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북간도 독립운동 이야기」
3부 <알고 싶지 않은 역사, 자유시참변>
3부는 1921년 6월 28일에 일어난 자유시참변에 대한 기술입니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 ( 알렉셰프스크, 자유시)에서 러시아 적색군(적군)과 자유시보병대대에 맞서 독립군부대의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며 무장해제를 거부한 연해주의 빨찌산부대들과 북간도에서 건너간 의군부(허재욱)소속 독립군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광의의 의미에서는 일본의 외교적 압박 속에 있는 레닌 적군들의 한인 독립군 제거작전이기도 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상해파 공산당(이동휘)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문창범, 오하묵)의 주도권, 패권 다툼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희생자는 ❮고려혁명군정회❯는 사망 37명, 도망 50명, 포로 900명이라고 발표를 하였고, ❮독립신문❯은 사망 36명, 탈출 100명, 포로 900명이라고 하였으나, 재북간도 항일단체는 사살 72명, 익사 37명, 기진해서 죽은 자 200여 명, 행방불명 250명, 체포 917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후의 흐름을 살피건대❮고려혁명군정회❯와 ❮독립신문❯의 발표된 숫자가 합리적이다.
당시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들의 무장해제는 일본의 압력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부대들이 위태하고 엄중한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여 서로 배려하였으면 최소한 인명 살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파국으로 치달으며 수많은 청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동북아 정세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부족했으며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역학관계에 무지하였고, 조국독립이라는 대의를 잊고 독립군끼리 경쟁하며 탐욕적인 파벌싸움에 주도하였고, 독립운동이야 어찌되든지 간에 자기파의 권력 강화를 위해 외국세력과 손을 잡고 동족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자유시참변의 권력다툼은 지도자들이 벌인 게임이었고 참변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에서, 서북간도에서 일본군과 생명 걸고 싸우던 청년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1860년대 부패한 양반관료들의 등쌀에 고향산천을 등져야 했던 가난한 천민과 소작인의 아들이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로 부터 혜택을 받은 적이 없었던 청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이 “조선 독립”이었다는 이율배반적인 사실에 전율하며 자유시참변에서 희망을 본다.
4부 <다시 용정에서 보다>
4부는 우리의 역사 인식에 대한 반성이며 제언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북간도에 온 망명지사들이 벌이는 독립운동의 시작과 한계성을 짚어보며 오늘 우리 한국사회가 여전히 봉건적, 양반 관료적, 사대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통찰하며 자성한다. 그리고 끝으로 한국 심장부에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인 독립투사들의 추모탑이 세워지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조선 건국자들이 조선 중심부에 왕건이나 왕건의 장군들을 동상으로 세워 놓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조선의 왕이나 장군이 세운 나라가 아니므로 그들의 역사적인 공이 아무리 지대하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심장부에 모셔서는 안 된다. 그 자리는 유명 무명의 독립군 투사들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 교회중심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
봉오동전투에 참여한 대한독립군, 신민단, 국민회군, 도독부 네 개의 독립군부대 중에 3개가 기독교 백 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네 개의 부대가 연합하도록 힘을 쓴 것은 캐나다장로회 지회를 근거로 해서 만든 간도국민회 였지요.
청산리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홍범도연합부대가 어랑촌으로 간 것은
그 곳에 캐나다장로회 지 교회, 백운평교회와 청산리(영신교회)와 가까운 거리에 장은평교회를 비롯한 캐나다장로회 지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0월 13일 어랑촌에 집결한 홍범도 연합부대 1,050여명은
대한독립군(약300명, 기독교, 봉오동전투 참전))
국민회군(약 250명, 캐나다장로회, 봉오동전투 참전)
훈춘한민회군(약 200명, 캐나다장로회)
의민단군(약100명, 천주교계)
신민단군(약 200명, 기독교 성리회, 봉오동전투 참전)입니다.
물론 후에 의군부군(약 150명, 복고주의)과 광복단군(약 200명, 복고주의) 도착하였지만 주력 부대는 위의 5개 부대였습니다.
10월 13일 어랑촌 모임에서 그들은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5개 조항을 결의합니다.
1)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한민회의 군사행동 통일한다.
2) 국민회 (간도)에 등록된 자들을 총동원하고 예정된 부서에 취임할 것.
3) 군량 및 군수품 징수에 급히 착수할 것.
4) 정찰대를 조직,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지할 것.
5) 일본군대와의 응전은 그 허를 찌르거나 또는 산간에 유인하여 필승을 기하도록 하고 그 외는 싸우지 말 것.
*청산리교회, 백운평교회, 장은평교회 등이 식사와 물자 조달
물론 북로군정서(대종교)가 있지요. 대략 600~1,000여명의 독립군이 있었지요.
홍범도연합부대가 어랑촌에서 연합부대를 편성할 때 북로군정서 군인들은 이범석이 이끄는 교성대(여행대)가 13일 정도에 청산리에 도착합니다.
김좌진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16일에야 청산리에 도착을 하였고
10월 19일에 있는 묘령모임에 김좌진은 참석하지도 않고 이범석과 계화, 현천묵이 참여해서 피전책을 주장했습니다.
- 오늘 우리(교회와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면?
화해자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민족적으로는 동서화해, 남북화해, 역사화해를 통해서 만남과 평화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어요.
세계사적으로도 화해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동서화해, 남북화해, 역사화해, 조건 없는 나눔과 봉사를 통해서 지구촌을 평화로, 정의로,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갈 사명이 있습니다.
- 이 책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주고 싶으셨는지?
강대국의 지도자들과 영웅들은 자국의 패권과 자신들의 권력과 영광, 명예와 이익을 위해 약소국과 민초들을 전쟁과 약탈로 죽음에 몰아넣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희생과 죽음을 기억하시며 결코 헛되게 하지 아니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진실을 사실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은 일꾼이 되어서 땅에서 평화의 도구로 살며 겪는 고통과 고난은 축복이라는 것,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 역사는 고정적이지 않으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 사랑과 희생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간 수많은 무명의 사람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자는 것 등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도 우리 시대가 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자는 것입니다.
2023.2.21.아침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