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이호아에서 온 편지(5)
뚜엉이 끄덕였다. 누나 화홍이 변 하사와 집에 있다는 뜻이었다.
녀석은 뭔가 마뜩찮다는 표정이었다. 허 병장은 더 있을 기분이 아니어서 뚜엉에게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돌아섰다. 그때 마침 집 출입구의 휘장이 열리면서 변순태 하사가 밖으로 나왔다. 허 병장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당황해 했다. 그 뒤에서 휘장을 반쯤 열고 내대보던 화홍 또한 허 병장을 보자 얼른 휘장을 내리며 사라졌다.
“어, 허 병장!”
“아, 네, 선임하사님.”
“허 병장은 여기 자주 오는가 봐? 뚜엉하고 잘 아네.”
“아, 네, 어쩌다 몇 번…. 선임하사님도 자주 오시나 봐요?”
“나야 뭐 영외 순찰 차 안 가는 데가 있나.”
“아아, 네.”
두 사람은 거기서 차도까지 한 이백 미터쯤 걸어 나와서 지나가는 백마부대 차를 얻어 타고 파견대로 들어왔다. 허 병장은 퀴논 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파견대는 임시 막사로 지은 건물이지만 지붕이 높직하고 직사광선을 막을 수 있는 차일을 둘러친 시원스러운 기역자 건물이다. 입구에 조성된 화단에는 제법 어우러지게 핀 영산홍이 흐드러졌다. 마침 출입문으로 나오는 파견대장 황 상사에게 두 사람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며 귀대 보고를 했다.
“임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엉. 그런데 허 병장은 오후엔 쉬어도 되는데 왜 들어왔어. 한국에 있는 마누라와 딸내미 생각에 다른 데는 관심이 없는가 봐!”
“네, 그렇습니다.”
허 병장은 일부러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 * *
허 병장, 허동준은 편지 봉투에 적힌 화홍의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영어도 아니고 불어도 아니고 읽기가 쉽지 않은 베트남어는 아무래도 익숙지 않았다. 20년 전에 엉겁결에 파월하여 1년 반쯤 근무했지만 월남어를 교육받은 적이 없고 월남인을 상대로 하는 대민 업무를 본 적도 없으니, 월남어라면 영어식으로 억지로 뜯어 읽는 수준이다. 주소를 자세히 보니 마가 살던 집 즉 화홍이 살던 집 마을인 것 같았다. 어쨌든 옛날에 근무하던 투이호아로 일단 가 보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나트랑에서는 닌호아와 투이호아를 거쳐 퀴논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20년 전에 주로 군용 지프로 다니던 길인데,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많이 변하였을 줄 알았지만 전쟁 종식 후 아직 정치적 혼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인지 집이 더 많이 생긴 것도 아니고 농경지의 모습이 변한 것 같지도 않고 그저 그냥 그 모습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변화를 기대했던 허 병장은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성한 잡초 속에서 별로 실하지도 못한 벼가 겨우 이삭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논 뜰, 무슨 곡식을 심었는지도 모르게 잡동사니 풀이 우거져 있는 밭, 질서 없이 아무 나무나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들판….
허 병장은 화홍과 이런 들녘을 산책한 적이 있다. 길도 명확치 않은 숲속을 지나고 논 뜰을 지나고 밭둑을 지나 그냥 걸은 적이 있었다. 우연이었다. 허 병장이 근무를 끝내고 마의 집에 갔을 때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문이 다 열려 있고 늘 해먹에 누워서 흔들거리고 있던 뚜엉도 없었다. 허 병장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큰길가를 향해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화홍이 숲속에서 얼굴을 보이며,
“허 빙장님!”
하고 불렀다. 그리고 그 숲속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를 따라가니 명확치도 않은 숲길이 있고 논 뜰이 있고 밭둑이 있었다. 둘은 그냥 맥없이 걸었다. 화홍이 가는 대로 따라 걸었다. 숲속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고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은 맑았다. 앉을 자리가 좋은 데서 화홍은 걸음을 멈추고 앉았다. 허 병장도 옆에 앉았다. 화홍은 손가방을 열고 과자를 꺼내 놓았다. 군인 PX에서 나온 과자들이었다.
둘은 그것을 먹으며 한국어 영어 월남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주로 화홍이 한국에 대하여 묻는 것들이었다. 허 병장은 이러다가 정들 것 같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이 어른거렸다. 화홍에게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일어섰다. 화홍은 아쉬워하며 천천히 일어섰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