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술답사기 <초한전의 유적지를 찾아서> 강남 史記班을 비롯 송파,강남시니어프라자 그리고 평촌,군포의 노대홍선생 수강생 68명과 여행사사장 등 모두 70명이 중국 학술답사여행에 참여 하였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초한전에 나오는 홍문宴,진나라와 위나라 경계이며 관중을 차지하기 위한 관문인 함곡관 그리고 사기를 쓴 사마천의 사당과 무덤이 있는 한청의 사마천祠가 주 목적지이나 시안의 화산(華산)과 낙양의 용문석굴,향산사와 백거이묘소 등 관광지를 포함하였다. 5월19일부터 4박5일의 빡빡한 일정이다. 19일 새벽잠을 설치며 6시까지 인천공항에 집합해야 했다. 필자는 미리 잡혔던 독일일주여행과 겹쳐 5월16일 귀국하는 스케쥴로 조절했지만 이틀만에 떠나는 무리한 여행에 은근히 피로와 시차 걱정이 앞섰다. 시안이라면 진시왕의 무덤,병마용,화청지,화산 등 관광코스가 많다. 필자는 시안관광은 물론 낙양의 용문석굴이나 향산사 백거이묘도 두번이나 갔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어찌 홍문연이며 함곡관,사마천사를 가볼 수 있겠나 싶은 간절한 마음이 앞섰다. 예전에 읽었던 초한지(10권)도 디시 읽고 답사여행에 대비한 셈이다. 단지 우리 반 동지들 참여가 부진한 것과 너무 이른 새벽 출발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여행사에서 버스를 내주어 잠실에서 새벽 4시반,압구정역에서 5시에 출발한 버스는 50분만에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았다. 개인비자가 아니라 그룹비자라 중국 입출국시에는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한다. 9시 10분발 대한항공은 3시간 걸려 시안(西安)국제공항 에 도착했다. 제1일 홍문연(鴻門宴) 시안공항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버스가 두대이니 1호차와 2호차- 가이드도 두명이다. 우리팀은 2호차에 배정되고 버스 자리는 늘 룸메이트인 김두식동지와 나란히 했다. 2호차 가이드는 이철씨로 관광지 해설뿐만 아니라 역사지식의 폭도 넓은 편이었다. 여행의 만족도는 가이드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현지식으로 중식을 마치고 첫 목적지인 임동현의 홍문연으로 향했다.시골의 한적한 지역이지만 항우가 유방을 제거하기 위한 잔치를 연 곳이기에 흥미가 진진하고 과연 어떤 곳일까 궁금했던 곳이다. 입구에 鴻門宴遺址라는 황색 표지석이 서 있고 큼직한 대문을 지나 왼쪽 기둥엔 汉高祖絶地逢生千古留名 오른쪽 기둥에 楚覇王刀光劍影鴻門没宴이 시선을 끌며 서 있다. 아무래도 홍문은 절대강자인 항우의 파워를 과시하는 곳이다. 유방의 목숨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달아난 곳이 이곳이라 과연 유방이 여기서 제거되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없다지만--그저 궁금해진다. 그럼 역사를 통해 홍문연의 사건을 기술해 본다. 홍문(鴻門)은 홍구(鴻溝)를 말하는데,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홍문연(鴻門宴) 또는 홍문의 회(鴻門之會)는 중국 진나라(秦) 말기에 항우와 유방이 함양쟁탈을 둘러싸고 홍문에서 회동한 일을 뜻한다. 진승(陳勝)이 죽은 후 항량은 초(楚)의 회왕(懷王)의 손자로서 심(心)이라는 사람을 내세워 똑같은 회왕이라고 일컫고 반진(反秦) 세력을 집결시켰다. 기원전 208년 8월 항량이 전사하자, 초나라 군사의 중심이 된 사람은 항우와 유방이었다. 9월이 되어 항우는 북로(北路)에서, 유방은 남로(南路)에서 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이때 회왕은 맨 먼저 관중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왕(關中王)으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항우가 거록(鉅鹿)에서 진군(秦軍)을 쳐부수고, 또한 진 나라 장수 장한(章邯)을 항복시키는 등 하남(河南) 지방의 곳곳에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유방은 기원전 207년 10월에 한발 앞서서 무관(武關)을 돌파하여 함양을 점령하고 진왕 자영을 항복시켜 관중을 지배했다. 유방이 먼저 관중을 지배하자 격노한 항우는 총력을 기울여 단번에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하고, 12월에 홍문(鴻門)에 진을 쳤다. 이 험악한 양자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유방이 사과하는 형식으로 열린 회견(會見)이 역사상 유명한 홍문지회(鴻門之會)이다. 항우 쪽에서는 이 기회에 유방을 죽일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항우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 기회를 잃었으며, 유방은 부하 장량의 지혜와 번쾌의 용기 등 필사적인 활약으로 손쉽게 호랑이 굴을 벗어나 그 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 후 항우는 군사를 함양으로 진군시켜 진왕 자영을 죽이고 시황제의 여산릉(驪山陵)을 파헤쳐 진보재화(珍寶財貨)를 약탈하고,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질렀다. 그 불은 3개월에 걸쳐 계속 타올랐다고 하며, 진도(秦都) 함양은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에 이르러 진(秦)은 시황제의 통일로부터 헤아려 3대(代),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기원전 206년 12월에 서초패왕 항우와의 연회에 참석한 유방과 일헹의 동상이 서 있다. 그리고 담장벽에는 홍문의 잔치가 천추의 전기가 되었다라는 글씨도 보인다. 그리고 비석에는 유명한 항우의 해하가도,유방의 대풍가도 새겨놓아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당나라 왕곡이 쓴 홍문연이라는 글도 보인다. 전쟁에서 북을 치는 전고대(戰鼓台)가 있어 보니 高祖鼓와 覇王鼓가 양쪽에 있어 관광객이 재미로 한번씩 쳐본다. 홍문연 박물관 전시장안에는 태사공의 고조본기,유방연표,패왕별희의 내용을 볼수 있게 했고 자살한 우미인을 안은 항우의 슬픈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거록전투,해하전투,팽성전투의 내용과 그림도 있고 초한전쟁지도도 알기쉽게 그려 놓았다. 당시의 토기유물(그릇,항아리,새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한편 연극장도 있어 홍문연을 공연한다고 한다. 밖으로 나오니 정문 좌측에 높은 건물이 보여 알아보니 초의 진영을 재현해 놓았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다음 행선지인 화산으로 행한다.한시간 20여분이 걸려 숙소인 화산국제호텔에 도착했다. 한사 발상지 홍문연 홍문연을 향해 홍문연 입구 홍문연 유지 한고조와 초패왕의 연회 유방측 인물 홍문연은 천추의 전기를 만들었다. 사마천의 홍문연 항우의 해하가 유방의 대풍가 당나라 왕곡의 홍문연 전고대 패왕고를 두드리며 해하전투에서 항후의 최후를 맞다 초한 전쟁도 초나라 진지 제2일 화산(華山) 북봉/낙양 용문석굴/향산사,백거이묘 호텔에서 조식을 먹은후 버스로 화산 북봉에 있는 케이블카 매표소에서 집결했다. 가파른 경사를 6명씩 타는 케이블카로 5~6분 오른후 북봉 정상까지 도보로 오른다.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안보이나 엄청난 큰 바위산이라는 것은 바로 알겠다. 바위에는 세로줄이 보이고 가로의 잔도 흔적도 보인다. 望河樓와 紀念亭을 지나 北峰頂에 올랐다. 높은 전망대에서 보는 화산 북봉은 운무와 함께 한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증명용 인물사진만 찍던 옆의 사람들이 내가 찍은 풍경사진을 보여주니 감탄하면서 나무가지도 넣고 운무에 싸인 바위산을 다시 찍는다. 화산북봉(해발 1614.7m)에서 기념사진도 남겼다. 화산구경을 마치고 화산기차역으로- 낙양까지 가는 특급열차를 타야 한다. 나눠주는 표를 보니 화산북역에서 낙양용문까지 가는 특급2등열차로 좌석번화와 승객이름까지 찍혀 있다. 승객 이름까지 찍히니 마치 비행기를 타는 기분이다. 실제로 가방짐과 몸 검사까지 하니 더욱- 속도가 예사가 아니다. 실시간으로 속도가 표시된다. 시속 300km가 넘는다. 50분만에 낙양용문역에 도착했다. 석굴까지는 전동차를 타고 간다. <9년전에 이곳 용문석굴과 향산사,백거이묘,백원을 갔을 때 기록한 비교적 상세한 여행기가 있어 여기에 복사한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은 돈황 막고굴,대동(大同)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석굴로 유명한 세계적인 불교문화유산이다.북위 효문제가 494년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용문시대가 열린다. 이미 대동시대에 탁월한 석굴조각기법을 자랑했던 북조문화의 정수가 보인다. 이때부터 당대까지 7왕조 400여년에 걸친 대역사의 결과가 오늘의 용문석굴이다. 1KM에 걸쳐 2345개의 석굴에 110,000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만불동에는 15,000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는 아미타불이 자리잡고 있다. 관세음보살과 대재지보살이 협시불로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마애삼존불,연화동,봉선사,고양동,극남동 등 많은 석굴이 통로를 따라 구경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봉선사 마애불이다. 본존 대좌불상은 측천무후(則天武侯)의 기부금으로 완성되었다. 실제로 대불의 얼굴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또 연화동의 내부는 많이 훼손되었으나 천정 연꽃만은 그대로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마애삼존불은 미완성 삼세불로 가운데의 부처가 미륵불로 시선을 끌었다.
아쉬운 것은 황하의 범람으로 많은 불상이 유실되거나 훼손되었고 불상의 목이 도굴꾼에 의해 짤려 나갔다는 점, 문화혁명시 홍위병들의 무차별 훼손, 그리고 미국이나 불란서에 도둑을 맞았다는 점 등은 큰 손실이었다.희화적인 텃취와 미려한 조각술, 화려한 색상의 사용은 용문석굴만이 갖는 가치있는 보물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문화숭상정신을 들여다 보는듯 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용문석굴을 견학하고 황하의 지류인 이수를 만수교 다리로 건너 맞은편 향산사와 백거이 무덤이 있는 백원으로 향했다. 만수교(漫水橋)를 건너니 바로 동산(東山)인 향산이다.중간쯤 걷다보니 강 건너 봉선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예불대(禮佛臺)라는 곳이 있다. 용문서산의 석굴들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장소다.그곳에서 바라보는 용문석굴은 대형화면처럼 한 눈에 펼쳐져 보이고, 바위산의 벼랑을 깎아 불상을 조성해 놓은 암벽이 마치 벌집만 같다.그러나, 그 중에 노사나불은 단연 군계일학이다. 측천무후가 아침햇살에 비추인 노사나불을 보고 스스로 흥에 겨워 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향산사는 급경사의 계단을 딛고 올라야 한다.절에 올라보니 사찰은 산중턱에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향산사 향산 기슭에 있는 향산사는 북위 희평 원년(516)에 창건된 고찰로 향산사에서 이하(伊河)를 굽어보는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측천무후가 낙양에서 황제로 등극했을 때 향산사에서 군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가장 먼저 지은 사람에게 금포를 내렸다는 곳이다. 백거이(白居易)와 백원(白園) 그러나 무엇보다 이 곳 향산사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백거이(白居易)다.백거이는 58세가 되던 829년에 낙양(洛陽)에 영주(永住)하기로 결심한 후,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名目)만의 직책(職責)에 자족(自足)하면서 시(詩)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당시 돌보는 이 없어 퇴락한 향산사(香山寺)를 자신의 사재와 주위의 도움을 얻어 증수를 한뒤,친구인 여만선사(如滿禪師)가 향산사 주지가 되도록 도왔다. 그 후 백거이는 여만선사 등과 함께 승속(僧俗)의 9명이 향산구로시사(香山九老詩社)를 결사하고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지었을 만큼 향산사를 좋아했는데,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18년간 문필생활을 하였다. 842년 71세의 나이에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待遇)로 퇴직(退職)했으며, 74세로 타계 하였다.향산사를 뒤로 하며 찾아온 곳은 백원(白園)이다. 천년을 넘게 사랑을 받고있는 천재시인은 그가 말년에 너무나 좋아했던 향산의 이 숲속에 잠들어있다. '白園(백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입구를 통해 들어서니 대나무 숲과 초목이 무성한 산속 정원이 나온다. 좁은 산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푸른 잔디가 심어진 평평한 정상이다. 이곳이 백거이의 묘가 있는 비파봉 (琵琶峰)이다.묘는 직경이 10m 안팎이고, 높이는 2.5m쯤 되며 화강암으로 호석을 두른 무덤이다. 그러나 무덤위는 공자의 묘처럼 잡초가 우거지고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무덤 앞에는 일주석문과 거대한 비석이 있는데, 석비에는 '당소부백공지묘(唐少傅白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백거이가 은퇴하기 직전까지 태자의 스승인 태자소부(太子少傅)라는 벼슬을 한 까닭이다. 이 밖에 묘 주변에는 싱가폴 백씨와 한국 백씨 대표단의 참배 기념비도 세워져 있었다. 한국 백씨의 시조는 백우경(白宇經)이라는 분으로 원래 당(唐)나라 때 소주(蘇州) 사람으로 인품(人品)이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관작(官爵)이 첨의사(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신라 선덕왕(宣德王)원년(元年)인, 서기 780년,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新羅)로 건너와 좌복야사공대사도라는 벼슬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바로 백거이와는 사촌간이라고 한다. 백씨들이 자랑할만 하다. 카트를 타고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버스로 갈아타고 호텔숙소로 향했다. 바쁜 일정의 하루였다. 내일이야말로 이번 여행에 꼭 참가하려던 목적의 장소인 함곡관 가는 날이다. 화산은 인기 관광명소이다. 동선 북봉 케이블카 승차구 뾰죽봉 팔전사 케이블카 타는 곳 케이블카 타는 곳도 인파가 6명씩 탄다 케이불카에서 내려 걸어 오른다. 망하루에 도착 북봉 정상이다. 안개로 시야가 안 좋지만 운무낀 경치도 볼만하다 운무에 싸인 북봉 진무전 북봉 소개가 한글로 백운봉 소개도 한글이다. 5개 봉 중에서 가장 낮다 북봉에서 경치는 최상급이다. 4인방 천년 고목의 운치 점처럼 보이는 케이블카 화산은 바위산이다. 취선루 화산북역(기차) 승객 이름과 차표 금액도- 열차 내부 현재 속도는 시속 302km 함양용문역에 도착 용문석굴까지 전동차로 간다 세계문화유산 용문석굴 용문석굴 해설 이하(伊河)가 유유히 흐른다. 용문석굴로 입장 계단에 줄지어선 인파 용문으로 가는 일행 낙양목단석 머리부분이 훼손 측천무후를 닮게 벌집같이 보이는 용문석굴 당대 고승 현장스님 당대 고승 신회 스님 당대 고승 김강지 향산사 설명 향산사 장송별서/장개석,송미령의 별장 별장 거실 장중정 글씨 분투 향산사 백거이의 백원 연못 백낙천의 낙천당 제3일 함곡관/한청 함곡관과 노자 낙양호텔에서 함곡관 까지는 무려 3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아예 호텔의 슬리퍼도 가져와 운동화를 벗고 편히 쉬면서 갔다. 과연 함곡관은 내가 상상하던 협곡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함곡관 앞에 버스에서 내려 함곡관 안으로 들어서니 엄청난 크기의 황금동상이 서 있다. 누구 동상이냐고 물으니 노자(老子) 동상이란다. 소위 노자금상(老子金象)이다. 노자가 이곳에서 반년에 걸쳐 도경과 덕경을 쓴 곳이란다. 그래서 함곡관은 노자와 도교에서는 큰 의미를 갖는 곳이다. 입구에 "函谷关 隆重紀念老子誕辰2589周年 老子庙會" 라는 크나큰 행사 아취가 서 있었다. 함곡관, 노자 탄신 2589주년 기념 노자 제례행사 성대히 마지하다--라는 의미이다. 노자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하남성 루이(鹿邑)에서는 매년 탄신기념행사 묘회가 열리지만 노자 말년에 도덕경을 쓴 이곳 함곡관에서도 묘회가 열리고 있다. 음력 2월15일이 그의 탄신일이라 금년에도 약 두달전에 이곳에서 탄신기념 제례행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도덕경이 석판에 전서체로 이어지는데 오른쪽은 상편인 도경이 그리고 왼쪽엔 하편인 덕경이 이어진다. 그의 사당 건물에는 도가지원(道家之源)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앞쪽에 돌에 새긴 태극팔괘가 그려져 있다. 정전(正殿)인 태초성궁(太初聖宮)에는 노자상이 모셔져 있다. 태초성궁 들어가는 벽면에는 千古道源,萬世德宗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성궁의 위상을 알린다. 또 영부(灵符) 소개도 있다. 전서체로 새긴 桑(桒)자를 노선생이 글자풀이를 해준다. 노자가 도덕경을 쓴 붉은색 받침돌에 관심들이 많다. 영석(灵石)이라는 돌인데 윗면이 평평하다. 그리고 계명대(鸡鸣台) 즉 계명구도(鸡鸣狗盗) 의 탄생지 설명이 있었는데 계속 녹음된 닭 울음소리가 나서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태초성궁을 지나 함곡관대도원으로 가는 길 양쪽에 노자의 명언들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天之道 利而不害" "知和曰常 知常曰明" "爲而不恃功成而弗居" "見素抱朴 少私寡欲" 또 "善爲之策"이라든가 "知足不辱,知止不殆,可以長久" "上善若水" 등 우리가 평소에 많이 애용하는 문구들이다. 함곡관대도원(函谷关大道院)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도가(道家)의 모든 인물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와 공자의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함곡관하면 천험의 요새보다는 노자가 《도덕경(道德经)을 저술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해서 《사기(史记)·노자열전(老子列传)》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으로 주나라 장서실의 사관이었다.노자는 도덕을 수련했고, 그의 학문은 스스로 감추어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주나라에서 오래도록 살았는데 주나라가 쇠해지는 것을 보고 주나라를 떠났다. 함곡관에 이르러 관령인 윤희(尹喜)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은거하려 하시니 억지로라도 저를 위해 책을 써주십시오."라고 말하니 노자가 이에 상·하편으로 도덕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5,000자의 글을 쓰고는 떠나갔는데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라고 하여 노자가 주나라를 떠나 함곡관에 이르러 관문지기인 윤희의 요청으로 흔히 《도덕경》이라 부르는 책을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도가(道家), 도교(道教)와 관련된 사람들은 이 곳을 매우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며 제사를 지낸다. 전설에 따르면 노자가 함곡관에 이르기 전에 윤희가 자색의 기운이 동쪽에서부터 오는 것을 보고, 성인이 관으로 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과연 청우(青牛)를 탄 노자가 관에 이르렀고, 여기서부터 성인이나 벗이 온다는 의미의 "자기동래(紫氣東來)"라는 말이 유래했다. 함곡관에서 예상치 못한 노자와 도가에 관한 유적들을 보느라 우리가 찾아온 함곡관을 잠시 잊었지만 이어 함관관 관루가 보이며 전국시대 진나라와 합종6국과의 관문인 함곡관,초한전의 격전지 함곡관,그리고 삼국지의 함곡관 또 제나라 맹상군의 계명구도에서 익히 들었던 함곡관-- 머리속에 연상되는 함곡관의 흔적을 찾아본다. 함곡관(函谷关) 함곡관(函谷关)은 하남성 영보시(灵宝市)에서 북쪽으로 15km떨어진 왕타촌(王垛村)에 있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먼저 지어진 관문 요새의 하나이다. 전국시대에 진효공(秦孝公)이 위나라의 수중에 있던 효함(崤函)의 땅을 탈취하고서 지은 것이 함곡관이다. 함곡관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사해(辞海)》를 보면 "협곡이 험하고 깊음이 나무로 짠 궤와 같아 이름을 얻었다. 동으로 효산(崤山)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동진(潼津)에 이르며 통칭 함곡(函谷)이라 하였고, 천연의 요새[天险]로 불리었다."고 하였다 함곡관은 일찍이 전마들이 울부짖던 고대의 전쟁터로 "한 명의 장부가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의 장부로도 열지 못한다[一夫当关, 万夫莫开]"는 검문관(剑门关)처럼 고대의 중요 관문이었다. 노자의 유적물들을 보고 지나오니 저멀리 관루가 보인다. 함곡관 관루이다. 함곡관 입구에서 프랑카드를 내걸고 단체사진을 남긴다. 노자금상 에서 도덕경/왼쪽이 덕경 우측이 도경 올해가 노자 탄신 2589주년이다 노자 사당을 향해 도가지원 지족불욕/뽕나무 桒 천고도원/만세덕종 태초성궁 노자와 윤희의 만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