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香傳』의 "이몽룡은 奉化의 실존인물 『成以性』이었다" 關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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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향전(春香傳)의 개요(槪要) |
작자.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또 조경남(趙慶男)이란 설(설성경)이 있다. 소설의 이본(異本)이 120여종이나 되고,제목도 이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단일 작품이 아닌 작품군인 '춘향전군(春香傳群)'이라고 보아야 한다. 판소리로 불리다가 소설로 정착되었으리라고 보이는 판소리계 소설의 하나이나 문장체 소설로 바뀐 것도 있고, 한문본도 있다. 창극·신소설·현대소설·연극·영화 등으로도 개작 되었다. 한국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 또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점이 거듭 논란되었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도령과 기생의 딸 춘향이 광한루에서 만나 정을 나누다가, 남원부사가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별한다. 그 다음에 내려온 신관(新官)이 춘향의 미모에 반하여 수청을 강요한다. 그러나, 춘향은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앞세워 거절하다 옥에 갇혀 죽을 지경에 이른다. 한편, 이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가 되어 신관 부사를 탐관오리로 몰아 봉고파직(封庫罷職)시키고 춘향을 구출한다. 이도령은 춘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한다. 그런데 이본에 따라서 춘향이 다르고, 춘향과 이도령의 결연이 가지는 성격에 차이가 있다. 신관 부사가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한 것이 얼마나 부당하냐 하는 점도 일정하지 않다. 이 작품은 설화를 소재로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 근원설화(根源說話)탐색이 여러모로 이루어 졌다. 그 내용은 ① 신원설화(伸寃說話) : 남원에 춘향이라는 기생이 있어 아자제도령을 사모하다가 죽었으므로 원귀가 되어 남원에 재앙을 가져오므로 액풀이하는 제의설(祭儀說두)에 근원을 두고, 양진사(梁進士)가 제문으로 창작하였다는 설, ② 암행어사실화(暗行御史說話) : 노진(盧縝), 조식(曺植)·성이성(成以性)·김우항(金宇杭)·박문수(朴文秀) 등의 고사에서 야담으로 형성된 암행어사 출두의 설화가 <춘향전>이 부연되었다는 데에서 <춘향전>이 그 주제를 따왔다는 설, ③ 조선조 야담에 보이는 도령과 기생과의 애련설화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설(成世昌의 설화가 이에 해당된다.)인데, 이는 <춘향전>전반부의 제재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④ 기타 설화 : <춘향전>속에 삽입된 제재로서의 춘향이 이도령에게 수기(手記)를 받는 이야기, 춘향이 판수에게 해몽을 청하는 이야기, 암행어사 출두장면에서 이 어사의 '금준미주(金樽美酒)'한시의 작시(作詩) 설화 등이 조선조 야담에 나옴으로써 이를 수용하였다는 설, ⑤ 이들 설화가 열녀설화(烈女說話) 및 조선조 유교윤리와 결부, <춘향전>생성의 제재가 되었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
2.봉화(奉化)의 실존인물 '성이성(成以性)'주장의 배경 |
▲ 주 장 자 :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 문과대학 인문학부, 춘향전 계통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 받음. 연구관심 분야 : 한국고전문학 및 춘향예술사 분야 ▲ '설'교수는 지난 '99. 11. 3.과 11. 23. 일본 및 국내에서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의 연구 논문을 통해 공식 발표. ▲ 본 주장관련 보도일지 ▲ "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인물이었다" 주장의 내용 요지 성춘향과 이몽룡. <춘향전>의 두 주인공은 여지껏 이런 이름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도령(李道令)으로 알려져 왔으나 ‘성도령(成道令)’으로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춘향의 성은 본디 무었이었는지 정확치 않다). '이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조선조 광해군 ·인조때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보려 했지만 사랑하던 그 기생은 죽고 없었다.' 한국 최고의 로맨스이자 4대 국문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춘향전>의 탄생비밀이 최근 한 국문학자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밝혀졌다.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춘향전 비교연구>등 굵직굵직한 저서를 내놓으며 지난 30년 동안<춘향전> 연구에 괄목할 성과를 일궈온 설성경 교수에 의해 근 3백년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이른바 '춘향전 신화'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설 교수는 오랬동안 <춘향전>이야기 '역사적 실체'가 숨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밝히는데 몰두해 왔다. 그는 최근 자신의 '가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를 손에 넣었다. 성이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낸<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 섭(成涉 :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가 그것이다. <춘향전>의 두 주인공 성춘향과 이도령의 실존 인물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와도 면밀히 대조·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길에 길을 나서서 십리가 채 안되어 남원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부내로)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원문 생략, 고딕체 강조는 편집자) 이 구절은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성이성 본인의 기록 '호남암행록'(<계서선생일고>에 실려 있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설교수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는 성이성의 진술. 설 교수는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또는 춘향)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 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라고 말한다. 설 교수에 따르면, 옛 연인(또는 춘향)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옛연인(또는 춘향)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사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 관기(官妓) 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인물 성이성의 행적과 <춘향전>주인공 이도령과의 밀접한 관계는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그대로 유입된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성 섭은 성이성의 4대손이며, 홍문관 교리·암행어사를 지낸 성기인(成起寅)의 아들이다. 성 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성이성)가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곳에 이르니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주었다. ‘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어 갔다. 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필원산어>에 나오는 이 대목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과 다름이 없다. 특히 성이성이 여러 관리에게 보여준 한시(漢詩)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내보인 한시 구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그것이 판소리 계열의 <춘향가>든, 소설계열의 <춘향전>이든 예외없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한 대목 '술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라는 시구는 성이성이 지은 한시내용 그대로인 것이다.(원문은 '金樽美酒千人血/ 玉盤嘉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로 되어 있음). 이쯤 되면 기왕의 <춘향전>은 형성요소의 절반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춘향전>의 실제 모델을 밝히려는 노력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춘향전>발생(기원)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이성은 일찌감치 60년대에 '1대 춘향전 연구가' 이자 설성경 교수의 스승이던 나손 김동욱 교수(작고)에 의해, 조선조 말 동시대인으로서 저마다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노진·박문수·김우항 등과 함께 '실제 모델'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김교수는 성이성 관련 설화에 '춘향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설교수는 '미완의 연구'로 끝난 이 부분에 새로 발굴한 사료와 남원일대에 흩어져 있는 각종 고사와 춘향설화를 있대어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설교수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춘향전>발생 시나리오를 다시 짜맞추고 있다. <춘향전>발생 경로와 관련하여 기존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설득력을 얻어 왔다. 하나는 <춘향전>이 무속(특히 무가)에서 발생해 진화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판소리를 통해 발생·진화 했다는 것이다. 설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즉,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절반으로 하여 한 '유능한' 작가의 창작에 의해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양·각층의 민중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KBS 1TV 역사 스페셜 프로그램 방영요지 이 또한 조선중기 인조 때 어사 성이성이 암행을 다니면서 쓴 친필<암행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암행일지>는 암행어사들이 자신의 행적을 적은 어사일지. 성이성은 <암행일지>에 광한루에 들러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한 기록을 남겼다. 그렇다면 소년시절의 일은 무었일까? 이 역사 스페셜에서는 이몽룡의 실존설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대고 그 실존 인물인 성이성의 삶과 행적을 살펴봄. 1) 남원의 도령 성이성 2) '금준미주 천인혈....' 3) 성섭의'교와문고' 4) ‘성몽룡’ 아닌 ‘이몽룡’이 된 까닭 5) 광한루의 잠 못 이루는 밤 ※역사스페셜팀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국문학과)와는 별도로 성이성의 친필<호남암행록>원본, <교와문고>원본을 최초로 찾아내고, '금준미주'시가 바로 성이성의 스승인 조남경에게서 나왔음을 밝혀낸다. |
3.'이몽룡"의 실존 인물 '성이성(成以性)'은 어떤 인물인가. |
<약 력 > 1635년(인조 13) 정언·부수찬·부교리를 거쳐 이듬해 지평을 지낸 뒤, 1637년(인조 15) 헌납이 되어 윤방(尹昉)·김류(金 류)·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의 오국불충(誤國不忠)의 죄를 논하기도 했다. 특히 사간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 하여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진주 ·강계 등 네 고을을 다스렸는데, 진주때는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선치(善治)보고로 표리(表裏:옷감)를 받았고, 강계 때에는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주어 백성들이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사후인 1695년(숙종 21)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학업에 열중하여 13세때 정경세(鄭經世)에게 보이니, 정경세가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다. 자라면서 학문에 더욱 증진하여 김굉필(金宏弼)·이연경(李延慶)의 학통을 이은 강복성(康復誠)의 문인이 되었다.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계서유고>가 있다. <일대기> 1627년(인조 5)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다. 1629년(인조 7) 부친상을 당하여 복을 벗고, 정자(正字)에 올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옮겼다가,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를 거쳐 1633년(인조 11) 성균전적(典籍)에 올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시강원사서(司書)를 지내고, 이듬해 병조(兵曹)-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또 유백증(兪伯曾 : 인조때 참판을 지냄 시호 忠景)의 몇 신하(인조 뜻에 찬성하는 )의 상소를 논함에 답하여, '그 죄는 다만 영합(迎合)이란 두글자이겠는데, ‘영합'은 비록 두 글자이나, 그 해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예로부터 신하로서 임군을 고혹(蠱惑)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 영합에 비롯되지 않음이 있는가. 영합이란 그 임군이 하고싶어 하는대로 인도함을 이름인데, 전하의 하고 싶어함이 과연 모두 도리와 경위에 맞으면 영합이란 것이 역시 좋으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한 경우임에도 반드시 영합하려 하면 자칫 말 한마디로 나라를 그러치게 함이 아닐 것인가. 이제 입묘(入廟 : 定遠君을 元宗으로 追尊하는)의 일은 전하의 마음이 꼭 수행함에 있으므로 저네들(영합하는 신하들)도 "수행해야 합니다"고 할것이나, 만일 전하께서 불가하다 하시면 저네들도 역시 불가하다고 할 것이다. 옛날 이윤(李尹)이 태갑(太甲)에게 이르기를 "말이 네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그 의미들) 도(道)에 구하고, 말이 네뜻에 순하면 반드시(그 의미를) 비도(非道)에 구하라"했는데, 전하는 어찌하여 이로써 반성하지 않으시는지... 아 - 바른 말 하는 선비는 물러가고 뜻이나 맞추는 사람은 승진하니, 충간(忠諫)의 길은 막히고 영합이 풍습을 이루게 되면 전하의 큰 욕망은 달성할 수 있으려니와, 전하의 나라일은 종당 어찌 될것인가’라고 했다. 상소로 하여 그는 곧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35년(인조 13) 사서(司書)로 복직하여,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인성군(仁城君) 공(珙 : 宣祖의 7째 아들)의 아들 용(用)이며, 여러 목숨을 죽음에서 구원했으니, 이는 그의 보람된 공적가운데 하나라 할 것이다. -앞서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이 대북(大北)의 잔당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하면서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하여, 인성군을 자결하게 하고, 연좌처형하기로 된 그 아들 용(用)을 구명하고자 간곡한 뜻으로 상소(疏), 경연(經筵)에서도 여러차례 간절한 진달(陳達)로 용서를 청하매 인조임금이 드디어 감동되어 인성군의 아들 용이 구원됨과 함께, 같은 역률(逆律)에 연좌되어 대년(待年)중이던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기에, 구원받은 그 사람들 조차 그런줄을 모르게 되었다. 그해(1635년<인조 13>) 가을 ∼이듬해 겨울까지에 수찬(修撰)·교리(校理)·정언(正言)·시강원문학을 두 세차례씩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겨울 청(淸)의 침략(병자호란)으로 임금이 남한 산성에 피난했는데, 그는 수찬으로 마침 귀향해 있던중 변을 듣고,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함께 급히 임금곁으로 달려가던중 충주를 지나다가 경상감사 행영(行營)에서 감사(監司)심연(沈演)을 만났다. '적군에 막혀 남한산성에는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여기서 힘을 바침이 옳으리라’고 하는 감사의 말을 쫓아, 거기서 감사 심연(沈演)의 참모가 되었다. 그의 도타운 충의(忠義)와 비상한 지모(智謀)에 심감사는 감탄을 마지 않았다. 피난 정부가 더 버틸길이 없어, 남한산성에 포위된지 꼭 달반 만인 1637년(인조 15) 정월 그믐날, 마침내 왕이 성을 나와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조정에 달려가, 2월엔 진휼어사(賑恤御使)로 경상도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 지방관리의 정사와 민정(民情)을 살폈으며, 이어 호서(湖西) 암행어사가 되어 탐학(貪虐)한 관원들을 징계하고 선정(善政)이나 미행(美行)이 있는 이를 포상하매 일도(一道)가 숙연했다. 그때, 권신(權臣)들이 서로 알력을 빚어, 공직(公直)한 인품으로 명망을 띤 이성(以性)을 서로 끌고자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삼으려 하매, 그는 욕되게 여겨, 어버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연달아 임명이 있었고, 옛 동료며 친지들도 복직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다가, 이듬해 봄 비로소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취임하매, 대신들이 서로 자기파당으로 끌고자, 수찬(修撰) - 이조정랑에 옮기게 하려다가 그의 강직(剛直)한 성품을 알고 물러섰다. 다시 교리·사간(司諫)·호남(湖南) 암행어사 등을 거쳐, 다시 사간·집의(執義)·교리를 지내고, 어버이를 위해 외직(外職)을 구하여, 합천현감(陜川縣監)에 부임했다. 그는 한결같은 청렴공직(公直)으로 갓난 아기를 어루만지듯 성력으로 백성을 돌보았으며, 봉록(俸祿)을 던져, 전임 현감이 축낸 곡식 수천석을 대신 충당했고, 교학을 일으킴에도 힘을 기울렸다. 그때 감사(監司)나 병사(兵使)가 서슬이 대단했으나 이성(以性)에게는 예우가 깎듯했으며, 두간이 감영(監營)- 병영(兵營)에서 재물을 내어, 고을 백성을 구호함에 돕기도 했다. 1644년(인조 22) 어떠한 사건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그 겨울 시강원필선(弼善)을 거쳐 보덕(輔德)에 옮기고,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청나라 사행(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正使는 麟平大君) 북경에 다녀올새, 돌아오는 행장(行裝)에는 다만 침구 한벌 뿐이어서, 부사(副使) 정세규(鄭世規)가 매우 공경했다고 한다. 그해 가을서부터 이듬해(1646년<인조 24>) 여름까지에 교리·수찬을 네차례, 사간(司諫)·사헌부 집의(執義)를 네차례, 시강원 보덕 한차례에 각각 임명되어 혹 취임하기도, 안하기도 했다. 그 6월에 별시(別試) 과거에 고관(考官)이 되어, 주시관(主試官)이 출제를 잘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파직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7월 다시 교리에 복직되고 겨울엔 또 호남행 어사가 되었으며, 1648년(인조 26) 봄 다시 집의·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담양부사(潭陽府使)에 부임했다. 1650년(효종 1) 암행어사가 그 치적(治績)을 임금께 알려 표리(表裡)가 하사되고 포상하는 유서(諭書)가 내렸다. 다시 교리(校理)로 불러, 곧 집의(執義)에 재수되고, 겨울에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다시 사간에 옮겼다. 그때 영남선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이율곡(李栗谷)을 문묘(文廟)에 배향함이 부당함을 상소하고 일도(一道)의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하시기를 거부 했던바, '경과(慶科 : 나라에 경사가 있어 보이는 과거)를 거부함은 곧 임군을 무시하는 작태다.'라는 말이 낭자하니, 이에 영남선비들이 또 상소로 변명하여, 우비(優批)가 내렸으나, 일반의 불평이 대단했다. 마침 도내(道內) 어느 장난꾼이 거짓으로 왕의 비답(批答)을 꾸민 사건이 있어, 의논이 몹시 시끄러웠는데, '그것은 앞서 상소한 유생(儒生)가운데서 나왔으리니, 필시 화를 넘겨씌우기위한 계책이리라'함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몸을 사렸으나, 이성(以性)이 나서서 그 애매함을 힘껏 변명하여, 사림(士林)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1651년(효종 2) 또 사간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었다. 어느날 가주서(假注書) 이명익(李溟翼)이 경연(經筵)에서 말한 것을 밖에 퍼뜨렸다 하여 임금이 이명익을 나포하여 국문(鞠問)하도록 명령했다. 이번에도 이성(以性)이 임금께 '경연에서의 일은 본래 공개함이 마땅한 것으로, 반드시 숨길일은 아닙니다.'라고 간(諫)했으나, 임금이 노여움을 풀지 않으매, 그는 드디어 사직하고 물러 오려 할새, 마침 <인조실록>이 완성되어, 편찬에 참여했던 춘추관(春秋館) 관원들은 공로로 승진시키는 예임을 들어, 사국(史局)의 동료들이 조금만 지체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언관(言官)이 되어 말이 쓰이지 못하는 터에 은상(恩賞)을 바라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노릇이라'하고 결연히 돌아와 버렸으니, 이로 말미암아 그는 더욱 임금의 뜻에 거슬린바 되어, 몇해 동안은 통 임명이 없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세규(鄭世規 )가 '이 신하(以性)는 본시 청백하고 근실하기로 알려져, 양조(仁祖·孝宗)를 섬겨 온 경악(經幄)의 신하이온데, 말 한번으로 전하의 뜻에 거슬렸다하여 버릴수는 없습니다.'라고 진언했으나, 임금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1653년(효종 4) 3월 비로소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어, 그는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했다. 이성(以性)은 상가의 이웃이나 친척이 힘을 모아, 반드시 매장(埋葬)을 하도록 했고, 딱한 처지이면 관에서 물자와 식량을 주어, 반드시 매장하도록 시켜, 미개한 풍속을 모두 고치게 했다. 그 가을, 다시 부교리로 불렸으나 얼마 아니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강계는 관서지방의 웅진(雄鎭)이나, 압록강에 면하여 여진(女眞) 땅에 연접되어 있고, 백성이 드물며, 국내 대표적인 산삼곳이라, 거의 산삼캐는 일로 생업을 삼는 고장이었다. 원근의 장사꾼들이 모여들고, 관가에서도 끼어 들어 이(利)를 탐함이 장사꾼 이상이었으니, 서도(西道)일대의 고위관원들, 및 중앙 각 아문(衙門)에서 포백(布帛)을 실어다 맡기고, 그 값어치의 3배에 해당하는 삼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수령(守令)이 또한 그러하니, 백성의 부대낌이 극심하여 원성은 온 고을에 들끌었다. 그가 부임길에 오르면서, 그 폐단을 여러 대신들에게 알리고, 과감히 바로잡으리라는 결의를 보이매, 정승 이경석(李景奭)만이 그를 칭찬했을 뿐, 대개는 미지근하거나 불쾌하다는 기색들이었다. 이 해에 관서지방에 가뭄이 심하고, 메뚜기가 온 들판을 뒤덮어 들어가 푸른 잎사귀란 남아나지를 못했다. 그 사람이 매우 노하여 돌아가, 거짓으로 보태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매, 감사가 감탄하기를 '그사람이 그렇듯 엄정(嚴正)하니, 비록 상사(上司)로서도 어찌할 수 없구나.'하고, 뒷날 서울에 돌아가 '성모(成某) 같은 이는 지금 세상엔 한사람뿐이리라'고 칭찬했다. 마침 만포첨사(滿浦僉使) 한휴(韓休)가 '사병이 삼금(蔘禁)을 범했다.' 고 이성(以性)을 무함하매, 조정에서 의논이 분분할새, 혹 겉으로 돕는체 하면서 도리어 그를 옭으려 들었다. 10월에 그를 나포(拿捕)하라는 명이 이르매, 온 고을이 창황하여 울부짖었고, 드디어 의금부(義禁府)로 잡혀가게 되매, 강계부의 백성들이 따라와 어울함을 호소하여 '우리 사또님 같은 은혜로운 다스림은 강계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하고, '인삼 2백근을 나라에 바치니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빌었다. 이성(以性)이 듣고 놀라, 평안가마 임의백(任義伯)이 장계 파직될새, 말이 인삼 사건에 미치매, 이성(以性)의 청렴함과 애민(愛民)정신을 들어, '관서 지방에서는 산부처(活佛)라는 칭호가 있으니, 그 사람의 죄없음을 알것이라.'고 했다. ◇ ◇ 그는 빼어난 의표(儀表)에 단정 장중하여, 아무리 불시에 급한 경우를 당해도 자약(自若)하여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 남원에 있을 때, 관아(官衙)안에 귀신의 괴변이 많았다 하나, 그는 조금도 개의함이 없이 밤이면 늘 혼자서 거처하며 태연히 글을 일었다. 벼슬에 있으면서도 교유(交遊)가 적었으며, 더욱 권귀(權貴)에 가까이 하기를 싫어하여,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여러 차례의 내방(來訪)에 대하여, 단 한번 답례로 찾은 뒤에는 다시 발길을 하지 않았으니, 그 결벽함을 짐작할만하다. 그는 평생토록 번화함을 싫어하여,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남의 떳떳치 못한 일을 말하지 않았고, 자기의 잘한 일을 나타내는 법이 없었다. 벼슬에 있어서는 절용(節用), 애민(愛民), 청렴(淸廉)을 첫째로 삼아 한결같이 법을 준수하여, 누구도 감히 그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못했으며, 관청이 정숙하고, 안과 밖이 엄격히 격리되어 아문의 관속들도 그 자체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술한잔 국 한 그릇이라도 사사로이 쓰지 못했다. 그래서 그 에게는 간혹 엉뚱한 비방이 있기도 했으나 그는 개의 하지 않았다. 그는 부임한 고을마다 밝은 다스림으로 칭송이 있어, 담양(潭陽), 창원(昌原), 진주(晉州), 강계(江界) 등 고을에 돌이나 구리에 새긴 송덕비(頌德碑)가 있었다. 한 아우가 있었는데, 시냇물을 상거하여 살면서, 화락함이 그지없어 아침에 모이면 저녁까지, 저녁에 모이면 때로는 새벽이 오는 줄을 잊기도 했다. 문장은 간결 담아(淡雅)하여 예사로운 경계가 아니었으나, 그는 문예로 자부하지 않았고 저술도 적은 편이었다. 그는 비범한 자질, 강직한 성품에 맑고 굳센 지조로 하여, 그의 바른 말과 결벽한 처신은 혹 임금께 거슬리고, 상사(上司)의 꺼림을 입어, 그의 진로(進路)는 순탄하지 못했으나, 변방고을로 밀려나 마치고 말았다. 1695년(효종 21)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자손에게 쌀과 콩이 하사되었다. |
4. 이몽룡 아닌 '성몽룡(成以性)'관련 유적 및 유물안내 |
▲ 가평리 계서당(溪西堂) 이곳은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에 위치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성이성 선생이 1610년(또다른 문헌에는 1613년)에 건립하여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한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입구자( 口)형으로 되어있다. ▲ 성이성 사당(祠堂) ▲ 어사화(御賜花) ▲ 부용당 사당(芙蓉堂 祠堂) ▲ 남원부사 성안의(成安義) 성덕비(成德碑) ▲ 부용당(芙蓉堂) 제실 ▲ 성이성(成以性)의 묘(墓) ▲ 창녕성씨 족보 ▲ 교 지(敎旨) ▲ 문과 시험 답안지 ▲ 국조방목(國朝榜目) ▲ 영 정(影幀) ▲ 전고대방전(全故大方典) ▲ 사 선(紗扇) ▲ 기 타 |
5. 성이성(成以性)관련 인물 및 참고자료 |
▲ 성안의(成安義). 1561(명종16) ∼ 1629(인조7) 조선 인조 때 문신. 성의성의 부(父).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본관은 창녕. 창녕 성산(城山) 출신.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자. 1591년(선조24) 문과에 급제, 벼슬은 사헌부 지평(持平)에 이르렀고, 영남지방의 조도사(調度使)로서 유성룡(柳成龍)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영해(寧海)부사, 남원부사를 역임. 광주목사에 승진하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 순응치 않아 파면,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13년만에 사성(司成)으로 재등용, 상의원(尙衣院) 봉상시성(奉常寺正)을 지냈다. ▲ 성춘향(成春香) : 고대소설 <춘향전>의 여주인공. 남원(南原)의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과 백년 가약을 맺고 여러 우여곡절과 난관에 봉착하면서도 절개를 지켜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에게 구출되고 왕으로부터 정렬부인(貞烈夫人)이란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 춘향가(春香歌) : 판소리 다섯마당의 하나.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이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전라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 ▲ 가평(佳坪)리, 가두들, 가구(佳邱) : 계서 성이성의 고택이 있는 마을의 명칭으로 약 380 여 년전 창녕성씨 선조가 지금의 안마에 정착하면서 마을 언덕에 가죽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해서 가구라고 불리워 오다 그 후에 음을 따고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의미로 가평, 가두들, 가구 등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 남원(南原)시 : 전라북도 동남단에 위치하는 시. 백제때 고룡군(古龍郡)이다. 당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을시켜 백제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았다. 그후 신라의 문무왕이 이 땅을 합쳤고, 684년(신문왕4)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경덕왕때에 남원으러 개칭하여 남원소경이라 하 였다. 940년(태조 23)에는 부(府)로 고치고, 1310년(충선왕 2)에는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다가 후에 남원으로 고쳤다. 1360년 (공민왕9)에는 또 부로 승격,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로 고쳤다. ▲ 광한루(廣寒樓) :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소재하는 조선중기의 목조건물. 규모는 작지만 석주(石柱)위에 세운 누정(樓亭)으로 본래는 광통루(廣通樓) 였으나, 1434년 (세종 16)에 중건되어 정인지(鄭鱗趾)에 의하여 광한루라 개칭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635년(인조 13)에 재건한 것이며 <춘향전>의 전설로 유서 깊은 곳이다. 보물 281호. ▲ 오작교(烏鵲橋) : 전설상의 다리. 음력 칠월칠석 저녁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서로 만나게 하도록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서 자기들의 몸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같은 이름의 다리가 전라남도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에 있어서, 소설 <춘향전>과 더불어 더욱 유명해졌다. ▲ 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시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문관·종친(宗親) 및 의빈(儀賓)의 관계(官階) ▲ 자헌대부(資憲大夫) : 조선시대의 관계. 초기부터 정2품의 동반(東班 : 文官) 및 서반(西班 : 武官)에게만 주었으나, 말기에는 종친(宗親)·의빈(儀賓)도 이 관계를 썼다. ▲ 부사(府使) : 고려 및 조선시대의 관직. '고려사' 식화지 녹봉조에 의하면 개성부(開城府) 및 지사부(知事府)의 수부사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대도호부(大都護府)·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를 가리키는 말이며, 경주와 같이 종2품관을 배치하는 부의 수령은 부사라고 하지 않고 부윤(府尹)이라 불렀다. ▲부제학(副提學) : 조선시대의 관직. 홍문관의 정3품관으로 제학(提學)의 다음이며, 직제학(直提學)의 위인데 정원은 1명이다. ▲ 홍문관(弘文館) : 이조 때 경적(經籍)·문한(文翰)·고문(顧問) 따위의 일을 맡아 보던 관청. (동) 웅천도 ▲ 목사(牧使) : 조선시대의 관직. 전국 8도(道)에 두었던 정3품의 관원으로서 각 고을의 으뜸 벼슬이었다. |
6. 향후 발전방안 및 참고문헌 |
<발전방안> 세계화, 개방화의 물결과 지방자치제의 시행으로 지역의 균형발전에 대한 군민적 요망 및 삶의 질 향상 등 국내외의 여건 변화와 , 지역의 관광 수급 실정을 고려하여 각종 다양화하는 관광수요에 효율적인 공급체계를 구축하고 경유형의 관광유형을 체류형으로 전환시키고 관내의 전통사찰 유·무형의 문화관광 자원을 연계 발전시키고, 인근 시군의 부석사, 소수서원, 하회마을, 도산서원 및 동해권의 관광자원과 관광 루트화 하는 제반 여건을 조성 봉화군의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먼저 역사적 사실 및 고증작업을 충실히 한 후 관련 가문의 종중과 행정기관의 협의가 우선되어야 할 으로 보이며. 관련 유적지에 대한 구체적인 개발 방안을 강구하여 관광 명소화의 여건 조성, 관련 문화행사 개발, 관련 시(市와)의 자매결연 및 각종 문화행사의 교류등 다각도로 연구추진 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참고문헌》 |
7. 네티즌 여러분께 |
'춘향전'의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인물 '성이성'이었다" 의 발표 및 보도, 역사프로그램 방영으로 봉화군민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이에 상당한 관심이 집중 문의가 쇄도 본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본 내용의 편집에 있어 국한된 참고 문헌에 의존하다 보니 문헌별 연대의 상이·한글 맞춤법 등의 오류가 일부 있으나 내용의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함을 우려 문헌 그대로 옮겼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 내용 관련 사항 중 역사적 사실 등 고증자료를 소장하고 계신분은 제출하여 주시면 유용히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국내의 국사·국어 국문학자님·관련 문중 제위의 긍정적 방향의 많은 의견 주십시오. 본 내용을 주제로 관광 자원의 개발·캐릭터의 개발 등을 추진 할 경우 저 투자 고 효율의 좋은 아이템이나 의견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