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에는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며 온갖 기술과 학문 등을 배우고 익히는 형태로서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행동거지가 그대로 교육이 되는 거지요. 스승이 들어오면 일어서고 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자잘한 심부름을 하되 어기지 않고 가르침을 소중히 받아서 익히는 것이 제자 된 의무입니다.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미학은 그의 인문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바르셀로나 시에서 장인(匠人)으로 인정받은 호세 폰트세레스의 밑에서 학업을 마칠 때까지 도제 교육을 받았습니다. 스승과 함께 1873년 사우다델라 공원 급수조, 폭포, 정문, 그리고 공원 전체를 둘러싸는 1킬로미터가 넘는 철책을 포함한 도면을 제작할 수 있었지요.
그뿐 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 최초로 철골구조를 적용한 보른 시장 설계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건축가이며 교수인 프란시스코 데파울라 델 빌랴르 이 로사노 밑에서 제도공으로 일했고, 19세기 절충양식의 대표주자인 에밀리오 사라 코르테스 밑에서도 수학했으며, 주철, 목공, 유리공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가였던 에우달도 푼티 밑에서도 수학했다. 그리고 조각가이며 장식가인 로렌스 마타마라 피뇨르의 작업장에서도 수학하며 건축에 필요한 예술적 요소들을 총 망라해 배우고 익혀 나갔습니다.
이와 같은 고진감래 끝에 젊은 가우디에게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제품전시를 위한 진열대 설계가 주어진 것이지요. 그는 여태까지 체득한 모든 예술적 요소를 유감없이 반영한 즉 목공과 유리, 금속공예, 조각 등의 장식이 잘 조화를 이룬 대담하고도 독창적이며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평생 친구이자 열렬한 후원자인 구엘을 만나는 행운을 거머쥐었습니다. 가우디보다 6살 위인 구엘은 벽돌제조업자로 큰돈을 벌어 남작 작위까지 받은 아주 명성이 대단한 사업가였습니다. 위대한 천재 예술가와 당대 사교계의 진보적인 재력가의 만남이었던 것이지요. 이 무렵 그는 돌로 된 기단, 주철과 청동으로 만든 가로등을 바르셀로나 시 레알 광장과 시장공관 앞의 파라시오 광장에 설치했습니다.
한편 가우디는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타로 노동조합을 위해 낡은 건물을 수리해 노동자들의 클럽하우스와 주택을 설계했으며, 지도자인 살바도르 파헤스의 주택을 비롯한 공장전체에 대한 설계 및 도개고와 수위실, 행진용 깃발 제작, 그리고 노동조합 축제 때는 공장을 그야말로 환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인류문명사에 길이 남을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가 있으며, 구엘 궁전과 구엘 공원, 그리고 구엘 별장과 교회, 카사 비센스, 독신자를 위한 저택 엘 카프리쵸, 성녀 테레사 학원, 아스토르가 주교관 등 수많은 걸작품을 남겨 놓았습니다.
눈 밝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 기회를 포착하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 지요. 철학적 신학적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창의성 그리고 고도의 정밀한 테크닉과 자연이 어우러진 웅대한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그의 안목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위대한 명장들은 섬세하며 풍부한 지성에 의해 길러진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가우디 또한 지식을 넘어 폭넓은 사유와 관찰, 강인한 인내와 반복되는 훈련 등을 통해 비로소 명장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범한 재능과 함께 끝내 중생과 자연을 포함한 통찰의 눈을 갖게 된 그였습니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이처럼 우리는 한없는 존경과 아낌없는 찬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의 높은 사상과 숭고한 정신을 높이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