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광원의 영성
(소망 송 해설) 2001.01.04. 김준호 선생
너희가 다시 살아나면, 너희가 다시 살아나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날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시고 하나님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시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다. 저 사람이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영이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에 함께 계신다. 또 바로 지금이 그때다. 바로 이때가 그때다. 예수님은 누구하고 이야기 하고 계시냐 하면 너무 인생을 실패하고 많이 울었던 사람과 그 영원한 하늘나라 이야기를 하고 계신 그 점입니다.
가사 이아침에 눈이 많이 왔다면 십리 밖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분이 있다. 합시다. 그 사람은 이 성경 을 보면 감격스러워요. 저는 뒷방에서 이방에 왔으니까 아무 고생 없이 와서 이 성경을 볼 때에는 느낌이 전혀 오지 않아요. 사람은 유한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그 경험이 있어야 한다. 체험이 있어야 한다. 몸으로 부닥친 것이 있어야 한다. 영안이 있다면 보일 테지만, 사람은 눈이 있기 때문에 보이듯이 영적 눈이 따로 있습니다. 영혼의 눈을 떠야 보인다는 그런 뜻은 영계의 이야기입니다. 영적 세계의 이야기 육신세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철학적 변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리가 눈에 보인다면 진리가 아니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한다면 그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려하면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안 보이는데 육신의 눈으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세계가 영계인데 그 유 영모 선생님은 그렇게 변증 하셨어요. 영은 건지가 없는 것이다. 새알 죽을 쑤어먹으면 건지가 있지요? 수저로 떠먹을 수 있는 건 건지지요. 영의 영계에는 달아볼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져지지가 않는 세계입니다. 영은 영인고로 그러니까 영이 있어야 영을 알아보지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그리스도를 알아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라는 말은 물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이라는 말은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경지를 깨달으신 이공님은 나는 비어있다. 빌 공(空)자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공이다. 일체 물질계를 초월했다는 뜻입니다. 집착이 땅에 아무 집착이 없다는 뜻이고 땅위에 아무것도 사랑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경지에 나는 그 경지를 나는 사랑한다. 내 이름을 공이라고 불러줘라. 그러니까 이 공님만 공이 아니에요. 그때 출가한 어른들은 다 공입니다. 곡성의 김 공 그러지요? 김 공님이라고 그랬어요. 실상은 우리도 그 경지에 이르러야 할 사람들입니다. 비록 몸에 마음은 바쳐있지만 마음만은 우주를 초월해야 돼. 달에도 가고, 별에도 가고, 태양에도 가고 가사 불두칠성에도 가고 유유자자 해.
이 선생님 말로 바꿔 말하면 나는 동광원 사람이 아니요. 동광원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여기 와 있는 것은 여기에 영이 통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요. 마음을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고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이 그때는 공산치하에 중국에 있다면 나는 중국에 갈 사람이며 영을 같이 할 사람이 서양에 있다면 나는 서양 거기에 있을 사람이요.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뜻을 말씀 하신 것도 지금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로 하면 그러니까 사람은 몸은 갖고 있는데 나는 네 속에 예수님은 우리 속에 와 계신 것입니다. 또 너는 내 속에 우리는 영을 예수 영을 갖는다면 우리는 예수 속에 와 있어요. 그러니까 울타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자유스럽겠어요? 그런데 이것을 길이다. 자기가 길이라는 거예요. 마음이 가는 길이다. 마음이 이 길을 가야지요. 여기는 평화가 있는 곳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이라는 겁니다. 진실로 사랑이 완성된 사람은 울타리가 없어. 적이 없어. 14장 1절부터 3절 아버지 계신 곳은 다 올수 있는 곳이다. 누구 한사람 배제되는 곳이 아니다.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못 사랑할 존재가 없다. 우주와 화목이 된다는 뜻이고 화친이 일어나요. 적이 없지요. 불목하고 있으면 원수가 있지 않아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왔다. 몸은 비록 갖고 있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적 사람이 되도록 해주러 왔다. 우리 영혼이 다시 말하면 김 흥오 선생의 변증으로 말하면 계란 껍질을 트고 나와야 한다. 새가 되어야 한다. 공중을 훌훌 날 수 있는 새가 되어야지. 그러니까 계란 껍질을 뚫고 새가 된다는 것은 부활이고 영이고 자유고 못 갈 곳이 없고 못 사랑할 사람이 없고 또 못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 나고 모든 것은 나다. 라는 경지에 이르는 거예요.
너희는 내 속에 예수님은 다 자기로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가 자기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국경이 없으니까 너는 내 속에 나는 네 속에 우리는 하나님 속에 하나님은 우리 속에 와 계신다.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제 아냐? 눈을 뜨면 다시 살아나면 죽은 듯이 갇혀있던 껍질을 뚫고 나오면 영이 눈을 뜨면 알수 있다는 경지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살아나는 지금은 죽어있다면 다시 살아나며 죽어있다는 말씀은 육에 있다는 거, 육을 초월하면 다시 살아납니다. 육이 아니고 영이 된다면 나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내 속에 나는 네 속에 너는 내 속에 그러니까 일치 된다는 말이지요. 일치, 그것이 17장 요한복음 17장에 어제 이 목사님이 봐 주셨지요.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너희들도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바란다. 기도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그렇지요?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한다. 일치 되어야 한다. 그런 뜻으로, 이 가사, 사명이 있지요. 사명, 우리 모여 있는 공동체도 사명이 있어요. 가사, 이 선생님의 일생은 사명에 삽니다. 사명 우리가 모여 있는 것은 어떤 사명을 갖고 있어요. 무슨 사명을 가지고 있느냐? 물이냐? 불이냐? 불의 사명도 있어야 해요. 물의 사명도 있어야 해요. 또 밀알의 사명도 있어야 해요. 그러나 특색이 있어야 해요. 어떤 공동체라고 특색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색이 이 공님입니다. 우리는 이 공의 영적 후손들인데 이 공은 공이예요. 공, 국경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껍질이 없는 사람 이예요. 껍질을 트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영적 자유를 얻을 사명을 가지고 여기에 모여 있어요. 영적 자유, 그러니까 마음이 우주같이 넓어야해. 마음이 바다같이 넓어야해. 그것은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기로 약속하시고 다시 말하면 사명을 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특색은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지. 땅위에서 뭘 잘할 사람들은 아니에요. 가사 운전을 잘한다. 음악을 잘한다. 학문을 잘한다. 박사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몸은 병들어 누워 있어요. 그 사람의 마음이 우주보다 넓은 사람들이다. 비록 몸은 여자로 태어났어도 그 마음은 우주같이 넓은 사람들이다. 그런 영적 사명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낸 사람들이다. 왜 이 공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나는 비어있다. 빌 공(空)자 너희들은 내 자손이다. 너희들도 비우라. 그게 예수님의 길이지요. 나는 길이다. 영혼의 길이다. 아버지는 영이시다. 아들도 영이시다. 성령도 영이시다. 이 공도 영화된 사람이야. 영적으로 화한 사람이야. 그런 뜻으로 그럼 그것은 성령이 하신다. 아까 17절에 진리의 성령이 하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 고대에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지요? 암탉이 알을 품지요? 지금은 암탉이 없어도 그 기계가 알을 품어요. 그것은 온도입니다. 따뜻한 것이 계란을 품어주면 어머니인줄 알고 까요. 그 계란이, 그러니까 어머니 품이라는 것은 따뜻하다는 뜻이지요.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다는 것은 따뜻한 체온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죽어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암 닭이 살아있기 때문에 알을 품으면 알이 까요.
사람의 체온이 37도에요. 아마 닭은 38도지, 사람의 열보다 훨씬 더 많아요. 그와 똑같은 기계를 만들어서 전기로 38도 유지를 해주면 21일 만에 알을 까요. 그게 현실입니다. 그 체온을 만나야 알이 까요. 그 열이 없으면 알이 병아리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유한한 몸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영이 아니에요. 아직은 공이 아니에요. 성령을 아직은 몰라요. 진리의 성령은 진리니까 진리에요. 확실해요. 절대 확실해요. 진리의 성령은, 예수의 영은 따뜻해요. 나는 온유하다. 예수의 사랑은 온유,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암탉의 가슴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거지요. 예수님의 가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그 품은 있을 곳이 많아요. 모두 품어도 있을 곳이 많아요. 가슴이 넓어요. 아버지 계신 곳은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렀으리라. 아버지 가슴은 넓어서 우주를 품고도 남아요.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고도 남아서 그 분이 나를 못 사랑할 분이 아니에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을 알게 되면 너희들이 다시 살아나며 아, 어머니가 나를 품어 주신다. 그걸 알아야지. 진리의 성령이 아, 나를 품고 계신다. 문제는 1초 3초 문제에요. 지금은 껍질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곧 깨져요. 곧 껍질이 깨져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쩍 벌어지거든, 그걸 각(覺)이라. 깨달음이라 그거에요. 수고부터 알 뜻부터 깨닫는 다는 건 깨진다는 말이다. 껍질이 깨진다는 뜻이다. 깨달은 사람을 성녀라 그래. 자기가 깨진 사람이 닭이란 말이에요. 알이 깨진 사람 껍질이 깨져야해.
그래, 이제 이 공님의 깨달은 제자가 한 분 있는데 수레기 어머니에요. 학문이 없어요. 일 밖에 몰라요. 무식한 여자에요. 그러나 영혼이 열린 사람이지요. 마음이 열린 여자에요. 껍질이 깨진 여자거든요. 몸은 비록 여자이지만 그 마음은 장부여, 가슴이 따뜻하다고요. 그 분이 왜 돌아가셨어요? 장태방죽에 있는 청년이 뭘 먹는가? 뭐 입는가? 걱정이 되셨어요. 그래서 음식이 좀 있으니까 반찬이 조금 생겼기 때문에 그걸 가져다주시러 가는 거예요. 옛날에는 다리가 없고 로디니까 로디를 건너갈 때 폭풍 폭우 큰물이 화학산을 밀어붙이니까 떠내려 가신거지요. 그 분이 물을 건너다 물에 떠내려가 돌아가셨지요. 그런 사랑의 화신, 물 건너 있는 청년들에게 가지고 가시다가 어떤 반찬을 갖고 가시다가 떠내려 가신거지요. 다시 말하면 사랑의 순교 아니에요? 사랑의 순교,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형태는 반찬을 갖고 가시다가 물에 떠내려 가셨다. 그것은 순교이지요. 사랑의 순교. 그것이 동광원 이지요. 말하자면, 이 동광원은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까? 동광원 이라는 공동체의 특별한 사명은 사랑이었다. 그 어떻게 사랑 했느냐? 수레기 어머니가 동광원이지요.
말하자면, 이 공님의 제자니까, 그런 사랑하는 형제를 위해서 반찬을 가지고 가시다가 물에 떠내려가서 돌아가셨다. 그게 동광원의 영성이라는 말이지요. 영성, 동광원은 별명이지요. 별명, 그러니까 사랑의 영성, 사랑의 실체, 사랑의 진수, 사랑의 상징, 사랑의 실천, 사랑의 체험, 체험 본인이 그걸 원했다고요. 나는 병들어 죽기 싫어. 나는 사랑하다 죽을 거야. 나는 사랑하다가 걸어가다 죽고 싶다고 평소에 ‘어떻게 평안하게 늙어죽어?’어떻게 늙어 죽어? 나는 사랑하다 쓰러지고 싶다. 그렇게 이야기 하셨다. 평소에 소원하신대로 된 것이지요.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사랑을 가슴에 안고 알을 품으러 가시다가 순교하신 돌아가신 거지요. 그런 뜻으로 보면 영은 껍질이 없다지 않습니까? 영은 자유 함이 있어요. 영은 물질이 아니에요. 영이니까 비어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계신단 말이에요. 여기가 비어있어. 빈 곳이면 그분은 어디든지 계세요. 이 공님이랄지 수레기 어머니랄지 그게 덕으로 완성한 사람은 사랑 다시 말하면 성직이에요. 그분들의 사명은 사랑입니다. 사랑, 그 동광원의 영성은 사랑이다. 왜 그 분들을 보고 한 소리에요? 현재 사는 사람들이 동광원이 아니에요. 이 공님 수레기 어머님 가사, 한나 어머님 가사, 이 선생님 정 원장님 또 김 은연어머님 그분들의 특성이 사랑이었다.
고향을 초월하고 부모를 초월하고 자녀를 초월하고 고향을 초월해서 사랑의 화신이 된 분들이었다. 예수 사랑 때문에는 고향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고 사랑하다 죽은 사랑하다. 죽은 사람들이다. 그런 뜻으로 동광원 이름을 지어준 것이지요. 눈에는 안보이지만 그 사람들은 사랑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뜻으로 불러준 호지요. 호, 이름이지요. 이름을 달리 바꾸어 말하면 귀일원이다. 집은 아니라고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영성 그 뜻으로 하면 영성은 귀일정신이다. 우주를, 인류를 하나로 본 사람들이다. 울타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가슴이 넓기가 우주 같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 인 것처럼 영적 사람들이다. 그런 뜻이거든요. 나는 아버지는 영이신고로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영적으로 진정으로 예배를 해야 한다. 예배한다는 것은 절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런 뜻이거든요. 예배한다. 만나본다. 사랑한다. 하나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너희는 내 안에 우리는 하나이다. 둘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초월하게 해 주십시오. 이 육을 초월하게 해 주십시오.
너나가 없게 해 주십시오. 그 하나가 다시 말하면 우리 깨달으신 우리 어머니 사무엘의 어머니 다시 말하면 그 어머니는 무엇이 철학이냐? 무엇이 그분의 복음이냐? 그분이 무슨 말을 했냐? 그 말이지요. 어떻게 말씀을 표현했냐? 하면 ‘나라는 놈을 죽여라.’그게 수레기 어머니 철학이에요. 제가 이야기 하지요. 한나 어머니가 가정살림을 다 마을사람에게 나누어줘 버리고 다 집에 있는 것을 다 없애버리고 소유는 쌀 한말이에요. 쌀 한말이면 일 년 먹을 수 있다고 생각 하셨습니다. 쌀 한말을 머리에 이고 도구박 골로 들어가셨어요. 그때 제가 거기 살았거든요. 그날 그때, 수레기 어머니 부엌 쪽에다 방 한 칸 들였어요. 허락받고, 저도 조금 흙을 이겨 발라 드렸는데 그렇게 기뻐하더라고, 그런데 그 막을 치고 방이 되어가지고 사세요. 그런데 가슴아패가 일어났어요. 한나 어머니가 참 과부로서 자식을 다 키우고 보내버리고 홀 홀 단신 출가해 가지고 이제는 마음을 닦고 있는데 그 옛날 독이 있지요. 몸속에, 옛날 살아가던 흔적도 있고 또 옛날에 가슴 아팠던 흔적도 있지 않아요?
그래 가슴아패가 일어나요. 그러니까 며칠을 끙끙 앓고 누워있는 거예요. 식사를 못하시고, 그러니까 약이 없지요. 그때는 약도 안 먹을 때니까, 사람이 죽어가는 거지요. 죽어가요. 그러니까 수레기 어머니가 문을 탁 열어보고 ‘아이고 걸렸고만, 걸렸어. 고놈만 없으면 살 텐데.’그래 수레기 어머니의 철학은 ‘나란 놈이요,’나란 놈이 있어서 며느리 섭섭한 마음 아들 섭섭한 마음, 그것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가슴이 아파. 그걸 초월해야 가슴이 안 아프다는 거지요. ‘나라는 놈이 있고만,’왜 아프냐는 거예요. 마음이 평안하면 병이 없을 텐데 마음이 불안하니까 병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고향 떠나고 살림 다 없애고 자식 다 떠나보내고 몸만 와있지, 마음이 지금 걱정하고 있어요. 자녀들이 다 밖에 있고 아이고, 그놈만 던져버리면 그만 벌떡 일어날 텐데. 그놈 그놈만 쫒아내면 될 텐데.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알아들었어요. 처음에 출가하시고 비가 많이 오던 날 조금만 말해도 뒷방에서 다 들려요. 앞방에서 어머니들이 이야기 하는 거 다 들려요.
비가 오니까 두 분이 밭에 못나가요. 종일 한나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배당 이야기, 과거 이야기, 그러니까 손으로 뭔 일 하고 계시지요? 무슨 삼을 삼는지 알 수 없어요. 종일 둘이 방에서 일하고 계시더라고요. 말이 안 끝나.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 이야기 하세요. 한나 어머니 혼자 이야기 하는 거지요. 다 들어주신 거예요. 밤에도 이야기, 낮에도 이야기, 과부의 설움이지요. 그 청춘과부가 되어갖고 살아온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하는 거예요. 다 들어주세요. 결론은 그거에요. 다 들어주고 ‘아갸갸 아갸갸 나란 놈이 안 죽었구먼, 지가 지숭 보네.’결론이 그거에요. 일주일동안 한스러운 이야기 했는데 ‘니가 니숭 봤다.’그러고 말아 버려요. 며느리 흉도 아니고 아들 흉도 아니고 남편 흉도 아니고 ‘지가 지숭 보구만. 아이고, 나란 놈이 죽어야 제.’‘나란 놈, 나란 놈이 안 죽어서 저렇게 가슴 아파 가슴앓이를 하는 거야.’자기 번뇌 자기 욕망 자기 미련 자기 미숙, 익지를 않아 자기가 건지가 있어. 건지 자꾸 뒤를 돌아봐. 그래 가슴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 밥을 못 먹고 누워 계세요.
그래 뿌리를 빼는 거지요. 뿌리를 빼. 그러니까 무식한 어른들이 철학가들이지요. 철학이에요. 나라는 놈, 예수를 믿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평화를 얻고 싶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같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나같이 영적 사람이 되려거든 자기를 죽여라. 십자가를 져라. 껍질을 죽여라. 라는 거예요. 껍질을 깨라. 그럼 자유롭게 나르라. 눈을 뜨라. 태양이 보이지 않느냐? 별이 보이지 않느냐? 그거에요. 다시 말하면 해탈하라. 해탈, 껍질을 벗어라. 그러니까 동광원이라는 말은 껍질을 벗은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 뜻이거든요. 깨어난 사람들이다. 눈 뜬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훌훌 나는 사람들이야. 나는 동광원 사람이 아닙니다. 껍질을 뚫고 나간 사람이에요. 동광원이라는 껍질을 내가 지금 만날 사람이 있다면 중국 갈 사람이요. 그때 소련에 내가 만날 사람이 있다면 소련가 살 사람이란 뜻은 그것은 해설이지. 해설, 자기 마음을 해설하신 것이지요.
이건 간디의 말로하면 나는 예수가 좋다는 거예요. 예수교는 싫다. 예수교는 껍질이 있지 않아요? 예수는 껍질이 없어요. 나는 예수교는 싫어도 예수는 좋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이 좋기 때문에 새벽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자기 식구들에게 다 암 송을 시켜요. 자기는 예수교 신자는 아니에요. 그래도 예수 말이 좋으니까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자기들의 공동체 전 식구가 독송을 해요. 새벽에 독송을 해요. 그 사람들은 소리를 내지요. 목탁을 뚜드리고 상관없어요. 그게 찬송이지요. 그럼 아침에 ‘소망 송’불렀지요? 소망 송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쥐어짜 가지고 진액이지요. 진액(津液), 성경말씀을 다 삶아가지고 딱 짜내면 건지가 없지요. 울타리가 없어요. 색깔이 없어요. 영이지요. 평화가 와요. 평화 해방이에요. 해방, 자유로워요. 훌훌 날지요. 다시 말하면 그렇게 산 사람을 성녀라 그래요. 성녀, 왜 영이다. 영이 된 사람이다. 성화된 사람이다. 껍질이 없는 사람이다. 울타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뜻이거든요.
러니까 좋은 말을 모아놓은 소리가 소망송이에요. 성경에 있는 좋은 말을 모아놓은 소리지요. 예수 같은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뜻 아니요? 노래 부른 노래가요. 따뜻하게 해 주십시오. 부드럽게 해 주십시오. 따뜻한 암탉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뜻이지요. 모든 인류를 내 가슴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 이 공님 같으면 잡풀도 품어줘요. 길가에 버러지도 품어줘요. 가슴이 넓으니까 그쯤 되어버리면 우주의 주인 아니에요? 하나님 비슷해요. 그쯤 품이 넓어진다면 신인일체(神人一體)야. 사람인데 하나님처럼 된 사람이 이 공님 이에요. 이 공님 품에는 불교가 포섭되어요. 모든 종교가 다 있어요. 한계가 넓어가지고 예수교 신자 하기에는 아까워요. 모든 종교를 다 품을 수 있는 아량을 갖고 계세요. 그런 경지 이지요. 하나님 비슷하다는 거지요. 신인일체(神人一體)한 사람이에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었던 사람이지요.
예수 소원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 같이 하나님은 신이고 예수는 사람인데 하나님과 내가 하나된 것 같이 이 사람들도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 그 승격 예수의 제자가 이 하나님처럼 되게 해 달라는 거예요. 영, 영이 되게 해 달라는 거예요. 나를 새가 되게 해 달라고. 나를 나비가 되게 해 달라고, 그 한나 어머니는 왜 가슴앓이를 해요? 이건 알을, 껍질을 갖고 있다는 거. 다시 말하면 버러지 번뇌를 가지고 있어요. 번뇌 가슴에 한을 품고 있어요. 서러움이요. 남자 없이 자식들을 키우느라고 가슴이 멍이 들었어요. 멍이, 그래서 옛날에 가슴앓이를 할 때 그 언니를 자기 집에 같이 살자고 동거하시던 먼저 깨달은 어머니지요. 수레기 어머니가 자기 후배를 안아줄 때 깨우친 것이지요. 아이고, 나란 놈이 나란 놈만 죽으면 가슴앓이가 나을 텐데 약은 아상(我相), 아상이 죽으면 훌훌 날을 텐데 아상이 안 깨진다. 그래 제가 한번 말씀드린바와 같이 라디오를 들었을 때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가슴앓이를 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소화불량이야? 그 말을 몰래했다고, 예수 믿는데 왜 밥이 소화가 안 될까? 그래 번뇌가 있단 말이에요. 번뇌가 있어. 그래 소화가 안 돼.
아 라디오가 선생님이다. 텔레비전은 백년 봐도 선생은 안 되어요. 그것은 유혹물이야. 아무 유익이 없어. 라디오는 들어보면 그건 선생님이지. 확 찔러요. 가슴을, 목사님들 설교하실 때 들리더라고요. 그래 소망교회 목사님, ‘아니 요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 소화불량하고 약 먹는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소화불량이 있냐?’고요. 보통 한 말이지만 얼마나 매가 무섭소? 매가 그래서 아 목사님 말을 무시한 죄가 크다. 목사님 말을 예수님 말로 받아들여야겠다. 회개 한 것입니다. 속이 넓어져요. 그렇게 되니까 그때 속이 넓어져. 그러니까 요새 목사님 오셨어. 예수가 오신 걸로 보여요. 그냥 사람이 왔다. 생각이 안 들어요.
아상이 강한데 옛날에 아상이 뭐냐? 아이고, 처자 거느리고 뭐 별거 있냐? 말만 잘하면 뭐해? 아상이 강해. 말씀을 무시한단 말이에요. 자기만 손해 보지요. 자기 마음이 좁으니까 용납이 안 돼. 그것이 깨졌단 말이에요. 그런 뜻으로 그 뜻이다. 그 말씀입니다. 20절이 제가 해설한 것은 20절의 해설이야. 자 따라 읽으십시오. ‘너희가 다시 살아나면, 너희가 다시 살아나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
이 경계를 흠모해서 단어를 모아놓은 것이 소망송이에요. 사랑에 무슨 국경이 있겠느냐? 그거에요. 사랑에 무슨 교파가 있어요? 사랑에 무슨 종교가 있어요? 하나님인데, 사랑 덩어리인데 동광원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있다면 이건 성인의 집합이야. 성인, 성인이 와서 살 곳이지. 무슨 교 무슨 종교가 와서 살 곳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이 공동체 사명은 이 공의 화신이라 이거예요. 이 공의 정신이 사는 곳이다. 그거예요. 별명이 공이라고 공, 하나님이 공이예요. 나는 영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도 영이다. 그러니까 영과 영이 합해져요. 껍질이 있으면 안 합해져요. 서로 부닥쳐요. 소리가 나요. 껍질이 없이 하나님이 껍질이 없고 예수가 껍질이 없어. 진리의 성령이 껍질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공은 우주를 품어도 껍질이 없으니까 다 알아들어. 다 품어 금융조합이라고, 돈은 조합에 들어가면 껍질이 없어요. 누구든지 빌려 쓸 수 있어요? 도둑놈도 거지도 빌려갈 수 있어요. 금융조합 이예요. 금융조합에 있는 돈은 이 동포를 살려줘요. 융통한단 말이에요. 융통, 둥글둥글하게 융통하기를 무에 껍질이 없다는 말이에요. 다 용납이 되어요.
누구 한사람 너다 할 사람이 없이 다 나다. 다 나다. 그게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하나님도 영이고 예수님도 영이예요. 껍질이 없어요. 모가 없어요. 빛깔이 없어. 자기주장이 없어. 내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는 영이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신 곳에 따뜻한 가슴이 있는 곳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예수님은 간 것도 온 것도 아니에요. 거기 계세요. 항상 지금이 그때고 그 말이 그 말이고 영인고로 모가 없고 갈 곳이 없지요. 우주에 충만하지요. 자유하시니까,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그 준비하러 가신 것이 오신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에베소의 철학은 가셨다는 말이 오셨다는 말이 아니야. 그렇게 편지하고 있어요. 올라 가셨다는 말은 여기 오셨다는 말이다. 에베소서에 그렇게 논하고 있어요. 나는 간다는 말은 없다고 그랬어요. 나는 너희에게 오겠다. 같이 있게 하겠다. 아까 17절. 같이 살러 와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게 하겠다. 그러니까 시간을 초월해 버려. 공간을 초월해 버려.
그게 영이야. 영은 공간이 필요 없고 국경이 필요 없어요. 껍질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끝이 없다는 말 이지요. 아까 17절에 이건 보혜사 성령, 다른 성령 이지요. 껍질을 없애 주시는 능력, 돕는 자 다른 돕는 자를 너희에게 보내 너희와 영원히 같이 계시게 할 것이다. 16절. 그분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영이다. 제가 말하는 것은 진리를 해석하고 있어요. 지금 김 준호의 말이 아니에요. 진리, 진리는 껍질이 없어요. 국경이 없어요. 나라가 없어요. 자기가 없어요. 자기가 죽고 없어요.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 껍질을 깨고 따라오라. 그거지요. 그럼 다시 말하면 어머니 사랑이 되라. 암탉의 사랑이 되라. 그분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영이다. 세상은 그 분을 맞아들일 수 없어. 그러니까 세속적으로는 그 분을 인식이 안 돼. 그 경지에 이를 수가 없어요. 세상은 그 분을 맞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그 분을 찾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 분을 알고 있다. 영은 영이예요. 이심전심이야. 영은 영인고로 그냥 통해버려. 이심전심 성령은 성령인고로 함께 계세요. 너는 없으니까 너희는 그 분을 알고 있다. 지금은 그 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지금은 함께 계신 순간이야. 영이 내 가슴을 뚫고 들어오시고 함께 계시고 또 이 천년 후에 훗날에는 오늘이지요.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벌판에 버려진 고아처럼 (끊김)
버러지가 껍질을 깨면 나비가 되니까 그게 해석 아니에요. 철학적 해석이야. 변증이고 우리가 지금 버러지 속에 갇혀 있어요. 영혼이 그러니까 껍질을 깨버리면 영이예요. 그게 성녀란 뜻이야. 성녀, 성인 껍질이 없는 사람 그쯤 되면 너희가 다시 살아난다. 버러지가 죽고(끊김)
껍질을 깼다고 그러지요. 안다는 것은 속이다. 속, 영이다. 그 말이야. 영이 되어버리면 하나다. 영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내 속에 내가 예수 속에 예수는 진리니까 진리가 내 속에 내가 진리 속에 똑같지요. 아버지는 영이신 고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의 예배를 봐야 할 것이다. 똑 같아요. 말은, 그러니까 지금은 몸속에 갇혀 있어요. 우리가 그래 서러워요. 그게 인생의 서러움이야. 그러나 곧 지금 이 몸을 깨고 나가야 해요. 육을 깨야해. 초월, 초월해야 돼. 육을 초월해야 된다. 그 변증이랄까 교리는 쉬워요. 그 말이 갈라디아 5장에 있는 논설 아니야? 그게 바울의 논문이거든,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가사 22절부터 24절까지 볼까요?
갈라디아서 5장.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 하실 때에 그러니까 껍질을 깨면 자기를 부인하면 십자가를 지면 옛사람은 죽으니까 죽어버리지요.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 하실 때에 그 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영적 은혜를 준다는 말이에요. 영혼에 맛을 줘요. 우선 사랑이 되어버려요. 자기가 깨져 버리면 이 몸통아리는 전부 사랑 덩어리에요. 어디에를 떼어먹어봐도 사랑이야. 이 몸통아리 전부가 사랑이야. 그러니까 사랑이 되어버려. 영적 맛이 그렇다는 것이에요. 그 사람의 성품이 사랑 덩어리야. 그 자기가 깨져 버리면 나비가 되고 사랑이 되어버리고 기쁨이 되어버려. 기쁨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사람이 기쁨 덩어리에요. 누가 딱 찔러버리면 기쁨이 충만해서 푹 튀어나오지요. 평화가 되고 아무리 욕을 해봐도 흉을 해봐도 평화뿐이에요. 평화의 화신이니까 그걸 누가 다시 말하면 방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능을 받아버리면 예수를 창으로 찔러봐. 절대 불평 안 해요. 예수를 죽여 봐. 축복을 해줘요. 이들이 모릅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이건 예수님의 인격이지요. 사랑 기쁨 평화 그러니까 요것이 예수의 것인데 요것이 하나님의 것이란 말이야.
하나님이 내 속에 내가 예수 속에, 예수가 내 속에 내가 예수 속에 예수가 하나님 속에 무엇이 사랑 기쁨 평화가 몸이 있으나 없으나 예수는 사랑 덩어리이고 기쁨 덩어리이고 평화 덩어리에요. 나는 이 평화를 너희에게 주고 간다. 예수님이 그래요. 이건 세상적인 평화가 아니다. 아까 그랬지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온유를 준다고 했어. 예수님이 주는 거예요. 성령을 준다는 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져. 사람이 강철 같은 마음이 녹아나고 암탉 같은 마음을 주세요. 따뜻하거든, 가슴이 누구든지 품어줘요. 다 품어줘요. 부드럽기가 새털 같아. 모가 없어. 빛깔이 없어. 껍질이 없어. 그러니까 24절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러니까 영적으로 깨진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껍질이 없다는 뜻이에요. 모가 없어. 껍질이 없어. 색깔이 없어. 영이야. 영, 영이니까 욕망의 본성을 깨버린 사람이야. 껍질이 없어.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국경이 없다는 말이지요. 거기는 여자라는 모도 없어요. 남자라는 모도 없고 몇 살이다 그것도 없어. 다시 말하면 무슨 학벌도 없어. 그 사랑 덩어리입니다. 사랑 덩어리, 모든 것을 초성인재야. 초월한 인간이라는 말이야. 그 경지가 영이 단 말이에요. 하나님이다. 예수님이다. 성령이다. 이건 진리다. 이건 이것은 길이다. 이건 생명이다. 말이야. 어떻게 표현 했던지 영이다. 그 말이야. 그 이 공님이 얼마나 상징적으로 나를 공으로 불러 달라고 내 이름은 공이요. 그 소리거든. 나는 사랑이요. 나는 기쁨이요. 나는 평화요. 그쯤 된 인물 이라면 아내가 두 번 시집갔다. 오기 로니 녹아버리지요. 아내는 없어요. 이 공이지. 한 몸이야. 한 몸 그러니까 그 부인이 개가 갔다. 오셨어요. 얼마나 마음이 행복한지 사랑하는 옛 남편이 현재는 스승이야. 거기가 소재를 넘어 문바우 골이라고 거기서 막을 치고 사셨다 하지 않습니까?
문바우를 넘어가서 무남이라는 곳에서, 몸은 가졌으나 신성을 가진 사람들이요. 신이 된 사람들이야. 옛날에는 부부지간이야. 아내는 개가했다 돌아왔어. 그 껍질이 녹아버린 사람들이라고, 그 경지야. 왜 사랑뿐이고 평화뿐이고 기쁨뿐이야. 그래 남편이 죽어 땅에 묻어놨어요. 옛 남편이지요. 그 무덤을 지켰다. 시묘했다. 그 뭔 말이냐? 그 이야기가 무슨 말입니까? 일체 아니야? 나는 네 속에 너는 내 속에, 또 우리는 하나님 속에 하나님은 우리 속에 일체를 이룬 분들의 이야기거든요. 율법을 초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조건을 초월했던 사람들이 이야기란 말이에요. 어떻게 억지로 살아요? 무덤가에 앉아서 무덤가에 막을 치고 시(侍)자 모실 시(侍)자, 묘(墓)는 모퉁이라는 뜻이거든. 묘(墓)를 묘 셔. 자기 옛날 남편의 묘(墓)를 모신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 옛날 소설이 아니지 않아요? 실제 그렇게 살다가 가셨다니까 그 분들의 우리가 정신을 같이한 사람들이라고 그런 뜻이거든요. 그렇게 살고가신 분의 영적 영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뜻이에요.
이쯤 된 사람들 이라면 우주를 알 수 있어요. 인류를 알 수 있어요. 모든 종교를 초월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공동체의 사명은 고아원이 아니에요. 양로원도 아니에요. 이렇게 무슨 정신 요양소도 아니에요. 이건 가정이에요. 가짜에요. 실제는 이런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들어난 것뿐이야. 속은 과부나 가사 정신 환자나 데리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속은, 속은 인류를 품고 사는 사람들 이예요. 우주를 사는 사람들 이예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사는 사람들 이라는 말이에요. 아니 풀을 풀까지 사랑해. 버러지도 사랑해. 못 사랑할게 없는 사람들이야. 무생물까지, 그렇게 상징으로 빛을 비추라고 두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와서 쉬어갈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와서 위로받고 갈수 있도록 등불을 켜놓은 등불이다. 그런 뜻이거든요. 동광원 동쪽에 불빛이다. 동쪽에 빛나는 빛이다. 동해다는 뜻이야. 동쪽에 태양이 떴다. 그런 뜻이거든. 동녘 동(東) 빛 광(光) 동광, 그런 뜻이 있어요. 동광이라는 뜻은 태양이다.
우리는 아직 그렇게 안 되어 있어도 희망이 있어요. 깨지면 다시 시작하면 돼. 희망이 있어. 언제 깨어지려는지 몰라. 기도를 해야지요. 나를 깨주십시오. 나를 깨달아지게, 옛사람이 죽게 해 주십시오. 그럼 새 사람이 되어요. 새로운 등불이 켜져요. 희망이 있어요. 저는 그러지요. 오히려 불이 켜졌다면 그것은 불행하다는 거예요. 왜 소망이 없잖아요? 막가는 거예요. 보름달을 희망하는 것뿐이에요. 보름달이 좋은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직은 그믐밤이야. 희망이 있다는 거예요. 희망이 있어. 그러니까 이건 희망이 있는 동산이라. 소망, 소망송이 그 뜻이거든. 아직은 희망이 있다. 왜 나는 죄인이다. 그걸 알고 있어요. 아, 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그걸 알고 있어. 나는 아직도 내 가슴에 불덩어리가 있어. 아직은 내 마음이 캄캄해. 희망이 있어. 희망이, 그러니까 희망이 천국이라는 거예요. 희망이 없는 것이 지옥이라고 해석하셨지요. 절망이 지옥이다. 절망, 희망은 천국이라. 천국, 그러니까 희망이 있다. 이건 변증이야. 제가 변증하는 거예요. 우린 희망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믐밤이야. 아직은 가슴이 캄캄해. 그러나 빛이 보여요. 동쪽에, 해가 떠올라요. 그렇게 구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렇게 축복받은 동산이다. 그런 뜻으로 있는 곳이다. 와서 보면 아무것도 없어도 좋아요. 희망은 있어. 희망이 있어. 어찌되었든 이 ‘소망송’그런 가사라는 말이지요. 다시 부르십시다. 소망송. 아직은 그믐밤이에요. 그러나 곧 달이 뜰 거예요. 곧 천국이 와요. 곧 깨진단 말이에요. 앞으로 이 공님 쯤 될 사람들이에요. 이 공님의 후계자란 말입니다.
소망 송
1. 이 동산을 드리오니 완덕을 이루소서. 이성산을 찾는 길손 은총의 빛 비추소서.
2. 물이 있고 산 있는 곳 빛있고 평화 있어 임의 말씀 길이 전 할 어진 언님 보내소서.
3. 사랑의 임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파한 이 슬퍼한 이 성화 받게 하옵소서.
후렴. 주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겸손함 모 없고 빛깔 없이 금 없고 울 없이
평화의 힘 성령으로 안심입명 이루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