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카인의 문화
카인(Cain,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땅의 소산물로 바친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아니 하시고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바친 동생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열을 받아 안색이 확 변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안색이 변함을 보고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간곡히 충고하셨다. 그러나 그는 분노와 증오를 다스리지 못하고 둘이 함께 들에 있을 때 아우를 쳐 죽였다.
창세기 4장 1~8절에 나오는 위의 말씀에서 그의 폭력 살인의 이유를 찾아보면
첫째 장자로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둘째가 태어남으로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동생에게 집중되면서 외로움을 타며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분노에 빠졌다.
장자로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는데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을 제지당하고 양보해야 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부모를 대신해서 보살펴야 되며 잘못 보살폈을 때는 야단을 맞으며 꾸지람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카인은 부모님이 자기보다 동생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동생을 비교하며 분노와 증오에 시달렸다. 카인은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하여 부모님이 동생을 보살피는 것을 자기에 대한 무관심으로 받아들였다.
둘째 카인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그가 땅의 소유자이며 그가 일찍부터 욕심을 가지고 부모의 땅을 사유화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탐욕에 사로잡혀서 행여 동생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일찍이 목자로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을 동생과 함께 경작해야할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장자로서 동생에 대한 사랑이나 동정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보편적으로 어느 집에서든지 장자가 어렵고 힘든 일을 하고 동생들은 형의 보조원으로 그의 일에 협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카인은 동생이 자기를 도와서 함께 일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여 일찌감치 동생이 유랑하는 목자로 어렵고 힘들게 살도록 농간을 부렸다.
셋째 카인과 아벨의 제사과정을 보면 두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이 천양지차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벨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바치려고 양의 첫 새끼를 구별하여 성별해서 바쳤으나 카인은 제물을 구별하거나 성별하지 아니하였다. 아벨은 제물을 드릴 양, 첫 새끼가 태어나는 날을 기다렸고 태어난 뒤에 정성껏 사육하였다. 그리고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치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처럼 겸허히 잡아 바쳤다. 그러나 카인에게는 정성스런 준비 과정도 없었고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복종시킴도 추수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도 없었다.
넷째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자 카인은 제사 중임에도 분노와 증오를 드러냈다. 그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충고대로 자기반성을 하지 않고 동생을 경쟁자, 사랑을 가로채는 자, 빼앗는 자, 자기 인생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충동에 빠졌다. 그는 다혈질이었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행하는 과격하고 난폭한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간곡한 권면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살해 하였다.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였다.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는 동생을 살해한 일로 부모님과 하나님 앞에서 전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 했다. 아마 부모님께는 동생이 금 번에는 아주 먼 곳으로 양을 몰고 갔기 때문에 좀 늦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견디다 못해 입을 여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마음이 죽어버린, 영이 죽어버린 그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목덜미를 잡고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 개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모든 것을 혼자 독차지하고자 하는 유아적인 욕심으로 가득 찬 카인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인이 저주가 되어 자기 앞에 떨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정신을 버쩍 차린다. 그는 두려움에 빠져서 하나님께 벌이 너무 무겁다고 잉잉 거린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카인의 고백은 결코 죄의 회개가 아니다. 자기가 살인의 대가로 치르게 되는 고통이 너무 크므로 자신이 땅에서 떠돌 때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니 선처해주라는 탄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인을 너무 잘 아시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표를 주어서 죽임을 면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선언해서 살인자의 생명이 살인당하지 않도록 막아 주셨다.
하나님은 살인의 일상화, 살인을 빌미로 한 연쇄 살인으로부터 존엄한 생명을 지키셔야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표를 가지고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한 그가 그 곳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성을 쌓은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표로 안심할 수가 없어서 자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 살인을 범한 자는 평화로울 때조차도 불안과 공포에 빠진다. 자기 죄에 스스로 쫓기어 자기 둘레에 성을 쌓는다. 그리하여 카인은 도성의 문화를 낳았다.
카인의 문화는 첫째 도성의 문화이며 도시 문화이다.
카인의 도성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형성된 것으로 타인에 대한 불신이며 자연과의 분리이다. 또한 하나님의 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문화요, 다른 종족을 이단시 하는 배타와 독선의 문화이다. 닫힌 문화이며 자연 약탈의 문화이며 소비문화이며 쓰레기 양산 문화이다.
둘째로 카인의 문화는 그의 후손인 가축치기인 유발을 통해서 육식의 문화, 도살의 문화로 발전 되었다. 육식이 일상화는 인간의 체형과 기질, 성품을 바꾸었으며 기후와 환경변화를 가져왔다.
셋째로 카인의 문화는 후손인 유발을 통하여 향락문화를 형성하였다. 카인의 후손들은 노동과 작업을 기피하며 노래와 춤, 연극과 연주, 영화, 스포츠 등으로 지나치게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퇴폐중독증에 걸렸다.
넷째로 카인의 문화는 두발가인을 통해서 금속문화를 형성하였다. 금속문화는 생활에 편리한 이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살해하는 무기를 만들어서 세상을 전쟁터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인간은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기를 만들어서 대량 살상하는 모순과 부조리에 빠졌다.
다섯째로 카인의 문화는 라멕을 통하여 폭력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보복의 원칙을 강화하여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것을 정당화, 합리화시켜서 강자의 문화가 정착하게 되었다. 강자의 질서, 강자의 폭력으로 세계 질서가 편성되며 강자들의 폭력과 보복 게임 속에서 약자들이 희생당하는 구조이다.
카인의 문화는 그대로 현대문화이다.
성서는 카인의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할 문화로 아브라함의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서 형성한 문화는 순종의 문화, 사막의 문화, 자연의 문화, 평화의 문화, 용서의 문화, 방어의 문화, 생명의 문화이다.
카인의 문화는 재미있고 분명하고 스릴이 있고 화려하며 장쾌하며 자극적이며 감성적이며 흥미로우며 멋지게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문화는 담백하며 조용하고 잔잔하고 평화롭고 신선하고 느릿하고 여리게 흐리게 보이나 치유와 회복, 평화와 자유, 구원과 해방의 역사가 나타난다.
어느 문화를 선택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2021.4.16.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