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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 새 민족
창 9:1-17; 엡 2:11-22; 마 5:9
김종원 장로 (새민족교회)
평신도 설교와 목회
어릴 때부터 교회 장로님들이 주일 아침 공과공부를 지도하고 예배에서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은 대체로 목회자가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평신도들의 헌신이 한국 교회를 지탱하고 이어 온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단체인 정의평화기독인연대가 2014년부터 매년 교회개혁주일(10월 마지막 주일)을 맞아 평신도설교로 강단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여섯 개 교회가 참여했고 세 번째 해인 올해는 열여섯 개 교회가 동참합니다. 지난 주일부터 시작했는데 오늘 교회개혁주일에는 열한 개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다른 교회로 흩어져 강단에 서게 됩니다. 저희 평신도 설교자들은 한목사님의 지도로 세 차례 모임을 하면서 설교문을 작성하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강단교류는 같은 성서본문으로 말씀을 나누는, 그야말로 교회일치와 연합을 위한 활동이기도 합니다.
평신도가 설교할 수 있는가? 평신도에게 설교하는 권리를 누가 부여할 수 있는가?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증 형태로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목회자는 설교, 간증은 평신도라는 인식이지요.
평신도 설교는 종교개혁을 한 루터가 말 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사제라고 하는 만인사제설이라는 것으로 근거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평신도를 생활목회자라고 합니다. 생활(일터, 일상)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이를 전파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어 신앙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목회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를 해석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역량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설교입니다. 이러한 역량이 튼튼하게 받쳐 줄 때 그 공동체는 하나님나라 운동에 더욱 매진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야말로 공부가 되었습니다. 성서공부를 통해 배운 것을 실제로 설교에 적용하고 또 뒤집어 생각하고, 딴지 걸면서 성서, 즉 하나님 말씀의 진수를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생명사랑 교우들 모두가 한 번씩 설교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 성장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준비하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공포의 정치화
사드 한반도 배치, 북의 발전된 5차 핵실험, 이에 대응하는 남한과 미국의 무력시위... 그리고 지진까지... 또한 이제는 국정농단이라는 믿기 어렵고 이 나라에 산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때,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걱정이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하다 못해 이제 지쳐가고 있습니다. 입장을 바꿔 북의 모든 사람들도 같은 공포 속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절망에 싸여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으신 ‘평안하뇨’ 이 말이 절실합니다. 교우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이처럼 우리는 불안과 위험과 공포를 입고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국가는 마치 공포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통치하고, 정치인들은 그 공포를 팔아 정치생명을 이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욱 불안한 것은 지진입니다. 저도 처음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느꼈습니다. 이게 지진인가? 이 밤에 무슨 공사를 하길래? 지진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지?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경주, 울산, 부산 지역 주민들의 공포는 더 심합니다. 이 지역에 원전이 집중되어 있어 큰일입니다. 지진과 원전 피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대재앙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지진 대응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각자도생하며 지진이 일어나지 않기를, 지진에도 원전이 아무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늘의 운에 생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더 힘들고 지칩니다. 독일은 2022년까지 가동 중인 17기의 원전을 모두 폐기하기로(2022년 원전제로) 결정했습니다. 지진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나라는 원전 25개를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정부는 신고리 5-6호기를 비롯한 6개의 원전을 앞으로 10년 내에 추가로 설치, 운영하겠다고 합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그 운명이 판가름 난 원전을 우상처럼 세워서 우리 국민과 이로 인한 세계시민들의 생명까지 위태로운 상황을 우리 스스로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전 세월호’ 상황을 걱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국가의 존재를 회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 구성원들인 국민의 생명에 대해 아무런 경외심도 없는 국가의 실체를 몸소 느끼고 있습니다.
소멸과 새로운 창조 – 평화의 회복
오늘 창세기 본문의 홍수 사건은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홍수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무대로 일어났던 홍수가 총체적인 참사가 아니라(물론 우주적인 참사는 더욱 아니고), 국부적인 재앙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사람들에게는 국부적인 홍수가 작은 도시국가들에서는 대홍수로 연상되어 우주적 사건으로 과대 해석될 여지가 있었던 것’(조셉 캠벨, 신의 가면 Ⅱ, 까치글방, 2000년)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구약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실제로 한반도의 국지적 전쟁은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는 대재앙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지진에 이은 원전 피해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성서는 홍수의 원인을 인간의 탐욕과 죄라고 말합니다. 창조세계의 평화를 해체, 역행한 인간의 죄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 인간의 질서와 구조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창조세계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다시는 멸하지 않겠다’고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언약하십니다. ‘인간의 죄-심판-회개-구원’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입니다(신명기사관). 평화와 생명을 파괴하는 한반도와 지구적 위기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방주로 부르십니다. 인간의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질서, 평화와 생명의 땅을 기획하고 계십니다.
배제와 낙인에서 환대와 인정으로 – 새 민족, 새 사람
에베소서 2장 본문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이 둘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이 둘을 하나의 새 사람(공동번역에서는 ’새 민족‘, 영어성경에서는 new man)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신’다는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입니다. 그리스도를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분’이라는 실천의 신앙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삶과 세계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평화를 제시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 예수 이후에 소아시아에서는 아직 율법의 이데올로기에 놓여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기독교 전파로 수적으로 우세해진 헬라문화권 이방인들의 우월감이 서로를 갈라놓고 반목하게 했습니다. 이들이 처한 원수 같은 사이가 되어 서로 사회적으로 분리되고 적대적으로 살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초대교회 또한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남과 북이 각각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와 신념 체계로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경제적인 풍요와 우방이라는 나라들의 군사력으로 힘의 우위를 앞세워 상대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양쪽이 서로 적대적 공존이라는 생존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함경북도 지역을 휩쓸고 지나간 홍수는 ‘해방 후 처음인 대재앙’이라고 북한 스스로 말할 정도로 지금도 수만 명의 수재민들이 쌀쌀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9.22일 CBS 여론조사에서 북한 수해에 인도적 지원에 반대하는 여론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반대 55.8%, 찬성 33,8%였습니다. 핵실험 이후 대북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분석입니다. 20대 연령에서도 56.5%가 반대했습니다. 대홍수의 비상 상황에서도 핵실험을 하는 북한을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남과 북은 이렇게 서로에게 나쁜 이미지와 표현으로 낙인을 해두고 있습니다. 왜 20대 젊은이들까지 증오의 감정을 갖게 되었을까요? 국제관계, 외교관계에서도 서로를 배제하려고 합니다. 분리와 배제, 증오와 비난, 힘의 지배와 오용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군대가 무엇입니까? 군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저는 아직도 자면서 군에 입대 하는 꿈을 꿉니다. ‘내가 제대했는데 왜 나를 다시 입대시키느냐’고 발버둥 치다가 깹니다. 안도의 숨을 쉽니다. 이런 꿈 저만 그런게 아니더군요. 1980년 4월, 민주화의 봄과 전두환 군부가 권력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을 때 군대에 갔습니다. 대학 다니다가 왔다며, 데모하다가 왔다며, 경상도 놈이라고, 전라도 놈이라고 기합주고 폭력을 행사는 일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전 둘째 아들이 현역 복무 할 때 부대에서 연 가족초청 행사에 갔습니다. 그 전에 첫 면회를 갔을 때부터 놀랐습니다만 부대 시설이 30년 전 제가 군에 있을 때와 별 차이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간부사관이 부모들에게 인사하는 시간에 제가 ‘내가 낸 세금이 아깝다’고 한마디 했습니다. 전력 증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세금으로 불량 무기를 만들어 군인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고, 품질 나쁜 생필품을 지급해 병사들은 자기 돈으로 민간 물품을 사 씁니다. 군 예산을 빼돌린 장성들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거나 가벼운 형을 받습니다. 이런 군대가 어떻게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군인은 전쟁을 위해 존재합니다. 적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적이라는 사람도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인간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서로가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군인이 되는 순간 그는 인간이 아니며 시민도 아니며 병사일 뿐입니다. 시민권이 정지가 됩니다. 그래서 군인은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는가 봅니다.
우리 국가는 어떠합니까? 우리 정부는 시민과 전쟁을 합니다. 백남기 어르신. 그를 시민의 권리를 가진 사람, 시민이 아니라 적군으로 봅니다, 그래서 적의 병사에게 하듯 살인 물대포를 퍼부었습니다.
한반도 전역이 군대와 무기의 힘으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과 북이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반도의 양 쪽은 눈보라 치듯 험하고 생존의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처지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의 악령은 평화를 파괴하는 것들입니다. 이들 세력은 남과 북, 북과 남의 선한 사람들을 서로 배제하고 낙인찍어 평화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악령들에 대해 영적 투쟁, 선한 싸움에 나서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창조자에 대한 경배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2장의 오늘 본문은 거룩의 개념을 제의적 관점이 아니라 평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실천에 나서고 평화를 실현하는 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다’(갈 3:28).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그리고 오늘 에베소 본문 말씀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환대하고 인정, 존중하여 하나의 새 사람, 새 민족’이 되라는 이 말씀은 곧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이유이며 신앙생활의 미션입니다.
기승전~평화
지난 추석에 저는 김천역 광장에서 열린 사드반대 촛불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추석 명절인데도 주민들의 투쟁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정부와 지자체 내부로부터 뻗쳐오는 회유와 분열, 탄압의 악한 권세를 물리치고 외롭지만 지금도 당당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 분들은 한반도의 십자가를 지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서 산상설교 말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팔복 가운데 일곱 번째 복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에서는 그래서 박해를 받아도 복이 있다고 축복하며 하늘나라를 그들의 것이라고 하는 최고의 축복을 선언합니다.
팔복 말씀의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까지는 ‘평화’를 전제로 합니다. 평화의 상태, 평화라고 말 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늘나라(정의), 슬퍼하는 사람들이 받을 위로, 땅을 빼앗긴 온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땅(생명), 의에 주린 사람이 받을 자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평화의 조건이며 평화가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평화의 나라, 정의와 생명의 공동체를 세우려면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 지금 온유한 사람들과 의에 주린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물어야 합니다. 지금 박근혜대통령과 최순실, 정유라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난하지도 않고, 온유하지도 않으며 의에 주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드 배치로 인해 생존의 절벽에 몰려 가난해 지는 사람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들, 투쟁하는 성주와 김천시민들의 외침에 답이 있습니다.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들,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는 온유한 사람들로부터 국가가 해야 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입니다. 평화를 가로 막는 것, 그 세력들을 찾아내는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가 깨어진 곳, 사람, 상태에 대해 민감한 평화감수성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많은 공포와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피조물의 탄식 속에서 성령의 탄식을 듣습니다. 이런데 우리에게 평화가 올까요? 그러나 지금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나처럼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나의 평화를 실천하기를’, 그래서 ‘새 사람, 새 민족’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교회개혁주일에 교회가 새롭게 되어 이 땅에 평화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함께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며 온유한 이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난한 우리 공동체가 온유함으로 빛을 전하고 세상과 우리 사회 곳곳을 감동시킴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드러내게 해주옵소서.
위로의 하나님, 불의하고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생명을 잃은 백남기 농민과 가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국민의 삶과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이 현실에 아파하며 탄식하고 있는 이 백성들을 위로하옵소서.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새 날을 열어갈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주옵소서. 에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