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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아 (2)—②
— [국제퇴계학연구회] 제5회 유교문화 유적답사
2022.08.25.(목)~08.27.(토)14일간)
* [호서유학의 유적 답사] (제2일) 8월 26일(금요일) 오후
○ 면암 최익현 선생 묘 (免庵崔益鉉先生墓)
예산 추사고택 인근에서 점식식사를 한 후, 예산읍과 예당저수지를 경유하여, 다음 탐방지인 ‘면암 최익현선생 묘소’로 향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619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예당저수지에서 멀지 않은 내상산 남쪽 산록에 있다. 선생이 1907년 대마도(對馬島)에서 돌아가신 후, 그 유해가 고국에 돌아와 처음 논산시 노성면(魯城面)의 국도변에 묘를 썼는데, 참배객이 몰려들자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예당저수지 서쪽 호반의 619번 지방도로에서 얼마 가지 않은 지점, 묘소 입구에 차를 세웠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내상산 아래에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태의비(太義碑)가 우뚝 서 있다. 이 태의비는 1972년 동짓달 선생의 66주기를 맞아 세운 것이다. 태의비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대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碑身), 이수(螭首,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직사각형의 2단의 지대석 위에 올려져 있고, 비신의 전면에 ‘勉庵崔益鉉先生春秋太義碑’(면암최익현선생춘추태의비)라 새겨져 있다. 비신의 나머지 3면에는 면암 선생에 대한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다. 당시 문화재위원장인 하성(霞城) 이선근(李瑄根)이 짓고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이 글씨를 썼다.
태의비 우측의 산록으로 올라가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인 산록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평범하고 아담한 묘소 앞에 비석이 있다. 비(碑)의 전면에는 ‘勉庵崔益鉉之墓 / 貞夫人淸州韓氏附左’(면암최익현지묘 / 정부인청주한씨부좌)라고 음각되어 있고, 묘소의 앞에는 상석과 높이 1m의 석주가 좌우에 1개씩 있다. 묘소의 아래에는 재실(齋室)이 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예산군 광시면의 너른 예당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화창한 날, 늦여름의 싱그러운 들판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1833년 12월 5일(음력)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新北面) 가채리(加采里)에서 아버지 최대(崔岱)와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 호가 면암(勉菴)이다. 가세가 빈한하여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4살 때(1836) 온 가족이 충북 단양으로 이사해 한동안 금수산 아래에 정착해 살았다. 1843년 11세 때 단양 금수산을 떠나 경기도 양근현 후곡(厚谷, 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 후곡)으로 이사했다. 이 무렵 후곡에서 가까운 벽계(蘗溪)에서 강학 중이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최익현은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8년(고종 5)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때에 경복궁 복원 토목공사로 인한 국민의 부담 가중과 당백전(當百錢)의 발행에 따른 재정의 파탄을 문제 삼아, 고종 10년(1873년) 대원군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이 물러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그로인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 * 제주도 유배시절 ; 최익현은 한라산에 올라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쓰기도 했다.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 ‘강화도조약’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그리고 1905년 *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그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은 74세의 고령으로, 전 군수 임병찬(林炳瓚, 1851~1916) 등과 함께 순창에서 4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북 정읍, 순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결국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大馬島)로 끌려가서 유폐되었다. 그는 일본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을 거부하고 생을 마쳤다고 한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을사늑약 전후의 상황
*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 1876(고종 13)년에 운요호(雲揚號) 사건(1875)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 조약이다. 군사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따라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당시 조선은 부산 외에 인천, 원산의 두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 ‘을사늑약(乙巳勒約)’ ; 1905년(광무 9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불법으로 강요된 늑약(勒約)이었다. 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이름으로 체결된 조약에는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약의 명칭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명목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이었지만, 실질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식민지에 준하는 통치와 수탈을 자행하였다.
•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은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이다.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였다. 이 때문에 신문은 무기 정간 당했고, 장지연은 체포당했다.
• 고종의 시종무관장인 민영환(閔泳煥)은 좌의정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 무효 등을 주장하다 11월 30일 국민에게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결했다. 조병세와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哲) 등은 음독 자결했다. 민영환의 유서는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자에 실려 항일 운동을 격화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민영환의 유서(遺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치민욕(國恥民辱)이 이에 이르니 우리 인민은 장차 경쟁에서 진멸될 것이로다. (……)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조력하겠으니 (……)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다시 찾으면 죽은 자는 황천에서도 기꺼워하리라.”
• 면암 최익현의 의병(義兵) 창의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 군대와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응징했다.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은 충남 내포 지역에서 1,000여 명을 규합해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했으며,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은 농민 300여 명과 함께 경북 영해에서 봉기해 강원, 경상도 일대 해안 지역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며 세력을 3,000명으로 키웠다.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부자는 경북 영천에서 포수와 농민들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편성해 청하와 청송 지역에서 활약했다.
• 1906년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통감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한국 내 일본인 경찰을 1,400명 규모로 늘리며 경찰기구를 강화했고, 통신과 철도, 도로 등 기간 산업을 장악해 나갔다. 광업법을 공포해 일본인을 중심으로 신규 허가를 내주는가 하면, 각급 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배치해 식민지 교육 정책을 펴나갔다.
면암의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의병(義兵)
면암 최익현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제자로, 제천의 의병장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1842∼1915)과 함께 대표적인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한 사람이다.
19세기 조선(朝鮮)은 밖으로부터 밀려오는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列强)의 군사력을 앞세운 경제 침탈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가치와 상반되는 서학(西學, 天主敎)의 확대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조선은 두 갈래로 대응한다. 하나는 기존의 가치질서를 믿고 외세를 경계하자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사상(開化思想)이다.
호서유학 답사자료집 서근식 박사의 정리에 의하면, 한말의 국가적 위기를 맞아 ‘위정척사(衛正斥邪) 학파’는 대체로 3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가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華西學派), 두 번째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중심으로 한 노사학파(蘆沙學派), 세 번째가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중심으로 한 간재학파(艮齋學派)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유교의 예의(禮儀) 문물을 ‘정(正)’으로 하고, 밀물처럼 밀려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문물을 ‘사(邪)’로 규정한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상소를 통해 시폐(時弊)의 시정과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효(孝)를 지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조선사회에서 단발령(斷髮令)은 가장 큰 불효였다. 면암은 “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라고 하며 격렬하게 반대상소를 올렸다. ☞
*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시해한 사건이다.
1875년 일본군함이 불법으로 침입한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빌미로 조선과 일본의 수호조약(1876) 체결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때,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린다. 상소가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면 목을 쳐 달라는 비장한 각오였다. 이것이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이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서 상소를 올린 사람은 임진왜란 때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과 최익현뿐이다.
당시 최익현이 올린 상소(上疏)는 재야의 사림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인데, 최익현은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고 강화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본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倡義討敵疏(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의 거부, 철도 이용 안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에도 임병찬, 임탁 등 80여 명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義擧疏略(의거소략)’이 실려 있는 ‘寄日本政府(기일본정부)’라는 글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갔다. ☞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서 생을 마치다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
최익현은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에 끌려가 이즈하라(嚴原)의 모처에 유치(留置)되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일본인들의 갖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제공하는 음식을 의연히 거절하다가 유소(遺疏, 죽으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를 구술하여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결국 그곳에서 생애(生涯)를 마쳤다. 지금 이즈하라 시내 슈젠지(修善寺, 일본 淨土宗 圓盛山 修善寺) 경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가 세워져 있다. —
▶ 필자는 2006년 1월 18일 대마도를 탐방하는 길에 이즈하라에 들러 면암 선생 순국비를 참배한 적이 있다. 그날은 아침부터 차가운 겨울비가 추적이고 있었다. 주택가 골목을 몇 구비 돌아서 찾은 곳은 슈젠지(修善寺), 백제의 비구니 법묘(法妙)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작은 절인데, 여느 가정집 같았다. 옆 마당에는 일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묘비들이 세워져 있는데, 바로 그 입구에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碑(면암최익현선생순국비)’가 조용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순국비는 면암 선생이 돌아가신 80년 뒤, 1986년 한일양국의 독지가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황수영 선생이 쓴 비문에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유해가 본국으로 운구(運柩)될 때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흔적이 사라질까 두려워 이 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었다.
최익현의 단식순국은 신문의 오보에서 비롯되었다
☞ 그런데 《땅의 역사》를 쓴 역사저널리스트 박종인(朴鍾仁)에 의하면, '위정척사(衛正斥邪)파 선비인 면암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4개월' 동안 단식하다가 순국(殉國)했다는 주장은 그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만든 오보(誤報)애서 비롯된 괴담'이라고 주장한다. ― 다음은 박종인의 《광화문 괴담》 (와이즈맵, 2022.10.15)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 최익현이 대마도에 끌려간 날은 1906년 8월 27일이었고, 죽은 날은 1907년 1월 1일이었다. … 당시 대마도에 함께 갇혔던 제자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본군 대대장이 통역을 통해 '관을 벗고 경례를 하라'고 했다. 선생이 벗지 않으니 일본인이 다시 말했다.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니 일본법을 거역하지 말라." 병정이 칼로 찌르려 하자 선셍이 나와서 꾸짖었다. "이놈 어서 찔러라." 이에 선생은 "먹지 않고 자결하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수로다."라고 말하며 나를 시켜 황제에게 아사순국하겠다는 상소를 적어내렸다. 그런데 대대장이 와서는 "통역이 잘못 되었으니 안심하고 밥을 먹고 나라를 위해 몸을 조심하시라."고 전했다. 이를 선생에게 전하니 죽을 드셨다. 우리 모두 밥을 먹었다. 단식은 사흘만에 끝났다. 12월 4일 선생이 풍토병을 얻었다. 아들과 의사가 건너와 병구완을 했다. 선생은 끝내 돌아가셨다. 1907년 1월 1일이다.
제자 임병찬이 귀국하여 스승의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렸다. 1907년 4월 25일 제자 임병찬이 고종에게 올린 뒤늦은 상소가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전문을 인용한 이 기사는 '삼가 목숨을 끊으면서 아뢴다.(謹自盡以聞)'는 상소문의 마지막 문장으로 끝났다. 원래 임병찬은 이 상소문과 함께 '스승께서 사흘만에 단식을 푼 이유'를 적은 본인 상소문도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 신문을 읽은 사람들은 최익현이 단식을 풀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가 '단식 순국을 결의하고 결국 굶어서 죽었다'고 알고 이를 조선팔도에 전파했다. 결국 신화가 되고 괴담이 되었다. … 《대한매일신보》기 임병찬의 상소를 제외한 것은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면암의 아사순국은) 오보가 만든 신화였지만 최익현은 오래도록 조선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박종인은 최근 이와 관련한 한 인터뷰에서 “특정인 선양(宣揚) 행위를 하더라도 그로 인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歪曲)해선 안 된다.”고 했다. ☞ 송의달 〈모닝드라이브〉 박종인 조선일보 선임기자 인터뷰(2022.10.04)
○ 홍성 양곡사(洪城 暘谷祠)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에 있는 양곡사(暘谷祠)에는 한원진(韓元震), 송능상(宋能相), 김한록(金漢祿)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늘 우리 답사단의 탐방을 위하여, 양곡사를 보존하는 청주 한씨 집안 어른이 몸이 불편하신 노구에도 불구하고, 사당의 문을 열어놓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미안하고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남당(南塘), 자는 덕소(德沼)이다.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로 호서지역 학자들의 학설인 호론(湖論)을 이끌었다. 송능상은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사능(士能)이며, 호는 운평(雲坪)이다. 한원진의 제자로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났을 때는 스승의 이론에 따라 호론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동조하였다. 김한록(金漢祿)은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여수(汝綬)이며, 호는 한간(寒澗)이다. 한원진의 제자로 영조의 장인 김한구(金漢耉)가 종형이다. 정순왕후를 배경으로 노론 벽파의 영수로써 영·정조대의 정쟁을 주도하였다.
양곡사(暘谷祠)는 1772년(영조 48)에 이유락(李儒洛), 김두순(金斗淳) 등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후 1987년에 재건하였으며, 후에 송능상과 김한록을 추배하였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한원진(韓元震)은 1682년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에서 출생했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한유기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로 숭부의 딸이다. 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의 한 사람이다. 수암의 강문팔학사는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 등이다.
남당(南塘)은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孟子)의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는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少論)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의 구명운동으로 복직되어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평생 학문의 목표를 ‘수사문설(守師門說)’에 두고 스승의 학설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이나 비판의 여지없이 절대 정당한 것으로 따랐다. 실제로 그는 송시열의 학문과 실천을 계승하기 위해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를 집중 연구했다. 이와 기의 부잡불리(不雜不離), 무선후성(無先後性)과 이에 입각한 인(人)과 물(物)의 차별상을 의리론(義理論)의 범주에서 해석했다. 1751년에 69세로 타계하였으며, 그의 묘소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 174에 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순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
조선 후기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대한 동질 여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인간과 동물 혹은 식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외암 이간(李柬)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서로의 본성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남당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으로 나뉜다. — 오늘 양곡사 사당 앞에서 황상희 박사가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대해서 해설을 했다. 다음은 황 박사가 집필한 〈남당 한원진의 인물성동이론에 관하여〉 내용에서 발췌한 것이다.
¶ 이른바 ‘사단칠정논쟁’과 ‘호락논쟁’은 조선 성리학을 특징짓고 있는 양대 논쟁이다.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서는 이발처(已發處)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심 테마로 떠오르며 매우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이에 비해,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발처(已發處)의 정(情)의 문제보다는 미발처(未發處)의 심과 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규정문제로 확대되며 보다 주의 깊게 탐구되어졌다. 호락논쟁은 조선 전기의 사단칠정논쟁의 성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사단칠정논쟁의 심화라고도 할 수 있다.
호락논쟁은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을 중심으로 한 낙학(洛學)과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1641~1721)를 중심으로 한 한 호학(湖學)측 내부에서, 그리고 이 두 학파 사이에서 일어난 집단적이며 지속적인 논쟁이다. (문석윤, 『호락논쟁: 형성과 발전』, 동과서, 2006, 313쪽) 낙학은 서울·경지지역을, 호학은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학적인 쟁점을 둘러싼 논쟁은 권상하의 문하생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과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1682~1751) 사이의 우연한 논변으로부터 촉발되었다.
* 율곡학파도 크게 두 계열로 사상전개가 이루어진다. 율곡 이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정점으로 ① 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 계통과 ② 김창협(金昌協)―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의 계통으로 나뉜다. 전자가 율곡의 기본 입장에 보다 충실한 정통 율곡계열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보다 개방적인 입장에서 퇴계설도 수용하고 있다.
1713년까지 5년여에 걸쳐 외암과 남당 사이에 편지가 오고갔으며, 그 후 외암은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여 「이통기국변(理通氣局辨, 1713)」, 「미발유선악변(未發有善惡辨, 1713)」, 「미발변(未發辨, 1715)」, 「오상변(五常辨, 1715), 「미발변후설(未發辨後說, 1719)」 등을 발표하여 남당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남당은 「의답이공거(擬答李公擧, 1715~1716)」, 「이공거상사문서변(李公擧上師門書辨, 1724)」를 지어 외암의 견해에 반박하였다.
호락논쟁은 크게 보아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ㆍ미발심체순선논쟁(未發心體純善論爭)ㆍ성범심동이논쟁(聖凡心同異論爭)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일컬어지기도 하고, 미발심체순선논쟁과 성범심동이논쟁이 둘 다 미발의 심(心)에 대한 논쟁이라는 점에서 이 둘을 합쳐 인물성동이논쟁과 미발심체순선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인물성동이논쟁’은 사람의 본성과 타 존재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를 다룬 것이고, ‘성범심동이논쟁’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성인(聖人)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같으냐 다르냐에 대한 것이며, ‘미발심체유선악논쟁’은 본래의 사람들의 마음에 선과 더불어 악이 동시적으로 같이 있다고 보아야 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다. 각 주제들은 각각 독립된 별개의 사항으로 논의되어지지 않았으며 상호 긴밀하게 맞물려지며 토론되었다. 호락(湖洛)의 ‘성범심동이논쟁’ㆍ‘미발심체순선논쟁’은 성(性)과 관련된 미발의 심(心)을 깊이 있게 토론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논의이고, ‘인물성동이논쟁’은 미발의 심성에서의 성(性) 부분을 집중적으로 논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외암과 남당의 학술 논쟁은 이후 조선학계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외암의 학설은 주로 낙산(洛山)지역 즉 서울 경기 지역의 학자들이 주로 지지하여 낙론 또는 낙학파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고, 남당의 학설은 호서(湖西)지역 즉 충청지역의 학자들이 주로 지지하여 호론 또는 호학파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호락논쟁을 촉발하고 이 논쟁에 적극 참여한 학자들은 율곡 계열의 노론학자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호락논쟁은 노론 학계의 사상의 분화를 반영하는 논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낙론(洛論)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외암 외에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ㆍ도암 이재(陶庵 李縡, 1680~1746)ㆍ여호 박필주(黎湖 朴弼周, 1665~1748)ㆍ기원 어유봉(杞園 魚有鳳, 1672~1744)ㆍ역천 송명흠(櫟泉 宋明欽, 1705~1768)ㆍ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 1702~1772) 등을 들 수 있다. … 호론(湖論)의 대표적 학자들로는 남당 외에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 1681~1767)ㆍ봉암 채지홍(鳳巖 蔡之洪, 1683~1741)ㆍ운평 송능상(雲坪 宋能相, 1710~1758)ㆍ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1798) 등이 있었고, 매봉 최징후(梅峰 崔徵厚, ?~1715) 및 낙론을 지지한 김창흡의 문인인 정암 이현익(正庵 李顯益, 1678~1717) 등이 호론의 학설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발생한 호락논쟁은 외형적으로는 외암과 남당사이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사단칠정논쟁과 같은 조선 전기의 독특한 학술논변들이 기반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호락논쟁은 정(情)의 문제에 초점을 두었던 전기에 비해, 미발에서의 심과 성의 문제를 매우 치밀하게 논의한 특징을 띠고 있다.(중략)
… 외암과 남당의 논쟁의 과정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여러 주장들이 나왔다. 대표적인 것으로 외암의 경우 미발의 심(心)을 대본저미발의 본연지심과 부중저미발 기질지심으로 구분한 것을 들 수 있고, 남당의 경우는 인물에 내재된 성(性)을 세 측면으로 분석한 ‘성삼층설’을 들 수 있다. 외암이 미발심을 두 측면으로 구분한 것과, 남당이 성을 삼층으로 구분한 것은 이전의 중국이나 한국의 주자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이론이다.
호락논쟁은 또한, 인간이 타 생명체보다 고귀하다는 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과 타 존재의 본성과 심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함으로써 타 존재에 대한 이해를 크게 향상시켰다. 타 존재에 대한 이해는 이후 북학사상의 태동으로 이어졌으며, 호락논쟁의 심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이후 조선후기의 다양한 관점의 심설논쟁으로 확장되었다. 외암과 남당의 논쟁으로부터 시작된 호락논쟁은 한국의 주자학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 있는 논변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이상 황상희, 《호서유학 유학의 자취를 찾아 — 답사자료집》 (2022) 63~67쪽.
▶— 호락논쟁(湖洛論爭)은 현실 사회의 실용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인성과 물성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주체성’과 ‘도덕의식’을 함양하는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리고 ‘호락논쟁(湖洛論爭)’은 18세기 초 수도권과 충청권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구면서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는 바람에, 16세기에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 격렬하게 벌어졌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함께 조선 성리학계의 최대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호서학파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자이다.
한원진의 학문과 사상은 한말 ‘위정척사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홍주의병을 비롯한 ‘항일의병운동’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특히 그의 사상은 파리장서에 참여한 한말 의병장인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1860~1924)과 복암(復菴) 이설(李偰, 1850~1906)을 비롯하여, 항일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사와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 홍성 출신의 수많은 충절위인들의 정신적 배경이 되면서 홍성지역의 사상적 뿌리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보은 속리산 연송호텔의 연찬회
서해안이 가까운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양곡영당을 출발하여 당진—영덕간 30번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충북의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속리산 법주사 관광단지에 있는 ‘은성식당’에 도착했다. 워낙 먼 거리이기도 하지만 예산—공주—세종시—대전의 부근을 지나는 고속도로는 퇴근 시간과 맞물려 자주 도로가 정체되어 예정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은성식당
은성식당의 식단은 속리산에서 나온 자연한 버섯 등을 재료로 한 전골 정식이었다. 보글보글 전골이 끓으면서 자연산 버섯향이 은은히 번지고 ― 양념더덕구이를 비롯하여 갖가지 산나물이 식탁을 채웠다. 무엇보다 ‘충청도 아줌마’[사장님]의 정성과 친절이 넘치는 만찬이었다. 식당을 가득 메운 회원들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따뜻한 식사를 했다. ‘맑은 이슬’로 반주를 곁들였다. 이광호 회장을 비롯하여 여러 분이 돌아가며 건배사를 제의하면서 분위기가 자못 넉넉하고 유쾌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식사 자리에는 귀한 분이 오셨다. 이광호 박사 내외분과 결혼식 동기(?)이며, 김덕현 교수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한 박홍석 선생 내외분이 저녁식사 자리에 함께 한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선이 굵은 호남형(豪男型)의 박홍석 선생은 서울에서 한 때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등 역동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다가 수년 전 낙향, 이곳 보은에서 가까운 괴산에 고택(古宅)을 짓고 여유 있는 노후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다. 오늘 이광호 박사와 김덕현 교수가 답사여행 중 이 속리산에 들어 유숙한다는 전갈을 받고 우정 참석한 것이다. —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는 반갑다.
건배사가 돌아가는 중, 깜짝 제의가 들어왔다. 황상희 박사의 초등학생 둘째딸 정아가 스스로 나와서 술잔 없는 건배사를 자청했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기가 “퇴계!”하고 선창을 하면, 자리에 계신 선생님들께서는 “이황!” 하고 후창을 하자는 것이었다. 국제퇴계학연구회 핵심어를 콕 집어낸 깜찍하고 절묘한 발언이었다. 모든 분들의 경탄을 자아내며 만장의 박수를 보냈다.
연송호텔의 연찬회
우리는 속리산관광단지 안에 있는 ‘연송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연송(輦松)’은 법주사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정이품송’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연(輦)’은 임금이 타는 가마이고 ‘송(松)’은 임금의 가마가 지날 때 길을 열어준 소나무를 말한다.
회원들이 일층의 회의실에 모였다. 답사 제2일의 연찬회가 이어졌다. 먼저 이광호 박사가 오늘의 빡빡한 여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하였다. 연찬회의 제1부로 현지혜 선생이 내일 답사 예정인 제천 한수면 ‘한수재(寒水齋)’ 탐방과 관련하여 ‘수암 권상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주 공을 많이 들인 논문이었다. 그 내용은 ‘1.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생애와 저술’, ‘2. 권상하의 황강(黃江) 이주와 정착 과정’, ‘3. 황강서원, 제향 공간의 확립’, ‘4. 권상하의 저서 삼서의집·논어(三書輯疑‧論語)의 내용과 퇴계와의 연관성’이었다. 그리고 제2부에서는 자유스러운 토론과 방담이 이어졌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