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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을 강
정유제
길을 잃게 됐다. 멀쩡하게 흐르던 강이 머잖아 물길을 잃게 된다. 얕고 좁은 강폭은 문지방이 없는 이웃처럼 가까워서 좋았고, 굽이굽이 돌아가던 정겨운 모롱이는 여유가 있어 좋았던 그 물길이 물 감옥에 매장될 것이다.
강이 옛 길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은 강 탓이 아니다. 자연의 탓도 아니다. 순전히 사람 탓이다. 자연의 순리쯤이야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다.
박 노인은 툇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먼 산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초겨울 햇살이 산등성마루에 걸려 있다. 근심 가득한 박 노인의 눈에 들어온 햇살에도 주름이 잔뜩 잡혀 있다. 박 노인은 툇마루를 내려서서 뒷간으로 갔다. 맥없이 떨어지는 오줌발을 거두고 다시 툇마루로 향했다. 주름진 햇살은 세월을 더께 껴안은 박 노인의 외딴집 문설주에도 기대어 서고, 문지방에도 걸터앉았다. 순간 박 노인은 허기를 느껴 부엌으로 가려다 말고 문지방 앞에 놓여 있던 먹다 남은 소주병을 거머쥐었다. 소주병이 흔들거렸다. 허투루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떨리는 팔을 조심조심 들어올렸다. 고개를 살짝 떨구며 얼굴을 옆으로 기울여서는 힘들게 들어 올린 소주병을 입 가까이로 가져갔다. 콸콸콸. 마른 목구멍을 통해 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독주가 노쇠하고 구불구불한 창자를 훑어 내렸다. 순간 정신을 놓을 정도로 싸한 통증이 일었다. 아뜩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는 일은 찰나다. 순간 눈앞에는 검은 만장 수십 개가 환영처럼 스쳤다.
박 노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절골로 올라가려던 참이다. 오늘따라 늑장을 부리다가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집을 나선 박 노인은 허청거리며 오솔길을 내려와 신작로를 건너 강가로 향했다. 방금 마신 소주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절골로 올라가기 전 늘 그렇게 했다. 정해진 길인 셈이다. 강바람을 쏘이며 덜 깬 잠을 깨우고, 강물에 얼굴이라도 씻어 눈곱이라도 뗀 뒤에야 절 마당으로 들어서던 평소의 신념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낮술 탓만은 아니련만 걸음걸이가 영 시원찮다. 나이 탓은 더더욱 아니다. 이즈음에 와서 도드라지게 느끼는 감이다.
25년을 걸었던 길이다. 수몰지구가 된 고향산천을 떠나서 절골로 들어와 집과 강과 절을 오가며 살아온 세월이 금세 그렇게 됐다. 철과 때를 가리지 않고, 춥거나 말거나 한결같이 오가던 길이었던지라 눈을 감고도 왕래가 가능한 곳이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는 도무지 걸음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도 전 같지 않게, 집을 나선 지 예전의 서너 배에 달하는 시간이 더 걸려서야 절 마당으로 겨우 들어서곤 했다. 나무며 숲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버리는 불도저의 괴력과 강을 파 헤집는 포크레인이며 중장비들의 굉음을 둔치에 서서 들으면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전과 다르게 길어졌기는 했다. 강이 파헤쳐지는 것을 막지 못해서 무거운 마음에 발걸음이 느려진 탓도 있다.
간신히 둔치에 올라서자마자 박 노인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불도저와 모래를 퍼 올리는 포크레인 소리며, 퍼 올린 모래를 운반해 나르는 덤프트럭의 긴 행렬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가시에 찔린 것처럼 눈도 아렸다. 예전 같지 않게 강으로 내려설 수도 없다. 공사를 방해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아예 철조망을 쳐 놓은 탓이다. 새로운 보를 만들기 위해 강바닥과 둑이 처참하게 파헤쳐지고 있다. 박 노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팔뚝에 핏줄이 돋았다. 강줄기도 몸을 뒤채는 듯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사시사철 푸른 물이 흐르고 각종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이 몸을 의탁해서 목숨을 지탱하며 종의 보존을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생존의 터전인 강이지 않던가? 그 강이 이 지경에 처한 것이 못내 서러운 것이다. 서식하는 희귀종의 동식물만 해도 적지 않다는 조사보고서를 어느 한 환경단체에서 내놨다. 3개월 동안 6차례에 걸쳐 9일간 약식으로 조사한 바로도 11종이나 확인됐다고 했으니, 정밀조사를 한다면 그 종류는 손발을 다 동원해도 꼽을 수 없을 만큼은 될 것이 분명하다. 천연기념물 제330호이자 멸종위기종 1급인 수달과 역시 천연기념물 제324호인 멸종위기종 2급 수리부엉이,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멸종위기종 2급 참매는 물론 멸종위기종 2급인 큰기러기, 가창오리, 표범장지뱀, 돌상어……. 다 열거하기도 벅차다. 또 있다. 얼룩새코미꾸리, 흰수마자, 흰목물떼새, 재두루미, 묵납자루, 미호종개, 꾸구리, 귀이빨대칭, 남생이, 단양쑥부쟁이……. 박 노인은 숨차 오르는 가슴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날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래도 뒤틀린 속은 개운치 않았다.
이 동식물과 어류들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 집단으로 떠나긴 했다. 공사를 감행하는 측에서 대체서식지를 조성하거나 물색해 이송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새 보금자리가 아무리 좋은들 정들었던 초가삼간만 하랴. 그동안 살아왔던 꿈의 보금자리는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송두리째 잃고 말 것이다. 저들의 처지가 박 노인과 매 한가지인지라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수몰지구를 떠난 실향민, 박 노인은 이미 한 차례 설움을 겪었다. 또 한숨이 나왔다. 한곳에 터를 잡고 한평생을 나지 못하는, 유랑팔자를 탓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무리 다급한 기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제. 여럿이 있을 때 험한 꼴을 당할라 치더라도 기중 한 사람만 훌륭하모 다른 사람까정 다 살릴 수 있능기라. 근데 말이다 기중 한 사람이 몹쓸 짓을 더 많이 저질러서 고게 훌륭한 사람 꺼보다 더 크마 모도 다 죽능기라. 세상 이치가 그렁기라. 그라이 좋은 친구를 옆에 많이 둬야 하능기라. 알겠제."
박 노인이 어릴 때 어머니가 자주 했던 말이다. 죽고 사는 문제나 고향을 잃고 말고 하는 이치도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박 노인은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옹송그렸다. 더 이상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면서 박 노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연은 정말 어쩔 수 없는가 봐. 내가 사붓골로 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저 강은 가만있었을 낀데. 그랬다면 이 동네도 멀쩡했을 낀데……."
"영감님, 이제 강가로 가지 마이소 마. 하지말란다고 안 하겠습니꺼? 영감님이나, 나나, 아무리 떠들어 봤자 괜한 헛수고지……. 그러이 이제는 마음을 접으시소."
박 노인을 빼고 사붓골을 마지막으로 떠나던 중식이가 달래듯, 때로는 어르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 노인에게 딸린 가족들이 있었더라면 그들도 응당 그랬을 말이다. 박 노인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둔치에 멀찌감치 앉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훔쳤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서 말상대가 없어 말을 잃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30여 가구나 됐던 마을은 시나브로 폐허가 됐다. 강을 개발한다는 말이 돌면서 근동이 관광단지 조성지역으로 지목된다고 했다. 사업자라는 사람이 여러 사람을 대동하고, 좋은 차를 타고 마을에 찾아와 몇 푼 쥐어주는 보상금을 받은 이들은 서둘러 마을을 떠났다.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던 사람들이다. 때를 만난 것이다. 먹고살기가 막막했던 탓이다. 강을 파 헤집는 공사가 금세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윗동네에서부터 물을 막고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바람에 흐르는 물이 그 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물고기는 죽어서 없어지고, 둔치 너머 있는 논은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려둔 논에서는 흙먼지만 펄펄 날렸다. 그 먼지가 옆의 논을 덮쳤다. 온통 사막이 되어갔다. 사람들이 새로운 물을 찾아 떠나면서 한 마을의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중식이가 고향을 버릴 수 없다며 마지막까지 버텼을 뿐이다. 그렇게 버티던 중식이도 결국은 마을을 떴다. 박 노인은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굳이 떠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집이 절골 밑 외딴곳이라 관광단지 조성지역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 노인에게는 그게 잘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굳이 떠나라고 했다면 집을 버리고 절골로 올라갈 참이었다.
박 노인은 맥을 놓은 채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흐느적거리며 옮겨 놓았다. 몸을 뒤틀며 모래바람을 일으켜 저항하는 강을 외면하고 돌아서기가 마뜩찮아 발을 질질 끌기까지 했다. 절골로 가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 집 언저리까지 갔다가 꺾여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외딴 절은 언제나 그렇듯 전각 한 채와 3층 석탑 1기만 동그마니 서 있다. 전각에는 편액도, 주렴도 없다. 단청도 하기는 했었는가 싶을 정도로 색이 바랠대로 바랬다. 전각 한 채와 석탑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의외일 정도이니 울과 담도, 일주문 또한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전각 내부에 수미단이 갖추어져 있긴 하나 불상 역시 없다. 불상을 봉안하기에는 수미단이 터무니없이 좁아 보였다. 그 대신 특이하게도 후불탱화가 붙을 자리가 조금 패여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굳이 불상이 있었다면 부착형이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닫집을 비롯한 내부의 단청은 비교적 색이 덜 바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장 군데군데에는 사람의 태를 형상화한 그림도 보였다. 법당을 어머니의 뱃속 태반처럼 꾸미기 위한 염원이 배어 있는 듯 했다. 그러고 보면 천장도 동그스름하게 만들었다. 동그스름한 천장은 마룻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목탁소리의 공명도 동그스름하게 만들어 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인위적인 그 어떤 소리마저 사라진 법당, 지금은 모든 것이 멈추어 선 듯하다.
박 노인은 매일 절골을 찾아 전각과 석탑 주변을 청소했다. 그리고는 법당에 앉아 몇 시간이고 뭉그적거리며 일어날 줄을 모른 채 앉아 있는 것이다. 멀찌감치 문 밖에 서서 박 노인을 바라보면 영락없는 절 주인이요, 수행자의 모습이다. 앉은 채 조는 듯 미동도 않는 박 노인의 품새는 절의 분위기와도 많이 닮아 있다. 전혀 낯설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은 편안함이 엿보였다. 전각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처럼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붙박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빗자루를 들고 전각이며, 석탑 주변 청소부터 했을 박 노인은 강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배기로 다가가 우두커니 섰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대고 강을 내려다봤다. 강바닥을 파 헤집는 포크레인의 움직임은 감지할 수 없었으나 모래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의 이동은 꼬리에 꼬리를 문 개미행렬처럼 꼬물꼬물 계속되고 있었다.
'퉤' 침을 뱉고 돌아서서 법당에 앉아 있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그냥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는 금세 법당 문 밖까지 다다라 있었다.
"안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래요?"
"보십시오. 여기 신발도 있는데……."
법당 문을 열어보지도 않은 그들은 박 노인이 벗어 놓은 잿빛 고무신을 보고 사람이 있다고 짐작한 것이다. 하얀 고무신이 세월을 뒤집어쓰고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이내 법당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멈칫했다. 박 노인이 앉아 있는 맞은편 수미단 위에 부처님이 없어, 어디를 향해 절을 해야 할 줄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있는 것은 이미 확인했으니 대수롭잖게 여긴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
"주지 스님은 없습니까?"
"……."
박 노인은 오른 손을 가슴에 얹고 토닥토닥 했다. 그들은 박 노인이 하는 손짓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법당에서 물러났다.
"묵언수행이라도 하는가 봅니다. 여기서 기다려보지요."
그들이 밖에서 하는 이야기가 박 노인에게도 고스란히 들렸다.
"그, 참, 첩첩산중의 절경이구만."
"이런 곳을 개발한다고 난리를 치니, 나, 원, 참."
그들이 하는 말로 보아서 개발업자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박 노인은 혹시 또 다른 무슨 말이라도 들릴까봐 귀를 쫑긋 세우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박 노인이 문을 열고 법당 밖으로 나서자 그들이 예의를 갖추며 물었다.
"……."
박 노인은 왼쪽 손바닥을 펴서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씩 글을 써나갔다.
"아! 네, 여기를 지키시는 분이군요."
박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강을 가리키며 양손 집게손가락을 겹쳐 엑스 자를 만들어 보였다.
"예에, 강을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까?"
박 노인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 허락을 받을 일이 있습니다. 우리도 강을 개발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며칠 뒤에 있을 모임을 갖기 위해 우선 이곳을 찾았고, 여기서 준비 작업을 좀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허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박 노인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고개를 더 크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절골 밑 집이 있는 쪽을 가리킨 뒤 왼쪽 손바닥을 펴서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우-리-집'이라고 썼다. 글을 다 쓴 박 노인은 두 손을 포개 오른쪽 귀 옆에 갖다 대고 고개를 조금 돌려서 잠자고, 밥 먹는 시늉을 했다.
"저기에 선생님 집이 있다고 하신 말씀입니까? 선생님 집에서 잠자고 밥 먹을 수 있다고 하신 거예요?"
박 노인은 이번에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박 노인은 일행 다섯 사람을 강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배기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강을 가리켰다.
"완전 황무지로 변했구먼.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어."
"저, 저, 불도저가 있는 저쪽은 숲으로 덮여 있었는데……. 아름드리나무도 다 베어 냈고. 나 참 할 말이 없네."
"서두릅시다. 준비할 게 많은데……."
일행들은 강이 파헤쳐진 것을 보고 한마디씩을 했다. 그리고는 차에 실려 있는 물건들을 가져오기 위해 절골을 내려갔다. 일행들이 타고 온 차는 박 노인의 집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일행들이 차에서 내려 절 마당으로 가져온 것은 천막과 만장을 만들 각종 막대기며 글씨를 쓸 수 있는 알록달록한 무지 천, 페인트 같은 것이었다. 일행들은 천막부터 설치했다. 손놀림이 빨라 금세 그럴듯한 천막이 완성됐다. 일행 중 한 명이 나무판 위에 붓으로 '생명의 강을 살리는 여여선원'이라고 큼지막하게 써서 천막 앞쪽 위에 붙였다. 천막 안에는 선반을 만들어 흰 천으로 덮고 부처님 한 분도 모셨다. 곧 그럴듯한 법당이 꾸며졌다. 천막 밖에는 스피커도 설치됐다. 천막법당에서는 독경소리가 울렸다. 박 노인은 바깥풍경을 구경하다가 천막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목탁소리에 맞춰 일어섰다가 엎드렸다 하기를 반복하며 연신 절을 했다. 박 노인도 그 뒤에 서서 절을 했다. 108배는 금방 끝났다. 박 노인의 앞에서 목탁을 치며 절하기에 몰입한 사람은 그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밤이라도 새울 듯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박 노인이 108배를 마치고 천막법당을 나왔을 때 절 마당에는 수십 장은 족히 될법한 만장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눈이 휘둥그렇게 됐다.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치장을 마친 만장은 막대기에 매달려 하늘을 훨훨 나는 듯 나부꼈다. 박 노인의 얼굴에도 환하게 미소가 돋았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내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손님인기라. 내가 불렀건, 부르지 않았건, 어쨌거나 찾아온 사람은 손님으로 맞이해야 하능기라."
하루해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박 노인은 찾아온 손님을 물리치지 않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딱히 대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쌀도 간당간당 했다. 반찬거리는 더더욱 변변찮았다. 혼자 끓여 먹을 때야 산나물 한 가지만 있으면 됐다. 그도 저도 아닐 때는 간장이나 된장 한 가지만 있어도 상관없었다. 난감했다. 물론 일행들이 호사를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형편이 딱할 뿐이다. 박 노인은 하는 수 없어 마당 한쪽에 걸어 놓은 솥에 물만 가득 붓고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말라비틀어진 걸레를 물에 짓이겨 빨아서는 방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안방을 일행들에게 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늘 자고 일어나는 방이지만 먼지가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천장의 거미줄을 털어 내고 각진 모서리도 정성껏 닦았다. 수십 번도 더 걸레를 빨아대며 방을 청소하고 난 박 노인은 창고로 쓰던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잡동사니 물건들을 한쪽으로 치우면 한 사람은 간신히 잘 수 있을 방이다.
"선생님, 어디 계세요?"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박 노인을 찾고 있었다. 박 노인이 창고 방을 나서자 저녁을 먹으러 가자며 박 노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박 노인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선생님, 저들 때문에 신경이 쓰시는가 봅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저들은 먹을 것도 갖고 왔고, 잠도 천막에서 잡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마시고, 걱정도 하지마세요."
박 노인은 말없이 손사래만 쳤다.
늙은 사내 혼자 사는 형편은 늘 그렇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을 때도 많았다. 시절이 좋을 때야 텃밭을 가꾸고 벼농사도 조금 하면서 물고기 반찬으로 호사를 했다. 그러나 마을이 텅 비면서 그 시절도 벌써 옛날이 됐다. 논농사와 고기잡이가 여의치 않자 기댈 것은 밭농사와 산이며, 들에서 자라나는 나물뿐이었다. 그래도 가장 풍성한 때는 봄이다. 꿀풀, 고사리, 냉이, 둥굴레, 두릅, 달래, 다래나무 새순, 들국화, 도라지, 돗나물, 민들레, 미나리, 미역취나물, 머위, 봄동, 뽕나무 새순이나 잎, 쑥, 삿갓나물, 산갈퀴, 싸리나무 어린 잎, 씀바귀, 엉겅퀴, 질경이, 잔대, 취나물, 참나물, 활나물, 패랭이꽃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반면 여름과 가을에는 먹을 만한 것이 적다. 가지, 개망초 어린 잎, 구절초, 개미취, 도라지, 더덕, 무릇, 쑥부쟁이 어린 순, 오이, 콩잎, 털머위 어린 잎자루, 칡, 팥잎, 호박잎 정도다. 그렇지만 아무리 먹을거리가 지천에 널려 있다 하더라도 박 노인은 꼭 먹을 만큼만 취한다. 자연에 대한 배려를 생각해서다.
문제는 물이다. 강을 파 헤집는 공사가 진행되면서부터 우물물이 점점 줄어든 듯 했다.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시원하게 나오질 않았다. 근간에는 아예 박 노인의 오줌줄기 만큼이나 약해졌다. 한 주전자의 물을 받으려면 수백 번은 더 펌프질을 해야 했다. 힘도 부쳤다. 이러다가 물이 영영 말라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물이 없으면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 한다. 아무리 버티면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눈앞에 나타난 만장 수십 개가 팔랑팔랑 나부꼈다. 색색이 모습을 드러낸 만장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4계절을 노래하는 듯 했다. 푸른색은 봄의 전령이 돼 기운을 북돋우고, 붉은색은 여름의 대지가 되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노란색은 가을 산의 단풍에 다름 아니었고 흰색은 겨울의 고즈넉한 정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아~!"
박 노인은 짧은 신음소리 같은 탄성을 질렀다. 죽어 있던 소리가 폐부를 박차고 울대를 넘어와 입 밖으로 터진 것이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박 노인은 습관적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괜찮다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박 노인은 그 때까지 자신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선생님 말씀을 하시네요."
"……."
"선생님 방금 말씀을 하셨어요. 괜찮습니다, 하고요."
박 노인은 그제야 말이 자신의 입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죽은 줄 알았던 말이 살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글케요. 내가 말을 다 하네."
"선생님, 말씀을……."
"본래 말을 못 했던 건 아니고……. 말 대꾸해줄 상대가 없다 보니 말을 잃어버린 게지. 난 또 아예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박 노인은 팔을 들어 올려 소매 깃으로 눈물을 닦고는 거친 손으로는 연신 입을 만지작거렸다.
천막법당 안에서는 여전히 목탁소리가 새어나왔다. 박 노인은 목탁소리가 들리는 천막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염불을 하고 있었다. 박 노인은 그의 뒤쪽에 멀찌감치 앉아 눈을 감았다. 생소한 느낌이 아니었다. 꼭 언젠가, 늘 그렇게 해왔던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였다. 박 노인은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수보리……어의운하……세존……."
독경소리가 앞서 나갔다. 독경소리 가운데 박 노인의 귀에 또렷하게 들리는 것은 수보리, 어의운하, 세존 등이었지만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박 노인의 입에서도 똑같이 소리가 만들어졌다. 비록 단음절이었지만, 박 노인은 너무나 또렷하고 선명한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스스로에게 놀라 몸을 움칫했다. 독경을 따라 한다는 것 자체도 신기할 따름이지만, 한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입으로 말을 만들어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가슴속에 큰 불길이 솟구치듯 몸이 불끈 달아오르더니 이내 화산 하나가 들어앉았다. '하, 학.' 가래침을 뱉을 때 같은 외마디 소리가 터졌다. 그때부터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검붉은 용암이 되어 거침없이 세상으로 흘러들었다. 사자후가 이런 것일까? 큰스님들이 주장자를 내리치며 괜히 아, 악하고 큰소리를 내 지르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암덩어리를 쏟아낸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속이 빈 듯해도 배고픔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십 년은 묵은 굴뚝을 말끔하게 청소해낸 듯 속까지 후련했다.
일행들이 천막법당으로 들어섰다. 저녁예불이 시작됐다. 독경을 하던 그 사람이 앉은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박 노인도 앉아만 있을 수가 없어 엉거주춤 일어서서 자리를 잡았다. 예불은 이내 시작됐다. 엎드렸다, 섰다를 계속하는 동안 어느 순간 절하기를 하는 중에 예불은 그런 대로 빨리 끝났다. 예불을 마친 일행들이 천막법당을 빠져나가자 박 노인도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밤의 밑자리가 절골 마당으로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끼리 먼저 식사를 하고 남은 일을 서두릅시다. 한 법사는 기도를 좀 더 하고 난 뒤에 하겠다고 하십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밥상을 차리면서 한 말이었다. 일행들과 섞여 앉은 박 노인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밥과 김치, 배추와 쌈장 정도가 전부인 저녁상은 조촐했다. 반찬이 적으면 때로 입담도 반찬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박 노인은 물론 어느 누구도 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앉은자리에서 밥을 한 술씩 떠서는 입속에 밀어 넣고 쌈장에 찍은 배춧잎을 우물우물 씹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 노인은 남모를 회한에 휩싸였다. 늘 혼자이기 마련인 밥상머리에 여럿이 둘러앉은 것이 영 낯설었기 때문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 했다. 박 노인은 밥을 먹는 시간보다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휘둘러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들 모두가 가족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주제넘게 해보았다. 꼴깍, 침을 삼켰다.
박 노인에게 가족이라는 말은 사치를 넘어 박제된 전설과도 같은 것이다. 열두 살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형편없이 어려운 살림살이에 장가를 들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실새삼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꾸역꾸역 엮어 가는 지난한 생활 중에서도 눈먼 처자를 하나 만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처자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야반도주를 해버리고 말았다. 작정을 하고 집을 나가버린 처자를 찾지도 않았다. 찾는다고 해서 돌아올 처자가 아니라는 것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은 잠시 뿐이었다. 살갑게 거두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스님 한 분이 소신공양을 했답니다."
한 법사라는 사람이 법당을 나와 밥상이 차려진 천막 안으로 들어서면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식탁에 둘러앉았던 일행들은 모두 상기된 얼굴이 됐다.
"어느 스님이랍니까?"
"지금 경찰들이 현장에 들어가서 조사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낙동강변 칠곡에 있는 성심사 삼막 스님일 것 같다고 합니다."
"설마……."
"정확한 것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박 노인으로서는 이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신공양은 뭐고, 일단은 그런 것 같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박 노인은 눈만 휘둥그렇게 치뜨고 끔벅끔벅 할 뿐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이 멀리서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달려가 불을 끄고, 타다만 사체는 일단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유서 같은 것은 없었는가요?"
"글쎄요,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쳐 놓아서 어느 누구도 접근조차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좀 더 기다려보면 뭔가 발표를 하겠지요."
"법사님 일단 저녁부터 드시지요."
"아닙니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때까지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들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수저를 밥상 위에 살포시 얹어 놓았다. 박 노인도 그들을 따라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밥상에서 한 뼘쯤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때 다시 한 법사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한영균입니다."
"네, 네, 말씀하세요."
"아~ 네~. 계속 수고들 좀 해주세요. 이쪽 일은 상황을 봐가면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휴대폰 폴더를 힘없이 닫은 한 법사가 더 이상 서 있지를 못하고 쓰러지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일행들은 엉거주춤 일어서는 듯하며 모두 한 법사 쪽으로 팔을 뻗었다.
"아, 나는 괜찮습니다. 역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연을 죽음으로 내모는 공사를 제발 멈춰달라는 내용의 짧은 글이 적혀 있는 유서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스님이 소신공양한 곳에서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풀 섶에서 발견됐다고 하네요.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스님께서 미리 넣어둔 것 같다고요. 조금이라도 불길을 늦게 잡아 옆으로 번졌으면 이마저도 불타버릴 뻔했을 거라고. 유서에는 공사 중단을 촉구하는 내용 말고도 부정부패 척결,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고 위정자들에게 호소하는 내용도 짧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정말 사람까지 죽이는구나……."
일행 중의 한 명이 주먹으로 밥상을 내리찍으며 거칠게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겝니다."
"맞습니다. 저들이 지금까지 해온 작태로 봐서는 아무래도 그럴 것입니다."
일행들은 모두 한마디씩을 보탰다. 박 노인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조금은 알 듯했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박 노인은 천막법당으로 찾아 들어갔다. 소신공양을 한 스님의 명복이라도 빌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향을 피우고 합장을 했다. 합장한 두 손이 떨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늙은 노구에도 눈물샘이 마르지 않고 남아 있었나 보았다.
몇 걸음을 물러서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식탁이 차려진 천막에 있었던 일행들이 한꺼번에 천막법당으로 들어와 줄지어 섰다. 한 법사라는 사람이 한자로 된 글을 적어서 붙인 나무판을 부처님 전에 놓고 향에 불을 붙여 꽂았다. 위패인 셈이었다. 그리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자 목탁이 울렸다. 소신공양한 스님의 명복을 비는 조촐한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박 노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의 뒤에 서서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의식에 참여했다. 부모를 떠나보냈을 때와 아내로 맞아들였던 처자가 떠나갔을 때 흘려본 뒤로는 더 이상 없었던 눈물이 쉴 새 없이 솟아났다. 서러움에 북받쳐 가슴으로 우는 피눈물인양 두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늘에는 별 하나 떠 있지 않았다. 칠흑의 바다같이 어두웠다. 온 세상을 송두리째 검은 비닐로 덮어버린 듯이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천막법당 안에서 새어나온 염불소리만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박 노인은 조금 전까지 말을 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염불소리를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입에서는 더 이상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천막법당에서 나는 염불소리 뿐이었다. 박 노인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법당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모르지만 몸에 기름을 끼얹으며 불타는 온몸으로 세상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을 토해내고 떠나간 그 스님은 과연 어떤 스님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까지 했다. 사람은 사람끼리 부대끼며 살아야 살맛이 나고, 자연은 자연끼리 자연스럽게 자라야 잘 자라며, 물은 물끼리 물고 물리며 흘러 물길을 내야 하는데……. 박 노인은 한숨을 토했다.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사람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삶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일행들이 주고받은 말을 떠올려보면 삼막 스님은 사회 참여보다는 수행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는 듯 했다. 수행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생 손가락을 연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늘 하는 것이지만 수행이라는 것도 거창하게 성불을 하겠다느니, 무엇을 깨닫고야 말겠다는 등의 것이 아니라 살맛나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도였다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소신공양을 할 만한 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은 단순한 물길만이 아니다. 생명을 낳고 키운 대지의 어머니였지 않은가? 그러한 강의 어머니도 처음에는 높은 산의 도랑물에 지나지 않았다. 법당에 앉아 있던 박 노인은 그때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 보였다. 안방 벽에 붙어 있던 사진 속의 처녀 적 모습 그대로였다. 주름살도 하나 없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섰던 어머니는 어서 오라고 부르듯이 손짓을 했다. 박 노인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박 노인은 결심을 굳혔다. 이런 사단이 난 것 자체가 모두 자기 탓인 듯해 몸서리가 쳐졌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법당에서 나와 천막에 비스듬히 기울여 세워둔 만장 같은 깃발을 들쳐보던 박 노인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집도 잃었고, 가족도 잃었고, 말도 잃었다. 하나 남은 것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작달막한 몸뚱어리뿐이지 않은가. 박 노인은 고개를 떨구고 산길을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내려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는 못 볼 줄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절골의 풍경이 대낮처럼 환하게 가슴으로 파고 들어와서 박혔다. 가슴을 파고든 절골 옆으로는 강물이 넘실넘실 흐르고 있었다. 굽은 곳에서는 굽은 대로, 얕은 곳에서는 얕은 대로 자연스럽게 물줄기를 이루며 흘렀다. 새로운 서식지로 떠났다던 동식물과 어류들도 옛 보금자리를 찾아 강을 다시 찾아들었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씩 사붓골로 돌아왔다. 중식이도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것이 보였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 듯 했다. 절골에서의 마지막 밤, 박 노인은 불현듯이 눈마저 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시에티카』 2011년 상반기 제4호
정유제
경북 성주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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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활발한 소설 작업, 보기 좋습니다.
선생님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