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걷기, 세계유산 남한산성을 찾다
오늘은 남한산성을 찾는 날입니다. 요즘은 꾸준히 걷기 모임에 참석할 수 있어 즐겁고 걷기가 있는
수요일이 그리워집니다. 숨이 차는 것도 없어지고 발바닥도 양호하니 얼마나 좋은 일이지요.
오늘은 의미 있는 333회 맞이로 남한산성을 걷습니다. 일 년 연간계획에 따라 착착 진행이 됩니다.
우리 이창호 대장님의 계획이 치밀하고 아주 一味만 걸을 수 있어 함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찍 산성역에 나가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아침 날씨가 싸늘합니다.
3월의 날씨가 가장 어중띠는 것 같습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3월에 전근을 가면 얼마나 을시년스러운지요.
게다가 난로도 피우지 않이 더욱 싸한 분위 속에 살게 합니다. 전에 우리는 4월 입학하였는데 그것이 자연이
돌아가는 순리일 듯도 싶습니다. 코로나로 인지 요즘은 역의 머물 수 있는 의자가 없이 횡한 공간만 있습니다.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산사람의 주요 멤버인 이창호 대장님과 김규환 총무, 정해중 악사님은
가정일로 나오지 못하고 7명이 모여 장재영을 대장으로 일정이 펼쳐졌습니다.
산성역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이리 저리 온 마을을 돌며 남한산성에 닿았습니다.
전에도 자주 와 보았던 남한산성이 요즘은 멀어졌습니다.
남한산성은 험준한 자연환경에 따라 성벽을 구축하고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답니다. 남한산성은 1971년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으며 2014년 6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답니다.
남문으로부터 산을 올랐습니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길은 5코스가 있으나 우리는 4코스를 걷기로 합니다.
157km 43회나 걸은 강석정과 장재영 달인이 있어 따라 살 수 있음이 편하고 즐겁습니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이 가장 크고 웅장하며 중심 문으로 현재 출입이 가장 많은 문입니다.
예전에는 자하문이라 불렀으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병자화란 때도 인조임금이 이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합니다.
수어장대로 성곽 안을 따라 오릅니다. 얼마나 가파른지요. 그래도 오르기 좋게 돌로,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숨이
차면서도 오를 수 있었습니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니 뱀이 꿈틀거리며 힘차게 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성을 지키는 군포지(軍鋪地)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었으며 125개
있었다는 설명 판이 있었습니다.
오르는 힘든 고갯마루에 어이없이 성황당 같은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겹게 오르며 돌을 쌓은 것,
나라를 위하는 기원, 자손들을 위한 기원 등을 담아 쌓아 올린 것으로 적이 쳐들어오면 긴요하게 썼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할 전략물자인 숯을 묻어두는 매탄처의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 300석을 묻을 수 있는
매탄처로 3년은 소금을 굽고 3년은 숯을 구웠고 합니다.
남산산성에서 제일 높은 수어장대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지휘소 겸 적정을 감시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수어사는 조선시대 5군영 제도중 하나로 수어청 수장이랍니다. 수어장대 아래애 남한산성을 쌓은 이희 장군과 그 부인을
모신 청량당이 있었고 동편으로는 매 바위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다녀가시며 심은 향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었습니다.
간식시간입니다. 한 사람이 한두 가지씩 가쳐 온 것이 훌륭한 간식입니다. 어쩌면 골고루인지요. 놀랍습니다.
이곳이 저에게는 의미 있는 자리입니다.1975년 장충학교에 근무할 때 동학년 12명의 교사들이 이곳에서 즐겼던 곳이며
다른 한편은 1973년 몸이 몹시 좋지 않아 시골에서 아버님이 자식을 보러오셨다가 며느리랑 3이 올라 밥을 짓고 즐거운
한 때를 지냈던 곳입니다. 아버지께서 배낭에 코펠이나 바나 등 먹을 것을 지고 오르시고 그 뒤를 따라가는 자식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요.
서문을 지나갑니다. 우익문(右翼門)이라고 불렀던 문으로 4문중 가장 작은 문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마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문으로 많이 올랐습니다. 전보다 중축을 하여 아주 볼품이 있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을 찾았습니다.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가 되는 곳으로 남한산성행궁은 실제 인조 임금이 병자호란 전쟁 때 피란하여 47일간을 항전했으며 그
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잠시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첫댓글 남한산성에는 많이 가보았으나 이렇게 남한산성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고
그냥 경관이 좋은 곳으로 알고 갔었는데, 어쩜 이리도 남한산성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 주셨는지 공부 한 번 잘 했습니다.
행궁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겉으로 스치고만 갔었는데
자세한 설명글과 사진으로 행궁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고,
남한산성 사진을 넘 잘 찍으셔서 "향기로운둥지"카페, '국내고적' 란에
사진을 복사해서 올려도 될지요. 저작권 침해는 아니겠지요? (^&^)
* 이렇게 향기로운 둥지가 있어 여행담이나 기사을 올릴 수 있어 좋습니다.
올릴 때마다 답글로 용기를 주셔 감사합니다. 친구들도 본다고 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