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교수가 요즘 무슨 바쁜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미스K는 얼굴빛이 흐려지더니 식당을 접을까 한다고 말한다. 공기가 좋고 경치가 좋아서 내려왔는데, 식당 일이 돈은 벌리지 않고 힘만 든다고 한다. 방학이 되면 손님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방학이 되니 매상이 1/3로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는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고 돈만 까먹는다고. 그럼 무슨 사업을 구상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니, 영화사를 만들려고 한단다. 평소에도 좋은 영화를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 아는 친척 언니가 자금을 댄다고 해서 요즘 서울에서 영화사 만드는 일을 추진한다고 한다.
K교수는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 지난 번에 4지선다에서 골라 나와 약속한 것은 나가리 되느냐고 물어 보니, 약속은 유효하고 꼭 지키겠단다. 그래도 K교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갈대와 같다는 여자의 마음을 믿을 수가 있을까? 장난처럼 말로만 한 약속을 그녀가 지킬 것인가? K교수는 오랜만에 스파게티를 먹고서 주)교수와 함께 학교로 돌아 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K교수는 주)교수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이어졌다. 그 후 며칠 동안 K교수는 우울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K교수가 미녀식당에 가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휴업’이라는 커다란 두 글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K교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 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 나오면서 보니 식당 건물 옆에 있는 작은 화단에는 분꽃, 채송화, 봉선화, 꽈리꽃 등이 피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하얀 꽃을 피운 조롱박이 줄을 타고 지붕을 올라가고 있었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베란다 쪽으로 가 보았다. 베란다는 텅 비어 있었다. 식탁과 의자는 사라졌다. 미스K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 건너 숲을 바라보았다. 숲에는 나무만 있을 뿐, 미스K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아쉬웠다. 허전했다. 조금 그리고 많이 슬펐다.
세월은 멈추지 않고서 계속 흘러갔다. 기쁜 사람에게도 슬픈 사람에게도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8월이 되고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 어느 날, 미스K에게서 전화가 왔다. K교수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화였다.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이 있느냐고. 4지선다 문제에서 4번째를 골라 약속한 골프를 치자고. 대학 후배이며 모 여대 무용학과 교수인 추)교수와 함께 나가겠다고.
전화로나마 미스K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K교수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K교수는 즉시 대학 동창인 쿠)사장에게 전화하여 다음 주 금요일 오전 이른 시간으로 골프 예약을 부탁했다. K교수는 용인 레이크힐스 CC에서의 마지막 골프 라운딩을 기다렸다. 쿠)사장도 덩달아서 미스 코리아 출신 미녀와의 골프 라운딩을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그 날이 왔다. 클럽 하우스에서 아침 7시에 네 사람이 만났다. 수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유류상종이라고 미스K와 같이 나온 추)교수도 미녀였다. 그런데 나중에 친구의 말을 들어 보니 미스K는 미인이 맞지만, 추)교수는 미인은 아니란다. 그러면서 쿠)사장은 “자네는 모든 여자를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친구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니, 친구가 말했다. “여자의 심리를 생각해 보라. 미스K는 자기보다 못한 여자를 데리고 나오지, 자기보다 더 예쁜 여자는 데리고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다. 여자 경험이 많은 친구 말이 맞는 것 같다.
용인에 있는 레이크힐스 골프장은 경치가 아름다웠다. 레이크힐스 골프장은 모두 27홀을 가진 고급 골프장으로서 전국 10위 안에 든다고 한다. 레이크힐스 골프장에는 다이아몬드 코스, 루비 코스, 사파이어 코스가 있다. 경기는 루비코스에서 시작되었다. 루비코스는 경치는 가장 좋지만 거리가 3219야드(블루 티)로서 가장 어려운 코스이었다. 그 날은 날씨도 좋고, 골프의 동반자들도 모두 매너가 좋았다. 쿠)사장은 유머를 많이 아는 친구였다. 진행이 지체되어 그늘집에서 기다리게 되면 쿠)사장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일행을 즐겁게 했다.
미국의 골프장에는 코스 가까이에 가정집이나 주택단지가 있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어느 골프장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코스 가까이에 개인 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환자가 병실에서 누워 있는데, 갑자기 창문을 깨고서 공이 날아와 하품하는 환자의 목구멍에 박혔다. 환자는 급히 수술실로 옮겨져 수술을 받는데, 어떤 사람이 수술실 문을 두드렸다. 의사가 물었다. “보호자 되십니까?” 그 사람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요.... 잃어버린 공을 찾으려고요.”
골프의 제1조는 힘을 빼고 치라는 것. 힘을 들여 공을 치면 멀리 나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 골프다. 그런데 골프 뿐만이 아니고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잘하기 위해서는 힘을 빼는 것이 제1조라고 한다. 대금을 불 때에도 어깨와 손가락에서 힘을 빼고 불어야 한다고 한다. 피아노를 칠 때에도, 색스폰을 불 때도 손가락에서 힘을 빼야 한다고 한다. 골프처럼 세상살이에서도 힘을 빼고 사는 것이 제1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때에 힘이, 특히 목에 힘이 들어가는가? K교수가 불혹이 넘도록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돈이 들어갈 때’ 사람들은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벼락 부자가 힘 빼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음에서 힘을 모두 뺀 상태가 마음을 비운 상태, 즉 무심의 경지가 아닐까?
첫댓글 명진스님이 2019년에 쓴 책의 제목은 <힘 좀 빼고 삽시다>이다.
힘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거나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