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수필>
아, 앙코르 왓
스마일리 호텔의 아침식사는 뷔페식이었다. 풍요와 맛이 일품이었다. 호텔 마당 한 옆에 석가모니부처님 상을 모셔놓고 있었다. 캄보디아 국민 95%가 소승불교를 믿고, 소승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만 모시기 때문에 석가모니불 이라고 한 것이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소승불교, 캄보디아의 모든 역사와 문화는 힌두교와 불교를 떠나서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답사의 길을 나선다.
캄보디아 남쪽지방 인사말이, “안녕하세요?”는 “섭섭허이.” “감사합니다.”는 “어군 찌란.” 이고 “많이많이 감사합니다.”는 “어군 찌란찌란.”이라고 한다. ‘섭섭허이’는 우리말로 서운하다는 얘기와 비슷한데, 공교롭게도 정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베트남에서 캄보디아에 들어올 때 임시여권을 만들었는데, 20불이다. 자기들이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 극장 입장권처럼 생긴 종이에 사진을 넣어, 이름표처럼 목에 걸고 앙코르 톰에 들어간다.
‘톡톡이’라는 오토바이에 장착된 허름한 앉을 자리가 있는데, 하루에 30불이다. 걸어 다녀야 할 길이 32km나 된다는데, 아무리 비싸도 어쩌겠는가.
우리 일행은 평원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앙코르’는 거대하다는 듯이고, ‘왓’은 사원을 의미한다. 앙코르 톰은 거대한 도시, 그러니 거대한 도시의 사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앙코르 왓는 1860년대 프랑스의 곤충학자 알베르 앙리 무오(Albort Henry Mouhot)가 현지 주민들과 캄보디아의 밀림 속을 탐험하다가 주민들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며, “정글 안에는 주술에 걸린 유령들이 들끓는 텅 빈 도시가 있어, 그 안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는 것을 설득하여 들어가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앙코르 왓은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 왕조가 12세기 초에 건립된 사원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사후를 대비하여 장례전을 짖듯이, 앙코르왓은 1119~1150년경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후 자신이 묻힐 영생의 집으로 건축했을 것이라 한다.
앙코르왓은 돌로 만들어진 우주의 축소판으로 지상에 있는 우주의 모형이며, 사원의 정 중앙에 세워진 중앙탑은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며, 5개의 큰 봉우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성벽은 세상 끝을 둘러싼 산맥을 뜻하며, 둘러싼 호수는 우주의 바다를 상징하고, 3층 중앙 탑들이 있는 곳은 천상계, 2층은 인간계, 그리고 1층은 축생계를 의미한다. 힌두교 신전 사당 꼭대기에 있는 지붕 탑은 메루를 나타낸다. 세계의 축인 메루 산은 땅 아래와 하늘까지 뻗는다. 모든 주요 신들은 이곳이나 이곳 가까이에 자신의 낙원을 갖고 있으며, 이 낙원에서는 이들을 믿는 경건한 신자들이 죽은 뒤 다음 영혼의 재생을 기다리며 신들과 함께 지낸다.
1441년 태국의 침략으로 1444년 크메르 왕국은 망하였다. 나라가 멸망한 후 지금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앙코르 왓을 건설할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 눈물과 원망이 쌓였으며, 국력의 낭비가 있었겠는가.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란 말이 생각난다. 사실 백성들이야 나라가 바뀐다고 땅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자연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앙코르 왓도 탐욕이 부른 재앙일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잠시 씁쓸해 진다.
이 거대한 사원의 거대한 회랑의 조각상들, 사람이나 말, 수레며, 왕과 장군 등의 모사, 벽면 가득히 네 면의 회랑에, 또는 천장에 섬세하게 장식되어 앙코르 왓을 더욱 불가사의한 존재로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캄보디아는 불교 국가다. 불교 중에서도 소승불교를(小乘佛敎)를 신봉한다.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깨닫기를 원하는 보살도를 수행하는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자기만 깨닫겠다고 수행하는 사람들을 얕잡아 부른 데서 생긴 말이 소승불교(小乘佛敎)이다.
불교 이전에 인도의 종교는 인도의 토속신앙과 풍속과 브라만교가 융합한 민족종교인 힌두교가 있었다.
힌두교의 베다성전은 좁은 뜻의 종교가 아닌 사회제도와 문화 전반에 걸친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소승불교(小乘佛敎)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연히 사원의 건축이나 조각, 미술, 역사 문화까지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추론도 해본다. 인도의 영웅 ‘간디’까지도 카스트 신분을 버리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힌두교의 삼신(三神)인 창조의 브라흐마, 세계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를 불교와 융합 형태로 소승불교에 표현하였으며, 앙코르 왓 회랑의 조각상에도 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앙코르 왓의 탑 하나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라도 신비하다. 백성들의 피와 땀, 고통과 신음 위에 세워진 영화, 그러한 영화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태국으로부터 멸망당한 건 크메르 왕국이지 백성들이 아니다. 크메르 왕국이었던 이 땅도 자연도, 그들이 건설한 앙코르 왓도,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라도 그대로이지, 멸망한 건 크메르왕조 뿐이란 생각이 든다. 군사들의 투구에 12 간지의 동물을 새기고, 비슈누 신의 조화를 아무리 꿈꾸어도 시바신의 파괴와 생성은 계속되며, ‘씨암’(깨부순다)는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 불교의 十王의 49제와 비슷한 염마왕의 표현인 벽의 그림은 36가지의 죄업 중, 말로 짓는 죄가 가장 무겁다 한다. 우리 불교의 명부전(冥府殿)의 송제대왕 뒤 불화(佛畵)의 지옥도(地獄圖) 벽화, 혀를 느려 빼어 쟁기로 혓바닥을 갈고 있는 모습이 그림이 아닌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앙코르 왓 건축기술의 불가사의는 계절이나 날씨 등을 바꿔가며 측량을 해도 단 1cm의 오차가 없다는 것과 주변의 해자도 벽돌을 깔았다 한다. 건축물 자체가 늪에 지어졌는데, 모래, 자갈, 진흙 등으로 계속 반복하여 다져 지은 것이라 한다. 이는 선운사 본 절이 늪에 자갈과 숱으로 메워 지은 것이나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거북이 조각은 비슈누신이 거북으로 변하여 세상을 떠받치고 있음을 의미하며, 원숭이 장군은 세상을 창조한 브라흐만 신을 의미한단다. 기둥이 32개인데 용을 포함하여 힌두 33신을 의미한다. 우리 불교에 도리천의 33천과 비슷하며, 타종시 33번 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앙코르 왓에서 들어갔던 문으로 다시 나와 주변 쉼터에 앉아 야자수 1개의 물을 다 마셨다. 목이 컬컬하던 차의 야자수는 정말 시원한 꿀맛이었다.
앙코르 왓 보다 200년이나 앞서 지어졌다는 ‘프놈바겡’, 산이랄 것도 없는 70m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캄보디아 상이군경들이 아리랑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리랑 곡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엄지를 세워 보이며 춤도 추었다.
나중에 인천공항에서 고창으로 오는 버스 속에서 고창문학 초대 회장이신 ‘이상인’ 선생은 “아리랑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그때의 감회를 술회하셨다. 나 또한 앙코르 톰에서의 아리랑 연주를 우리 국력의 신장이 아닌가하고 감회가 새로웠었다.
이 나라 소년소녀들이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선물을 판다. 그냥 손만 내밀며 “원 달러, 천원만” 하고 조르는 어린 아이들, “주지 말라”고 하지만 차마 안 줄 수가 없다. 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긴 후예들이란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연주자들 앞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 소년소녀들의 손바닥에 천 원 짜리 한 장을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12.7.1)
※매루산(힌두교 신화에서 우주 중심에 서 있는 황금 산이다. 세계의 축(軸)인 그 산에는 신들이 살며, 산기슭이 히말라야이고, 남쪽으로는 인도의 옛 이름인 바라타바르사(바라타 아들들의 땅)가 뻗어있다는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