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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중장과 장택상 통역. |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주한미군 철수
1948년부터 3만 주한미군 철수 시작… 그 공백 채울 예비전력 필요해져
중등학교 이상 대상 학도호국단 결성도… 6·25전쟁 유격대 등으로 참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8·15 광복 이후 남한 지역을 통치했던 미 군정(軍政) 시대도 그 끝을 보게 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전 세계에 공포되자 이제까지 남한을 통치했던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2년11개월, 1071일간에 걸친 미 군정의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
대한민국에 통치권 이양
이에 따라 딘(William F. Dean) 육군소장은 군정장관 직에서 물러났고 미 7사단에 복귀해 사단장에 취임했다. 그는 6·25전쟁이 났을 때 제일 먼저 한국 전선으로 달려와 싸우다가 대전전투 이후 실종됐으며 이후 북한군에 붙잡혀 휴전 후 포로교환 때 돌아온 불운의 장군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미 군정청과 신생 대한민국 간에는 정리할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에 통치권을 이양하는 것과 미국 군대를 철수하는 문제였다. 한국 정부에서는 이범석·윤치영·장택상을 인수대표로 선임해 미 군정청으로부터 통치권을 원활히 이양받도록 했고, 미군정 측에서는 헬믹(Charles G. Helmick) 육군소장과 외교관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를 선임해 이 문제를 매듭짓도록 했다. 드럼라이트는 6·25전쟁 때 주한미대사관 참사관으로 활약하면서 대전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국 참전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인물이다.
하지 중장은 통치권 이양이 순조롭게 이뤄지자, 8월 24일 주한미군사령관직 퇴임을 밝히고, 자신의 후임으로 쿨터(John B. Coulter) 육군소장을 임명했다. 쿨터 장군은 6·25전쟁 때 미 9군단장으로 후방 지역 평정 작전과 중공군 개입 이후 청천강전투에 투입돼 싸웠고, 나중에는 미8군 부사령관 직을 맡아 활약했으며, 휴전 후에는 한국의 전후복구를 위해 노력했다.
미군 전력 메울 예비 전력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당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3만 명의 주한미군도 철수하게 됐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미군을 어떻게 해서든 붙들어 두려고 했으나, 워싱턴에서는 세계전략 차원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이미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철군(撤軍) 정책을 그대로 추진했다. 자국의 철군 정책에 따라 주한미군은 정부 수립 1개월 후인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에 들어가 1949년 6월 29일까지 군사고문단 495명만 남기고 모두 떠났다. 이에 따라 군정을 위해 남한에 들어왔던 미24군단도 해체되고, 한국에는 국군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남겨둔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존재하게 됐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1949년 7월 1일부로 발족됐다.
주한미군 철수가 기정사실화되자 정부에서는 이와 관련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비전력 확보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체 예비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대한민국 최초의 예비군인 호국군(護國軍)을 창설하게 됐다. 호국군은 이름 그대로 ‘나라를 수호하는 군대’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인 국방군과 좋은 짝을 이루는 명칭이 아닐 수 없다. 호국군은 국군조직법에 근거를 두고 창설됐다. 당시 국군조직법에 따르면 국군은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편성돼 있었다.
호국군을 창설할 무렵 국방부는 그 규모를 육군호국군 10만 명, 해군호국군 1만 명 수준으로 내다봤다. 호국군을 지휘감독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호국군무실(護國軍務室, 후에 호군국으로 개칭)을, 해군본부에 호군국(護軍局)을 설치했다. 호국군은 주한미군 철수가 완료된 직후인 1949년 7월에 5개 여단, 10개 연대로 확충됐고, 병력은 2만 명에 이르렀다. 호국군 간부 육성을 위해 호국군간부훈련소(후에 호국군사관학교로 개칭)를 서울 용산 이태원에 설치했다. 호국군의 규모가 커지자 육군본부는 1949년 4월 1일에 호군국을 해체하고, 대신 육군총참모장 직속의 호국군사령부(護國軍司令部)를 설치했다.
하지만 호국군사령부는 병역법 개정에 따라 1949년 8월 31일 해체되고, 청년방위대(靑年防衛隊)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정부에서는 당시 긴박한 국내외 정세를 감안해 민병(民兵) 20만 조직을 서두르던 시기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미국의 주방위군(National Guard)과 같은 향토방위대 20만을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청년방위대·학도호국단 결성
국방부는 청년방위대를 지휘감독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청년방위국을 만들었고, 청년방위대원 및 간부 양성을 위해 청년방위훈련학교와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를 설치했다. 청년방위대는 각 시와 도에는 사단급에 해당하는 방위단을, 군에는 연대급에 해당하는 방위지대를, 면에는 대대급에 해당하는 방위편대를, 이(里)에는 중·소대급에 해당하는 구대와 소대를 설치했다. 그 결과 1950년 5월에는 20개 청년방위단을 창설하고, 20만 대원을 확보하게 됐다.
이와 병행해 정부에서는 전국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호국단을 결성했다. 학도호국단을 총괄하기 위해 중앙에 중앙학도호국단을 설치하고, 총재는 대통령이, 단장과 부단장은 문교부 장관과 차관이, 서울시와 각 도 단장은 도지사 또는 교육감이, 각 학교 단장은 대학총장·학장·학교장이 맡았다. 그 결과 1949년 말까지 전국 중학교 이상 학도호국단은 947개에 달했고, 그 수도 45만에 이르렀다.
이들은 6·25전쟁 초기 대한민국이 낙동강까지 밀리는 위급한 상황을 맞아 국군에 편입되거나 유격대 또는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조국을 수호하는 역군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것은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한 정부와 국방부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