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70년,기적의70년]7부작中 2回 한 · 일국교정상화와 60년대|자유시간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 2 回 한 · 일 국교정상화와 60년대 |
| [위 흑백사진]은 한·일 협정 반대 시위 초기인 1964년 3월 26일 중앙청 앞(현 광화문광장)에서 군경과 대치 중인 학생 시위대. [아래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당시를 회상하는 6·3 사태의 두 주역 김정남 전 수석(왼쪽)과 최장집 명예교수. 최정동 기자, [중앙포토] | |
수교 반대한 6 · 3세대도 반일 민족주의에 빠지진 않았다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2> 한 · 일 국교정상화와 60년대
[창간8주년기획]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6 · 3 세대와 한 · 일 수교
광복 70주년을 맞아 중앙SUNDAY는 한국사회과학협의회(회장 임현진 서울대 명예 교수)와 공동으로 기획시리즈 ‘광복 70년, 기적의 70년’을 7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첫 회인 지난 10~11일자에서 ‘한국전쟁과 50년대’를 다룬 데 이어 이번 주에는 ‘한 · 일 국교 정상화와 60년대’를 들여다봅니다. 이처럼 이번 기획은 광복 이후 1945~2015년을 10년 단위로 나눠 시대별로 정리하면서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합니다. 시대별로 지금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키워드가 무엇인지를 재조명하고, 이 과정을 통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할 지혜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한 · 일 국교정상화와 60년대
다음달 22일은 한 · 일 협정 체결에 따른 한 · 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되는 날 이다. 최근 악화일로인 한 · 일 관계를 반영하듯 양국 모두 별다른 기념행사 없이 조용하다. 하지만 한 · 일 국교 정상화는 1960년대 한국 외교의 최대 사건이다. 한 · 일 국교 정상화로 외교공간을 확대하며 아시아외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건 조국 근대화를 앞당긴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62년 오히라 외상과의 협상을 통해 청구권 관련 합의를 이끌어낸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고 밑천이 나올 곳은 대일 청구권뿐” 이라며 이 돈으로 도로와 공장을 짓고 기술을 얻어 고도성장의 길을 열어가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 한 · 일 양국은 1951년부터 수교에 이르기까지 14년 동안 교섭했다. 걸림돌은 과거사 문제 즉,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 문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논리를 내세우면서 타협점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역사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봉인하고 경제협력 자금을 얻어내는 데 주력한 것이다. 김종필-오히라 메모(회담 결과를 양국 정상에게 보고하기 위한 양자 합의안 메모)로부터 실제 협정 비준까지는 3년이 더 걸렸다. 양국 정부 간 입장 차를 좁히는 것도 물론 쉽지 않았지만 정작 난항은 대내 교섭에 있었다. “굴욕적 회담을 중단하라” 며 수교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세력이 가두시위를 주도했던 대학생들이다. 당시 각각 서울대와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김정남(73)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김영삼 정부)과 최장집(72) 고려대 명예교수도 그때 광화문에 있었다.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김 전 수석과 최 교수는 50여 년 전을 회고했다. “여기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앞에 모여서 청와대로 갈지, 을지로 내무부로 진격할지 정했지. 이젠 남아있는 게 거의 없네.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도 사라지고….”
64년은 한 · 일 회담을 비난하는 대학생 시위로 연일 긴장이 고조되던 해다. 급기야 6월 3일 서울 18개 대학생 1만5000여 명 등 3만여 명의 시민이 광화문의 청와대 외곽 방위선을 돌파했고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을 점령했다. 이른바 6·3 사태다. 당시 김 전 수석은 ‘총파탄에 이른 국민경제를 일본 제국주의의 더러운 배설물로 얼버무려 놓은 자 과연 누구냐’는 내용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격문 등 시위 현장의 각종 선언문 작성을 맡았고, 최 교수는 필동 대한극장 근처의 한 개인 집에서 오히라와 회담 후 귀국한 김종필과 독대한 운동 이론가였다.
격렬 시위 덕에 협상 유리하게 이끌어
한 · 일 수교를 이끈 박정희와 김종필의 경제논리는 당시 서울 도심을 덮은 대학생의 운동논리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흥미롭게도 당시의 6 · 3세대는 역사 문제가 경제나 안보 논리로 봉합된 데 대해 분노하지 않았다. 물론 거리에서는 ‘제국주의자 및 민족 반역자 화형식’을 열고 ‘매국(賣國) 정상배 (政商輩) 퇴진’을 외쳤지만 반일 민족주의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이는 김 전 수석이나 최 교수도 동의하는 바다. 대신 분단 고착화에 대한 우려가 많은 이를 거리로 나서게 했다.
김 전 수석은 “일본은 인류학적으로도 밀접해 가깝게 지내며 공영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 라며 “6 · 3 사태 당시엔 일본과 손을 잡는 게 분단 고착화로 이어질 거란 생각에 회담 자체를 반대했지만 결국 우리 시위가 한 · 일 회담 분위기를 한국 쪽에 유리하게 돌리는 데 일조한 측면도 있다” 고 말했다. “일본 측이 격렬한 한국 시위를 보고 협상이 물 건너갈 것을 우려해 강경하게 나갈 수 없었다” 는 원용석 당시 농림부 장관 말을 전하면서 말이다.
최 교수는 진보적 성향의 민족주의 분위기를 이야기한다. 역시 국교 정상화를 분단 고착화로 가는 길로 봤다는 얘기다. 그는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이 시위의 주 동기는 아니었고 오히려 그때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이미 과거의 문제로 여겼다” 며 “다만 당시엔 이대로 가면 통일이 불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과도 조율한 후에 한 · 일 국교 정상화를 하는 게 진정한 정상화라고 판단했다” 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아태 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안보 체제가 공고해진 결과 한국이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면 통일이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 그리고 북한도 교섭 당사자가 돼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정이 반대시위의 명분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는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불과 10여 년이 지난 때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일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최 교수는 김종필과의 독대에서 프랑스 핵 이론가 피에르 갈루아(Pierre Gallois)의 이론을 언급하며 국교 정상화로 한국이 냉전 핵 대결의 최전선에 나서게 돼 한반도가 핵전쟁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는 우려를 전달했다고 기억한다.
박정희 정부나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 모두 큰 범주에서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다만 박정희 정부는 개발독재를 추구하는 보수적 민족주의였던 데 비해 학생 시위대는 시민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당시 운동권에는 또 다른 반대논리가 있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의 정통성 문제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청구권을 헐값에 팔아넘긴다” 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6 · 3 사태는 한국 현대사를 점철해 온 ‘민주화 세력 대 산업화 세력’ 대결구도의 최초 사례라 할 수 있다. 김 전 수석은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온 두 주역인 민주화와 근대화 세력이 최초로 충돌한 사건” 이라며 “회담은 분명 굴욕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불가피한 면도 있었고 산업화에 기여한 것도 사실” 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도 “쿠데타로 들어선 정부가 이 조약으로 안정화할 것이란 생각에 반대한 것” 이라며 “당시엔 전부 부정적으로만 봤지만 나중에 세월이 지나 평가해 보니 일본과의 정상화는 필요한 일이었고, 한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자원이 된 자본 조달(청구권)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고 말했다.
한 · 일 관계 가장 좋았던 때는 DJ 집권 초
앞서 언급했듯 60년대 거리의 반대세력은 역사청산을 정조준하여 대결하지 않았다. 광복 70주년이자 한 · 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는 오늘날 역사 문제로 일본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현실과 비교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에도 물론 대중 사이에 반일감정은 있었지만 일제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대학생 시위대는 반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일제를 전혀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오히려 반일감정이 상승하고, 정부의 대일정책이 이에 휘둘리는 건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사회가 저항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영어학습 열기와 유학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다문화 가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혹시 3년째 대치하고 있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외손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선친들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일감정이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의심의 눈길은 권력자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월 미 국무부 정무차관 웬디 셔먼은 “동북아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하면서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런 도발적 행동은 진보가 아니라 마비(paralysis)를 초래할 뿐” 이라 경고했다. 일본을 지지하고 한국과 중국을 비판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일외교를 다시 돌아봐야 할 때라는 얘기다. 지금 워싱턴에선 미국과 일본이 동맹의 새 장을 여는 글로벌 파트너십의 축배를 터트리고, 중국과 일본 역시 전략적 화해를 연출하는 동안 한국은 반일 민족주의의 덫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김 전 수석은 “위정자들이 정치적 인기를 위해 반일 감정을 이용하다 오히려 격화된 대중의 감정에 휩쓸려 상황을 그르치고 있다” 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6개월을 앞두고 독도를 방문한 건 독도 문제와 한 · 일 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벼운 짓이며,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일본을 부끄럽게 만드는 전략이 필요한데 꽁하게 대립각을 세울 뿐” 이라고 말했다.
65년의 리더십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덫을 분명한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로 헤쳐나갔다. 2015년의 리더십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한 · 일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로 김대중 정부 첫해인 98년을 꼽는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처음으로 공식 문서화한 의미 있는 발표문이다. 당시 대일 외교 실무를 담당 했던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부 동북아국장)는 박근혜 정부에 이렇게 조언한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외교를 단절할 수는 없다. 경제교류와 초보 수준의 안보협력 등 제한된 수준의 협력이라도 유지하려면 외교채널을 복원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삼으면 복원이 쉽지 않다. 지금은 아베가 문제이긴 하지만 구조가 변화한 요인도 있다. 냉전 시대의 반공 연대나 일본에 대한 경제 의존은 과거의 구조다. 새 구조에서 남북통일이나 역내 평화번영을 위해 한 · 일이 공동으로 협력의 틀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조 교수는 김 전 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야당 지도자 시절부터 과거사 청산을 강조하면서도 일본에 대해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해야 한다는 뚜렷한 일본관이 있었고, 그게 공동선언을 가능하게 했다는 거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 이후 한국에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일왕에게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고, 일본은 ‘언제까지 반성을 요구할 거냐’며 줄다리기를 했다” 며 “그래서 98년 당시 양국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이런 소모적 논쟁 대신 반성과 사죄의 내용을 문서화해 더 이상 논쟁을 그만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고 했다.
결국 한국 외교 위기론의 핵심에 있는 한 · 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반일감정을 정면으로 다스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 중앙선데이 제427호|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이충형 기자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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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기시, 이념 · 정책적 공유로 교섭 순항 |
한 · 일 국교 정상화 막전막후
| | | 77년 9월 한일협력위원회 회장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을 만난 기시. [중앙포토] | | 박정희에겐 만주국 최고위직을 거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가 아이돌이나 다름없었다. 산업개발 5개년 계획 등 신개념으로 만주국을 경략한 기시는 군국주의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와 콤비로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탓에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복역하다 냉전이 오면서 사면됐다. 이후 불사조처럼 부활해 1957년 총리에 올랐다.
그는 안보를 미국에 위임하고 경제성장에 매진하는 독특한 부국강병노선을 추진했다. 이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899~1965) 총리로 승계돼 전후 눈부신 고도성장의 견인차가 되었다. 이와 함께 60년 미 · 일 안보조약 개정을 통해 군사동맹을 공고히 하고, 동맹을 위해 자유롭게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 제9조를 개정한다는 논리로 개헌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조약 개정 과정에서 기시의 반민주적 통치행태를 거부하는 시위대에 밀려 결국 하야하고 말았다.
조국 근대화를 외치며 집권한 박정희는 기시를 모델이자 반면교사로 삼았다. 미국에 안보를 맡기고 경제성장에 매진하여 궁극적으로 자주와 독립을 성취하는 국가전략을 추구한 것이다. 한 · 일 국교 정상화는 미국의 안보 논리를 만족시키고 일본의 자금을 활용해 경제를 일으키는 전략의 출발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상대 일본은 이를 잘 이해했다. 한 · 일 협정 당시 총리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1901~75)는 기시의 실제(實弟)이고, 외무대신 시나 에쓰사부로(椎名?三?·1898~1979)는 그의 핵심 참모였다. 기시가 막후 실력자이자 조정자였다는 얘기다. 기시와 박정희 사이에 이념적 · 정책적 공유로 양자 간 교섭은 비교적 순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협상 주역이었던 김종필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고, 그 이면에 기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셈이다.
김종필은 협상 당시 한국을 중국 · 소련에 막혀 대륙에 달려 있는 맹장으로 비유하며 일본을 디딤돌로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종필의 구상은 당시 국제적 구조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냉전의 한 축인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연결해 반공연대의 틀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 낙후한 한국에 대한 원조 부담을 일본에 지우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이런 미국의 의도에 맞춰 경제협력이라는 고리로 한국과 수교해 전후처리 외교의 결실을 보고자 했다.
- 중앙선데이 제427호 |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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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못 찾는 한 · 일 관계 개선되면 미 · 중 사이에 낀 한국 활동공간도 넓어져 |
한 · 일 관계 정상화 시급한 까닭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를 놓고 본격적으로 힘겨루기에 들어간 지 벌써 3년이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반등의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50년 전 박정희 정부는 냉전 환경하에서 미국·일본과 반공연대를 공고히 하는 안보 논리, 그리고 일본의 청구권 자금으로 경제성장의 길을 여는 경제 논리로 과거사 청산이라는 역사 논리를 넘을 수 있었다. 반면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안보적으로 한·미 동맹을 견고히 하고 경제적으론 중국과 협력한다는 전략 속에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해 왔다. 그만큼 일본과 역사갈등을 봉합하고 타협할 유인이 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단순논리로 21세기 동아시아의 격랑을 헤쳐나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래사의 시각에서 볼 때 동아시아 시공간은 과거사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국이 소망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는 기성대국 미국과 신흥대국 중국 간 세력전이가 평화적으로 이뤄져 역내 중견국 · 약소국이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며 공존 공영하는 세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란 슬로건처럼 미국이 중국과 평화적으로 경쟁하고 협조하는 길이 열리지 않으면 주변부는 괴롭다.
일본이 문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는 점차 강대국화하는 중국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과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미 · 일 동맹을 강화하고, 센카쿠 ·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 시 미국의 개입을 확인하는 등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로 미국 조야의 축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베 정부가 원하는 ‘미국 · 일본 대 중국’이란 대결구도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행보다. 역내 국가들이 미 · 일이냐 중국이냐의 두 줄을 서야 하는 동아시아의 분단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 일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 · 일 관계가 양호하면 미 · 일의 중국 견제 수위가 적절히 하향할 수 있고 미 · 중 사이에서 한국의 활동공간도 넓어진다. 그러나 한 · 일 관계 악화로 현실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고 비판하며 미 · 일 동맹의 끈을 조이고 있고, 중국은 이를 틈타 한국을 끌어들이려 하며, 미국은 한국을 서서히 압박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미 · 일 두 고래가 만드는 파고 속에서 표류하는 새우 신세가 되는 것이다.
한 · 일 관계 악화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부정적이다. 단순히 투자와 관광인원 축소 정도가 아니라 지역 질서 차원에서 한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력판도를 보면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 앞서 가고 있고 중국이 RCEP(지역포괄경제협정)와 한 · 중 · 일 FTA 등으로 반격하는 양상이다. 한국은 TPP에 참가하는 동시에 RCEP와 한 · 중 FTA 교섭을 진전시킴으로써 두 네트워크가 향후 통합될 수 있도록 중견국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 · 일 관계 악화는 이런 시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 · 일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할 수 없도록 가로막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과 일본은 나빠질 수 없는 관계다.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다양하고 깊은 이익을 공유하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친숙해 긴밀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봐도 과거사 여러 문제로 때론 얼굴은 붉히지만 복원력 역시 강하다. 현재 최악의 관계를 겪고 있다지만 불과 3년 새 일어난 일이라 앞으로 하기에 따라 급속도로 회복될 수도 있다.
현재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당부하고 싶은 건 목표가 단지 관계 회복과 정상회담 개최 차원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이다. 한 · 일 관계는 이미 과거사를 푸는 정도의 양자관계 외교사안을 훌쩍 넘어 지역질서 변동에 주요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냉철하고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과거사를 풀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단선적 사고를 넘어 미래 속의 과거를 상상하며 공생과 공영의 신(新)동아시아 지역질서를 만들어 간다는 차원에서 대일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 중앙선데이 제427호 |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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