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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육체파’ 배우라는 말이 있었다. ‘글래머’보다 왠지 더 즉물적인 이 단어의 에너지로만 설명되는 배우가 ‘에바 가드너’ 아닐까. 금발이 넘쳐나는 스튜디오 시대의 할리우드 여배우들 사이에서, 그녀의 건강한 흑발과 신비로운 초록 눈은 다른 여배우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이국적이고 동물적인 매력을 내뿜곤 했다. 타고난 몸매를 감추지 않았던 그녀는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1922년 노스캘로라니아주에 태어났다. 아일랜드와 인디언의 혈통이 복잡하게 얽힌 탓에 또래의 친구들과 확연히 다른 외모였다. 가난한 유년을 보내고 18세가 되던 해, 뉴욕에 살고 있던 언니를 보러 갔다가 인생이 바뀐다. 사진관을 하던 형부가 그녀의 사진을 찍어 걸어놓았는데, 마침 MGM사 직원의 눈에 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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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부터 [Fancy Answers], [Shadow of the Thin Man] 등에서 조역, 단역을 오가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진 못했다. 그러다 [Whistle Stop](1946)에서 첫 주연을 맡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를 둘러싸고 두 남자의 배신과 음모가 오간다는 내용이다. 시종 담배를 피워대는 에바 가드너의 모습에서 위대한 팜므파탈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에바 가드너를 많은 사람이 알게 된 작품은 [살인자들](1946)이다. 전직 복서의 죽음을 보험 조사원 리어든(에드먼드 오브라이언)이 파헤치는 과정에서, 미스테리한 매력의 여인 키티(에바 가드너)가 사건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된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치명적인 미소를 짓는 그녀의 마력 앞에 전 세계 남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연이어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클라크 게이블과 열연한 [The Hucksters](1947)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에바 가드너는 할리우드에 안정적인 기반을 만든다.
판타지 코미디 [원 터치 오브 비너스](1948)에서 비너스 역을 맡는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모습은 여신 자체였다. [판도라](1951)에서도 그녀는 남자들의 인생을 쥐락펴락하는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당시 할리우드의 모든 연출력과 기술력이 총출동한 대형 뮤지컬 영화 [쇼보트](1951)에서도 에바 가드너의 화려한 외모는 가장 큰 볼거리였다.
그녀의 이국적이고 에너제틱한 이미지는 곧잘 모험 영화에서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모험영화로는 헤밍웨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그레고리 펙과 열연한 [킬리만자로의 눈](1952)이 있다. 다시 한 번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한 [모감보](1953)는 존 포드가 연출하고 그레이스 켈리까지 가세한 블록버스터였다. 아프리카를 탐험하는 사냥꾼 빅 마스웰(클라크 게이블)을 사이에 둔 켈리(에바 가드너 분)와 린다(그레이스 켈리 분)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다. (두 미녀의 영화 속 사랑싸움은 결국 에바 가드너의 승리!!) 당시 유행하던 중세 대작 중의 하나인 [원탁의 기사](1953)에서는 세기의 미남 로버트 테일러와 호흡을 맞췄다.
유독 스페인을 사랑한 그녀의 매력이 폭발한 작품은 [맨발의 백작부인](1954)이다. 스페인의 작은 술집에서 맨발로 춤추다 일약 세기의 무비스타가 되는 여인 마리아는 다름 아닌 에바 가드너 자신이었다.
이후 핵전쟁 이후 잠수함에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세기말적인 강박증을 이야기한 [그날이 오면](1959)에 출연했으며,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북경의 55일](1963)에서 중국 장교를 죽음으로 내모는 농익은 팜므파탈 연기를 선보였다. 말년에는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 [대지진](1974)과 인류의 존망이 걸린 병균과의 사투를 그린 [카산드라 크로싱](1976)에 출연한다.
에바 가드너가 연기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하는 영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57)는 다시 한 번 헤밍웨이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다. 여기에서 에바 가드너는 현실에서의 자신처럼 여러 남자를 강박적으로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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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데뷔 때부터 시작된 그녀의 남성 편력은 당시 최고의 코미디 배우였던 미키 루니와의 철부지 같은 결혼부터 시작됐다. (당시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재즈 뮤지션 아트쇼와의 두 번째 결혼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끈질긴 구애를 받았고, 헤밍웨이 혹은 헤밍웨이 주변의 복서, 투우사 등과 끝없이 정열적인 염문을 뿌렸다. 아카데미 수상을 거부한 적이 있는 지조 있는 남자, 조지 C 스콧도 그녀의 유혹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역시 에바 가드너가 가장 깊게 사랑했던 남자는 프랭크 시나트라였다. 프랭크 시나트라도 조강지처를 버리고 에바 가드너와 결혼하기 위해 도덕적인 지탄을 감수했다. 두 바람둥이의 결혼 생활은 외도, 다툼, 용서를 오가다 예정된 것처럼 이혼으로 끝난다. 그러나 가난 속에서 병마와 싸우던 말년의 그녀를 도왔던 남자는 프랭크 시나트라뿐이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에바 가드너는 1990년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내고자 했다. 그러나 작가 피터 에반스에 의해 녹음된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야 지난 후에야 [Ava Gardner : The Secret Conversation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불꽃처럼 살다간 한 여배우의 회한이 그녀와 잠자리를 나눈 남자들에 대한 자극적인 표현들에 가려 있었다. 세기의 섹시 스타는 죽어서도 소비되고 있다.
안성민
<FILM 2.0>, <DVD 2.0> 등의 칼럼니스트였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모더레이터로 활동했다. 돈 되고 재미없는 일과 돈 안 되고 재미있는 일 사이를 오가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진, 많은 영화, 많은 남성……. 그런데 노후에 병에 걸리자 치료비가 없어 쩔쩔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전남편 프랭크 시나트라가 돈을 대줬다니……. 미인 박명이 아니라 미인 가난인가. 화무십일홍이고, 인생무상이라. 미인의 아름다움도 세월 앞에서는 참 덧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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