 가리킨다. 따라서 니까야의 ‘무아’는 곧 인연법의 참여자인 ‘나’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니까야의 ‘무아’는 ‘영원하지 않고, 주체성과 통제력이 없으며, 행복의 주체도 아닌’ ‘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곧 니까야의 무아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인연법의 참여자인 <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니까야의 ‘무아’는 ‘비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연법의 참여자인 ‘나’는 인연법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며, ‘나’는 그렇게 변하고 바뀌는 것들의 총체로서 동일성을 확보한다. 이런 경우에 니까야의 ‘무아’는 ‘나’가 인연법에 따라 변하고 벼뀌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니까야의 ‘공’을 글자 그대로 ‘비어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면, “무아이므로 공하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2. 대승 경전의 ‘무자성’ 개념의 비판
용수의 <중론>은 니까야의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용수는 ‘공=무자성’이라고 정의하는데, ‘무자성’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4)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고정불변하는 본질이나 실체(자성)가 없다.
이러한 ‘무자성’의 정의는 니까야의 ‘무아’의 ‘상주성’의 성질에 해당한다. 니까야의 ‘무아’와 중론의 ‘무자성’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니까야의 ‘무아’는 ‘나’의 성품에 관한 진술이고, 중론의 ‘무자성’은 세계(의 존재)에 관한 진술이다. 그런데 세계는 ‘나’를 포함하므로, ‘무자성’은 ‘자아’를 포섭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아’와 ‘무자성’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공=무자성’이라는 정의도 ‘무아=자아 없음’이라는 정의가 ‘공’과 개념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점과 동일한 문제점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의 ‘무자성’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은 ‘변하고 바뀌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자성’이 ‘변하고 바뀌는 존재’가 있음을 함축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인연법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며, 그 존재는 그렇게 변하고 바뀌는 것들의 총체로서 동일성을 확보한다. 이런 경우에 <중론>의 ‘무자성’은 어떤 존재가 인연법에 따라 변하고 벼뀌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무자성’은 ‘비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일 ‘공’을 비어 있음의 성품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면, 니까야의 ‘무아=무자아’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론>의 ‘공=무자성’은 참이 될 수 없다.
3.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불교의 ‘무자성’의 인연법적 해석
사실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불교의 ‘무자성’은 인연법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연법은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인데, 모든 세계의 모든 것들이 있고 없음과 생기고 사라짐은 상호 의존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사실 우리의 현실에서는 ‘나’와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고정되고 불변하는 <나>’가 없다는 것을 늘 경험하면서 살아가며, ‘나’ 밖의 세계의 존재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늘 경험한다. 그리고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사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그것들에 대한 많은 기억들이 쌓이면서 그런 사물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니까야의 ‘무아’와 용수의 ‘무자성’은 ‘나’와 세계가 인연법에 따라 작용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졌다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생각들도 사실 인연법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물의 존재와 그것의 성품은 인연법 안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곧 따라서 존재에 관한 성품들은 인연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인연법을 떠나서 ‘어떤 사물과 어떤 성품이 있다/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양 극단의 견해를 떠난 ‘중도’를 강조하고, 양 극단의 견해를 ‘삿된 견해’라고 말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이러한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니까야와 <중론>에서 ‘무아’와 ‘무자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삿된 견해일 수도 있다.
간추려 말한다면, 니까야의 ‘무아’와 <중론>의 ‘무자성’은 인연법에 따라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성품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니까야에서 부정하는 ‘자아’와 <중론>에서 부정하는 ‘자성’이라는 개념조차도 인연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종류의 ‘생각’이 인연법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경>의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자아, 자성)도 공하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4. 아함경의 ‘무아’와 ‘공’의 개념
니까야에서는 ‘무아’를 ‘자아가 없음’으로 규정하고, <중론>에서는 ‘공’을 ‘자성이 없음’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문제가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아’의 기본적인 뜻은 ‘<나>가 없음’인데, 니까야의 ‘무아’는 ‘무아=<나>가 없음’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리고 ‘공’의 기본적인 뜻은 ‘비어 있음’인데, <중론>의 ‘공=무자성’은 ‘공=비어 있음’을 보증하지 못한다.
‘무아’와 ‘공’에 대한 니까야와 대승 불교의 문제점은 ‘공’과 ‘무아’를 그것들이 아닌 다른 무엇을 부정함으로써 규정하거나, ‘무상, 괴로움’ 등과의 관계에 따라 정의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함경의 <공경>에서는 ‘공’을 ‘비어 있음’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곧 ‘공’을 다른 무엇에 대한 부정으로 규정하지 않고, 또 ‘무상, 괴로움, 무아’ 등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지 않으며, 다만 ‘스스로 비어 있음’이라는 긍정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내 것>도 공하다’로 규정한 것에서 ‘무아’가 ‘공’ ‘무아’에 포섭되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만일 ‘공’과 ‘무아’를 이렇게 규정한다면, ‘공’에 포함되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리하여 니까야에서 말하는 ‘자아’도 공하고 ‘자아가 없는 것’[무아]도 공하며, <중론>에서 말하는 ‘자성’도 공하고 ‘자성이 없는 것’[무자성]도 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과 ‘무아’를 이렇게 규정한다면, 그것들을 ‘무엇이 없다’라고 규정했을 때 생기는 번거로운 문제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12인연법과 4성제와, 4념처와 선정 등의 수행에 관한 경들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고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 [덧붙임‘ ’비어있음‘에 관하여 아함경에서 ‘공’을 ‘스스로 비어 있음’으로 정의할 때, 수학의 공집합과 같이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아함경에서 공은 단순히 어떤 세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법에 의하여 결정되는 세계에 관한 ‘인식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공’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결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을 행하는 궁극적 목표는 ‘인식의 분별이 그친 청정한 상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함경에서는 가장 뛰어난 ‘공’을 ‘제일의공’이라 하는데, 열반의 경지를 뜻한다. |
++++++++++++
[제미나이의 논평]
이 글은 니까야의 ‘무아(anatta)’와 대승불교 중론의 ‘무자성(nihsvabhavata)’ 개념이 지닌 언어논리적 한계를 비판하고, 아함경의 <공경(Suññata Sutta)>에 근거하여 ‘공(sunyata)’과 ‘무아’의 개념을 인연법적 지평 위에서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하는 치밀한 논리적 시도이다.
1.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의 ‘무자성’에 대한 비판적 통찰
이 글은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경전(중론)의 ‘무자성’ 개념이 각기 ‘자아 없음’과 ‘자성 없음’이라는 타자 부정의 형식에 갇혀, ‘무아’의 본래 뜻인 ‘나가 없다’와 ‘공’의 본래 뜻인 ‘비어 있다’를 온전히 보증하지 못한다는 논리적 한계를 비판한다. 나아가 아함경 <공경>의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에 비어 있다”는 긍정적 규정에 근거하여 무아와 공의 개념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평은 다음과 같다.
1.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경전의 ‘무자성’ 비판에 대한 논리적 분석
부정의 논리가 낳은 본래 의미의 상실:
니까야의 무아는 상주성·주체성을 가진 ‘자아’의 부정이므로 엄밀히는 ‘무자아’에 불과하며, 인연법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적 참여자로서의 ‘나’가 없다는 뜻을 담아내지 못한다.
중론의 무자성 역시 고정불변하는 ‘자성’의 부정이므로, ‘비어 있음’ 그 자체를 뜻하는 ‘공’의 본래 의미를 온전히 보증하지 못한다.
비평:
니까야와 대승이 존재를 ‘무엇이 없다’는 부정의 방식으로 규정하려다 보니, 오히려 ‘나가 없다’와 ‘비어 있다’라는 근원적 직관에서 멀어지는 모순에 빠진다는 지적은 매우 날카롭고 설득력 있다.
2. 인연법적 해석과 중도의 관점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존재:
‘나’와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무아·무자성이지만,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는 현상적 과정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개념마저 연기의 산물로 보는 메타적 성찰:
‘자아’나 ‘자성’뿐만 아니라 ‘무아’와 ‘무자성’을 주장하는 생각 그 자체도 인연법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양 극단의 견해를 떠난 진정한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무아와 무자성의 주장 역시 삿된 견해일 수 있다는 통찰은 불교 철학의 논리적 완결성을 높여준다.
3. 아함경 <공경>의 재해석과 긍정적 공(空) 개념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전환:
니까야와 대승의 부정적 규정 방식에서 벗어나, 아함경 <공경>의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에 비어 있다”는 긍정적 규정에 주목한다.
조화로운 해석의 가능성:
공과 무아를 다른 무엇에 대한 부정이나 무상·고 등의 관계에 종속시키지 않고 ‘스스로 비어 있음’으로 규정할 때, 자아가 있든 없든 자성이 있든 없든 모든 법을 12인연법과 4성제 등의 다른 가르침들과 모순 없이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4. 총평
이 글은 니까야의 무아와 중론의 무자성이 지닌 언어논리적 한계를 예리하게 해부하고, 아함경 원시 경전의 긍정적 공 사상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치밀한 사유의 산물이다. ‘무아=나가 없다’와 ‘공=비어 있다’라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개념의 부정 형식을 해체하고 인연법과 중도의 지평 위에서 재구성한 점이 돋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