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독후감 황시엽의 [미스터 씨] 1.
시엽에게!
1962년 2월 경복고등학교 졸업한 지 벌써 60년도 더 지난 2월 네 책 7권이 동창 모임에 전달되어 받기를 원하는 친구에게 준다고 하여 신청하니 6번째란다. 하여간 책까지 받고 보니 학창시절 네 모습이 떠오르며 책 표지에 매달린 포도송이가 마치 옛이야기를 하나씩 매단 듯 또 작은 한 송이는 희미해져 가는 우리의 기억을 알려주는 듯 그려진 수묵화가 어쩜 대롱대롱 매달린 우리의 마음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특집 ‘야인시대 선친 황병관’이란 부제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듯 근육질 몸매가 예사롭지 않게 흥미를 끌어내고 계셨다. 앞표지 안쪽의 네 학력, 경력, 수상, 주소까지 보고 간단하게나마 네 삶의 깊이를 우선 가늠하게 되었다.
표지 안쪽 다음 페이지에는 영엽 형님이 너와 부친에 관한 인쇄된 안내 글이 일목요연하게 쓰여 있었다. 읽으면서 1952년에 부산에서 돌아가셨다는 글을 읽고 돌아가신 연세를 계산해 보고 아니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는지 궁금한 마음이 엄청 크게 다가왔다. 또 네가 열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마음고생 또한 컸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고 새로운 미국이란 나라로 이민을 떠나 화학과 졸업생답게 고무 기술교육을 이수하고 고무공장에 입사 후 품질 실험, 연구와 개발, 나아가 새로운 고무 제품까지 성공적 이끌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나라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큰 서점 교보문고에서 앱에서 <황시엽 미스터 씨>를 검색하면 네 책이 올라온다. 아직 유행을 탈 정도의 책은 아니지만 꾸준히 팔리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독서목록 상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서점 앱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도 6, 25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우리 집 10식구는 엄마 아버지와 형제자매가 여덟(5남 3녀)이었다. 아버지는 운전수로 서울 을지로 입구 식산은행 본점에서 부산 지점(용두산 기슭, 동광국민학교 바로 옆)으로 은행에 보관해 둔 물건(듣기로는 금덩이)을 싣고 피난 가셨고, 우리 집은 두 조로 나누어 엄마는 막내 1살짜리 남동생(49년 3월생) 업고, 형 수송국민학교 3학년(경복고 35회), 나 (수송국민학교 1학년), 넷이서 인천에서 배 타고 부산으로 갔고, 다른 조는 큰누나(만 나이 18살)가 인솔하여, 작은누나(16), 작은형(14)과 막내 여동생(3살) 네 명이 기차로 부산으로 갔다. 나는 7살로 우리가 어떻게 갔는지는 알지만, 큰누나가 어떻게 갔는지는 잘 모른다. 큰형은 군 입대 6.25 참전용사로 우리와 같이 피난 가지 않았다. 부산으로 간 식구는 하여간 아버지 은행을 찾아서 모였다. 갑자기 피난민이 몰려오니 주택난으로 은행 관사(부평동 4가 4번지 그 당시 은행장)인 넓은 마당이 있고 창고와 부속건물 그리고 우물이 있는 저택(일정 시대 식산은행 높은 일본 관리인의 집)의 창고를 넷으로 나누어 한 집씩 살았고 부속건물(방이 둘, 일정 시대 은행 두취(頭取, 현 은행장) 집 일꾼들이 살던 곳)에도 피난 온 사람들이 살았다. 마당에 변소(재래식 두 칸)가 있고 긴 도랑인 하수도가 있었고 그래도 집이 모자라니 허술하게나마 단칸방 집을 따로 2채나 더 지어 살았다. 새로 만든 판잣집도 모두 세 채이었지만 한 집은 피난민이 아니었다. 관사 뒤편에는 장작을 엄청 많이 쌓아놓아 그곳으로 올라가 철없던 나는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 장작은 은행 관리직 직원 집 연료 및 난방용이었다. 부산 용두산에 피난 수송피난국민학교가 생겨 2학년부터 4학년 1학기까지 2년 반을 지내고 1953년 7월 휴전협정 맺은 후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부산 동광국민학교 뒤쪽에 있는 용두산에는 큰 나무가 많지 않은 편이고 그 반대편 쪽 산에 피난 수송국민학교가 있었고 땅은 완전히 진흙 산이었다. 피난민이 많이 내려오니 집이 부족하여 용두산으로 올라가 종이상자부터 시작하여 움집같이 땅을 조금 편편하게 파내고 그곳에 작은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피난국민학교는 1951년 2학년 때에는 학생이 많지도 않았지만, 전쟁 중으로 교실을 지을만한 재력이 없어서 그냥 나무에 칠판을 걸고 책걸상도 없이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두꺼운 종이 화판을 끈으로 꿰어 어깨에 걸고 땅바닥에 앉아 교실도 없이 하늘 보며 수업을 했다. 3학년 때는 판자로 지은 교실이고 창문은 있었지만, 옆으로 여는 창이 아니고 아래쪽을 밖으로 밀어내는 창이었다. 교실 안에는 책걸상이 없이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앉았다. 다만 그 당시 남자 담임은 어디에서 구했는지 영화 촬영기를 갖고 오셔서 우리들 제기차기 놀이를 찍었다가 현상해서 나중에 영사기까지 가져와 흰 천으로 만든 화면에 영화처럼 제기 차는 우리들 모습을 보여주셨다. 점심은 각자 집에서 싸가지고 다녔는데 추우면 석유풍로(굵은 실로 굵은 끈처럼 된 심지 10개가 따로따로 연달아 하나씩 들어가는 원통형이고 심지가 녹아 없어지면 심지를 조금씩 올려 화기를 조절함)를 갖다 놓고 주전자에 물을 데워 주셨다. 4학년이 되니 교실마다 책걸상이 들어왔는데 책상은 땅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직사각형 긴 널빤지를 올려놓았고 의자도 마찬가지로 좀 낮게 만든 것뿐이었고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두 명씩 같이 앉았다. 그런 책걸상이 많아야 10줄 정도이었다. 넓은 땅이 없으니 편편한 곳을 찾아 교실을 하나씩 세웠으니 가까이 있기는 했지만 교실 배열은 일정하지 않았다. 화장실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냥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가로와 세로로 나무와 판자로 칸막이도 없는 바깥쪽만 가리개로 가린 곳이었다. 그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피난민을 위한 화장실을 만들었다. 소변은 깡통을 갖다 놓았지만, 대변은 나중에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형(경복 35회)이 바로 6학년으로 같이 다녔으니 학년마다 교실은 따로 있었다고 생각된다.
학교 시설도 문제지만 어린 나에게는 등하교 시 용두산에 있던 피난 수송국민학교로 걸어 다녔다. 낮은 산이지만 학교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많은 피난민이 오니 학교를 평지에 마련할 수 없어 산으로 올라간 것이고 교실을 지을 여력이 없었겠다. 3월에 개학했다면 부산이라도 날씨는 추웠을 것이고 비 오는 날에는 비를 가릴 교실이 없어 노천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 칠판이 있었으니, 분필도 있었을 것이고 지우개도 있었을 것이지만 세세한 것은 생각이 안 난다. 큰 운동장은커녕 작은 운동장도 없고 교실이 아니라 공부하려 모이는 칠판 걸린 나무까지 오르내렸지만, 비 오는 날이면 진흙 길이라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안 찧는 날이 드물어 언제나 엉덩이가 진흙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일반 피난민들도 용두산으로 올라가 땅을 대충 깎아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화장실은 집집마다 만들기 어려워 약간 긴 사각형으로 나무를 우물 정자식으로 깔아 앞뒤는 물론 옆으로도 칸막이가 없이 용변을 보는 식이었는데 그것도 돈을 받고 들어가는 식이었다. 지금처럼 화장실을 생각하면 안 된다.
부산 식산은행 지점은 돌로 잘 지은 건물이다. 영업장 건물은 일정 시대 때 지은 건물이고 길모퉁이에 있었다. 건물 앞쪽이 정면이라면 옆쪽으로도 길이고 건물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계단 4~5개 내려가게 낮게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건물 보일러실과 기능직 직원용 낮은 방이 길게 있었다. 피난 가서 당장 우리가 살 집이 없어 그곳에서 꽤 오래 살았던 기억이 난다. 은행 옆길을 조금 더 지나가면 바로 동광국민학교가 있었다. 물론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다만 우리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은 <♩♪♬ 동광 동광 거지 떼들이 깡통을 옆에 차고 수송학교로 들어오너라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사실 우리가 피난민 거지 떼이면서 동광국민학교 학생들을 놀리는 노래를 불렀다니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그리하여 내가 동광국민학교를 기억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동광국민학교에서는 어떻게 얼마나 많은 피난민 학생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해진다. 정식 학교이었으니 반마다 10명이고 20명이고 더 넣을 수는 있었겠지만, 전쟁통에 어떻게 많은 책걸상을 갑자기 마련했는지 모르겠다.
네 책 90쪽 [‘낮아짐’의 달인]에 ‘작가 X’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황석영(황수영)이 나오는 것 같아 잠시 이야기하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