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 장 멋진 남자가 되는 법
십뢰가 단 한 번도 발사되지 않았다는 단리효의 외침으로 팔황북천각 일층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청강 일행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내기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속임수로 천주 자리를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점철됐던 팔황북천간 일층에 이번엔 자욱한 살기가 퍼져나갔다.
“ 청후야, 내 혈도를 풀어라!”
북청강은 동생인 북청후를 보며 말했다.
“ 안 되오. 북성주.”
북청후를 제지한 사람은 남십자성 성주 백마흔이었다.
“ 무슨 소리요?”
“ 이번 일은 점혈을 한 상태에서 끝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마오. 오늘 이 자린 천주를 뽑기 위한 자리고, 그 일은 마무리 돼야 하오.”
“ 내 생각도 백 성주와 같소. 북 성주. 지그 이 상태로 해결을 보도록 합시다.”
만독존자 당갈이 백마흔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북청강은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내기를 무위로 돌리겠단 말인가?”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면 따르겠지만 속임수라면 내기 자체를 인정할 수 없소. 연 공자.”
“ 우린 모두 같은 조건이었소. 나와 사은은 댁들보다 담력이 셌고, 운이 좋았을 뿐이오.”
“ 십뢰는 연 공자 당신 소유였소.”
“ 그 이야기는 시작할 때 했던 걸로 알고 있소. 북 궁주.”
“ 야료를 부리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십뢰가 작ㄷ공하는지 그건 확인하지 못했소.”
“ 그걸 확인하겠단 말이오?”
“ 그렇소. 연 공자.”
“ 누가 확인할 거요?”
“ 허공에 대고 쏴보시오.”
“ 그럴 순 없소. 북 성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본인의 입에 십뢰를 넣고 직접 해야 하오.”
“ 정녕!”
북청강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 너희들은, 금릉 연씨 세가의 상속자고, 흑천의 천주고, 대야벌 야정의 후계자인 나 개독새 연우강을 모욕했다. 북청강.”
“ 모욕은 연우강 네가 했다, 놈.”
듣고 있던 단리효가 버럭 소리쳤다.
“ 내가 속임수를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욕한 게 아니다. 단리효.”
“ 그 시험은 내가 하겠다. 연우강.”
“ 저, 정말 네가 하겠단 말이냐?”
“ 그렇다. 연우강. 내가 하겠다.”
단리효의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어렸다. 더듬거렸던 연우강의 어투 때문이었다. 허공에 쏘지도 못하고, 시험을 하겠다고 나서자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는 것은 십뢰가 가짜라는 반증이었다.
“ 십뢰를 넘겨라.”
“ 내가 직접 쏘겠다.”
연우강은 십뢰를 들고 단리효 앞으로 걸어갔다.
“ 좋다. 연우강.”
단리효는 연우강 앞에 가슴을 활짝 펴고 섰다. 그러고는 뒤편에 있는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부하 한 명이 검을 뽑아들고 연우강 뒤편으로 섰다.
“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네 목을 치겠다. 연우강.”
“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연우강은 십뢰의 앞부분을 단리효의 배에 밀착했다.
“ 얼마든지 쏴라. 연우강, 얼마든지.”
단리효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 용기는 가상하다만......”
연우강은 십뢰의 단추를 사정없이 눌렀다.
철컥!
“ 프! 하하하! 크! 하하하!”
단리효는 호쾌하게 웃었다.
역시 가짜가 맞았다. 뭉치가 십뢰를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십뢰는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 죽여라!”
단리효는 연우강 뒤편에서 검을 들고 있는 부하를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단리효의 부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 뭐하고 있느냐?”
“ 아직 구멍은 세 개나 남았소, 단 막주.”
딘리효 부하 뒤편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십 년은 늙어버린 듯 추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이자승이었다. 이자승이 들고 있던 혈루의 끝은 단리효 부하 목에 닿아 있었다.
이자승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천국과 지옥을 몇 번 오갔는지 모른다. 아니 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지가 축축해졌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 아이고, 연 공자가 사람 여럿 잡는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가장 자리 아래쪽에서 나직이 툴툴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수천월이 올라왔다. 그의 품속에는 늘어진 수여설이 안겨 있었다.
“ 기절한 거냐?”
욱일승이 수천월을 보며 물었다.
“ 게거품을 물고 있더라.”
수천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 말에 연우강의 고개가 수천월을 향해 돌아갔다.
“ 수 소저가 왜 기절한 거지?”
“ 왜 기절을 하겠는가, 불같이 급하 성격을 견디다 못해 기절을 한 게지.”
“ 별일이네. 오줌 싼 사람은 난데, 지가 기절을 왜 해.”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단리효를 보았다.
“ 이리 주세요.”
연우강 근처에 있던 수나인은 수천월이 안고 있던 수여설을 덮치듯 빼앗아 안았다.
“ 큭! 기절한 딸을 보니까 갑자기 모성애가 샘솟는 모양입니다. 궁주.”
수나인을 빤히 쳐다보며 비아냥대던 연우강은 다시 단리효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아직도 가짜가 아니라고 할 테냐?”
단리효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 방금 그건 네 개 중 하나야. 그러고 보니 사은 저 자식이 마음먹고 한 번 더 당겼으면 황천 천주가 될 뻔했는데 아쉽게 됐어.”
“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구나, 놈, 눌러라.”
단리효는 가슴을 활짝 펴며 소리쳤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연우강은 단리효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단추를 사정없이 눌렀다.
철컥!
“ 봐, 봐라.....”
푸아악!
단리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파란 광채가 십뢰 끝 부분에서 터져 나왔다.
“ 크아악!”
단리효는 입을 쩍 벌린 채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 믿으라고 했잖아. 새꺄.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연우강은 고개를 숙이는 단리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위로 쳐들었다. 그러고는 쩍 벌어져 있는 그의 입 안으로 십뢰를 쳐넣었다.
“ 으으!”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리효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손사레를 쳤다. 살려달라는 의미일 터였다.
“ 여기는 사막이다, 단리효. 사막에서는 나도 날 제어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친 이리, 광랑이라 불렸다.”
연우강은 차갑게 말을 뱉으며 단추를 눌렀다.
철컥!
푸아아악!
또다시 새파란 광채가 단리효의 뒤통수에서 솟구쳐 나왔다.
북청강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십뢰.
실제로 목격한 십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 또 시험해 보고 싶은 사람.”
연우강은 몸을 돌려 북청강 일행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단리효의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있었다.
“ 인정하오.”
북청강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인정하면?”
연우강은 십뢰를 들어 북청강을 겨누었다.
“ 날 쏠 참이오?”
“ 팔황새는 천주가 나타나면 ‘그래 너 천주다.’ 그럼 끝나는 그런 조직이었어?”
“ 그건 아니오.”
“ 아! 힘없는 천주라서 그런 모양이네. 영감님. 저 혈도 좀 풀어주십시오.”
“ 알았다.”
연우강 곁으로 다가간 이자승은 해혈을 해주었다.
이자승이 해혈을 해주는 순간 다른 이들 또한 자신의 수뇌들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광채가 들어오고 수뇌들의 내공이 돌아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기운이 수뇌들 몸 주변을 감쌌다.
“ 자! 이제 무공도 회복했으니까, 다시 해 보자고, 내가 천주가 되는 것에 대해 불만인 사람?”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 그럼 한 가지 알려줄게. 경천사마라고 불리는 노인네들 중 대형인 경천사마 기운상은 흑천의 천주 대행이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어.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더군. ‘천주시여, 저를 비롯한 우리 흑천 무인들은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천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라고 말이야. 아주 감격한 얼굴로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데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고,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털썩!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청강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이어 백마흔이 무릎을 꿇고 팔황새 수뇌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각 수뇌들 뒤편에 있던 자들 또한 연우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 인정하는가?”
연우강은 쥐고 있던 단리효의 머리를 놓으며 소리쳤다.
“ 인정합니다. 천주님!”
우렁찬 함성에 호수가 파르르 떨었다.
“ 난 중원인이다!”
연우강은 곧바로 말을 놓았다.
‘ 저놈?’
이자승은 내심 탄성을 내뱉었다.
팔황새 수뇌들은 대부분 제 녀석보다 곱절 이상 나이가 많다. 그런 그들을 향해 말을 놓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수 년 동안 부하로 거느린 자들을 대하는 것 같다.
더불어 연우강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앞에 앉아 있는 팔황새의 수뇌들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완전히 장악해 들어갔다.
‘ 하지만.......’
이자승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내기에 져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팔황새는 변황의 절대자들이다. 저들이 앞으로도 계속 연우강을 따를 리가 만무하다.
설사 황천을 다시 세운다고 해도 모래성에 불과할 뿐이었다.
‘ 공연하 짓이다, 이놈아.’
“ 황천의 천주십니다.”
이자승의 내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팔황새 무인들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 인정하느냐?”
“ 인정합니다. 천주님.”
“ 난 흑천의 천주이기도 하다!”
“ 인정합니다. 천주님!”
“ 좋다. 그럼 난 지금 이 시간 부로 황천의 천주다! 천주로서 첫 번째 율법을 말하겠다!”
“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천주님!”
“ 제일법은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린 황천이 아니라 팔황천이다. 위로는 천주가 있을 것이며 천주 바로 아래에는 여덟 개의 하늘이 있게 될 것이다. 북천지옥부는 북천, 천외흑막과 새외귀막은 천외천, 막북혈마성은 혈마천, 남만독존궁은 독천, 해남 남십자성은 십자천, 북해빙궁은 빙천, 서장 포달랍궁은 서천, 청해천종림은 해천으로 개명한다. 각 천의 수뇌는 천주로 부를 것이며, 팔황천의 천주는 총천주라 부를 것이다. 따르겠느냐?”
“ 따르겠습니다. 총천주님.”
“ 인정하느냐?”
“ 인정합니다. 총천주님.”
“ 제이법을 말하겠다. 팔황천의 차기 총천주는 현 총천주가 지목하는 자가 맡는다. 따르겠느냐?”
“ 따르겠습니다. 총천주님!”
“ 인정하느냐?”
“ 인정합니다. 총천주님!”
팔황새, 아니 이제는 팔황천으로 바뀐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 영감님, 혈루를 주십시오.”
연우강은 이자승에게 손을 내밀었다.
“ 여기 있다.”
이자승은 혈루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팔황새 무인들이 미덥지 않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 저들을 믿는 게냐?]
그는 결국 전음으로 물었다.
[ 제가 바봅니까?]
[ 그럼 지금 뭐 하는 짓이냐?]
[ 멋있는 남자는 아무 노력 없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영감님.]
[ 멋있는 남자라고?]
[ 두고 보십시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탁자 위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팔황혈루파천황 비급이 둥실 떠올라 날아왔다.
“ 북천대제 야율사은은 앞으로 나와라!”
연우강은 한편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야율사은을 불렀다.
“ 명 받잡습니다. 천주님.”
야율사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다가왔다.
“ 지금 이 시간부터 팔황천의 차기 총천주 추대식을 거행하겠다. 현 총천주인 나 연우강은 차기 총천주로 북천대제 야율사은을 지목한다. 받아라, 야율사은.”
연우강은 혈루와 비급을 야율사은 품에 안겼다.
“ 이, 이게 무슨.....”
순간 야율사은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팔황천 무인들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제 막 팔황새를 장악했고, 팔황천으로 개명을 했을 뿐 아니라 율법 두 가지를 공포했다. 그랬던 여눙강이 곧바로 총천주 직위를 야율사은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 이제 팔황천은 네 손에 달렸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중원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이곳에 머물 수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들에게 천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까지다. 각 문파가 정말로 천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건 이대 총천주인 네 몫이다. 야율사은. 네 어깨에 변황의 모든 것이 달렸단 말이다.”
연우강은 야율사은의 어깨를 툭 치더니 이자승의 어깨를 잡았다.
[ 뭐 하는 짓이냐?]
[ 날 업어주십시오.]
[ 널 업으라고?]
[ 멋진 사내가 되기 위해서는 멋진 마지막 마무리도 필요합니다. 영감님. 절 업고 처소로 가 주십시오.]
[ 알았다, 이놈아.]
이자승은 연우강을 들쳐 업었다.
“ 난 피곤해서 갈 테니까, 의논들 해서 잘해.”
연우강은 아직 멍하게 서 있는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호수로 걸어가야 합니다. 영감님.]
[ 알았다, 녀석아.]
이자승은 연우강을 업은 채 호수로 몸을 날렸다.
[ 느긋하게 천천히 가시면 됩니다. 석양에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지금 해가 지고 있는데 그것도 몰랐냐?]
[ 그럴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천천히 가야 한다는 연우강의 말과는 달리 이자승은 빠르게 걸었다.
“ 순전히 운이란 말이냐?”
팔황북천각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 오자 이자승은 그제야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화간 난 기색이 역력했다.
“ 노력을 하고 난 다음에 운을 기다리는 겁니다. 영감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놈에겐 운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 무슨 노력을 했단 말이냐?”
“ 뭉치 돌아가는 소리로는 십뢰가 끼워진 구멍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절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 그럼?”
“ 어느 정도 힘으로 돌렸을 때 십뢰가 끼워진자리가 어디에 위치하는 지 그걸 알아내야 했습니다. 어차피 뭉치를 끼우고 돌릴 사람은 저였으니까요.”
“ 그래서?”
“ 삼 일 밤낮 동안 손바닥이 닳도록 그 짓만 했습니다. 하나를 넣고 해보고, 두 개를 넣고 해보고, 세 개를 넣고 돌려봤더니, 열 번에 다섯 번 정도는 십뢰가 들어 있는 구멍이 위치한 자리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 오 할에 모든 걸 걸었단 말이냐?”
“ 오 할은 노력으로 해결하고 나머지 오 할에는 제 운을 올려놓는 겁니다.”
“ 운이 아니고 네 목이겠지. 그리고 그 내기는 오 할의 승률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중간에 기권을 해버리면 순서가 달라지게 되니까.”
“ 하지만 십뢰가 맨 열 번째 위치에 도도록 조정을 해두면 설사 기권을 한다고 해도 죽을 염려는 없죠.”
“ 그런 놈이 오줌을 쌌단 말이냐?”
“ 오 할의 확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오줌을 지릴 정도면 다른 놈들은 말할 것도 없죠.”
“ 하지만 기권은 수나인만 했다.”
“ 이용할 자식이 있는 사람은 죽을 확률이 오 할인 상황에서는 절대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나인은 기권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단 말이구나.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하는 거냐?”
“ 모르겠습니다.”
연우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멀리 보이는 사구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어쩌면 삶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그런지도. 그것도 아니면 이곳이 사막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 오 할에 목숨을 걸어서 얻은 총천주 자린데 왜 그냥 넘겨준 거냐?”
이자승은 화제를 돌렸다.
오 년의 전쟁.
아마도 그 전쟁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 그건 영감님이 더 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 녀석들이 널 따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냐?”
“ 영감님 같으면 도박으로 총천주 자리를 딴놈이 명령을 내리면 군말 않고 따르겠습니까?”
“ 도박을 한 놈은 너다, 녀석아.”
“ 그래서 멋지게 퇴장하고 있잖습니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고 떠나면 달라집니다.”
“ 어떻게 달라진단 말이냐?”
“ 팔황새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기꺼이 양보한 멋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혈루와 팔황혈루파천황을 가져다주고, 총천주 자리까지 양보한 사람. 얼마나 멋집니까?”
“ 태상총천주라는 직책은 그대로 살아 있을 테고.”
“ 그런 걸 일컬어 버려서 얻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북청강 그놈들은 제가 한 말이라면 일단 한 수 접고 들어갈 겁니다.”
“ 클클클!”
이자승은 고개를 저으며 웃고 말았다.
한 수 접어주는 정도가 아닐 테다. 아마도 연우강의 말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도와줄 것이다.
녀석은 이곳에서 엄청난 우군을 얻은 셈이다.
“ 그런데 말이다.”
문득 야율사은과 연우강이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경황이 없는 중이었지만 한마디는 놓치지 않았다.
“ 말씀하십시오.”
“ 혼자 떠났을 거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 그 정도로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영감님.”
“ 야율사은이 분명히 그랬다. 너 혼자 사막으로 들어갔더라도 전부 따라갔을 거라고.”
“ 너무 난해한 질문입니다. 영감님. 영감님도 봤겠지만 생사결을 벌이게 되면 대화를 한 기억조차 남지 않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단추를 누를 뿐입니다.”
“ 몽롱한 상태에서 단리효의 약은 잘도 올리더구나. 놈이 십뢰를 가짜라고 믿게 만들면서 말이다.”
이번엔 이자승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막폭풍작전은 흑랑기로부터 시작됐다.
그 작전을 펼치는 데 혼자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녀석이 혼자 가려고 했던 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그 누군가는 바로 주무상일 것이다.
“ 그건 그놈이 지레짐작한 것뿐입니다. 저는 가짜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갔어, 이놈아.”
어느새 다가온 걸까, 각 처소 앞에는 잠룡들과 노인들이 나와 있었다.
“ 이 녀석 목욕시키고 난 다음에 이야기하세.”
“ 또 목숨을 아무렇게나 굴린 거예요?”
불쑥 몸을 날려 이자승 곁으로 날아온 남궁운화가 소리쳐 물었다.
“ 아느냐?”
“ 일구 할아버지로부터 십뢰에 대한 말을 들었어요.”
“ 팔황천 태상총천주가 됐단다.”
“ 태상총천주는 뭐죠?”
“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와 같은 신분이란다.”
“ 그럼 엄청난 거잖아요.”
“ 그런 셈이지. 그런데 너 등평도수도 펼치는 거냐?”
“ 그러게요?”
남궁운화는 제가 보기에도 신기한 듯 발로 물을 굴려보았다. 물이 사방으로 튀자 그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토해냈다.
“ 몰랐다고?”
“ 네.”
“ 검법은 어느 정도 익혔느냐?”
“ 간혹 청룡의 그림자가 나타나곤 해요.”
“ 청룡의 그림자라면 오 초인 창궁천주를 말하는 거 아니냐?”
“ 에이! 설마요. 창궁천주는 이기어검술이라고요.”
남궁운화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 왜?”
“ 전 일천독행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고, 여설 언니로부터 배운 빙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고요. 그런 제가 무슨 수로 창궁천추를 익혀요.”
“ 그건 일부러 익히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냐?”
“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계집이 무슨 수로 두 가지를 동시에 익히겠어요.”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일천독행신에 몰두할 때 넌 창궁대연검법만 익혔단 말이냐?”
“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 허허허! 아주 장하구나.”
“ 지금 저 바보라고 놀리는 거죠?”
“ 아니다, 녀석아. 내가 왜 널 놀리겠느냐?”
“ 아무튼 빨리 가요, 할아버지.”
“ 갑자기 이 녀석이 무거워졌구나.”
“ 잠들었으니까 당연히 무거워질 수밖에 없잖아요.”
“ 잠들었다고?”
“ 삼 일 동안 미친 듯이 십뢰만 돌렸는데 아무리 무인이라도 견디겠어요?”
“ 하하하! 알았다. 넌 얼른 가서 이불이나 깔아 놔라. 난 녀석 목욕시켜서 들어가마.”
“ 알았어요. 할아버지.”
촤악!
남궁운화는 물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그녀의 신형은 순식간에 연우강의 처소로 사라졌다.
“ 누가 저 아이를 가르친 거냐?”
“ 야장에 창노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무공을 가르친 걸로 알고 있다.”
“ 창궁대연신공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는 그런 무공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냐?”
이자승은 연우강의 처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나도 그렇게 알고 있기는 한데,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다.”
“ 창궁대연시공을 저렇게 완벽하게 가르치려면 석년의 창궁무제 남궁우문밖에 없다, 자승.”
“ 그럼 창노가 남궁우문이란 말이냐?”
“ 옆에서 본 사람은 넌데 그걸 왜 내게 물어!”
“ 맞습니다. 영감님.”
그때 등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맞다고?”
“ 그렇습니다. 창노는 남궁 영감이고 무원은 낙일마검 장만봅니다.”
“ 맙소사.”
이자승은 연우강을 떨어뜨릴 뻔했다.
삼십 년 전 팔황정벌에 나섰다가 실종됐다고 하였던 그들이 대야벌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작군, 그 친구도 알고 있는가?”
뒤에 있던 욱일승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 대충 언질은 해줬소. 창노 영감이 말을 했다면 알고 있을 테고, 말하지 않았다면 모를 거요.”
“ 전혀 모른다. 이 나쁜 자식아.”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었던 듯 두작군이 씩씩대며 몸을 날려왔다.
“ 늙으면 귀만 밝아진다더니.”
“ 이 나쁜 놈아, 우리가 지옥으로 간 이유.......”
“ 또 나댄다. 또 나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 깨닫지 못한 거야?”
“ 이번 일은 그것과 다르잖아 자식아!”
“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사부라는 사람이 어째 제자보다 못하냐.”
“ 여기서 제자가 왜 나오는데?”
“ 창궁대연신공이 어떤 무공이야?”
“ 그거야 남궁세가의 가주무공이잖아, 자식아.”
“ 특징을 말해보란 말이야, 영감탱이야.”
“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 창궁대연신공은 절대 익히지 못하고, 창궁대연신공을 쌓은 내공은 다른 사람에게 전수가...”
두작구의 얼굴이 연우강의 처소로 향했다.
창궁대연신공을 통해 쌓은 내공은 반드시 창궁대연신공을 익힌 상대에게만 전해줄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제 몸 속의 내공이 두 배 이상 늘어났는데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다.
결국 남궁운화는 창궁대연신공을 가르쳐주고 내공을 전이해 준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어. 그 힘든 와중에도 그녀는 할아버지를 찾지 않았다고. 대신 남들이 자는 시간에 무공을 익혀. 할아버지가 적어준 비급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보면서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이야. 왠지 알아?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서 할아버지의 본명인 남궁우문이라는 이름을 찾아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무튼 남궁 소저는 복도 지지리도 없어. 하고많은 영감들 중에 하필이면 저런 인간이 걸려서는...”
“ 에라, 개자식아!”
퍼억!
순식간에 몸을 날린 두작군은 연우강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주먹을 박아넣었다.
“ 악!”
연우강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렇다고 기절을 시키면 어떡하냐?”
“ 기절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저 자식은 말입니다. 제 손녀딸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해 준 놈입니다. 아주 치사한 자식이라고요.”
두작군은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내질렀다.
“ 그래도 이 녀석 머리를 후려쳐서 기절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 화가 나면 무슨 짓을 못합니까?”
“ 일승이 저 녀석들이나 경천사마 그 양반들은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죽어도 못할 걸?”
“ 정말 그렇습니까?”
두작군은 욱일승을 돌아보며 물었다.
“ 맞네. 두 아우. 오늘부터는 팔황새에 있는 모든 무인들도 연 공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하네.”
“ 쩝!”
두작군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 할아버지, 빨리 오세요!”
그때 연우강 처소에서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 왔다.”
욱일승은 빙그레 웃으며 연우강 처소로 몸을 날렸다.
“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욕실로 나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곳으로부터 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삼 일 동안 잠도 못잤고, 지금은 기절한 상태니까 따뜻한 물이 좋을 것 같아서요.”
“ 이 녀석아! 그건 호수 물을 나무로 막아 만든 욕조일 뿐이야. 네가 아무리 데운다고 해도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도 몰라?”
이자승은 어이없는 얼굴로 소리쳤다.
나무판자를 세워 욕조처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안쪽과 바깥쪽의 물이 넘나들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물을 데운다고 해도 금세 식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남궁운화는 삼매진화로 물을 데우고 있었다.
“ 그래도 찬물보단 낫잖아요. 옷은 거기에 두고 연 공자나 데리고 오세요.”
“ 네가 목욕시킬 거냐?”
이자승은 웃으며 연우강의 옷을 벗겼다.
그러고는 욕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나갔다.
“ 무슨 소리에요. 저는 연 공자 옷이나 빨래요.”
화들짝 놀란 남궁운화는 얼른 방안으로 들어왔다.
“ 물은 제가 데우겠습니다. 형님.”
조금 전 말을 떠올린 두작군은 욕시롤 들어가 물속에 손을 넣고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이자승 일행의 연우강을 목욕시키고 있을 때 남궁운화는 사망묵의에서 암기를 제거했다.
“ 와! 많기도 하네.”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암기를 보며 남궁운화는 입을 쩍 벌렸다. 놀란 눈으로 암기를 쳐다보던 그녀는 한편 구석에 놓아둔 궤짝을 가져와 뚜겅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반듯하게 각이 잡힌 채 개어진 옷들이 상의와 하의 그리고 속옷 순으로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밥보다 더 열심히 챙겨먹는 약과 약탕기, 쇠로 만들어진 손괭이와 낫이 놓여 있다.
“ 누가 군인 출신 아니랄까 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전에 저 모습을 처음 보고 이상해서 연우강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군에서는 지급된 옷을 저렇듯 각을 세워 정리하지 않으면 얻어터진다고 하였다. 그런 게 어디 있냐며 깔깔댔는데 아직도 그는 그런 식으로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궁운화는 상의와 하의 그리고 속옷을 꺼내 침상에 올려 놓은 후 한쪽 빈 공간에 암기를 집어넣었다.
일을 마친 그녀는 사망묵의를 비롯한 안쪽에 받쳐입었던 옷과 속옷가지와 세재를 챙겨들고 방을 나섰다.
어느새 주변은 깜깜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 더 강해졌대요, 할아버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할아버지가 주신 내공 전부를 제 걸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빨래를 시작했다.
옷을 물에 담갔다가 건져낸 다음 조두를 뿌려 돌에 대고 비빈 다음 물속에 넣고 빠르게 휘저어주면 빨래는 금세 끝이 난다. 사망묵의 안에 받쳐 입는 옷과 속옷을 빤 남궁운화는 이번엔 사망묵의를 집어들었다.
사망묵의는 거의 갑옷과 비슷하기 때문에 구겨서 빨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예 물속으로 들어가 사망묵의가 펴진 상태 그대로 담가 빠르게 휘저었다.
그렇게 몇 번 휘저은 다음 건져내 물기를 털어내자 빨래는 끝이 났다.
그녀는 사망묵의와 옷가지를 챙겨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목욕이 끝난 듯 연우강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 언니도 그곳에 있지 않았어요?”
남궁운화는 수천월을 보며 물었다.
“ 어머니를 만나고 올 모양이다.”
“ 기절했죠.”
“ 잘 아는구나. 녀석이 와 있다는 걸 몰랐다라면 송장 치를 뻔했다.
“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참! 식사하셔야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남궁운화는 문득 생각나는 듯 물었다.
“ 그래야겠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구나.”
“ 가요, 할아버지. 식사 준비해 두었어요.”
“ 허허허! 그래도 우릴 생각해준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알았다. 가자.”
일행은 흐뭇하게 웃으며 연우강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활짝 웃은 그들과는 달리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수여설이었다.
수여설은 잔뜩 굳은 얼굴로 어머니 수나인을 쏘아보았다.
“ 마지막 부탁이다. 여설아. 네가 나서주면 우리 북해빙궁은 팔황천 최고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우리 북해빙궁의 시대가 열린단 말이다.”
“ 그래서 이곳에서 처음 본 남자에게 시집을 가란 말인가요?”
“ 나도 네 아버지와 혼인할 때 그랬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혼인했다. 하지만 자식을 둘이나 낳고 잘 살았다.”
“ 만족하세요?”
“ 내 삶을 말하는 거냐?”
“ 그래요.”
“ 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나는 여자 팔자는 남편에게 달렸다고 믿었고, 네 아비를 택했다. 물론 네 아비와 혼담이 오가기 전에 사랑했던 사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신분도 보잘것없었고 가난했다.”
“ 가난한 사랑보다는 풍족한 삶을 택했다는 말이군요?”
“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옳았다. 사랑은 열병과 같아서 세월이 가면 희미해질 뿐이다. 결국 남는 건 재산과 지위밖에 없다.”
“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저보다는 수정에게 시키세요. 저보다는 그 아이를 더 좋아하잖아요.”
“ 그 아이는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 따로 있다.”
“ 그 아이도 팔아먹을 생각이군요?”
수여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다.”
“ 모녀지간이라도 합이 들어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와 전 합이 들지 않았나봐요.”
“ 마지막 부탁이다, 여설아.”
“ 차기 궁주 자리를 수정에게 넘기라고 할 때도 마지막이라고 하였고, 잠룡쟁패를 줄 때도 마지막이라고 했었지요. 어머닌 항상 마지막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시죠. 쉬세요.”
“ 난 네 어미다.”
“ 어머니는 이제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제가 보기에도 아주 젊어요. 야율사은을 그렇게 얻고 싶으면 직접 하세요.”
수여설은 차갑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 잡아!”
수나인은 밖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발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옥녀빙인대 대주이자 수나인의 친동생인 빙정옥녀 나옥심이었다.
“ 날 막을 건가요?”
수여설은 안으로 들어오는 나옥심을 쏘아보았다.
“ 북해빙궁에서는 궁주의 명령이 곧 법이다. 여설. 궁주의 혈족이라고 해도 궁주의 명령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 난 내가 북해빙궁의 수하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모. 내가 북해빙궁에서 살았던 건 부모님이 북행빙궁 출신이라 그랬던 것뿐이에요.”
“ 북해빙궁을 떠나려면 무공도 반납해야 한다는 걸 모르느냐?”
듣고 있던 수여설이 버럭 소리쳤다.
“ 난 무공을 아버지로부터 배웠어요. 어머니.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어머닌 수씨가 아니라 나씨죠. 북해빙궁의 며느리 말이에요.”
“ 건방진 것!”
수나인은 나옥심을 향해 제압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 날 원망하지 말거라.”
나옥심은 나직이 말하고는 수여설의 맥문을 움켜쥐었다.
“ 절 원망하지 마세요. 이모.”
수여설은 차갑게 말하며 내공을 끌어올려 맥문을 통해 쏟아냈다.
쩌엉!
“ 커억!”
느닷없이 가공할 냉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면서 손가락부터 하얗게 변해갔다. 나옥심은 급하게 견정혈을 눌러 내기의 침입을 막았다. 그녀가 어깨의 혈도를 누르는 순간 오른손은 딱딱한 얼음으로 변했다.
건드리기만 해도 깨지는 그런 상태였다.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 함부로 움직이면 산산이 부서질지도 몰라요. 이모.”
“ 어떻게.....”
경악한 사람은 비단 나옥심뿐만이 아니었다.
뒤편에 있던 수나인 또한 기절할 듯한 얼굴로 수여설을 쳐다보았다. 맥문을 움켜쥔 상대를 역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배 이상의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저 정도면 자신과 비슷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빙하빙백강을 익혔나요?”
수여설은 나옥심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이, 익혔다.”
“ 그럼 오른팔은 구할 수 있겠네요. 빙하빙백강을 천천히 운기하면서 냉기를 빨아들이세요. 심한 고통과 동상이 수반하긴 하겠지만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어머니께 부탁하면 더 큰일난다는 걸 명심하세요, 이모.”
“ 다, 다른 무공을 섞었단 말이냐?”
나옥심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 제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어머니께 부탁해도 돼요.”
수여설은 차갑게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 멈춰라, 여설!”
뒤편의 수나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어머니가 계모였으면 정말 좋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에요.”
“ 넌 모른다. 여설. 너희 수씨들이 내게 어떻게 했는지, 그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넌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수여설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수나인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나직한 신음이 들려오자 비로소 나옥심을 보았다.
“ 언니!”
“ 그 아이 말이 맞을 게다. 무리하지 말고 빙하빙백강을 운기하면서 천천히 냉기를 빨아들여라!”
“ 아, 알았어요. 언니.”
나옥심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 나쁜 년!”
나옥심이 나가자 수나인은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빙하빙백강에 격중당한 찻잔은 순식간에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걸 안다면 넌 결코 그런 소릴 못 해. 난......”
[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요, 나인?]
귓전으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잔뜩 일그러져 있던 수나인의 얼굴이 한순간에 활짝 핀 장미로 돌변했다.
[ 침실로 오세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건장한 사내가 천장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평복을 걸치고 있는 사내는 바로 막북혈마성의 성주 대혈마 북청강이었다.
“ 일이 생각대로 안 되는 거요?”
북청강은 수나인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 싫답니다.”
“ 수여설은 어린 애가 아니오, 나인.”
“ 그래서 포기하란 말인가요?”
“ 천천히 조금씩 해 나가야 한단 말이오.”
“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그렇죠.”
“ 나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딸과의 관계 회복이오. 그런 뒤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단 말이오. 그건 그렇고, 연우강 그자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소?”
“ 공력은 일 갑자 반 정도고, 칠보귀둔필사와 흑철마신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해요. 그 외 암기술을 포함하여 잡다한 무공을 익히고 있고요.”
“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말이오?”
“ 그놈이 야율사은보다 강하다고 했더라면 야율사은에게 시집가라고 할 이유가 없죠.”
“ 그렇군. 아무튼 그놈도 주시해야 하오.”
“ 알았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 해요. 침실에서만큼은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나인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나도 그렇소. 나인.”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수나인의 침실에 뜨거운 열풍이 몰아쳤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