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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25
조금 편해보려다가 / 김영주 목사
1. 서론
우리 육신의 요구는 끝이 없습니다. 쉬고 싶고, 눕고 싶고, 자고 싶고, 놀고 싶어 합니다. 이 요구대로 따라가다 보면 인생 아무것도 안됩니다. 오죽해야 잠언24:33~34말씀에 보시면, ‘이러다가 거지된다.’고 했겠습니까?
(잠23:33~34)33“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34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육신은 적절하게 다스리고 훈련해야지 그냥 놔두면 이 육신이 나를 잡아먹고 내 인생을 잡아먹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육체의 소욕과 성향은 성령을 거스릅니다.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가만 놔두면 ‘주님이 내게 원하고,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됩니다.’
② 육체를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갈6: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ex)TV를 많이 보는 사람이 영적인 능력, 기도의 능력, 권세, 성경에 대한 깨달음과 신앙의 맛을 알 수 있을까요? 삶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이 새벽기도를 나오겠습니까? 육신적인 일에 집중하면서 영적인 풍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육체의 것을 심으면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③ 다스리지 않으면 결국 내가 정복되기 때문입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④ 육체의 연습보다 경건의 연습이 더 유익합니다.
(딤전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의 연습은 건강, 근육 단련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생에서 뿐입니다. 경건의 연습은 영, 육간에 도움이 되고, 이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은 다 연습이라는 것입니다. 한두 번에 안 된다는 것이요, 맘먹었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습관이 될 때까지 악착같이 연습해야 합니다.
2. 어떻게 다스리나?
육체를 다스리는 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육체는 제 마음대로 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말씀과 반대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질과 성향을 말씀에 복종시키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용서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용서하라 하는데 내 감정은 전혀 용서할 맘이 없습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때 내 감정에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한번 맘먹었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먹었으면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해서 말씀의 다스림 받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마18: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왜 이렇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셨겠습니까? 한번 맘 먹었다고 되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적 감정은 ‘절대 용서 못 해, 내가 왜 용서해? 지가 먼저 와서 사과라도 하면 몰라도....’라고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허드렛일, 귀찮은 일 해주는 것입니다. 불끄기, 신문 가져오기, 쓰레기 버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남편 의견 무시하지 말고, 들어주고, 인정해주고, 나중에 탓하지 말고, 순종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의 요구는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없습니다. 예를 들어, 밤늦게 무엇을 먹으면 백해무익합니다. 위장병이 있거나, 소화불량, 자주 체하는 사람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배가 고프면 꼬르륵하며 허기의 신호를 보내면서 자꾸 보챕니다. 이것에 넘어 가면 안 됩니다. 채워주면 더 달라고 조릅니다. 굶기고 다스려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은 육체의 요구를 못 이겼습니다. 하나님은 명령을 통해, 벧엘에 머물지 말라, 떡도 물도 마시지 말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고 잠시도 그 땅에 머물지 말라. 바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잘 하다가 그만 육체의 요구에 넘어갔습니다. 돌아가다가 피곤해서 상수리나무 아래 쉬고 있다가 늙은 선지자를 만나서 회유에 넘어가 다시 그 벧엘로 돌아가, 먹고 마시고 쉬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이 한 번의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습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좀 피곤하고 지치니까 잠깐만 쉬고 가자.’ 했을 것입니다. 잠깐 쉰다고 쉬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데 마침 늙은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선지자다. 천사가 당신을 데려다가 먹이랬다.’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쉬고 싶었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옳다 하고 홀딱 넘어가버렸습니다.
한 번 쉰 행동도 문제지만 그 이전에 ‘육신의 요구에 넘어가 마음속에서 좀 쉬자.’ 했던 타협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에서 무너지니까 그 틈새로 육신의 요구가 강하게 들어왔습니다. 이미 쉬려는 마음이 있던 차에 잠깐만 쉬자 하고 앉아 있다가 선지자가 와서 권면하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하면서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타협, 변경, 환경의 변화, 징계를 하나님의 뜻으로 잘 못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욘1: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니느웨로 가야 하는데 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란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가면서 속으로 이랬을 것입니다. ‘거기 배가 없으면 하나님 뜻이 아닐 줄 알고 다시 돌아오고, 배가 있으면 가도 좋다는 주님의 허락으로 알고 타고 가야지....’
그런데 항구에 도착해보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이거 하나님의 뜻이네! 하면서 옳다 올라탔습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얼마나 자주 범하는지요?
새벽기도를 쉬었으면 하는 맘이 들어서 눈이나 왔으면 좋겠다 하면서 일기예보를 보니, 마침 내일 새벽에 눈 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일 새벽 쉬는 것은 주님의 뜻이네! 하고는 늦게까지 하고 싶은 것 다 하다가 알람까지 꺼놓고 자 버립니다. 또 피곤하고 쉬고 싶은데 마침 아이들이 열납니다. 기침이 심한 것 같습니다. 잘 됐네! 아이들도 아프고,...하면서 쉬어 버립니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우리 중심의 해석입니다.
3. 본문에서 볼 것
1) (20절)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하자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불순종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서 선포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람이 이제는 오히려 늙은 선지자에게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을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면 예배 때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ex) 예배 때, 어느 날부터 예배가 은혜가 되지 않고, 찬양은 지겹고 시끄럽고 지루합니다. 설교는 왜 이렇게 길고, 졸리고, 피곤할까? 예배 시간이 힘들고 지루하지 않은가요?
2) (22下) “...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2절 상반 절에 “말라 하신 곳에서” 라는 표현을 잘 보십시오. 떡 먹은 것도 문제고, 물 마신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장소가 문제였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같이 어울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있지 말란 장소에서 있지 않아야 할 사람들과 어울린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러면서 은혜 못 받았다.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 하면 웃기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신 심판의 말씀이 바로 네 시체가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네 시체가 한 것 보면 너는 죽는다 이 말씀이요,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는 것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닌 수치스런 죽음이 될 것이다 한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죽어도 선산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의식 속에서, 죽어서 가족이나 조상들의 묘실엔 못 들어가는 것은 아주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닌 비정상적인 죽음, 수치스런 죽음을 당했기에 조상들의 묘실에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3) (23下)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귀를 탑니다.
시간이 지체되어서 빨리 가려고 했을까요?
시간 내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나귀를 줬기 때문일까요?
너무 피곤해서 이젠 더 못 가겠다고 해서일까요? 처음과는 다른 상황입니다. 우리 속담에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피곤하다고 앉게 되면 눕고 싶고, 자고 싶고 내일 하고 싶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잠시 쉬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쉬는 김에 어디 가서 편히 쉬자, 기왕 쉴 거면 떡 먹고, 물도 마시자.’ 했을 것입니다. 쉬고 나니 ‘이젠 더 이상 못 걷겠네. 나귀 타고 가지 뭐...’ 이런 식으로 무너져 갑니다.
4) (24절)“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사자가 그를 물어 죽였습니다. 보통 사자는 배고프지 않으면 사람 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자는 길에서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배고프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옆에 나귀는 건들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지나가는 사람들도 건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나 물고, 덤비고 하면 미쳤다고나 하죠. 그것도 아닙니다. 유독 이 하나님의 사람만 물어 죽였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사람들은 보통 재수 없게 걸렸다고 합니다. 설명이 안 되니까 재수 없다 합니다. 남들 안 걸리는데 나만 걸린 것입니다. No! 사실 세상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인 경우가 있습니다.
ex)고등학교 교련시간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이요 심판입니다. 불순종의 값을 물은 것입니다. 불순종의 값은 너무 치명적입니다. 신앙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속도를 조절할망정 쉬는 것 아닙니다. 쉬면 그 때부터 저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더구나 26절 하반절 표현을 보십시오.
(26절下)“...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사자가 그를 죽였다 이정도가 아니라 그를 찢어 죽였다 했습니다. 찢어놓고 먹지도 않은 것입니다. 참 희한한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남들 다 괜찮은데 왜 나만 재수 없게 그러느냐? 이건 재수라는 말로는 설명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설명이 됩니다.
5) (24 中) ”...길에 버린 바 되니”
이 장면에서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길에 버려져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린 한 인생을 봅니다. 맛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습, 삶, 인격은 하나님께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밖에 버려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힘은 순종에 있습니다.
6) (25절)“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한지라”
이것은 우상숭배와 배교, 죄악을 선택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불순종했을 때 이 정도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이것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보도록 그 시체와 사자가 길에 서 있게 한 이유입니다. 사자도 참 이상해요. 사람을 물어죽였어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오면 도망가든지 해야 하는데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이렇게 살다가는 이런 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예수 믿는 것이 처음엔 쉬운데 가면서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넓은 길 가다가, 좁은 길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넓은 길 끝에는 멸망이 있고, 좁은 길 끝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좁은 길이라 잠간 불편하지만 계속 가면 생명이 있습니다. 가보면 처음에만 힘들지 갈수록 즐거워집니다. 그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이 과정들을 잘 넘겨야 합니다. 내 육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보면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한번 출발한 믿음의 길, 쉬지 마시고, 멈추지 마시고, 뒤 돌아보시지 마시고 가십시오. 그 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고 생명이 있습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히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처음 마음을 끝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