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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7월 30일 목요일]
《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의 <요서10성 축성>조작 비판》 (63)
先是 高句麗 與百濟 外競俱存 遼西地 有百濟所領 曰遼西晉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署郡縣曰 松江會稽吳城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 百濟郡廢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바깥에서 경쟁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요서 땅은 백제령으로 요서와 진평이 있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었다. 문자열제 명치 11년(501년) 11월에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서 군현을 고쳐 관청을 설치하고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50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겨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군사를 보내 공격하여 요서와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지했다.
[논주] 501년의 동북아 정세를 보면,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중국 대륙은 5호16국 시대(304~439년)을 지나 위진남북조시대가 정착되고 있었다. 이에 『삼국사기』에는 대륙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는 백제, 고구려, 신라 세 나라의 외교 전략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백제는 동성왕 6년(484년)에 남제(南齊)에 사자를 보내어 내속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다. 그 후에도 몇 번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 488년 북쪽의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치러오다가 백제군에게 패하였다. 무령왕 12년(512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21년(521년)에 양나라 고조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직함을 받았다.
고구려는 문자왕 원년(491년)에 위나라 효문제로부터 사지절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용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 왕으로 봉해졌다. 원년에 3번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3년(493년) 정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또한 3년에 제나라 황제가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삼았다. 3년과 4년 해마다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년(495년) 제나라 황제가 왕을 승진시켜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8년, 9년 10년에도 사신을 위에 보냈다. 11년(502년) 4월에 양나라 고조가 왕을 승진시켜 거기대장군으로 삼았다. 13년, 15년에 사신을 위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후에도 해마다 위나라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라 역시 중국 대륙의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니, 삼국이 경쟁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500년 전후의 한반도 정세였다. 사정과 형편이 이러한데도 어찌 백제와 고구려가 바다 건너 멀리 요서와 강남에 영토를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 문장 “攻取越州 改署郡縣曰 松江會稽吳城左越山越泉州”은 바로 앞의 글 “與世民約 山西河北山東江左 悉屬於我 이세민과 약정을 맺어 산서, 하북, 산동, 강좌 모두 우리 고구려에 속했다”에 이어지고 있다. 이 문장의 목적은, 이세민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중국 땅 동부 지역을 확보했는데, 그것은 그냥 얻은 게 아니라 이미 150여 년 전에 백제와 함께 우리 고구려가 가졌던 구토였고, 이제 그 구토를 되찾았다는 명분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의 문장이 조작되었음이 밝혀졌고, 이 문장 역시 『삼국사기』의 기사에 나타난 대중 외교 모습에서 검증한 대로 조작이다.
역사를 조작하는 자들은 무엇을 노리는가. 연개소문을 민족 영웅으로 조작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중국에 쳐들어가서 산동-하북-요서 지역을 차지한 치우천왕의 뜻을 받든 연개소문이 산서-하북-산동-강좌 지역을 차지했듯이 우리 대진국도, 고려도 중국에 쳐들어가서 구토를 수복하자는 게 아니냐. 그런데 치우천왕은 탁록대전에서 헌원에게 패배하여 잡혀 죽었고, 연개소문은 4전 1승 3패를 하며 근근이 버티다가 마침내 아들 셋의 분열 때문에 고구려를 망하게 만들었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망상에 빠진 국수주의자들은 그저 고토수복을 외쳐댄다. 환국이 동서 오만 리에 남북 이만여 리라 주장하는 자들의 심리 깊숙이에는 아시아 대륙을 제패하려는 야심이 가득하다. 그 심리는 일제 군국주의자들과 똑같다. 좁혀서 만주와 중국대륙 동부 동이족 영역을 주장하는 자들은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똘마니들이다. 1388년 최영의 요동정벌론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꺾임으로서 우리 민족의 대륙 수복 의지가 통하던 시대가 끝났다. 삼천리 금수강산을 잘 지키고 가꾸는 것이 현재와 미래의 유일한 명분이요 목적이다.
[조대기]와 [고구려본국기]가 이렇게 빤한 거짓말을 사서로 남겨서야 되겠는가?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키고, 그 둔갑을 감추기 위해 교묘한 문장 술수를 부리는 것은 글을 아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하물며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자세가 아니다. [조대기]와 [고구려본국기]에서 이러한 조작술을 부린 자는 글을 아는 자가 아니라 정치 선동꾼이다. 이 정치 선동꾼이 조작한 역사를 사실로 믿고 퍼뜨리는 자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난세일수록 이러한 조작 선동꾼들이 날뛰면서 혹세무민하여 사회와 나라를 어지럽히다가 종내는 망치고 만다. 재차 말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옥과 돌이 섞여 있다. 모두 옥이라 여기면 큰 실수와 과오를 범한다. 또한 모두 돌이 아니다. 모두 돌이라 여기면 큰 실수와 과오를 범한다.
내가 노년기의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비분강개하며 보내지만, 이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시시비비를 밝혀 조작을 폭로함으로써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난동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크게는 우리 민족사의 흐름이 바르게 흐르도록 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王介甫曰 淵蓋蘇文 非常人也 果然 莫離支在 則高句麗與百濟俱在 莫離支去 則百濟與高句麗俱亡 莫離支 亦人傑也哉
莫離支 臨終 顧謂男生男建曰 爾兄弟 愛之如水 束箭則强 分箭則折 須無忘此將死之言 貽笑於天下隣國之人 時則開化十六年十月七日也 墓在雲山之九峰山也
왕개보가 말하기를, ”연개소문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이로다. 막리지가 있은즉 고구려와 백제가 공존하더니, 막리지가 없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했다. 막리지는 역시 인걸이로다.“라 했다.
막리지가 임종할 때 남생과 남건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같이 사랑하라. 화살은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쉽게 부러진다. 부디 이 아비가 죽어가며 하는 말을 잊어 천하와 이웃 나라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하였다. 이때가 개화 16년(666년) 10월 7일이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논주] 율곡 이이 석담일기(石潭日記) <기대승 인물평>에 “옛날 송나라의 왕개보(王介甫 왕안석)는 정권을 잡아 일을 하였으나 뭇 소인들이 아부하여 마침내 나라 일을 그르쳤으니, 이것은 때를 만난 중에서의 불행이다.”라는 말이 있다.
또한 동국통감에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와 더불어 고사를 논하며 말하기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征伐)하였으나 어찌하여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왕개보가 대답하기를, ‘천개소문이 비상(非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천개소문은 또한 재사(才士)인 것이다. 그러나 능히 곧은 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혹하고 포악하며 스스로 방자하여, 대역(大逆)에 이르렀던 것이다. 《춘추(春秋)》에,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적(賊)을 토벌하지 않으면 그를 일러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천개소문이 모름지기 목숨을 보존하여 집에서 죽게 된 것은,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또한 ‘신(臣)등은 살펴보건데’에서 말하기를,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치려고 천개소문의 시역(弑逆)의 죄를 성토(聲討)하니, 천개소문이 천자의 사신을 가두어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불공(不恭)하였습니다. 그 죄악은 천하 고금에 없던 것으로,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모두 흉역(凶逆)임을 알고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은, 신종(神宗)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은 천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까? 이와 같은 난적(亂賊)의 괴수(魁首)를 비상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천하 고금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누구인들 비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왕안석은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한 데다가, 학술(學術) 또한 바르지 못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것이 후세의 평가이다. 왕안석이 변법론자라 하더니, 역시 왕을 무참하게 죽인 불충과 부도덕성보다는 정치성 수완을 높이 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왕개보가 한 말은 “천개소문이 비상(非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뿐인데도 뒤에 사족을 달았다.
사족이지만 맞는 말이다. 고구려는 연개소문과 운명을 함께 했다. 즉 연개소문이 고구려를 망쳤다. 생시에도 폭압한 언행을 자행했지만 사수전투에서 한 번 승리한 것 외에는 세 번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 임종 시에 요즘에도 교훈으로 쓰이는 화살 묶음을 비유하며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들 셋은 아버지가 죽자 곧 권력투쟁에 빠져 분열하더니 만 2년 만에 고구려를 패망하게 하고 말았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다. 아버지가 그렇게 악독하고 포악하니 자식들인들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자가 있겠는가. 남생-남산-남건 세 형제가 아버지의 유연을 받들어 굳게 단결하여 고구려를 지켜냈다면 연개소문이 빛났을 것이다. [조대기]의 조작이 워낙 교묘해서인지 연개소문에 대한 조작된 인식이 현재까지도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연개소문을 존경하는 자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보다는 강제와 억압의 굴레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갈 길이 멀듯이 DNA에 착색된 강제와 억압성의 굴레도 쉽게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高麗鎭 在北京安定門外六十里許 安市城 在開平府東北七十里 今湯池堡 高麗城 在河間縣西北十二里 皆太祖武烈帝所築也
唐樊漢 有高麗城懷古詩一首 傳於世 其詩 曰 僻地城門闢 雲林雉堞長 水明留晩照 沙暗燭星光 疊鼓連雲起 新花拂地粧 居然朝市變 無復管絃額 荊棘黃塵裡 蒿蓬古道傍 輕塵埋翡翠 荒豌上牛羊 無奈當年事 秋聲肅雁行
予雖不文 追其韻而次之曰 遼西尙存古城墟 想必名邦運祚長 燕峀嶒巇多戰色 遼河湯棠共天光 風林空谷演舞態 仙禽高樹欲啼粧 干旄關防一夕變 呼賣振鈴聞凄額 燕凉元來盡我有 官兵久鎭飮馬傍 英雄不作時事去 無復驅敵如驅羊 今我弔古無限意 爲贐核郞萬里行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제6대 太祖武烈帝 서기53년~서기146년)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 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 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취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빛으로 흘러라.
바람 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 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 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옛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논주] “皆太祖武烈帝所築也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았다”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大祖大王)> 기사로 “三年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3년(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註 001)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요서(遼西)’가 어디냐 하는 데 대해 현재 여러 학설이 대두하고 있다. 또한 10개 성을 쌓았다고만 했지 성의 종류가 열거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는 고려진, 안시성, 고려성이란 이름을 거론한다.
「註) 001 요서(遼西)에 10성 : 요서는 흔히 ‘랴오허[遼河] 강의 서쪽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요서로 지칭되는 지역 범위는 시기별 요서군의 관할구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가령 요서군은 전국(戰國) 연(燕)에 의해 처음 설치되었는데, 전한(前漢)까지는 이우뤼산[醫巫閭山]~롼허[灤河] 강 일대를 포괄하면서 14개 현(縣)을 거느렸지만, 후한 시기에는 현의 수가 5개로 줄어들었다. 조위(曹魏) 시기에는 수현(首縣)인 양락현(陽樂縣)을 비롯해 소속 현을 모두 롼허강 중·하류에만 두었고, 서진 시기에는 현의 수가 3개로 줄어들었다. 5호 16국~북위(北魏) 시기에도 요서군은 롼허강 하류 일대에 두어졌다. ‘요서’의 지역 범위는 시기에 따라 바뀌었는데(여호규, 8쪽), 어느 시기이든 요서는 요하가 아니라 이우뤼산의 서쪽 지역을 지칭했다. 이 기사를 근거로 고구려가 1세기 중반에 이미 랴오허[遼河] 강을 넘어 요서로 진출하였다고 보기도 하지만(金光洙, 58쪽; 손영종, 96쪽), 한의 현도군과 요동군이 지금의 요동지역에 설치된 상황에서 고구려가 요하를 넘어 요서지역까지 진출하여 10개 성곽을 축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에 요서를 ‘아이허[靉河] 강이나 타이쯔허[太子河] 강 서쪽 일대’로 비정한 다음 해당 기사를 고구려가 서쪽 변경에 10성을 축조하였다고 보거나(신형식, 205쪽), 요동방면으로의 진출이나(김미경, 89쪽) 요동방면 서쪽 변경의 방비 강화(장병진, 123쪽)를 반영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단순히 서쪽 변경에 성곽을 축조한 것을 ‘요서 10성’으로 표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모종의 착오에 의한 두찬(杜撰)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7: 2012, 278쪽 및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42쪽).」
이 글에서는 고려진, 안시성, 고려성이 요하를 지나고 대릉하를 지나고 또 난하를 지나 북경 가까이 하북성 일대에 있다고 한다. 안시성이 있었다고 하는 개평부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의 시린궈러 맹 내의 행정구역상으로 ‘정란 기’에 속한다. 베이징시와의 거리는 베이징시 북단으로부터 허베이성을 사이에 두고 200km에 불과하다. 이 말대로라면 당 태종의 대군이 북경에서 500리 되는 곳에서 사투를 벌였다는 것이 되고, 철군할 때 죽을 고생을 했다는 ‘遼澤泥榧 요택의 진흙뻘’이 그 사이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서기 55년 전후 시대의 고구려는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건국 초기였다. 한사군도 다 몰아내지 못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지역에 존재하고 현도군은 심양 부근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중국은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부흥하여 다시 세력이 강해졌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졸본성과 국내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요동으로, 남쪽으로는 압록강 하류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옥저와 동예, 북으로는 부여와 경쟁하며 한창 국토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였다. 중간에 한사군을 두고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까지는 도저히 진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요하 서쪽 지역 일부까지는 장악할 수 있어 10개 성을 쌓았을 것이다. 즉 55년 태조대왕 때의 최대 진출 지역이 요서였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요하에서 수천 리인 북경 60리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고, 10개의 성을 쌓았다 하는 것은 후세의 왜곡이요 과장이다. 현재 나한과 북한의 학자들 모두가 중국 요령성 해성시에 있는 영성자 산성을 고구려 말기의 안시성으로 보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왜곡하고 과장한다고 하여 우리 민족에게 득되는 게 전혀 없다. 오히려 허황한 객기만 잔뜩 불어넣을 뿐이다.
[고구려국본기]가 대진국 초기에 대야발 등에 의해 처음으로 쓰여진 이래 계속하여 첨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요서 10성 문장은 누군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사를 옮겨 쓰면서 10성 중에서 3성의 이름과 위치를 첨부했다. 그러고는 당나라 시인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성회고시(高麗城懷古詩)’를 찾아 덧붙여서 증거로 삼으면서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번한이 북경 인근의 고구려 성들을 보고 지었는지, 요동반도의 고구려 성들을 보고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단재 신채호가 “그 시가 북경 안정문(安定門)밖 60리지점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縣) 서북(西 北) 12리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을 보고 지은 시(詩)라”라고 말했다는 것이 세상에 퍼져 나가면서 단재의 이름값과 함께 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朝代記曰 太祖隆武三年 築遼西十城以備漢 十城 一曰安市 在開平府東北七十里 二曰石城 在建安西五十里 三曰建安 在安市南七十里 四曰建興 在灤河西 五曰遼東 在昌黎西南境 六曰豊城 在安市西北一百里 七曰韓城 在豊城南二百里 八曰玉田堡 舊遼東國 在韓城西南六十里 九曰澤城 在遼澤西南五十里 十曰遼澤 在黃河北流左岸 五年春正月 又築白岩城 桶道城
三韓秘記曰 舊志云 遼西 有昌遼縣 唐時 改遼州 南有碣石山而其下則白岩城 亦唐時所謂岩州 卽此也 建安城 在唐山境內 其西南爲開平 一云蓋平 唐時亦稱蓋州 是也 資治通鑑曰 玄菟郡 在柳城盧龍之間 漢書 馬首山 在柳城西南 唐時築土城
[조대기]에 말하기를, “ 태조 융무 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10성의 첫 번째는 안시성으로 개평부에서 동북 70리에 있고, 두 번째는 석성으로 건안 서쪽 50리에 있고, 세 번째는 건안으로 안시 남쪽 70리에, 네 번째는 건흥으로 난하 서쪽에, 다섯 번째는 요동으로 창려 서남쪽 국경에, 여섯 번째는 풍성으로 안시 서북쪽 100리에, 일곱 번째는 한성으로 풍성 남쪽 200리에, 여덟 번째는 옥전보로 옛 요동국으로서 한성 서남쪽 60리에, 아홉 번째는 택성으로 요택 서남쪽 50리에, 열 번째는 요택으로 황하 북류의 좌측 강가에 있었다. 5년 봄 정월에 다시 백암성과 통도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삼한비기]에서 말하기를, “옛 기록에 이르길, ‘요서에 창료현이 있다’고 하는데 당나라 때 요주로 바꾸었다. 남쪽에는 갈석산이 있고 그 아래가 백암성이니 또한 당나라 때의 암주라고 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건안성은 당산 경내에 있으며 그 서남쪽을 개평 혹은 개평이라 한다. 당나라 때 개주라고 한 곳이 여기다.”라 하였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현도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의 마수산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으니 당나라 때 쌓은 토성이다.”라 하였다.
[논주] 한국과 중국의 고사서에 등장하는 많은 지명 중에서 위치가 정확하게 규명된 것보다 미지의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 틈새로 독버섯으로 돋아나는 것이 바로 과격한 국수주의자들의 갖가지 망상성 가설이다. 그런데 가설로 끝나면 좋은데 가설이 아니라 정설이라 확신하며 고집하는 데 문제가 있다. 고사서 한 귀퉁이에 실려있는 글자 한 자나 문장 한 구절을 단장취의를 넘어서 단장취해 해버린다. 그리하여 상고사와 고대사 분야가 학문의 장이 아니라 혓바닥 춤과 손가락 춤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버린다.
기성 학자들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배우고 익힌 범위 내에서 사고하고 만족한다. 새로운 학설이나 가설에 대한 탐구심보다는 배타심이 먼저 생긴다. 소위 재야 학인들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왕성한 탐구심으로 기존 학설을 헤집으며 새로운 것을 찾아낸다. 하지만 학문의 기초가 약하기 때문에 새로운 학설이나 가설 역시 허약하다. 특히 기존 학설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나오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광분한다.
[조대기]의 이 부분의 글 역시 비교 검증을 거친 정설이 아니라 글쓴 이가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또는 자기가 상상한 가설을 써 놓은 것이다. 그런데 소위 재야 학인들은 [조대기]에 적혀 있는 내용을 거름장치 없이 사실로 확정해버린다. 그리고는 자기 소신을 보태어 세상에 퍼뜨린다. 요서 10성 축성설은 곧바로 고구려가 북경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한 역사로 둔갑해버린다. 그리고는 온갖 매체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간다. 그러한 과정이 개인이 아니라 단체, 종교 집단의 선전도구에 편승되면 거침없이 퍼져나간다. 그리하여 감동, 감염된 사람들은 잃어버린 고토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되찾는 방도가 전쟁 말고 다른 게 있는가? 즉 비교 검증의 과정도 없이 함부로 [조대기] 등 고사서들의 왜곡, 과장, 조작된 부분을 세상에 퍼뜨리는 자들은 전쟁을 불러들이는 자들이다.
이렇게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자칫 엉뚱한 횡액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민간 소장 고사서 수거령을 내린 까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이러한 위험성 때문이었다. 수거령이 단순히 조정의 역사관 정책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왜곡과 조작으로 생기는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조대기]에 왜곡과 조작이 많다. 2026. 7. 30 남선헌에서 개산팔경 박희용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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