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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즘, 시로 쓴 최초의 분석 보고서
―옥지구 시집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 해설
이영숙 | 시인ㆍ문학평론가
환상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을 의미하지만 예술, 특히 시에서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은폐되거나 왜곡된 진실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실천적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의 개념이 어떻게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닐 수 있는지를 곰브리치는 일찍이 『The Story of Art』(1950)에서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엡솜의 경마>(1821)를 통해 예시한 바 있다. 당시의 그림이나 스포츠 판화는 말들이 네 다리를 쭉 뻗고 마치 공중을 나는 듯이 묘사되었는데, 그로부터 오십여 년 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연속 촬영한 <달리는 말의 동작>(1872)은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질주하는 말은 네 다리를 차례로 땅에서 떼었다가 다시 내린다는 것이다. 마이브리지의 시도는 관습적으로 유통되던 왜곡된 진실을 드러낸 것이었으나, 대중은 이 사진을 사실이 아닌 환상으로 받아들였다. 이 에피소드는 양윤의가 “환상은 앎의 체계와 욕망의 체계, 지식의 담론과 정념의 담론이 위장하고 은폐하는 지점들을 지시한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이 구성한 세계의 관습적 이면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부모와 자식 혹은 스승과 제자 같은 일상적 관계망들도 (…) 사랑과 존경이 빠져나간 자리를 우리가 흔히 ‘예의’라고 부르는 ‘연극’이 버텨주고 있지 않은가”라는 신형철의 반문도 같은 맥락이다. 현실은 사실과 실재가 아니라 체계와 담론의 산물로서, 대상 간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조건 등에 의해 가치와 정의의 기준이 달라진다. 만약 사실과 실재가 우리의 현실 상황을 구성했다면 환상의 자리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시는 환상을 담기에 유용한 그릇이다. 현대시에서 환상은 1990년대 이후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세계사와 문명사적 급변이 유발하고 견고하던 이념과 근대적 시공간에 대한 회의와 성찰이 찾아낸 출구였다. 그로부터 삼사십 년이 흐르는 동안 환상시는 성년을 지나 보다 원숙해졌고 참여 시인의 층도 두꺼워졌다. 현실과 환상이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숱한 문제작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환상에 시적 논리를 부여하고 있는 환상적 리얼리티는 환상보다 더 환상 같고 우화 같은 우리 현실 세계의 이면을 투시하고 인간의 내면을 조명했을 뿐 아니라 환상적 상상력을 더욱 풍요롭게 발현하였다. 환상시의 말석을 차지하면서 그 자신이 농인이기도 한 옥지구 시인은 농사회에 무지하거나, 알지만 모른 척하거나, 대놓고 무시하는 청사회를 향해 도발한다. 「오디즘Audism」은 그런 의미에서 <달리는 말의 동작>의 21세기 버전이며, 청능주의에 대해 시로 쓴 최초의 분석 보고서다.
글쎄, 당신들의 기준이 내 것이었나
난 절망한 당신들의 눈빛을 관찰하고 싶어
약오르게 울고 나서야 오, 오디즘
난 그대들이 원하는 일원으로 진실하지 못해
굴복하는 연기를 하기 직전에 난 나를 미운 듯이
오, 오디즘
인공 달팽이관 속에 깔린 노이즈에
거의 죽어가는 유리알들이 무질서하게 움직인다
극복해야 해, 살아남을 수 있어
글쎄, 당신들의 기준이 내 것이었나
이러다가 더 결핍될지도 모르고
나를 고백하는 지구력이 초라해지고
이게 최선인가요
다른 방법이 없나요
사회적인 천사들, 나를 하대하는 그대들의 눈빛은 아름답지
그토록 은은하게 사악할 줄도 몰랐지
오, 오디즘, 오디즘
너 지금 어디쯤이니
뒤돌아서 가늘어진 비명으로
나만 아는 곳에서 가시꽃이 피어난다
소리 세포는 이미 영면에 든 지 오래되었다
‘청’ 완벽주의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딱딱해진 내 손으로
열광적으로 닦아주느라 눈물 덩어리가 부담감으로
힘껏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들을
목을 잠기게 하는 영광으로 돌려줄 테니
오 오디즘, 오디즘
*오디즘Audism: 청인이 우월하다고 믿고 농인에게 청인처럼 행동하라고 하는 청능주의
―「오디즘Audism」 전문
청인(聽人)은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농인(聾人)은 ‘듣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청인은 청각에, 수어(手語)와 수지(手指)를 사용하는 농인은 시각에 의존한다. 언어적 다수자와 언어적 소수자로도 지칭되는 이들은 비장애인/장애인으로 분류되거나, 심지어는 정상인/비정상인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차이로 인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보편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사실과 실재의 현장이다. 그럼에도 농인이 청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라는 인식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가족이나 지인들조차 수어를 배워 그/그녀와 소통하기보다는 인공와우 삽입 등을 통해 그/그녀가 청사회에 편입되기를 더 열망한다. 세계는 청인을 중심으로 기획되었으므로, 그/그녀는 꽤 잘 듣는 농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청인은 될 수 없는 경계에 놓이게 된다.
청인들은 알고 있을까. “인공 달팽이관 속에 깔린 노이즈”(인공와우)를 착용했을 때 “거의 죽어가는 유리알들이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쇠구슬이 뇌 속에서 굴러”가는 듯한 두통과 “눈알이 튀어나”(「편두통」)올 것 같은 안구통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청력을 포기하고 왕왕 침묵의 세계를 선택하는 농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극복해야 해, 살아남을 수 있어”라는 말은 용기를 주는 격려보다는 농인의 의지나 노력의 부족을 지적하는 말투에 가깝다는 사실을. “굴복하는 연기를 하”면서까지 노력해도 청사회의 “일원”이 되기는 요원할뿐더러 오히려 “더 결핍”감과 “나를 고백하는 지구력이 초라해”져 막상 농인의 자신감과 자존감은 저하된다는 사실을. “이게 최선인가요/ 다른 방법이 없나요”라고 물으며 “그대들”이 “나를 가엾게 여기”며 “절망”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할 때, 그 “사회적인” “눈빛은 아름답”지만, 내면의 “하대”까지 숨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얘야 누가 뭐래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만 해
바보가 되기 싫으면 시각에 의존하지 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말을 잘 들어야 해
(중략)
어른들이 말한다 너는 말을 할 줄 알고 착해졌지 타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예쁘지 혹시 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있는 건 아 니지? 직업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설마 문예창작? 국어국문학과? 얘, 현실적으로 생각해 너 같은 애가 그곳에 가면 과연
사람들이 너를 환영해줘? 국어시험지를 안 봤어? 그게 딱 네 수준이야
―「ㅍㄱㅅㄹㅇ ㅇㄹㅈ」 부분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주입하면서 청능주의는 시각에 의존해야 하는 농인에게 “시각에 의존하지” 말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강제한다. 이때 ‘잘 듣기’의 필요성은 그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청각 기능을 높이기보다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사회의 집단 무의식이 농인을 대하는 태도이며, 농인은 ‘훌륭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고, ‘바보’와 가깝다는 전제가 깔린 “은은하게 사악”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면서 “고객요청”에 “농인입니다/ 필담 필수”라 메모했을 때, 즉시 “가십거리 정보”(「가십거리 정보 영수증」)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오디즘Audism」에는 반전이 있다. “힘껏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들을/ 목을 잠기게 하는 영광으로 돌려줄” ‘나’의 전략은 “절망한 당신들의” “눈물을” “열광적으로 닦아”줄지언정 “그대들이 원하는 일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대들이 흘리는 절망의 눈물’에는 ‘가엾게 여겨 그토록 친절을 베풀었는데 은혜도 모르다니!’류의 원망 내지는 분노가 담겨 있다. “글쎄, 당신들의 기준이 내 것이었나”라고 ‘나’는 되묻는다. 그 “기준”을 따라가지 않고 “꿈쟁이가 되겠다고 결심한 (…) 열여덟 살”(「해몽 일기」) 이래, 옥지구는 “미움을 여행하느라 자아를 부수는 사람/ 무일푼을 두렵지 않은 척하는 독한 년/ 찬사받아야 할 위치에 횃불을 지핀 나/ 하고 싶은 일들을 실현시킨 혁명가”라는 미래완료형 인물로 거듭나고 있다.
옥지구에게 농인의 정체성은 사실과 실재를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환상적 리얼리티의 중요 기제이다. 「오디즘Audism」은 모체로서, 내부에 장착된 또 다른 패턴과 형태의 폭죽들을 연이어 터트리는 방식으로 폭발한다. 현실에 없거나 보이지 않았던 존재와 현상들이 발랄하게 현현한다.
나는 나의 언니가 되어야 한다
Kitsh하게 살래 Hippie스럽게 춤추자
사랑은 곧 Vintage 너와 나의 이름은 High teen
나는 타인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을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생명체
나는 나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우월적인 눈빛에 첨예하게 고백하기로
발음이 왜 그렇습니까 아이고 당신의 가족이 참 고통받으셨겠네요 말씀을 잘 듣고 말 연습을 멈추지 마세요 기도할게요
우리 교회에 오실래요 아니면 제일 친한 의사를 소개해 줄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그래야 소리 잘 듣지 얼굴이 예쁜데 참
안타깝군 살도 좀 빼 몇 살이야? 시집가야지 너와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정상적인 아이도 낳지
예, 감사합니다
지R
그쪽은 모른다 나는 양면적인 사회가 원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려다가 굴욕을 구토하지 못한 병으로 죽을 뻔했단 걸
창문 틈에 들어오는 바람을 잔빛이라고 부른다
불쾌한 다정함 때문에 건조한 미소를 딱딱한 침대에 눕힌다
술자리에서 처음 보는 동족들마저 아쉬운 마음에 나를 알고 싶은 척한다
너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르는 게 많아서 문제야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작정을 했니?
너 4차원이라는 기질이 강하다는 소문을 들었어 유치한 장난을 자제하렴 왜 그렇게 살아
감히 허락 없이 나의 스승이 되려고 한다 내가 싫어하는 개구리 시체를 주워서 던질까 말까
(중략)
호불호 뭐라고 호호호 간지러워라
참을 수가 없어서 난 나를 고백하겠어
좋지 않음과 좋음에 선이 없어 이 망할 것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해야 하는 제도가 없지
난 나랑 연애하는 게 더 빠르겠어
―「자유의 시그너처」 부분
시의 머리맡에 자리한 Kitsch, Hippie, Vintage, High teen에는 (이것이 자발적,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일 때 특히)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고급함에 대한, 기성 문화에 대한, 현대의 인스턴트식 사랑에 대한, 어른 되기에 대한―저항이 그것이다. 미술사나 문예사조를 보더라도 저항은 기존 권위에 대한 반동에서 출발한다. “타인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나’는 “좋아하는 것들”로 만든다. “우월적인 눈빛”을 가진 “타인들”의 육성은 편견과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처음 만난 ‘나’가 농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발음이 왜 그렇습니까”) 말투에서 예의가 사라진다. ‘나’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나’의 가족을 연민함으로써 ‘나’를 타자화시키며(“아이고 당신의 가족이 참 고통받으셨겠네요”), 상투적인 충고(“말씀을 잘 듣고 말 연습을 멈추지 마세요”)에, 진심이 담기지 않은 약속(“기도할게요 우리 교회에 오실래요 아니면 제일 친한 의사를 소개해 줄게”-이 대목에서 슬그머니 하대로 전환)을 하고, 잔소리(“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그래야 소리 잘 듣지”)에, 노골적으로 인신공격의 무례를 범하며(“얼굴이 예쁜데 참 안타깝군 살도 좀 빼 몇 살이야?”), 존재에 대한 부정이 서슴없이 이루어진다(“너와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정상적인 아이도 낳지”). 어쩌면 이 모욕은 상시적이며, ‘나’만이 아니라 농사회에 속한 사람들 모두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예, 감사합니다”라는 사회적인 응대와, 충고를 가장한 그 허위의식을 “지R”로 규정하는 내면의 소리에서 ‘나’의 진심은 후자 쪽에 있다. “타인들”은 “양면적인 사회”, 곧 청사회와 농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려다가 “굴욕”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나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는 “술자리에서 처음 보는” 농인들마저 “허락 없이 나의 스승이 되려고 한다”. 말하자면 옥지구의 “4차원이라는 기질”은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타인들”에 대한 반동이며 저항이 이행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중략)// 난 나랑 연애하는 게 더 빠르겠어
이 의젓한 도발은 가볍되 경박하지 않고, 무겁되 진지하지 않게 시집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옥지구는 주어지는 상황, 곧 “세 살 무렵”과 “다섯 살배기” 때 물과 관련하여 청력을 잃은 후에도 “가끔 물을 지나갈 때면/ 공포는 공포일 뿐이라고/ 소리지르는 낙을 즐겼어요/ 열다섯 살짜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중2병을 활용해서 노는 것뿐이었죠”라면서도 한발 더 나아가 “난 나에게 멋져 보이고 싶었어/ 아, 극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어/ 허세를 부리면 겁쟁이로 안 살게 될 것 같아서”(「반대편 멀티버스 지구에 사는 20대 논란의 화제 인물 인터뷰: 수심에 관하여」)라는 반동을 잊지 않는다. “돌에 걸려 넘어졌더니/ 앞니에 또 새로운 금이 갔다/ 친구 어깨에 매운 손을 날리고/ 뛰어가”다 “돌에 걸려 넘어”져 “앞니에 또 새로운 금이” 생기고, “인공 앞니를 심”(「동심 지킴이」)더라도 멈출 수 없는 이 “재미있는” 놀이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삶이 십팔스러워서 온 세상이 자극적으로 십팔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스물여덟이 되면 시집만 있는 서점에서 시간과 시를 파는 시팔이”(「멜랑꼴리하고 장난꾸러기 소녀」)가 되는 게 꿈인 ‘나’의 현실 공간은 환상 혹은 4차원에 가깝다. 인공와우를 끼지 않으면 거대한 침묵으로 변하는 이 혹독한 현실 공간에 옥지구는 「도피자를 위한 피자계 서브웨이」를 건설한다.
도피자를 위한 피자계 서브웨이
도피자들이 오로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은 피자 가게
받을 수 있는 손님은 오로지 도피자
피자 한 조각 무료 시식을 할 수 있는 손님은 오로지 임시 도피자
도피자가 만든 피자 가격과 종류는 천차만별
토핑 종류는 행성에 맞먹을 정도지
주문 방법은 매뉴얼에 있습니다
농인을 위한 수어 매뉴얼
청인을 위한 구어 매뉴얼
농인을 위한 필담 매뉴얼
청인을 위한 음성 매뉴얼
외국 농인을 위한 국제 수어 매뉴얼
외국 청인을 위한 구어 통역 매뉴얼
외국 농인을 위한 필담 번역 매뉴얼
외국 청인을 위한 음성 통역 매뉴얼
부끄럼이 많은 도피자 손님을 위한 그림 매뉴얼
(중략)
맛있게 드시는 방법에 정답은 없습니다 누가 쫓아오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도피자님 맛있게 드세요
―「도피자를 위한 피자계 서브웨이」 부분
현실이라는 침묵에서 도피한 자들을 위해 모든 걸 갖춘 “피자계 서브웨이”는 요리사도, 캐셔도, 손님도 모두가 “도피자”들이다. ‘도피자’와 ‘피자’의 언어유희에서도 발랄함이 묻어나지만, 이곳은 침묵 대신 활기가 가득하고, 중략된 부분의 [피자 종류]와 [토핑 종류]에는 생의 은유와 유머가 생동한다. “주문 방법은 매뉴얼에 있습니다”와 같은 친절함에는 “불쾌한 다정함”(「자유의 시그너처」)이나 가식과 경멸이 없으며, “부끄럼이 많은 도피자 손님을 위한 그림 매뉴얼”도 준비되어 있다. 이 환상적 공간을 4차원이라 부르지 않으면 달리 무어라 하겠는가. 가로축, 세로축, 높이축을 가진 3차원 공간에 시간축을 더한 4차원을 기하학에서 꺼내 현실에 건축한 예술가들은 많다. 쓰즈키 다쿠지의 『4차원의 세계』의 표지화로 인용되기도 한 르네 마그리트의 <백지 위임장>(1965)은 현실과 환상을 융합한 공간을 2차원의 평면 위에 구축한 대표적 작품이다.
땅속 다양한 파를 뽑기
양파 대파 쪽파 봄파 일파 실파
먹을 수 있는 파가 소멸 불가
내 땅의 가능성을 캐낸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마찰을 일으키고
아주 가볍게 손 키스를 날리듯이
손바닥의 끝을 입술에 살짝 댔다가 파-
할 수 있어 가능해 파-
사소한 의심 파기 불가
채소 파를 자주 드시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집니다
―「파-」 부분
수어의 시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시 역시 평면에 구축한 4차원이다. ‘할 수 있다, 가능하다’의 농인식 표현인 “파-”를 중의적으로 “채소 파”와 겹쳐 놓고, 또 “파-”의 기의를 “내 땅의 가능성”과 겹쳐 놓으면서 “파-”의 차원을 ‘내’ 생의 전면으로 입체적으로 확장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의 맛있는 출발」이나 「유리 조각」에서 보여주는 수어 표현도 단지 수어의 재현이 아니라, 사물이나 현상, 관계 등의 시적 소재처럼 기능하면서 시적 다의성을 실험한다. 수어의 무궁한 세계가 지면에 전혀 새로운 언어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일상예술가라는 직업이 있어야”(「일상예술가라는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할 만큼.
아, 시대가 비쌀수록 사랑이 가난해지네
새이니는 감히 시대가 비싸졌다고 말한다
새람이는 행성으로 이민 갈 준비를 한다
새이니는 미리 새람이에게 이별을 예고한다
새람이는 머리 뚜껑을 열고 뇌를 꺼낸다
소주 한잔하자고
별들의 무덤 지상 아래서
그들은 잠옷 차림으로 춤을 몽유한다
뒤틀어진 심장에서 바늘이 솟아나는 통증
오늘보다 더, 내일이 되면 정직하게 살지 말아야지
부끄러운 감정을 잊으면 용감해지기 쉬워진다
성공을 살짝 맛본 사람들이 웃으면서 말한다
이제 잘못이 아니란다 미래를 위해서란다
(중략)
아, 시대가 비쌀수록 사랑이 가난해지네
―「감히」 부분
사랑이 시대와 함수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물질과 함수 관계에 있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후자라면 그것은 어쩌면 현대적 삶의 일반적 진실이 될 수도 있다. 물질이 매개하는 사랑, 물질의 척도를 보유한 이 시대의 사랑을 우리는 자주 소비해 왔기 때문이다(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런데 ‘시대가 비쌀수록 사랑이 가난해진다’는 선언은 좀 낯설다. 더욱이 옥지구는 “사랑은 곧 Vintage”(「자유의 시그너처」)라고도 말한 바 있다. 시간이 매개하는 사랑, 시간의 척도를 보유한 이 시대의 사랑 같은 것일까(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 정작 물질도 시간도 아니고, 비싼 건 시대다. “새이니”가 “감히 시대가 비싸졌다고 말”할 때 ‘감히’에 주의해 보면, 사랑이 비싸질지언정 시대는 비싸지면 안 된다. 그들은 고통(“뒤틀어진 심장에서 바늘이 솟아나는 통증”)스러워하고, 자책한다(“오늘보다 더, 내일이 되면 정직하게 살지 말아야지// 부끄러운 감정을 잊으면 용감해지기 쉬워진다”). “성공을 살짝 맛본 사람들”에 의하면, 이 시대에는 “미래를 위해” 사랑을 저축해야 한다. 저축할 사랑이 없는 이들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기쁜 추억들과 꿈을 매수”해야 한다. 시대가 비싸지고 사랑이 가난해지는 이유이다.
지난여름이 내 피부를 태우고
숨결이 보이지 않는 내 얼굴
키스가 뭐라고 더워라 라라
라면이 좋아 후덥지근한 맛 따위
여름이 운명하기 전에
난 나의 오만함을 용서해
쓸데없이 내 사랑이 퍽 컸어
―「뜨거웠던 계절, 안녕」 부분
Y의 환한 미소가 떠오를 때마다
눈부심을 분해하고 싶다
무척 빛났어 터무니없는 열망이 도질 뻔했지
―「미완성적인 도수」 부분
짐짓 딴청을 해보지만(“키스가 뭐라고 더워라 라라/ 라면이 좋아 후덥지근한 맛 따위”), “뜨거웠던 계절”과 함께 “사랑”도 갔다. “Y의 환한 미소가 떠오를 때마다” “터무니없는 열망이 도질 뻔”한다. 시대가 이기고 사랑은 가난해진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먹고 딸기를 낳고/ 딸기를 먹고 석류를 낳는다/ 체리를 먹고 앵두를 낳고/ 앵두를 먹고 자두를 낳는다// (중략)// 다시 되돌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연구한다// (중략)// 떨리는 신호의 온도가 떨어지지 않게”(「붉은 기가 도는 달콤함」) 사랑을 불 지펴야 할 때가 온다.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는” “담배 냄새를 수용하게” 됨으로써 「지난겨울 동안 너 때문에 목이 안 아픈 적이 없다」는 불평은 사랑 고백의 다른 말이다. 사랑이 시대를 이긴 것일까. 그렇다. 시대가 비싸서 사랑이 가난해진 게 아니라 사랑이 가난해서 시대가 비싸졌다. 사랑이 비쌀수록 시대는 가난해진다는 역설을 옥지구는 이렇게 돌려 말한 것이다. “배신할 용기에 영양을 제공하면/ 사형, 사형이오, 잊지 마오, 잊지 마오”(「핑크 느와르」). 옥지구는 사랑의 절대성을 믿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
나는 갑자기라는 단어를 사랑한다
자꾸만 찾아오는 갑자기에 기댈 수밖에
갑자기는 나의 감정선을 게임기로 조종한다
이제 애인이 된 갑자기는 어제 겨울에 태어나서
차가운 음식을 즐겨 먹는 중이다
내년 여름에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중략)
실존하지 않는 친언니가 보고 싶어져서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
(중략)
정수리 위에 돌고 있는 사악한 천사들이
부끄럼 많은 인간을 간지럽히는 것은 사랑이야
―「불안하게 다정한, 욕망」 부분
우리 생은 비의에 둘러싸여 있다. “갑자기”가 언제 출현해서 “나의 감정선을 게임기로 조종”할지 모른다. “갑자기”를 “사랑”하고, “갑자기에 기댈 수밖에” 없어질 때, “갑자기”는 ‘나’의 “애인이 된”다. “갑자기”는 “불안하게 다정한, 욕망”이어서 “실존하지 않는 친언니가 보고 싶어”지는 감수성 따위를 생성할 뿐 아니라 “부끄럼 많은 인간을 간지럽”혀서 “사랑”을 일깨우는 “사악한 천사들”의 역할을 자초한다. “갑자기”로 인해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 해보지만, 글쎄, 잘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갑자기”가 없으면 옥지구는 다음과 같이 빼어난 시를 쓰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가 주는 꽃다발에
당신의 억척스러움이
바스락, 부실해졌습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허리가
굽어지는 것을 불허합니다
이제 이별 항공사에 문의하겠습니다
천국 명단에서 춘의 이름을 제외해 주세요
방금 아름다움을 목격했기 때문에
애증의 힘이 사랑스러워졌어요
춘이 많이 아프기엔 아직 마음이 여립니다
춘, 난 아직도 당신을 미워하고 싶습니다
꽃다발을 주지 말 걸 그랬습니다
엄청 좋아하는 표정에 오히려
동정이 부유해졌단 말이죠
춘, 거친 손으로 요리하는 음식에
어떤 세월을 보내셨는지 짐작합니다
그래도 남은 생에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요리해주세요
당신의 예민한 폭주를 용서할 테니
춘, 무뚝뚝한 내 얼굴에 울지 말아요
저 지금 솔직해지기 쉬운 마음을 밟고 있습니다
내 의견이 밉더라도
빈말을 꾸밀 줄 모릅니다
제발이라고 말하기엔
마음의 결이 이미 녹슬어버린다
―「할미꽃」 전문
아마도 (‘나’의 할머니일 듯싶은) “춘”에게 “꽃다발”을 준 동기는 따로 있겠지만, 이것이 의례적인 게 아니라 ‘갑자기’ 벌어진 이벤트 느낌을 주는 것은 “춘”의 “억척스러움이/ 바스락, 부실해졌”고, “엄청 좋아하는 표정”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나’는 비로소 처음 보는 듯한 시선으로 “춘”을 ‘발견’한다. 당신의 허리가 굽었다는 것, 천국 명단에 이름이 올라갈 만큼 나이 들었다는 것, 몸이 아프다는 것, 오랜 세월 요리하느라 손이 거칠어졌다는 등의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나는 자신의 주관적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당신의 허리가 굽어지는 것을 불허하며, 이별 항공사에 문의해 천국 명단에서 춘의 이름을 제외해 달라고 요청하려 한다. 애증은 사그라지고, 당신 마음의 여린 부분이 짚어진다. 한편 이것이 동정심이 아닌가 싶어 나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당신을 미워하면서 꽃다발을 주지 말 걸 하고 후회한다. 서사와 감정을 걷어낸 후반부가 시의 백미인데, “춘”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면서 옥지구는 마치 우리의 공감 능력을 예리한 시선으로 탐구하는 것만 같다. 이 부분에 어떠한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도 “불허”한다는 듯.
안녕 친구들,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꽃 피는 걸 보고 싶으면
자기 뼈를 깎아야 한대
절망을 여러 번 씹어봐
은은하게 반짝이는 빛의 맛이 느껴질 거야
―「시인의 말」 전문
옥지구는 첫 시집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를 내면서 “꽃 피는 걸 보고 싶으면/ 자기 뼈를 깎아야” 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슬픔을 간직한 채 “절망을 여러 번 씹어” “은은하게 반짝이는 빛의 맛이 느껴질” 때까지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지만, 그 자신은 경계인이 아니었다. 모험심과 저항 정신과 발랄함이 내내 동행하였다. 시 속으로 ‘끌려 들어가’ 아름다워지지 않으려고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옥지구의 빛깔로 물들었다. “혹시 저라는 인간은 당신인가요”. 그녀가 물었고,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이다.
-「오디즘, 시로 쓴 최초의 분석보고서」,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 출판사 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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