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비우며 돌아가고 싶은 길 위에서
---정복선의 시세계
조동범
태초의 어느 밤을 생각한다.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먼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곳이 어떤 세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마음 속에 태초의 자연은 가닿고 싶은 삶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인간이 자연과 결별한 뒤 우리는 비극의 세계 속에 남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은 자연이라는 근원적 세계에 다다를 수 없으며 그것과 소통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언어를 잃어버렸고 이윽고 그것과 결별하게 되었다.
오늘날 인간이 자연이나 자연의 언어와 다시 교감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이다. 예술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언뜻 쓸모없어 보이는 시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시는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존재이며 근대 이후에 잃어버린 것들을 복원시켜 준다. 그리하여 인간과 결별한 자연에 다가설 수 있도록 한다. 시인이 자연을 통해 시적 지향을 제시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크다. 시인에게 자연은 도달하고 싶은 본질적 세계이다. 정복선의 ‘담다’ 시편은 자연과 같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수용하려는 시인의 의지이다.
어느 한 별이 수십억 년 전
밤이고 낮이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왔을
그 처음 스토리를 떠올렸어
태초에 목숨 건 사랑과 모험을
(중략)
달은 가깝고 빠른 공전에 하루가 짧았었다는
선캄브리아시대로부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까지
(중략)
오늘의 화두는 지수화풍地水火風
당신이 바로 뮤지엄, 몸이라는 자연사박물관이지
이미 소멸했을지도 모를 행성의 한 조각이자
이내 돌아갈 한 빛이야
-「담다, 수풍석 뮤지엄」 부분
정복선의 시는 세상 모든 것을 수렴하려고 한다. 그리고 아주 먼 과거에 존재했던 세계를 수렴하고 지향함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복원하고자 한다. 외부의 것들을 수렴함으로써 시인은 더 큰 세계를 꿈꾼다. 그것은 “선캄브리아시대로부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와 같은 태초이며 “수십억 년 전”의 밤과 남과 별과 달의 세계이다. 마치 잃어버린 자연을 복원하고, 자연의 언어를 회복하고 싶은 것처럼 인류 이전의 세계를 호명한다. 시인에게 오늘의 화주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다. 세계를 이루는 바탕으로서 땅과 불과 물과 바람을 화두삼음으로써 시인의 의지는 단단해진다.
「담다, 수풍석 뮤지엄」은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수풍석 뮤지엄’을 배경으로 전개한 작품이다. ‘수풍석 뮤지엄’에 가 본 사람이라면 그곳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수풍석 뮤지엄’은 물, 바람, 돌을 테마로 한 세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뮤지엄과 사뭇 다르다. 그야말로 물과 바람과 돌이 있을 뿐이다. ‘수풍석 뮤지엄’은 인간의 언어로 만든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다. 시인은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것은 “이미 소멸했을지도 모를 행성의 한 조각”이지만 우리가 “이내 돌아갈 한 빛”이다. 시인이 언급한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재현해놓은 곳이다.
커피를 내리네 사월의 뜰을 바라보네
꽃나무들은 저리 움푹진푹 봄날을 건너네
나비, 벌, 새들에게 활짝 대청마루 열어둔 채
그득한 잔물결에
가뭄에 퍼덕이던 물고기의 아픈 지느러미도
살랑거리네
(중략)
이따금 잔盞을 딱 한 개씩 사온 건
세상의 모든 우물과 사막과 오아시스를
하나씩 건너보려는 일
-「담다, 커피 잔」 부분
삶은 사소함으로부터 비롯되는 법이다. 많은 경우 ‘사건’은 예외적으로 발생하며, 그것은 특별한 순간으로 남는다. 물론 ‘사건’으로 점철된 일상도 있다. 이런 경우 ‘사건’은 더 이상 예외적인 특별함이 될 수 없다. 대부분의 삶은 ‘사건’ 대신 ‘일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쩌면 그런 일상이야말로 진짜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일상의 작은 것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수용하려고 한다. “커피를 내리”고 “사월의 뜰을 바라”본다. 그리고 대청마루에서 봄날의 꽃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비와 벌과 새들이 날아가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시인이 “커피 잔”에 담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평범함의 순간이자 순환하는 자연의 모습이다.
커피를 마시는 시인은 자연 이편에 서 있지만 어느새 자연은 “커피 잔”에 담겨 그 둘은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이때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에만 도취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도달한 곳은 긍정과 부정 모두를 담고 있는 진짜 우리 삶이다. 그리하여 “그득한 잔물결에” 살랑거리는 것은 “가뭄에 퍼덕이던 물고기의 아픈 지느러미”이다. 시인에게 “잔盞”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며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가교이다. 잔은 통해 시인은 “세상의 모든 우물과 사막과 오아시스를/하나씩 건너보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우물과 사막과 오아시스를/하나씩 건너보려는 일”은 고통을 건너며 그것을 인내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청춘들이 꽃구름처럼 몰려오고 몰려간다
비구름 번개구름 되어 그토록 갈망하는
낯선 곳에 다투어 쏟아지려 하네
기타를 친다, 흐르다가 부딪거나 저어가거나
뭉쳤다가 부서지고 겅중겅중 춤추며 자지러질 듯
신神이 매어 놓은 저 수평선, 그 현絃에 목숨을 튕긴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이 눈부신 잔치마당 뒤에서
어둠속 정체, 그 무엇이라도 끌어안고
철썩, 밀물썰물로 누군가의 꿈에서 깨어난 듯
이타카Ithaca 너머 태양계 너머 항해하려는 보이저호들이여!
-「담다-오디션, 오디세이Odyssey」 전문
삶은 오랜 세월 지속되는 방랑과 모험의 대서사시이다. 누구도 그 앞길을 알 수 없다. 「담다-오디션, 오디세이Odyssey」에서 시인은 스타가 되기 위한 이들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시 속 이야기는 어렵지 않다. 스타가 되기 위한 “청춘들이 꽃구름처럼 몰려오고 몰려가는” 현상을 이야기하며 그들이 “비구름 번개구름 되어” 갈망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요즘 세태를 말하기 위해 작품을 쓴 것이 아니다. 「담다-오디션, 오디세이Odyssey」는 “오디세이Odyssey”와 “이타카Ithaca”를 겹쳐 놓음으로써 현실 너머 보다 근원적인 욕망과 지향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담다-오디션, 오디세이Odyssey」 속 현실적 욕망은 확장된 외연을 통해 시적 깊이를 획득한다. 시인은 “이타카Ithaca 너머 태양계 너머 항해하려는 보이저호”를 통해 끝을 알 수 없는 삶과 미지를 향하려는 열망을 동시에 언급한다. 캄캄한 우주를 향하는 것은 도전이자 두려움이다. 두려움의 가운데 무엇인가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시인은 안다. 미지의 우주를 항해하는 보이저호는 오디션에 도전한 이들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삶의 막막함을 보여준다. 우주적,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 속 오디션은 시적 원형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 소박한 이름 보랏빛으로 물들었네
널리 소문나지 못한 슬픔
열렬한 시 사랑에 진정성 있는 통화의 목소리,
마지막 꽃밭에서 그의 얼굴은 쓸쓸하다……
수국꽃같이 어우러지고 싶었던 이
비로소 옛 시인들과 더불어 유유히 만행漫行할까,
그가 사랑한 차이코프스키 비창교향곡 희망절망의 리듬으로
여주 남한강에서 두물머리를 지나서 한강, 강화도를 휘돌아
두둥실, 반야용선에 탄 한 사람 뒤를 돌아보네
무량억겁 파도 속 비단 스카프 한 점
-「담다, 보랏빛 시인」 전문
다른 ‘담다’ 시편이 삶에 대한 태도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라면 「담다, 보랏빛 시인」은 시에 대한 시인의 자기 고백이다. 그런 점에서 「담다, 보랏빛 시인」은 시인의 시론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시는 회한과 애틋함의 대상이다. 그것은 보랏빛으로 물든 “소박한 이름”이며 “널리 소문나지 못한 슬픔”이다. 시에 대한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감정을 사로잡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회한이다. “열렬한 시 사랑”에 빠져 “진정성 있는” 목소리로 시를 부르지만 “마지막 꽃밭에서 그의 얼굴은 쓸쓸”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와 “수국꽃같이 어우러지고” 싶다.
시인은 시의 길이 멀고 기약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처없음이 모든 시인의 숙명이자 삶이라면 시는 길 위에 쓰이는 언어이다. 시인은 “여주 남한강에서 두물머리를 지나서 한강”으로 나아가고 이내 “강화도를 휘돌아” 바다로 나아간다. 망망대해 속의 정처없음과 막막함은 삶의 방향을 잃게 하지만 그것이 시의 길임을 알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반야용선에 탄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 그는 “무량억겁 속 비단 스카프 한 점”처럼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이다. 시인의 삶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짜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담다, 보랏빛 시인」은 삶과 시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아니다. 언뜻 사소해보이는 시적 국면은 사실 문학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준비도 없이 허투루마투루 밤길 떠나왔다
스스로 불 밝히고 걸어온 줄 알았다
청우산 자락에 기항寄港한 지도 오래,
산사태와 물난리에 나무뿌리 잡고 숨 가다듬는 동안
비바람에 글라디올러스 꽃대 무참히 꺾여버린
시행착오에도 산새들은 어딘가에 알을 낳아 품었듯이
딱따구리, 검은등뻐꾸기, 물까치들 소리 계곡을 넘나들듯이
다시 심은 수선화 자목련 모란꽃…… 들이
차례로 연등燃燈을 켜듯이
오천축국五天竺國을 순례하며 절절히 그리워했으나
신라에 끝끝내 돌아오지 못한
혜초 스님의 법등명을 이제야 이해할 듯하다
-「담다, 청우산」 부분
앞의 시편에서 무엇인가를 담으려 했던 시인은 「담다, 청우산」에서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제목은 여전히 “담다”를 표방하지만 시 속 세계는 오히려 담겨 있던 것마저 흘려보내는 태도를 보인다. 마치 삶에 대해 달관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시인은 버릴 수 있어야 삶의 진짜 모습에 가닿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연민과 참혹의 끝에 진실이 있음도 안다. “비바람에 글라디올러스 꽃대”가 “무참히 꺾여버린” 세계가 진짜 삶임을 알고 있으며, 산새들이 “알을 낳아 품”는 일이나 “딱따구리, 검은등뻐꾸기, 물까치들 소리”가 계곡을 넘나드는 애틋함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도 알고 있다.
삶은 “준비도 없이 허투루마투루 밤길 떠나”온 듯 흘러간다. “스스로 불 밝히고 걸어온 줄” 알기도 하지만 그저 길 위에 놓여 있었음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청우산 자락에 기항寄港”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사태와 물난리에 나무뿌리 잡고 숨 가다듬”으며 버티며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안다. 무엇을 담으려고 할 때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있다. 모든 것을 비우는 삶! 그것은 “신라에 끝내 돌아오지 못한” 혜초의 길과 같다. 시인은 흐르는 삶을 맡기며 이제야 “혜초 스님의 법등명을 이제야 이해”할 것만 같다. 시인은 길 위에서 삶의 모든 고통과 절망, 희망과 기쁨을 수용하고 바라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정복선 시인이 ‘담다’ 시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의 시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동범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이 있으며, 산문집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보통의 식탁』,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을 펴냈다. 청마문학연구상,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