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2번째 시간으로서 “율법의 안과 밖” 律法の内と外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앞뒤로 두 구절씩 나누어서 보기로 하겠습니다.
앞 부분은 19절~20절까지이고, 뒤 구절은 21절~22절까지입니다.
우선 앞부분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20절까지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20절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9.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律法が言うことはみな、律法の下にある者たちに対して語ら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すべての口がふさがれて、全世界が神のさばきに服するためです。
20.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여기서 19절에 보면 <율법>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율법>이라고 해도 이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좁은 의미의 율법이라고 하면,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가까이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 하에 탈출을 하게
되지요. 이 사건이 이른바 출애굽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자유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법률이 없었고 오로지 애굽의 법률에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을 탈출한 그들은 이제 자유민입니다.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이 만들어놓은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의 법을 가질 권리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법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출애굽기를 비롯해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이 우리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는데,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무엇무엇을 하라고 하는 명령이 248가지,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 365가지, 그래서 모두 613가지 정도라고 합니다.
당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엄격히 지켜져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으로부터 몇
천년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기에 첨부가 되기도 하고, 또한 변형이 되기도 한 것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법조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상이나 문화, 제도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율법이라고 하면 이는 단순히 법조문이나 구약을 뛰어 넘어, 당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일컫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19절에 나오는 율법을 좁은 의미의 율법, 그러니까 법조문이라는 의미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절에 보면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두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율법에 보면 무엇을 하라고 하는 명령이든,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든 간에 이를 행한다 하더라도 의롭다고 여겨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자,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를 쉽게 이해하면 지금 법률도 마찬가지지요. 특히 형법을 생각하면 알기 쉽습니다. 형법에 보면
누구의 물건을 훔치거나, 누구를 속이거나, 누구를 때리거나, 또는 이는 좀 무서운 말입니다만 살인을 하거나 하게 되면 그 죄에
따라서 형벌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형법에 없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누구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고 해서, 누구를 속이거나 때린 적이
없다고 해서 상을 준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좀 이상한 말씀입니다만 아무리 법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그건 본전인 셈이고, 법을 잘 지킨 것만으로 큰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일은 드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20절에 보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3장 20절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0.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성경에 보면 종종 등장하는 <의롭다> 또는 <의인>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그냥 가볍게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단순히 <그냥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의인>만이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은 뭐라고요? 예, 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아무리 열심히 지켜 봤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즉
아무리 율법을 평생 동안 열심히 지켜 봤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태어날 때에 100점을 가지고 태어나요. 그런데 율법을 어길 때마다 점수가 깎입니다. 큰 죄를 지으면
점수가 많이 깎이고 작은 죄를 지으면 점수가 조금 깎인다고 해봐요.
그런데 문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천국에는 의로운 사람, 흠이 없는 사람, 즉 100점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둘째 문제는 뭐냐 하면, 율법을 어기면 점수가 깎이지만,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 봤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 한대요.
말하자면 점수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따지고 싶을지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살면서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정말 세상 법으로는 처벌도 받지 않은 작은 죄 몇 개를 지었을 뿐인데,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11절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姦淫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た方は、「殺してはならない」とも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姦淫しなくても人殺しをすれば、あなたは律法の違反者になっているのです。
아니,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A라고 하는 죄를 지었으면 A라고 하는 죄에 대해서 죄값을 치르면 되는 것이 세상
법입니다만, 성경에 의하면 무겁든 가볍든 A라고 하는 법을 어기면 B라고 법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니다.
그러니까 큰 죄를 범한 사람이나, 작은 죄를 범한 사람이나 점수는 깎일 뿐이고, 평생 동안 노력해서 율법을 지켜 봤자 점수가
도무지 늘지를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100점인 의인 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99.9점을 받은 사람도, 아무리 노력해도
0.1점이 늘지 않아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희망입니까. 절망입니까. 그렇습니다. 절망입니다. 완전한 절망이에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무리 힘써 노력해 봤자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무리 힘써 노력해 봤자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희망이 생겼어요.
오늘 말씀 뒷부분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22절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1.しかし今や、律法とは関わりなく、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によって証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22.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信じるすべての人に与えられる神の義です。そこに差別はありません。
이제 율법 말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의>라고 하는 것이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말합니다. 내가 비록 지은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만 그 의만 내가 잡으면 천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의를 잡아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잡아야지요. 목숨을 걸고라도 잡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다 하더라도 잡아야 합니다. 그러잖아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 <의>를 잡음으로 인해서 천국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남는 장사겠습니까.
그리고 그 의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이 되어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의>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구주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흰 빨래를 먹물로 열심히 빨아보아도 하얘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절망 속에서 열심이 허우적거려 봤자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잠시 화제를 좀 돌려볼까 합니다. 세상이나 다른 종교를 보면 죽어서 다시 다른 무엇인가로 태어난다는 말을 합니다만, 성경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죽어서 다른 사람으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거나 아니면 하물며 다른 동물로 태어난다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 보면, 가끔은 아, 정말 어떤 동물처럼 살고 싶다. 뭐 그렇게 생각해 보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로 살아간다면 어떤 동물처럼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으시겠지요. 다양한 동물을 생각하실 수도 있고, 또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 생김새나 구조적으로 본다면 우리 사람과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모두 눈 코 입 귀가 있어요. 팔과 다리가 있습니다. 머리에는 뇌도 있고 심장과 위장과 대장 소장 등이 있어요.
혈관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드릴까요? 우리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를 분석해 보았더니 그 차이가 몇 프로가 같았을까요? 미국에서
2003년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대략 94.8%가 동일하다고 합니다.
뭐, 이쯤이면 거의 사람과 동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여차하면 동물원에 갔을 때 침팬지를 만나게 되면 전도라도 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자, 그렇다고 물론 침팬지한테 전도할 생각을 없어요.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밝혀낸 숫자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4.8%가
아니라 99.9% 동일하다 하더라도 침팬지가 인간일 수가 없고 인간이 침팬지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한 번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좋은 초등학교 또는 국민학교를 나오셨겠습니다만, 특별히
어느 분이 좋은 명문 국민학교, 명문 초등학교를 나왔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동물과 우리 사람들을 비교해보았을 때, 침팬지이건 아니면 기타 수많은 동물들과 우리 인간의 차이, 특별히 생태적인 차이라면 무엇을
들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힌트를 드리자면, 동물이나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생태학적 공간, 소속되어있는 세계에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이 소속되어 있는 세계. 아시겠어요?
이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먹이사슬의 세계입니다.
어렸을 때 공부했던 교과서를 좀 떠올려 보시면 먹이사슬의 맨 밑에는 미생물들이나 작은 곤충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면서 덩치가 큰 동물들이 생기지요. 초식동물이 있고 그 위에는 육식동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양은 주로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먹이사슬에서 우리 인간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먹이사슬의 제일 위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먹이사슬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그려집니다만, 그러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 끝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먹이사슬의 첫번째 특징이라고 한다면, 먹이사슬의 두번째 특징은 바로 순환이라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먹이사슬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고 한다는 것은 위에 있는 동물이 아래 동물을 잡아먹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천적이 있다는
뜻입니다만, 그렇다면 천적이 없는 맨 꼭대기에 있는 동물은 어떻게 되냐 하면, 그 동물이 죽게 되면 다시 아래 동물들의 먹이가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먹이사슬은 단순히 위로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순환이라는 특징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백수의 왕 사자를 부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암컷의 경우에는 수컷이 만드는
무리에서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수컷이 없으면 그 가족이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듬직한 수컷을 얻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정말 젊고 힘이 넘치는 수컷은 멋이 있지요. 그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컷들은 가족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입니다. 젊고 힘이 넘치는 사자가 영원한가요? 아니요. 사람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고
젊음은 잠시입니다. 나이가 들고 힘이 약해지면 금새 다른 사자들이 공격을 해옵니다. 그러면 싸움이 벌어지고, 싸움에 패하게 되면
비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로 홀로 광야를 떠돌다가 쓸쓸하게 죽어갑니다. 그러면 그 죽은 시체는 다른 작은 동물들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럼 이제 새롭게 가족을 차지한 수컷 사자는 어떤 일을 버리냐 하면, 그전 수컷 사자 사이에 태어난 새끼들을 다 물어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 새끼를 낳도록 하는 것이지요. 참 알고 보면 그 세계가 얼마나 끔찍한 지 모릅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자 그럼 사람은 먹이사슬의 어디에 있을까요. 사자 위에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에 있냐 하면, 먹이사슬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먹이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침팬지와 사람
유전자가 아무리 94.8%가 아니라 99.9%가 비슷하다 하더라도 침팬지는 먹이사슬 안에 있는 것이요, 사람은 먹이사슬 바깥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는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먹이사슬은 완전히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짐승들이 노약자를 보호한다는 말 들어보았습니까. 먹이사슬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개념이
없습니다. 약자는 오로지 강자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될 뿐이고, 강자는 약자를 먹이로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실 리야 없겠습니다만, 만약에 그와 같은 먹이사슬의 세계가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그 분은 지금 아주 자신의 힘이 강할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까 제가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히 젊은 사람도 없고 영원히 힘이 센 사람도 없습니다. 그 먹이사슬의 세계에 있게 된다면 그 끝은 누구나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먹이사슬 바깥에 존재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잡아먹으러 올까 봐 덜덜 떨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힘이 약해져도 사회적인 제도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우리 사람이 사는 사회의 냉혹함을 동물의 세계와 비유로
말할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사실 정말로 동물의 세계와 같은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자, 다시 율법과 구원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면, 율법의 세계는 마치 먹이사슬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구원이 없습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오로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 자신의 힘만이 지배하는 세계가 먹이사슬의 세계이자 율법의 세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볼까요. 내가 누구한테 맞았어요. 화가 나요? 안 나요? 당연히 화가 나죠.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누군가가 내가 입고 있는 얼마 안 하는 옷을 빼앗으려고 해요. 그러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지금 가격이 문제에요? 아니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내 것을 지켜야지요.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누가 나한테 억지로 무엇인가를 강요해요? 그런 사람을 용서해서는 안 되죠.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가 뭔데 나를
미워해요? 나한테 함부로 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인지상정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절~45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子どもになるためです。父はご自分の太陽を悪人にも善人にも昇らせ、正しい者にも正しくない者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からです。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내 것을 빼앗으려 한다거나 나를 힘들게 하려는 사람들,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런
사람들과 싸우고 하는 것을 인지상정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하겠어요? 예,
바보라고 하겠지요. 천하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먹이사슬에 속한 사람들 즉, 율법 안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에 속한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바깥에 속한 사람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방법, 아니,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우리가 율법 안에 속해 있으면, 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계속 점수가 깎이고 결국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서 은혜에 속하고 예수님께 속하게 된다면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채워 주시고 우리가 빼앗긴 것을 갚아
주십니다.
이사야 61장 3절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シオンの嘆き悲しむ者たちに、灰の代わりに頭の飾りを、嘆きの代わりに喜びの油を、憂いの心の代わりに賛美の外套を着けさせるために。彼らは、義の樫の木、栄光を現す、主の植木と呼ばれる。
우리 힘으로 복수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근심을 찬송으로 바꾸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먹이사슬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축복에 속한 사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망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에 속한 사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 속한 사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먹이사슬의 세계, 율법에 속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고, 근심을 찬송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구원에 속한 자로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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