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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춘천UBF 여름수양회 주제2강
말씀/ 요한복음 9:1-7
요절/ 요한복음 9:5
세상의 빛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사람들은 어두운 존재 보다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각종 이름에 빛 광(光)자가 많이 들어갑니다. 프로야구 투수 중에 김광현이 있고 U20 월드컵의 준우승의 주역인 골키퍼 이광연이 있습니다. 가수 김광석, 개몽 소설가 춘원 이광수, 영국 김찰스선교사님의 본명은 김광림입니다. 지역이름에도 광주, 광명, 광교 등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남쪽 문을 광화문(光化門)이라고 합니다. 세종 7년에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볼 때 많은 사람들이 밝고 빛나는 삶이 아니라 어둡고 우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힘든 시대에 많은 청년들이 3포, 5포 하면서 운명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노후문제로 미래를 불안해하는 부모세대들이 있습니다. 인간조건의 여러 한계들 앞에서 두려움과 절망으로 내면이 어두운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이런 어둠을 벗고 밝고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어두운 상황에서도 빛의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운명적이고 어두운 제자들의 생각에 빛을 주십니다. 또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세상의 빛이 되시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진정으로 ‘광(光)’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생각하게 하심으로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지였습니다.(8절) 아마도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길가에 앉아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입니다요. 한 푼만 주세요.”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눈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은 정보의 90% 이상을 눈으로 얻습니다. 눈이 있기에 밤하늘의 영롱한 별도 붉게 물든 저녁노을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성경 말씀을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싱스프레이션 시연자로 갑자기 나가도 인도자를 보면서 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마치 불 꺼진 지하실에 사는 사람처럼 날 때부터 소리와 감각에만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직장을 잡기가 어려워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를 보는 제자들은 고구마 먹고 물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속이 답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질문은 질문자의 사고의 틀과 마음 상태를 반영합니다. 제자들은 사람의 불행이 죄의 결과라는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죄 때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모의 죄 때문이라면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은 너무 가혹하신 것 같았습니다. 맹인 된 자를 보는 그들의 생각은 인과응보 적이고 과거 지향적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다같이 3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불행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율법적 사고의 좁은 틀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안에서 보셨습니다. 말구유에 낮아져 운명적인 자들과 함께 하러 오신 예수님 자신 속에서 보셨습니다. 과거의 그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될 현재와 미래의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통념과 율법에 갇힌 어두운 제자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빛의 생각을 비추셨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본문의 맹인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하는 제자들의 말을 들었을 때 원인 모를 죄책감과 슬픔에 짓눌렸습니다. “적선하지 않을 거면 그냥 갈 것이지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며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문제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인식의 눈이 밝고 온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습니다. 불자도 아닌데 인생의 역경과 질병을 만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의 업보가 많아서 이런 일을 당하나” 생각합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고 자식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팔자타령을 하는 어머니들을 많이 봅니다. IMF와 금융위기를 겪고 취업절벽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 중에는 “이것이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인가? 시대를 잘못 맞춰 태어난 내 죄인가? 무능한 정부나 기성세대 때문인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회나 인간이 당하는 불행은 무조건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불행을 통해 겸손하게 하시고 구원의 주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고 운명을 극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이는 요즘 흔히 말하는 희망고문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밝고 온전한 시각을 회복하시는 빛의 역사입니다.
현재 전주 2부 UBF를 섬기고 전주교육대학교 교수로 있는 장아브라함목자님은 어릴 적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목자님은 이로 인해 절망과 열등감과 트라우마가 심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는 하루도 다리 생각을 잊을 수 없어 절의 보살에게 물어 보았는데 “네 다리는 조상들의 업보의 결과이다. 너는 그 저주를 받아서 다리가 불편한 것이다.”하는 말을 듣고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철학과 술에 빠져 보았지만 해답은 못 얻고 폐렴만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구의 초대로 UBF 수양회에 와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빛은 그의 내면에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장애가 오히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주님의 뜻임을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운명에 도전하여 미술교육과 교수가 되고 2017년에는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서 <하늘에서 내려와…….>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은혜를 감당하고자 지난 30년 동안 일본과 전주의 많은 대학생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적인 생각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생각게 하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둘째, 영적인 눈을 떠지게 하고 생명을 주심으로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일반적으로 일은 낮에 합니다. 밤에는 쉬고 자야 합니다. 밤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주로 도선생들입니다. 이처럼 하루에 낮에 해당하는 생명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밤이 와서 육체의 생명이 끝이 나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은 Niv 성경으로 “We MUST do the work of God”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입안에서 우물우물하시더니 갑자기 땅에 침을 ‘퉤’, ‘퉤’ 뱉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 중에 입에 먼지가 들어갔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침과 흙을 손에 모으시더니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안경 알 만한 머드팩을 만드시더니 뚝뚝 떼어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평소에 지적인체 하고 깔끔을 떠는 빌립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 얼굴에 주름이 잡혔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고치시지 않으시고 굳이 이렇게 일 하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에게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진흙 터치를 받은 맹인은 갑자기 눈이 서늘해 졌습니다. 뭔가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이 들렸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에 그는 단순하게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냥 적선이나 해 주세요”, “기왕 고치실 거면 그냥 여기서 바로 고쳐 주세요”, “저를 실로암 못으로 데려다 줄 사람이 없는 데요”하며 불평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가는 길에 넘어지고 부딪치기도 하였지만 끝내 실로암 못에 와서 얼굴을 씻었습니다. 이때 눈에 진흙이 씻겨 내려가며 시신경들이 살아났습니다. 눈꺼풀이 열리고 실로암 맑은 물이 보였습니다. 어른거리는 물에 비추어진 잘 생긴 한 사나이도 보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흥분되어 소리쳤습니다. “보인다. 보여! 내 눈이 보인다 할렐루야!” 그는 너무나 감사하여 찬양하였습니다. “오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날 때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5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로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빛은 어둠을 떠나게 하고 참 모습을 드러냅니다. 빛은 질서와 생명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세상의 빛 예수님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어둠의 문제는 다양합니다. 가난으로 인한 슬픔, 가정불화로 인한 상처, 실패로 인한 열등감, 성적인 방황으로 인한 수치심. 운명적 인간조건으로 인한 절망의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빛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밝고 따뜻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남편의 사랑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이 이 예수님의 빛을 받았을 때 영생수가 샘솟는 하늘나라의 황공주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의 핍박과 내세울 것 없는 인간조건에 위축된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 예수님이 비추었을 때 온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빛의 전사들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영적으로 맹인된 자들의 참 빛이 되셔서 그 눈을 뜨게 하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로수 등을 햇빛으로 착각하여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생명주지 못하는 거짓된 빛을 향해 살아갑니다. 이럴수록 영적인 눈은 더욱 멀게 됩니다. 돈에 눈이 멀고, 남친 여친에 눈이 멀고, 인간적인 꿈에 눈이 멀고, 게임에 눈먼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눈먼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영적인 눈을 뜨고 생명을 충만하게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잠시 스마트폰을 끄고 조용히 세상의 빛 예수님께 나아가면 달라집니다. 내가 어둠 가운데 있는 자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세상의 빛 예수님을 영접하면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됩니다. 죄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죽고 심판 받을 나의 실존이 보이게 됩니다. 이런 나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보이게 됩니다. 나의 죄 때문에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몸을 찢으시고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게 됩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나의 모든 열등감과 두려움과 성적 수치심과 운명주의가 치료되고 생명을 얻게 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만족과 기쁨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가 이번 수양회를 통하여 세상의 빛 예수님을 심령에 영접함으로 영적인 눈을 밝히 뜨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보고 누리는 빛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믿음을 심으심으로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8-41)
8절~41절 까지는 맹인이 바리새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이런 그를 다시 만나 주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 맹인 거지가 저희 공동체에 있었다면 카톡방에 축하 메시지로 도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 이렇게 놀라운 기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세상의 빛 예수님, 그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세요.” 그런데 맹인 거지를 알던 이웃들은 분위기가 아주 썰렁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눈뜬 맹인이 맹인 거지 맞다 아니다 논쟁을 하였습니다. 답답한 그는 “내가 그라.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였다.” 분명히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묻고 부모를 불러 또 묻고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그를 불러 회유하고 또 물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팩트 체크도 한두 번이지 바리새인들은 왜 계속 묻는 것입니까? 이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쳤다는 율법주의와 교만과 아집에 갇혀서 예수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이었으나 영적으로는 맹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 사람에게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회유하였습니다. 권세를 가진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나올 때 “알겠어요. 그런가 보네요. 하나님께 영광을~”하고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냉담한 이웃들을 속에서도, 회유와 핍박까지 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장님으로 태어나 거지로 비참하게 살았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밝히 보게 되었다는 한 가지 아는 것을 그는 견고히 붙들었습니다. 이때 어떤 냉담한 반응과 회유와 핍박을 이기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 때 은혜를 엄청나게 받고 영적인 눈을 떠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저 UBF 수양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어요. 이제 예수 믿고 교회 다닐게요.” 하면 가족들은 본문의 이웃들처럼 “어 그러니, 너무 깊이 빠지진 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낙심과 회의가 들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한 가지 아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생의 샘물이시다”, “예수님은 나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신 세상의 빛이시다” 이때 냉소와 회의와 핍박을 이기고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뜬 소경을 출교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예수님은 핍박과 역경 가운데서 그에게 믿음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에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하였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크게 뜨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난 받는 자들에게 믿음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때 감추인 천국 보화 얻게 되고 힘든 세상을 이기게 되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핍박과 유혹이 많은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의 빛을 비추사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토록 도와주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서울 변두리 가난한 집에 막내로 태어나 자존감이 매우 낮았습니다. 또 중1때 IQ테스트 받으면서 IQ 운명주의의 어둠이 깊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무리 노력해도 잘할 수 없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장래에 대해서 밝은 꿈을 꿀 수 없었습니다. 이런 어두운 인생에 세상의 빛 예수님은 UBF 목자님과 1:1 성경공부를 통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창세기 1:31절 “하나님이 지으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말씀의 빛이 제 심령에 임했습니다. 가난 가운데 태어난 것, 적당한 IQ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세상의 빛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실 때 학업이 어렵지 않았고 학생목자가 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 물질자립 하며 춘천 4개 대학에 복음을 증거하고 믿음으로 결혼하고 자녀도 낳고 호주유학생 선교사로 쓰임도 받았습니다. 저는 운명적인 인간조건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의 빛 예수님 열심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50을 바라보는 학사목자이지만 음악역사, 제자양성역사, 말씀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눈 뜬 맹인처럼 고난과 역경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 물질적인 어려움, 인간적인 갈등, 수고한 만큼 열매가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를 운명과 정욕의 깊은 어둠에서 구원해 주신 한 가지 아는 것을 붙들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역경과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시기보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믿음이 생길 때 문제는 작아지고 인내하며 극복할 힘이 생겼습니다. 문제를 통해 내적, 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참 소망을 가지고 사는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같이 운명적인 죄인에게 구원하시고자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세상의 빛 예수님은 우리를 생각의 어둠에서 영적인 어둠에서 핍박의 어둠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저희가 세상의 빛 예수님을 심령으로 영접하여 밝고 소망이 넘치는 인생 운명을 이기고 개척하는 인생 믿음으로 사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김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