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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핍박받았던 한국교회가 수전절의 교훈을 배우자 요10:22-39 갈1:10
설을 맞이하여 1월 30일부터 실내 마스크 해제라는 반가운 뉴스가 전해졌다. 전철이나 버스를 제외하고서는 마스크를 의무착용을 해제하고 자율로 한다는 것이었다. 2020년부터 3년 동안 마스크를 착용하고 생활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집을 나섰다가도 마스크를 하지 않아서 집으로 다시 돌아갔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는 코로나도 독감정도로 함께 생활하여야 한다는 질병청의 대처라고 생각한다. 겨울에는 오히려 마스크 쓰는 것이 괜찮기도 하지만 여름 더위로 푹푹찔때는 너무 힘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2022년은 폭염이 지구촌을 휩쓸었다. 동시에 홍수와 산불 등 각종 재해들이 유례없는 규모와 빈도로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작년 3월 강릉 옥계와 동해 일대 산림을 쑥대밭으로 만든 화마가 약 90시간 만에 잡혔던 화재를 기억할 것이다. 강릉산불로 산림이 잿더미로 변했던 피해상황은 여의도 면적 13배가 넘고 축구장 면적으로 따지면 5천602배에 달한다. 재산 피해는 동해에서 주택 등 130채가 전소되고, 53채가 일부 불에 타는 피해를 봤다. 이런 재난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몇 해 전부터 과학자들은 지구의 위기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몇 가지 증거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첫째는 빙하가 녹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영하 수십도가 되어야 할 남극과 북극의 온도가 영상 20도 까지 오르고 있다 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동토층이 녹기시작하면서 건물들이 금이 가고 도로가 파괴되고 땅꺼짐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동방박사의 경고이기도 하다. 얼어붙은 땅이 조금 녹아내리면 무슨 문제일까? 사실 지구의 동토가 지구의 온난화를 막고 있다는 것인데 동토들이 다 녹아내리면 지구의 온도상승을 막을 수 있는 냉방장치가 사라지고 있다. 지구의 동토가 녹으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긴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시베리아 동토층이 녹으면서 땅속에 있던 메탄가스가 지구 온난화를 매우 가속시킨다는 것이다.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수십배 강력한 온실가스이다. 지구의 온난화 때문에 엄청난 동토들이 녹으면서 엄청난 양의 메탄가스가 올라오고 있으면서 지구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또 방금 위에서 작년 동해안의 산불을 이야기 했었는데 얼뜻생각하면 산불 때문에 지구가 위기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산불은 동네산불이 아니다. 규모가 장난이 아니면서 역사이래 볼 수 없었던 산불이다. 자 산불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의 인공위성에서 보일정도의 규모이다. 실제로 2019 호주에서 인류역사상 최악의 산불로 반년이상 꺼지지 않는 산불로 숲(산림)이 사라진 것이 남한보다 더 넓은 면적이 잿더미가 되었다. 비가 내려도 산불은 꺼지지 않았으며 10만명 이상이 집을 잃어버렸고 수억명의 동물들도 불에 타 죽으면서 엄청난 재앙을 격었다. 또 미국 캘리포니아와 일곱 개 주에서 일만번의 번개가 내려치면서 그 번개 때문에 560건의 산불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미국역사상 가장 큰 산불이 발생하여서 서울의 6배 넘는 땅을 태워버렸다. 결국 이런 대형산불로 대량의 이산화탄소발생이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고 광대한 밀림이 없어져 지구에 산소를 제공하는 산소탱크가 사라지게 된다. 유럽 기상관측소 발표로는 매년 산불 때문에 수백메가톤의 이산화탄소가 발생으로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키면 그 지구온난화가 폭염과 폭우를 만들어 가고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3월 산불에 이어서 8월에는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07년 이후 115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로 8일 밤 서울 강남 일대 도로에서는 물이 무릎 높이 이상 차올라 승용차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교통이 마비되었던 원인이 지구 온난화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온난화는 북극과 남극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얼음과 빙하를 녹이면서 해수면 상승으로 섬나라들이 잠길 수몰의 위협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빙하가 반사하던 태양 복사열의 흡수율이 높아짐에 따라 기온 상승이 가속화돼 지구가 더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촌 한쪽이 홍수가 진행되면 또 다른 한쪽은 극심한 가뭄이 진행되고, 지구촌 한쪽이 화산이 폭발하면 또 다른 한쪽은 지진이 일어날 것이며, 지구촌 한쪽이 태풍이 몰아치면서 홍수가 일어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막화가 가속화 될 것이다. 기후변화로 초원지대인 몽골이 이미 거의 사막화 되었으며, 현재 중국의 북경 70킬로미터 전방까지 사막화가 되었고,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산불, 중국 쓰촨성 지진. 인도네시아 쓰나미 현상 등과 같은 지구촌 재앙으로 지난 50년 동안 남극의 평균온도가 3도 이상 오른 만큼 빙화가 녹아 해수면이 1m 상승한다면 전 세계 1억 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해수면 상승은 바닷물 범람으로 저지대가 침수되고 지하수에 염분이 스며들어 사람이 마실 수 없게 되며 농작물 수확도 어려워지며 괴질도 발생하는 등 인류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에 당면하는 것이다.
질병하면 14세기에 발생한 대흑사병 만큼 심각한 전염병은 없었다. 이 공포스러운 흑사병이 왜 발생했는지 알 수는 없었는데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가 25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 숫자는 그 당시 전 유럽 인구의 1/4에 해당한다고 한다. 14세기 흑사병은 너무 오래전이라 믿기가 어려우시다면 약 100년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이 창궐할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인 10억명이 이 독감에 걸린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1억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인류역사상 흑사병이나 스페인 독감같은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류는 이처럼 많은 질병과 싸우며 살아가면서 누구는 죽게 되고 누구는 목숨을 건지며 우리인류는 죽을 확률이 엄청나게 높은 질병들로 인해 공포의 삶을 살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병들은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감염된 환자가 다 치료되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홍수나 가뭄 그리고 화산 폭발이나 해일 등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야말로 바이러스와는 다르게 인간의 힘으로 아직은 해결할 수 없는 일이고 앞으로 시간이 지나가도 그럴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질병이나 자연 재해로 말미암아 요동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에서 떠나고 있으며 바다와 육지에서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인데 사탄은 한 사람이라도 더 멸망으로 이끌어 가려고 무서운 전염병을 발생시키려 할 것이다. 질병이외에도 태풍, 지진, 화재, 홍수 그리고 온갖 부류의 살인 사건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아닐까? 누가 미래를 알 수 있는가? 어느 곳이 안전한가? 인간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것 중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한 깃발 아래로 신속하게 정렬하고 있다. 그들은 들뜬 기분으로 그 지도자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그 아래로 모이게 되는데 거기에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일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이 불안한 세계를 이끌어갈 새로운 세계질서를 갈망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지도자인 적그리스도가 지도하는 대열로 전락하고 있다. 피해야할 지옥과 얻어야 할 하늘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태양은 하늘에서 여전히 궤도를 따라 돌며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위기는 서서히 우리에게 덮쳐오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다. 상인들은 여전히 사고 팔며 사람들은 자기들이 얻고자 서로 속이고 속으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더 강력한 자극을 위해 마약을 통해 더욱 강한 쾌락에 빠져 있으며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복권과 경마장과 도박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다니엘의 12장 4절 말씀처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말씀이 우리 시대에 보이면서 은혜의 시간은 속히 마치려 하고 있다. 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신 주님말씀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눅21:34-36)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너희 마음이 과식과 술취함과 이 세상 삶의 염려로 무겁게 되어 그 날이 알지못하게 너희에게 임할까 염려하노니 35 이 날은 온 지면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올무같이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피하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서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코로나 방역으로 인한 교회의 핍박
코로나가 우리생활에 침투한지도 만 3년이 넘었다. 코로나하면 마스크인 이런 질병이 아주 없어진 것도 아니지만 오늘 뉴스를 보니 실내마스크도 2월부터 곧 해제할 것이라고 한다. 지난 문재인정부 때는 코로나로 인해 학교가 문닫았고 백신접촉을 거부한 사람들에겐 갖가지 제재를 가하면서 개인생활이 억압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식당을 마음대로 갈 수 있었나 사우나를 맘대로 갈 수 있었나 하는 일들이 떠오르는데 특히 교회가 받았던 핍박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생명인데 교회가 마치 코로나 발생의 진원지처럼 매도되면서 대부분의 교회가 교회를 개방못하면서 비대면 예배로 교인들은 교회가 아닌 각자 있는 처소에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혼자 예배를 드렸던 것을 기억하는데 우리같이 10명도 안 모이는 작은 교회들까지 점검하면서 예배가 위축되었었는데 대형교회들은 얼마나 어려웠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예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무덤에 계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던 일요일을 택해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 찬송 말씀 듣고 예물드리고 마지막 축도하면서 끝나고 예배 후에는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함께 식사도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한주간의 안부도 물어보고 교제하는 것이 지금까지 예배였는데 이런 예배가 코로나로 인하여 멈추어 섰던 지난 3년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국가의 법도 지키야 하고 하나님의 법도 지켜야 하는데 두가지 법이 상충될 때는 당연히 상위법을 따르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양심을 주셨으므로 각자 양심이 정하는 데로 따르면 그것이 최고의 선한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코로나 시대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적발되면 벌금도 내고 계속 거부한다면 교회도 폐쇄당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초대교회부터 고난으로 시작한 교회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루살렘교회가 핍박받아 흩어졌으며 로마시대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250년 동안 지하 카타콤에서 생활했다. 로마정부의 핍박으로 신앙인들은 예배자리를 잃어버렸을 때 지하 굴속에 있는 무덤 [카타콤]에 들어가 예배를 연명해 갔다. 예배의 처소가 사라져갈 때 예배의 본질을 찾아 목숨같이 예배드렸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이럴 때 일수록 뒤돌아 볼 수 있다. 그동안 습관처럼 드렸던 예배의 자리가 사라지면서 비대면 예배로 대체되면서 교회들은 예배의 본질을 신중히 생각해 봐야한다. 교회를 싫어하는 자들은 말을 교묘히 지어내면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당에서의 예배만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초대교회도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린 것을 근거로 인터넷 예배를 정당화 하는 사이비 신자들도 있었다. 교회당 예배가 아니어도 어디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동의하지만 초대교회는 지금처럼 집에서 나홀로 스마트폰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코로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협과 핍박을 받아서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공기도 잘 순환되지 않고, 물도 구하기 힘들고, 세균과 바이러스가 번식하고,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전염병 위험이 있는 지하 묘지를 택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성도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를 찾은 것이다. 초대교회의 믿음의 유산은 지금도 이슬람지역과 북한지역에서도 이어지고 있으며, 오늘도 순교의 꽃을 피우며 복음을 전 세계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예배와 지금의 비대면 예배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재인 정부의 탄압으로 비대면 예배를 드렸던 것은 신앙적 핍박에서 벗어나 단지 육신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초대교회와는 다르다. 정말 진짜 환난의 때가 온다면 그때 교회는 다시 지하 예배당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벌써 한국교회에 환난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말인가? 한국교회는 세계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듯이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 때도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신앙을 지켜온 그 피의 역사를 벌써 잊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예배당에 몰려들었다가 전염병을 더욱 확산시켰던 미신적 신앙을 비유하며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미신적 신앙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역사에 대한 무지로 무례한 마녀사냥식 비판이며, 또한 한국교회의 예배방식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를 비위생적이라고 추측하고 교회당 폐쇄를 요구한 것에 영향을 받은, 자기 비하적 주장이다. 중세 흑사병 때 사망률이 높았던 것은 당시 의료와 위생 수준 등이 낙후된 것이 원인이었지 교회예배가 결코 원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 흑사병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체 없는 주장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교회에서의 대면예배를 포기해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없고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교회는 당연히 강요가 아닌 자율적으로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정부에서는 교회는 코로나감염예방을 위해서 정말로 최고의 핍박을 받았던 대상이었다. 정말로 코로나 위험을 감수하고 성도들이 교회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이며, 육신의 안전보다 영혼의 안전이 더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부 교회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것을 근거로 예배폐쇄를 강요하지만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는가? 김성순 국회의원이 교통안전공단에서 제출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0년에 교통사고로 65세 이상 노인 1700여명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하루 평균 4.7명의 노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것은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보다 훨씬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통사고로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모든 차를 없애버려야 하는가? 엘리베이터 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엘리베이터를 중지시키야 하는가? 회사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 전국의 모든 회사를 문 닫게 하여야 하는가? 그런 비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코로나 확진지가 발생하면 그 장소만 폐쇄하고 방역이 끝나면 다시 운영하면 된다. 따라서 일부교회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것을 빌미삼아 확진지가 발생하지 않은 교회까지 전부 예배를 중단하라고 강요하였고, 지키지 않으면 벌금이나 교회폐쇄로 압박하는 것은 누가봐도 교회핍박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예배드리는 시간은 작은 교회라면 1주일에 보통 3-4시간, 대형교회는 8-10시간 정도인데 당시 코로나로 주일예배만 드리는 교회의 경우는 예배당 사용시간이 1주일에 2-3시간 밖에 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도 잠시 교회에 머물 뿐 식사도 안하고 곧바로 헤어진다. 반면에, 일반 직장은 같은 공간을 하루 8시간 사용하므로 일주일이면 40시간 사용하고 식당, 커피숍, 자영업소, 대형마트 등은 매일 13시간 일주일이면 91시간 정도 사용한다. 또한 지하철과 버스도 매일 출퇴근시간에는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매우 위험하다. 비교해보면 교회가 세상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모를 일이 아니다. 만약, 마스크 쓰고 예배드리는데도 코로나에 감염된다면,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는 당장 지하철과 버스를 중단시키고, 또 사람이 밀집하게 되는 모든 장소를 폐쇄해야 한다. 그러면 각 교회도 자율적 결정에 의해서 폐쇄할 것이지만 문재인정부는 전체적인 폐쇄를 하지 않고 코로나가 발생하면 환자의 여러동선을 파악한 후에는 그 환자가 교회에서 감염되었다고 선전하면서 교회를 코로나의 온상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인식시켰던 것이 정말 교회를 핍박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의 실책을 교회에 책임전가하려는 의도로 밖에 생각이 안들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대통령과 정부를 믿고 협조하는 것은 교회의 마땅한 자세이지만 맹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과 정부의 대처능력은 얼마나 무능했던가? 대한의사협회가 7번이나 중국인 입국 금지를 권고했으나 대통령과 정부는 무시했다. 또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해달라는 76만명의 국민청원도 무시했다. 정부가 국민의 안전은 뒤로하고 정치적 이익만 생각하고 있다는 의심과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합리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취해야 하는 성경적 자세는, 교회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대통령에게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대한민국 전체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객관적이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별해서 협조하고 교회예배를 지켜야 하고 무엇보다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교회는 대통령과 정부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이 나라에 은혜를 내려주실 수 있는 분임을 가르쳐주고, 또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할 수 있는 존재가 교회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질병도 막을 수 있는 분이시다.
(출15:26)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그의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그의 명령들을 귀담아 듣고 그의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주니라, 하시니라.
분명한 사실은 정부가 교회를 폐쇄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남겨 놓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 그루터기 같은 교회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목숨을 걸 정도의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지금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성도의 안전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예배장소를 찾아서 대체할 것이다. 그때는 비대면 예배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 교회가 세상 정부에게 허락받고 예배를 드렸는가? 교회가 정부로부터 보조금이라도 받았는가? 자유 대한민국이 통제국가인가? 아니면 왜 교회가 예배로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세상에서 칭찬받으면 부흥하는가?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님을 죽인 권세자들이 교회를 위협하는 세상에서 탄생했다. 초대 로마교회는 핍박자들이 만들어 낸 악의적 소문-성찬식을 왜곡하여 교회를 핍박하였는데 그 근거는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살과 피를 먹는다는 악의적 소문 때문에 초대 로마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순교자들이 나올정도로 초대교회는 정부로부터 핍박 받았지만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세상의 허락과 상관없이 예배드렸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세상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예배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현대교회이다. 그렇다면 이 유산을 지키고 다음세대에까지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모든 면에서 세상에게 칭찬 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미움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교회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와 전도는 늘 미움 받아왔다. 교회는 세상사람 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바울사도의 가르침을 보자.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교회는 국가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 예방한다는 방역수단으로 정부가 교회 예배까지 중단한 것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교회가 핍박받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지구의 어느 지역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현재 한국교회가 코로나로 인하여 받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영국 크리스천투데이가 21년 1월8일 보도했다. 아프리키 동북부 수단과 에티오피아에 사이에 위치한 에리트레아(Eritrea) 나라는 국가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한다는 것이 폭로되었는데 교회폐쇄 조치와 함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여년 동안이나 수감되어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수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초만원 상태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데 코로나가 빠르게 퍼질 것이 우려된다고 알려주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기자인 로빈슨 씨는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몇 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하여 이들을 이제 풀어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요청하던 중 이란으로부터 일부 기독교 죄수들이 석방되고 있다는 고무적인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는 에리트레아가 그 뒤를 따르기를 바란다고 했다. 옥에서 풀려난 자들은 코로나 확산의 위험이 그들을 옥에서 나오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에리트레아는 종종 “아프리카의 북한”이라 불릴 정도로 국가 설립 이후부터 현재까지 지속해서 미등록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를 폐쇄하고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리스도인 수천 명이 감금 투옥되어 지금까지 15년 넘게 처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에리트레아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인 수감자 수천 명을 위해 기도하고, 에리트레아 정부에 석방을 청원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 릴리즈 인터내셔널의 협력 단체인 미국의 소리에 의하면 중국 동부 산둥성 관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유행 기간 동안 온라인 설교를 금지했으며, 국가 통제 밖에 있는 모임을 ‘완전한 근절’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협력 단체 차이나에이드(ChinaAid)는 정부가 종교 상징물을 제거하기 위해 교회 철거와 십자가 철거가 계속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계속 공유하고 있다. 우한의 황 레이는 SNS를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는 기회다”고 공유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영적인)죽음보다 세상권세를 더 두려워한다면, 그들이 견뎌온 고통은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레이 씨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하신다”면서 “이 코로나는 우리를 성찰하고, 영적인 삶을 강화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고난중에 믿음을 지키는 우한에 있는 성도들을 본받자.
작년에 우리나라에서도 부산 세계로교회는 코로나와 관련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대면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부산의 대형교회들이 비대면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세계로 교회는 코로나 시작 때부터도 계속해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던 중 6번 고발당하여 경찰 조사도 받았고 고발 건이 전부 법원에 올라가 있다. 이제 교회를 폐쇄하겠다고 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예배 드려온 것처럼 예배를 드린다면 교회가 폐쇄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배를 계속할 예정이다. 그것을 다시 한 번 당회에서 모여 결의를 한 것이고, 교인들도 이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한국의 이런 교회들이 몇이나 있을까 박수를 보낸다. 건물교회는 폐쇄 될 수 있으나, 교회 공동체는 폐쇄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정부가 밥먹듯이 강조하는 비대면 예배는 유튜브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리면 말씀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최소한 두 세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서로가 격려하기에 예배 분위기도 달라진다. 예배는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방역 수칙을 지킴에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완전히 헌법을 무시하는 것이며,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기에 절대 굴복해선 안 된다고 본다. 반면에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교인들이 방황하게 되며, 믿음이 후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코로나가 언젠가는 끝나게 된다면 정부가 코로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밝혀질 것이라 본다. 정치방역으로 보는 이유는 현재 방역지침을 보면 형평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10평도 안 되는 칼국수 집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1만 명 들어가는 교회에 20명만 허락하는 규제를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할 수가 없다. 하루 수도권 지하철 이용객이 73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지하철발 코로나는 일년동안 1명도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형평성 없는 조치는 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 역시 누가 걸리고 싶겠는가. 어쩔 수 없이 걸리게 되면 국가에서 국민을 보호해야지 죄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보다 더 두려운 것은 과연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코로나 방역기간 중에 모임을 갖는 것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으려는 경향이 뚜렷해질 것이다. 이와같은 코로나 트라우마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로나 이후에는 더욱더 오프라인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이 온라인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뀔 것이다. 이미 그런 징조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온라인식 삶의 양태는 개인주의 사회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공동체 중심의 기존의 교회가 강조하던 정신과 문화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예측은 코로나 이후의 교회를 상상하게 한다. 과연 코로나 이후의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로나는 비대면 예배를 통해 교인들은 온라인 예배가 얼마나 간편한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온라인 예배가 여러 번 반복 되면서 온라인 예배가 익숙하게 된다면 온라인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를 발견한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처럼 세상은 거스를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과연 믿음 있는 자를 볼 수 있겠는가 하시지 않았는가(눅18:8).
페스트가 중세의 종말을 이끌었고 1920년경의 스페인 독감은 새로운 산업과 세상을 만들었다면 코로나도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렇게 세상은 또 한 세대를 지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고 있지만 생명있는 교회라면 이런 정책에 대해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고 고난과 맞서야 한다. 10일 오전 부산 강서구 한 교회 예배당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2미터 간격으로 앉은 1000여 명 이상의 성도들이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해당 교회는 이날 예배 강행을 '영적 전쟁'으로 규정했다. 이날 교회 관계자는 "지금 우리는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거룩한 싸움에 나섰다"면서 "주님 성전에 마땅히 예배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예배하지 못하는 참담한 시기를 가고 있다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달라"라고 기도했다. 어느 목사는 "이 주사파 정부가 교회를 멸절하려고 모든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여기서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나가면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사실 문재인 주사파정부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흠모하며서 코로나를 빙자해 교회를 핍박하고, 멸절시키려는 명백한 사탄의 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가 교회의 예배에 관여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않는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이 나라에서는 교회의 예배는 교회가 결정하는 것이다. 대면 예배를 고수하는 일부 교회는 교회시설을 폐쇄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이제는 정부가 코로나를 빙자한 교회탄압이라는 말이 나올만도 할 것이다. 미국 워싱턴DC 내 6.25전쟁 참전기념비 평화공원에 이런 문구들이 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 서울여의도 순복음교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들 특히 서울 주요 대형교회들이 잠에서 깨어야 할 시기이다. 한국 대형 교회들을 중심으로 앞장서서 오프라인 예배를 재가동시키게 하라고 압박하여야 할 것이다. 정말 지나고보니 문재인 정부는 무엇에 쫓기는 듯, 어떤 목적을 향해 멈출 수 없는 열차를 타고 질주하는 듯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소리에도 귀를 막고 누구의 충고도, 비판도 개의치 않고, 그냥 저들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도리어 충고나 비판자들을 적폐세력으로 몰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나라에는 비판세력이 아무 곳도 없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조직화된 비판 세력은 교회가 유일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중·대형의 교회의 착한 목회자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켜야 하겠다는 불타는 마음은 별로 없는 듯하다. 모두가 중도라고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사수하고, 정의와 평등에 목말라 하는 국민은 지금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들 중에는 깨어있는 기독 지성인들이 있고,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연약한 교회들이 참으로 많다. 반면에 제법 잘 나가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자칭 보수주의를 말하는 지도자들은 국민의 거대한 함성을 외면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기회주의자들도 참으로 많다. 사실 교회만큼 코로나 방역에 모범적인 곳도 없다. 철저한 건물 내 소독과 출입하는 성도들의 손 소독, 열 체크,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 등을 지나칠 만큼 질병관리본부의 수칙대로 지키고 있는데 무슨 의도로 정부와 언론은 마치 교회가 코로나의 온상인 듯 계속 프레임을 만들어 선동하고 방송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헌법은 종교적 행사에 자유로이 참석할 자유와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하였다. 국가가 종교의 제한을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하여 제한하였다면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정부가 카톨릭교와 불교는 전혀 제한조치를 내리지도 않았고 기독교만 예배를 막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종교자유법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교회의 생명인 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성경에는 유대역사중 성전이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원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드렸을 때 유대민족이 얼마나 감격했는지를 그들의 절기를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바로 구약에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구약성경에는 기록이 안 된 봉헌절 즉 수전절이다. 비대면예배를 드리는 한국교회가 수전절의 기쁨을 통하여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예루살렘 성전으로 구분되는 유대 역사
성서학자들은 유대교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을 기준으로 유대 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솔로몬왕 때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1 성전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바빌론 포로 귀환이후 재건되었던 스룹바벨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2 성전시대입니다. 제1 성전시대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던 BC959년부터 유대왕국이 바빌론 누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BC586년까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아 등이 이 시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2 성전 시대는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인들은 포로생활 70년이 되어서 페르샤 고레스왕 때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하였던 BC 520년부터 시작해서 이 성전이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던 AD70년 까지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왕국을 정복했던 바빌론 왕국은 페르샤에게 무너지고, 페르샤는 BC332년에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는 알렉산더대왕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죽으면서 헬라제국은 알렉산더 왕의 장군들이 쪼개어 갖게 됩니다. 그래서 BC 32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미우스가 이집트 지역에 세웠던 프톨레미우스 왕국이 유대를 지배하게 되다가 BC 198년에는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셀레쿠스 왕조가 유다를 지배하게 됩니다. 셀레쿠스 왕조가 유대를 지배하던 BC164년경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뿌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는데 유다 마카비가 군대를 일으켜 성전을 탈환하고 성전을 청소하여 봉헌한 것을 기념한 절기가 수전절이다. 수전절은 성전을 되찾고 예배를 복원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수전절은 유대력 9월 우리 음력 10월 25일부터 7일간이다.
요한복음 10장 22절은 예수님이 수전절을 맞이하여서 유대인들과 논쟁 하신 것이 기록되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다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는데 논쟁의 주제는 당신이 메시야인가 아닌가 이다. 오늘의 주제는 수전절에 관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신약 성경 중에서 단 한번 구약의 절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수전절이다. 이 수전절에 관한 말씀은 요한복음 10장22절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는 없다. 따라서 이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는 외경 마카비서에 수전절에 관한 기사가 나오며 또 유대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서도 수전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유대인의 마음으로 좀 더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그들의 명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런 절기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독교의 전승이나 유대역사서나 유대전쟁사도 참고하기도 하고 또 외경도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3. 수전절이 주는 교훈
수전절(修殿)은 글자 대로 해석을 한다면 성전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수리하여 하나님께 봉헌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쯤 되면 수전절은 과거에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여 성전이 매우 더럽게 되었다가 이제는 예배가 회복되어서 축하하는 기념일 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수전절이란 성경에는 그 유래와 의미가 나오지는 않지만 22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전절 즉 히브리어로 하누카를 기념하고 지킵니다. 왜 유대인들은 이 수전절 하누카를 지킬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신 구약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칠칠절(오순절 초실절 맥추절)로서 일년에 세 번씩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라고 명령하셨으나 수전절은 구약에 나오는 절기도 아니고 심지어 유대인이 사용하는 구약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절기이지만 유대인들은 이 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마카비서나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직접 마카비서를 참조하여 함께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당시는 헬라지배를 받았을 때라 헬라문화를 숭배하는 시리아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 이방인들에게 의하여 각종 신과 우상으로 더렵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한 날입니다. 그동안 제사다운 제사를 드리지 못했을 때 얼마나 안타까웠을가 합니다. 그러다가 성전을 되찾고 그 기념으로 수전절을 통해 제사를 다시 복원하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기뻤을까 합니다.
수전절이 되면 첫째로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인 시편 120-135편을 부르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가정에서도 수전절을 지키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가지가 여덟 개인 촛대에 하루에 한 등씩 불을 밝혀서 8일째는 촛대의 불을 모두 밝혔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하누카라고 하며 지금도 이 날을 지키면서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 같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성전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의 한 구심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전중심의 제사가 아니라 우리 몸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3:16). 우리 자신이 바로 성전이요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성전대신 주님의 머리되신 교회가 있으며 진짜 성전은 우리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처럼 성전신앙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성전의 역사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성전의 역사는 모세부터 시작이 됩니다. BC15 중반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내산에서 성막이 만들어지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므로 성막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약 500년이 지나서 다윗은 이 성막을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으로 하여금 성전을 세우게 하여 성막을 대체하게 하였고 BC959년 솔로몬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이 웅장하고 찬란하였던 솔로몬 성전은 BC588년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파괴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됩니다.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BC536년 바사의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폐허가 된 고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BC520년 무너진 성전을 스룹바벨의 인도로 성전을 재건축하여 초라하나마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70년 동안 성전에서 예배하지 못하다가 예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유대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헤롯왕이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축하여 스룹바벨성전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성전이 바로 헤롯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이 헤롯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자랑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들이 보는 이 성전도 돌위에 돌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성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기 전 제3성전이 세워지면 적그리스도가 그 성전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라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수전절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과 무슨 관련이 있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신앙을 탄압하는 어떤 정치적 세력과 타협해선 안됩니다.
한국기독교의 오점은 일제강점기 때 하나님을 버리고 신사 참배한 오점을 안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지난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긴급 동의안을 가결했다. 여기에는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국교회의 지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교회가 정치에 휘둘리면 바로 이런 큰 죄를 범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지도 않고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시며 통치자이기 때문에 주님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주님의 통치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군사 스포츠 등 모든 영역을 관할하고 영향력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 우리의 역량과 책임과 의무를 행사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어느 정부든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을 유린하거나 또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예배를 방해하는 정부에 대하여는 대항하여야 합니다. 지금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 예배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우리 앞에 시험으로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위협하고 무너뜨렸던 신사참배에 동조하였던 많은 목회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앞에서와 교회앞에서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에서 비대면 예배로 교회문을 닫고 온라인예배를 드렸던 대부분의 교회 역시 하나님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둘째 우리도 율법의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전절뿐만 아니라 유월절 초막절 같은 명절도 모두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정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지도들에게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고 적용하였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구약을 말씀을 이루려 함이란 말이 많이 등장하면서 구약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남긴 말이 다 이루었다 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지금은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특히 모세5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율법폐기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본질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율법은 천국가는 이정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요 나침판이 바로 토라요 교훈입니다. 율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코 율법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 구약의 모든 율법적인 규정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으나 율법의 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하고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곧 아직도 사회적인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계층이나 조직 또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희생과 사랑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몸인 성전을 정결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성령 하나님 계시는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할 때 그리고 죄를 질 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몸에 해롭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담배나 술 기타 마약이나 도박 무분별한 성행위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이유는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민족이 되어 복을 받고 이방나라 들도 하나님을 믿도록 알려주기 위하여 먼저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우월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빛이라고(요9:5) 하신 것처럼 우리 몸은 산위의 동네가 되어야 하고 등잔위의 등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조그마한 불빛도 어두운 밤에는 사람에게 환하게 비춰줄 수 있는 불빛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썩으면 썩을수록 작은 불빛은 영롱하게 비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전절에 성전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청소한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어떤 정치적인 위협에도 복종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와 싸울 대상이 말씀에 있습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주사파와 싸워야 하고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기쁨과 감사로 율법의 정신을 배우고 깨달아서 실천하고 적용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