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 (3) 이길상
가. 이슬람교
(1)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
오늘날까지 이른바 세계적인 종교로 군림하고 있는 3대 종교, 즉 기독교(유대교를 포함한), 불교, 이슬람교의 발상지를 보면, 북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를 제외한 두 가지 종교가 모두 서아시아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파 지역을 따라 가 보면, 페쇄적인 유일신앙의 유다교는 이민족에게 침투되지 못하여 자기 들 만의 민족신앙으로 굳어졌고, 보편성을 강조한 기독교는 출생지에서는 빛을 잃고 유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며, 불교 역시 출생지에서는 흔적도 없이 쫓겨났으나,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어 교세를 넓혔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출생지에서부터 전파지역까지 시종일관 교세를 넓혀온 저력을 지니고 있다.
다시 이슬람의 전파지역을 따라 가보면, 아리비아에서 출발하여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의 순(順)으로 이슬람화 시키고, 이어서 북아프리카의 사막지대를 따라 서진하여 이곳의 베르베르족(백인 유목민의 총칭)과 70여년간 투쟁 끝에 이들을 복속시키고,
다시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상륙하여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711) 그곳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다시 피레네산맥을 넘어 갈리아지방 까지 들어가 교회와 수도원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쫓겨나고, 아프리카 북부에서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어 나이지리아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 지역의 자연적인 공통점은 위도상으로 적도에 가깝고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에 해당하며, 주민들의 생업은 유목(遊牧)과 대상(隊商)을 포함한 목축과 상업이고, 농경은 오아시스를 중심한 일부지역에서 제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곳이다.
이래서 유럽인들은 이들을 사라센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슬람의 서진은 정통칼리프시대 때부터 시작되며, 한편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유목지대를 거치면서 돌궐(투르크)과 위구르족을 이슬람화 시키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이어 지는데 이곳 역시 사막이거나 반사막화 지대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러다가 15세기 까지는 다시 동진하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까지 세력을 넓혀 갔다. 이 이슬람교의 서진(西進)은 우마이야왕조 때, 동진(東進)은 아바스왕조 때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주된 전파지역은 사막이거나 사막화 지대이고, 여기에서 생활하는 유목민 사회가 일차적으로 이슬람화 되었다. 유목민 사회란 대개는 부족단위로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의 생활을 하거나, 낙타에 짐을 싣고 대상(隊商)을 이루어 이익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도는 유랑집단 이다.
이런 상황에게 국가적인 치안이란 있을 수도 기대 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강자가 약자의 것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잠시라도 경계의 긴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고 부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부족마다의 수호신을 받들고 심리적인 불안은 수호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간에도 뺐고 빼앗기는 악순환이 진저리가 나지만, 그러나 그것을 막을 방법이란 어떤 형태든 하나의 단일 사회로 통합하지 않고는 불가능했고, 이러한 단일 사회로 통합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이슬람교이고 이 엄청난 과업을 수행한 것이 예언자라고 부르는 마호메트였다.
따라서 이슬람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종교적인 인식이나 생각과는 달리, 단순한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개인생활에서부터 국가 문제에 이르기 까지 인간이 인간답게 평화적으로 사는 방법과, 인간 존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사회, 물질, 도덕, 경제, 정치, 법률, 문화, 국가문제에 이르기 까지 안내의 구실을 하는 규범이고 도덕이며, 법이기도 하다.
그들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을 모시고, 그 신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안 이상, 그 신의 말씀(법)에 복종하기로 서로가 약속하고, 그 약속은 신의 이름으로 철저히 지켜져야 서로간의 이익으로 되 돌아 오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은 종교와 세속 쌍방에 걸쳐 합일된 생활방식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이슬람교
이슬람의 뜻은“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歸依)”라는 것이라고 하며, 그 알라의 가르침은 모두 천사(天使) 카브리엘을 통하여 아랍어(아라비아어)로 계시되었고
마호메트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여 아랍권을 이루게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슬람교도는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 씩 아랍어로 된 신앙고백을 해야 되는데 그 내용은 매우 간략하여
처음에는“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라고 하다가, 후에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聖句:카리마)를 외우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고 그것은 나태(懶怠)하기 쉬운 인간의 속성을 신의 이름으로 묶어두자는 것이기도 하다.
신을 믿는데 조건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신이 시키는 데로 따라야 되는데, 그것은 최후의 심판 날과, 천사들과, 코란과,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을 말하며 이러한,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하며, 이러한 믿음을 실천하고 알라에 귀의하기 위해서는 알라 이외에 아무 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예배·희사(喜捨)·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이슬람"이라고 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모슬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역사는 6~7세기경 아랍에 살고 있었던 마호메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슬람교인들은 주장한다.
"태초에 하나님이..."으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 코란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아가 아니라 알라라고 쓰고 있다는 것이고, 알라에 대한 학문적 해석도 단일신을 의미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랍어에서 알은 관사에 불과하고 라는 유일신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절대불변의 경전인 코란은 마호메트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유일신 알라가 마호메트에게 계시한 말을 사도로서 읽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구원의 빛을 주기 위해서 구세주로 왔다면 알라는 그의 사도인 마호메트를 통해서 인간의 법을 내렸고, 마호메트가 읽었던 코란은 알라의 말씀으로 신성시되지만, 예언자 자신은 같은 인간일 따름이고 신은 아니며, 신의 사도로서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여러 가지 의무를 부과하여 베드윈(사막의 사람들) 사회를 통합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대에서 중세로 이관되는 시대 상황이 종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의 재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세 유럽에서 페데의 폐단을 버리고 도시전체가 나아가서는 유럽전체가 집단 페데를 택하여 외부세계로 진출한 것과 같이 이 사막의 베드윈 사회도 개인간 부족간의 폭력을 배제하고 이슬람이라는 교단조직하에 하나가 되어 외부 세계로의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이슬람교의 신앙
이슬람 신앙은 모두가 코란에 근거하는데, 크게 지(知), 언(言), 행(行)의 세가지로 요약된다. 지(知)는 알라의 계시(啓示)를 잘 아는 것이고, 언(言)은 마음으로 알고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며, 행(行)은 이슬람교도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 즉 행동을 말한다.
이 행(行)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다섯 개의 기둥 즉 오주(五柱)라 하고, 이 오주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근행(勤行 : 이바다트)이라고 하며, 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斷食)만을 중요한 근행으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첫째 샤하다(증언, 고백)라고 하는 것으로“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신도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것을 입으로 외워야 한다.
둘 째, 살라트(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메카를 향해서 하는데 그 시각은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에 하며,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이슬람교 사원)에서 집단예배를 한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를 "두아"라고 부른다.
셋 째, 자카트(희사:喜捨)는 신자로서 교단에 바치는 종교세(?)로서,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데 필요 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넷 째, 샤움(단식)은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한 달동안(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해야 된다. 한 달 간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다섯 째, 하주(순례)는 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고,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
메카 다음 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메트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도 많다.
(4) 교도의 일상생활
이슬람 세계가 아라비아반도를 벗어나 많은 지역으로 전파함에 따라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들 이민족은 각각의 관습과 전통이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이슬람사회가 복잡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슬람의 종교법(샤리아)으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샤리아라고 부르는 이 종교법의 근간은 코란과 하디스(Hadith)인데, 코란은 알라의 가르침을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달된 이슬람교의 경전이고, 하디스(Hadith)는 마호메트의 언행(言行:수나)이 그의 사후(死後) 여러 형태의 이야기로 전해오던 전승(傳承)을 말한다.
이슬람교의 유일한 경전은 코란이지만, 코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호메트의 언행(수나)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이슬람법(샤리아)도 코란을 기초로 하지만, 코란에 언급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는 자연적으로 수나를 기초로 했다.
이것이 이슬람세계의 신학과 법학의 출발이다. 그런데 전승된 이야기라는 게 일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들었다 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와전된 것이 많기 때문에, 각자의 유리한 입장에서 해석하다보니 그 전말(顚末)에 모순성이 들어 나게 되었고, 이래서 8세기 중엽 이후는 학자 사이에 하디스 비판이 일고, 그 진짜와 가짜(眞僞)를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이래서 이른바 하디스학(學)이라는게 등장하게 되었다.
그 진위를 가리는 방법으로, 하디스의 내용과 전승자의 계보(系譜)를 추적하는 두 방향에서 실시하여 모든 하디스는 전승자를 명기하도록 하였고, 이것이 9세기 중엽에 와서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는데, 이래서 편찬된 하디스집(集)을 육서(六書) 또는 6전승집이라 하며, 모두 사히흐집(集) 2권과 수난(Su-nan)의 서(書) 45권으로 되어 있다.
무릇, 무슬림이 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되고, 인간의 행위는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 있는데,
① 어떤 일을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어떤 일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어떤 일을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어떤 일을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어떤 일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 등이 있는데 이를 하람(Haram:이슬람법 용어)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된다고 하며, 메카의 순례는 하람②, 코란의 독송은 하람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변칙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도 있고 중세 이래 모스크(이슬람 교회)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세습 칼리프 - 우마이야 왕조(661 ~ 750)
(1) 무야위야의 세습칼리프 만들기
시핀의 전투에서 4대 정통칼리프 알리와 타협하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돌아온 무야위야는 스스로 칼리프에 취임했다가(660), 이듬해 알리가 암살당하고,
알리의 큰 아들 알 핫산이 칼리프로 추대되자 알 핫산을 많은 연금을 주어 메디나로 은퇴시키고 정식으로 칼리프가 되었다(661)
그의 세력기반은 오랫동안 시리아의 총독을 하였기 때문에 시리아 지방이고 따라서 칼리프의 취임식은 예루살렘에서 했으나, 수부(首府)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정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세습왕조를 열었다.
이 시대 이슬람의 주요 지역은 아라비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 이였는데 원래 이란과 이라크는 페르시아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곳이고, 시리아와 이집트는 동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곳으로 두 지역의 문화적인 차이는 매우 컸었다.
따라서 무야위야의 다마스쿠스정권은 시리아 주민들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라크의 바스라(Basra)와 쿠파(Kufa) 두 도시는 이 새로운 칼리프에 대해서 반항적이었으며, 특히 쿠파는 알리의 편이되어 무야위야와 싸운 사람들의 본거지고, 아직도 알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무야위가가 통치에 가장 고심한 것은 이라크의 지배였다.
더구나 바스라와 쿠파는 예루살렘이나 다마스쿠스처럼 전통있는 도시가 아니고, 이슬람의 성전(聖戰)을 위한 군사기지로 새로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 신흥도시에는 힘과 고집이 센 아랍인들이 칼을 차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대낮에도 강도와 살인 등을 자행하여 공포와 암흑의 무법지대가 되어 있었다.
이 때 이 지방을 다스리던 사람은 우마위야 집안의 이븐 아미르(Ibn Amir)였는데, 그는 온건하여 이슬람의 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이슬람의 형법에는 도둑질을 하면 그 손을 자르고, 그래도 다시 도둑질을 하면 발을 자르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미르는 매우 인정 많은 사람으로서, 그는 도둑이라 해서 사람의 손발을 자르면 그 부모들로부터 원망을 듣는다 하여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능한 관료의 표본이 되어 쫓겨 났다고 하는데, 인정과 통치를 구분하지 못하면 유능한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통해서 같은 이치었던 것이다.
이에 무아위야는 정통 칼리프 우마르 때부터 활약한 지야드를 이 두 곳의 지사로 임명하여 치안에 힘쓰자 바스라는 일약 이슬람의 문화도시가 되어 수많은 학자와 문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유능한 관리였던 지야드는 사생아(私生兒)였으나,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이라크가 그런데로 정돈되자 칼리프 무아위야는 지금까지의 전통을 깨고 칼리프의 자리를 그의 맏아들 야지드 1세(Yazid 1 : 680 ~ 684)에게 세습하기 위한 공작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가 처음 단행한 것은 예언자의 무덤이 있고, 학식있는 사람들이 많은 메디나 시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종제(從弟) 마르완 1세(Marwan 1 : 후에 4대 칼리프가 됨)가 메디나의 장관으로 있는 것을 기화로 해서 자신이 직접 메디나를 방문, 그의 아들을 다음 칼리프로 앉히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그 반대가 너무나 심했으므로, 일단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각주의 장관들을 차례로 매수하여 메디나를 고립시킨 후 1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메디나로 들어가 반대자들을 위협하여 동의를 얻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를 잇게 되어 세습제가 성립되었다(680)
야지드의 모후 마이슨은 시리아지방의 팔미라를 근거지로 살고 있었던 유력한 유목민 카르부족 출신이 였는데, 황막(荒漠)한 사막에서 성장한 그녀는 사막에 대한 미련과 야성(野性)을 버리지 못하여 아들 야지드 1세를 데리고 다마스쿠스의 궁전을 떠나 모래 먼지 이는 사막을 돌아다니며 유목의 생활했다.
따라서 야지드1세는 전형적인 바다위(베드윈:Badawin)로 자랐고, 이런 교육의 영향은 칼리프가 되었을 때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치세기간은 4년에 불과했으나 그 행적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의 두 가지로 나타나 시리아나 비잔틴제국에서는 유능한 군주로 평가되었으나, 이슬람세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2) 알 후사인의 죽음과 성지 카라바라
그가 극악무도(極惡無道)한 폭군으로 기록된 것은 예언자의 외손자이며, 예언자의 신성한 혈통을 이은 알리의 둘 째 아들 알 후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이슬람의 성전(聖殿)인 메카의 카바신전을 파괴했다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자초지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야지드가 칼리프가 되자 메디나의 반대파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곳의 지사에게 콩알만한 크기의 밀서를 보내어 반대자들에게 충성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지사는 알 후사인을 비롯해서 반대파를 체포하려 하자 후사인은 알 주바르의 아들 압둘라와 함께 메카로 도망했고, 이 사실이 이라크의 쿠파시민들에게 알려지자, 쿠파시민들은 알 후사인을 칼리프로 세우고 야지드에 대항할 것을 맹세하는 집단이 나타났다.
이에 알 후사인은 뜻있는 사람들의 충고를 물리치고, 200 여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를 떠나 쿠파로 갔는데, 당시 쿠파의 지사는 앞서 얘기한 유능한 관료였던 지야드의 아들이 맞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소굴로 스스로 찾아가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쿠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쿠파 북방의 유프라테스강변의 카라바라 들판에서 시리아군이 주축이 된 칼리프 야지드1세의 군에게 포위되었다가 양 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알 후사인 일행은 모조리 도륙(屠戮)되었고, 다행이 그의 어린 아들 알리와 두 딸은 생명을 보존하여 메디나로 돌아 갔다.
메디나로 무사히 돌아온 이 어린 알리의 어머니는 사산조 최후의 왕인 아즈디기르드의 딸이 였기 때문에 이란의 혈통을 잇고 있었고, 후세에 이란 사람들이 이 알리의 직계를 진짜 이맘(칼리프 혹은 교주)으로 생각하여 시아파(이슬람의 분파)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을 칼리프로 추대할 때, 페르시아의 왕통을 이었다 해서 한층 친근감을 느꼈다.
이 카르바라의 참극은 오랜 기간 시아파(Shiites) 이슬람교도의 통한사(痛恨史)가 되어, 지금도 매년 10월의 첫 열흘 동안 알 후사인을 추도하는 제사를 지내며, 카르바라는 시아파의 성지(聖地)가 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후계자(대행자)를 의미하는 여러 칼리프들이, 예언자의 언행(수나)을 따른다 하여 수니파라고 하는데 반하여, 이에 대항하여 분파의 의미를 갖는 것을 시아파라고 하고, 그 중심이 된 것은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후손들이 정당한 칼리프의 계승 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서, 그 숫자는 전체 이슬람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하나 그 본거지가 이란이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1980년부터 시작하여 8년 간의 지루한 이란-이라크의 전쟁의 원인도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에서 찾기도 했다.
(3) 카바신전의 파괴
알 후사인이 순난을 당하자, 메카에 있던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에게 칼리프가 될 기회가 주어졌는데, 압둘라의 아버지 알 주바이르는 알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을 때 반대의 선봉이 되었던 사람으로서 낙타전쟁 때 사망하였고, 그의 아내는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딸로서, 예언자의 애처(愛妻) 아이샤의 배다른 언니 이스마 였다. 예언자가 메카의 박해를 피해 아부 쿠바이스산 동굴에 숨어 지낼 때 허리끈으로 음식을 매달아 동굴 속에 넣어준 그 사람이다. 우리식으로 촌수를 따지면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는 아이샤의 생질(甥姪)이 되며, 알 주바이르와 예언자는 동서(同壻)간이 된다.
그러면 예언자의 종제(從弟)이자 사위인 알리와 알 주바이르와는 어떻게 되는가? 동서의 사촌동생, 아니면 동서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이며 모계와 부계를 따지지 않는 이슬람의 풍속으로 우리들과 같은 촌수(寸數)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마호메트건 알리건 알 주바이르건 모두 코레이시족의 하심가 출신이기 때문에 모두가 가까운 친척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메디나에서는 이변이 일어나 다마스쿠스의 칼리프 야지드 1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야지드1세의 출신 집안인 우마이야 사람들의 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682) 이에 1천명에 달하는 우마이야집안 사람들은 사태가 급박해 지자 마르완을 사자로 다마스쿠스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야지드 1세에게 알렸다.
이에 야지드 1세는 시리아출신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메디나 정벌에 나섰다.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시리아는 로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곳으로 문화적인 인식이 메카나 메디나와는 달라서 무차별 메디나를 공격하였다. 이에 압둘라는 메디나를 벗어나 메카로 들어 갔는데 설마 성지인 메카야 공격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시리아군은 메카의 외각에 진을 치고, 노포(弩砲)를 사정없이 퍼부어 드디어 카바신전이 불타버렸다(683. 10. 31) 그리고 나서 27일 후 야지드 1세가 급사했고, 이 부고에 접한 시리아군은 서둘러 철수하였는데, 이에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는 칼리프로 추대되었고 그의 세력은 시리아를 공격할 만큼 강대해 져서, 우마이야왕조로서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더구나 우마이야왕조에서는 야지드의 아들이 칼리프가 되었으나 취임 3개월만에 병사하자 수도 다마스쿠스 조차 반란의 무리들에게 지배당하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우마이야왕조를 재건한 것은 마르완이다.
(4) 칼리프 마리완과 그의 가계(家系)
우마이야왕조의 4대 칼리프로 취임한(684) 마르완은 수도 다마스쿠스를 회복하고 우마이야왕조를 재건하여, 무야위야에 의해서 수립된 아부 수피얀계의 칼리프는 막을 내리고 이 후 그의 자손들에 의해서 우마이야왕조가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칼리프가 된지 1년도 못되어 급사하였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압둘 말리크(Abd-al Malik 685 ~ 705)가 이 왕조의 5대 칼리프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영명의 군주로서 알 핫자이자와 이븐 유수프 같은 현신을 등용하여 우마이야왕조의 중흥(中興)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타이프의 사키프족 출신의 핫자이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그의 아버지와 함께 흙 파기 돌 나르기 등의 노예노동과 글방 선생을 했다는 것이다.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지금은 비록 격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사회에서는 식자로서, 혹은 자녀의 스승으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이 시기의 이곳에서는 노예나 몰락한 사람들이 하는 천한 직업이었다.
그래서 글방 선생을 골 빈 양에 비유하기도 했고, 또 세상에는 무지(無智)한 계급 세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물레 장이 한 여인의 지혜는 70명의 방적 공의 그것과 맞먹고, 한 방적 공의 지혜는 70명의 글방선생의 지혜와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형편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전통의 영향인지 지금도 이들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의외로 문맹자가 많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고, 물건을 사고 고액권으로 대금을 지불하고 거스름 돈을 받아 보면, 곱셈은 고사하고 뺄셈도 하지 못하여 모든 것을 덧셈만으로 계산하는 이상한(?) 광경을 자주 불 수 있다. 이런 것은 자동계산대가 없는 유럽의 시골지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 현지의 안내자들은 열심히 설명하나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핫자이자라는 사람은 당시 이슬람세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식자(識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으나, 그는 오로지 출세를 위해서 칼리프에게 개 같은 충성을 바쳤던 것이다. 마르완이 일찍 병사하자 그의 아들 압둘 말리크에게 발탁되어, 칼리프의 권세를 업고 이라크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이렇게 해서 이라크가 안정을 찾게 되자 메카를 근거로 하여 칼리프를 칭하고 있었던 압둘라 이븐 알 주바이르(Abdullah ibn al-Zubayr)와 결판을 내기 위하여 원정하였을 때는 그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아랍권에서 인명에 붙이는 "이븐"은 아무개 혹은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전에 밝힌 것과 같다. 즉 "이븐 알 주바이르"라고 하면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아무개가 되고, "압둘라 이븐 알 주바이르"라고 하면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의 뜻이라고 한다.
시리아군이 주축을 이룬 핫자이자가 이끈 원정군은 메카를 포위하여 카바신전을 중심으로 양측이 결전을 벌여 드디어 메카가 정복되고, 이로써 아라비아가 재통일 되었다(692. 10) 그 후 핫자이자는 이라크의 총독이 되어 이 지방은 다스리게 되었는데,
당시 이라크의 총독은 이라크 뿐만 아니라 옛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중요한 자리였으며, 특히 이란은 문화적으로 아라비아에 앞서 있기 때문에 아직도 칼리프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에 핫자이자는 총독이 되어 그의 철화(鐵火)같은 모진 정치가 이라크 이동(以東)의 천지를 덮어, 연일 피의 비가 쏟아졌고 벌판은 사람의 해골과 뼈다귀로 가득 찼다.
이러한 그의 20년간 동방통치는 그가 죽음으로서 끝났는데(714. 6), 그의 부보(訃報)를 접한 이라크를 비롯한 방방곡곡에서는 감사의 기도소리가 진동하였다. 그가 악한 총독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마이야왕조의 골칫거리를 해결하고 왕조를 재건하는 악역을 맡았던 훌륭한 관료였다고 후세의 사가는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핫자이자가 활약한 이 시기, 즉 5대 칼리프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 6대 칼리프 왈리드 1세(705 ~ 715) 때가 우마이야왕조의 전성기로서,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복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지브로울트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가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711)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을 침범, 궁재 샤를 마르텔에게 패하여(732), 유럽지배의 꿈은 좌절되었으나,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문화를 전파시켰고,
한편 메카의 카바신전을 재건하고(692), 이어서 알라도 크리스트와 같이 훌륭한 신전(神殿)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메디나,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카이로 등지에 비잔틴의 장인(匠人)들을 불러 들여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스크(이슬람의 사원)를 세웠다.
왈리드 1세 때부터 칼리프는 아라비아의 족장풍에서 벗어나 제왕(帝王)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이후에도 우리들이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비슷한 이름을 가진 칼리프가 7명이 더 있다.
그러나 시리아를 거점으로 했던 흰색 깃발의 우마이야왕조는, 호라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이란계와 결탁한 아바스왕조의 검은 색 깃발에게 왕조의 자리를 일단 물려주었고, 그 후손들은 이베리아반도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후 우마이야왕조를 건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