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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78. [역경의 열매] 이동섭 <1-10> 6·25 직후 보릿고개 속에도 온기 느끼며 성장
열일곱 살에 시집와 고생하신 어머니… 자식 위한 헌신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국민의당 이동섭 의원이 서울 노원구 순복음노원교회 내 ㈔세계태권도선교협회 사무실에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보연 인턴기자나는 1955년 11월 전남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17세 때 시집와 1년 뒤 나를 낳으셨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마치 여린 소녀가 아기를 키우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이렇게 일찍 결혼해 일찍 자녀를 갖는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하늘에서 하얀 비단이 내려오는 태몽을 꾸셨다. 비단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섭아, 너는 나중에 커서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여. 용기와 소망을 잃지 말거라.”
그때는 6·25전쟁이 끝나고 2년밖에 되지 않던 상황이라 보릿고개가 있었다. 세 끼 밥을 제대로 챙겨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보리밥이나 열무김치, 쌀죽, 밀가루죽 같은 것으로 끼니를 채웠다. 그것조차도 못 먹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고 어머니가 손수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른 가정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다른 친구들은 풀죽으로 한 끼를 때웠다. 당시 코흘리개 친구들은 등교는 고사하고 매일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느라 산을 누볐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농사일에도 매달렸다. 땔감을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워도 인정과 온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돈 몇 푼에 생사가 오가는 그런 살벌한 사회는 아니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월급날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월급날이 되면 오토바이에 생선을 싣고 오셨다. 아버지는 당시 농촌지도소장이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오토바이가 나왔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형 세단 정도의 관용차와 비슷했다.
아버지는 3년에 한 번씩 타지 발령이 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전남 신안, 화순, 광양 등에서 함께 생활하셨다. 나는 자연스레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유년 시절은 할머니와 함께했던 기억이 많다.
장남인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할머니는 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셨다. 대나무로 만든 참빗으로 한 올 한 올 정성껏 빗어 비녀를 꽂으셨다. 할머니는 내가 졸고 있을 때면 나를 품에 안고 가슴을 토닥거리며 노래를 불러주셨다.
아버지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당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33년 공무원 재직 동안 월급을 제대로 갖다 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이었다. 아버지 형제가 12명이나 되고 자식이 6명이나 되는데다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시부모를 모시니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나 깨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식 걱정, 집안 걱정으로 사셨다. 6남매 공부시키고 장가·시집보내는 데 뼈골이 다 빠질 정도로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코끝이 찡해진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이처럼 온갖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어머니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동섭 <1> 6·25 직후 보릿고개 속에도 온기 느끼며 성장
* [역경의 열매]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 <2> '약골' 단련하려 찾은 태권도장… 인생의 변곡점
* [역경의 열매]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 <3> 무도대회 우승자에 도전해 승리… '훈련소 스타'로
* [역경의 열매]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 <4> 조용기 목사 '속사포 설교' 들은 뒤 믿음 깊어져
* [역경의 열매] 이동섭 <5> 14평 신혼집에서 10여명 식구가 빠듯한 살림
* [역경의 열매] 이동섭 <6> 검사의 지역 차별에 사표… "국회의원 돼 바로잡자"
* [역경의 열매] 이동섭 <7> 두 번의 낙선 큰 교훈… 눈물의 기도로 마음 달래
* [역경의 열매] 이동섭 <8> 총선 잇단 좌절… "남은 생애 태권도로 복음 전하자"
* [역경의 열매] 이동섭 <9> 야권연대 위해 총선-보선서 연거푸 후보 양보
* [역경의 열매] 이동섭 <10·끝> "6전7기의 힘든 도전에 늘 동행해주신 주님"
◇약력=전남 고흥 출생.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치학석사, 국민대 법학박사. 태권도 공인 9단. 안철수 의원 정무특보 역임. 현 순복음노원교회 장로, ㈔세계태권도선교협회 회장,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국민의당 원내부대표.
***[역경의 열매]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 <2> ‘약골’ 단련하려 찾은 태권도장… 인생의 변곡점
실력 있는 사범 밑에서 열심히 수련, 전국체전 예선전 우승… 대학도 진학
이동섭 국민의당 의원이 2014년 12월 국기원 태권도 공인 9단에 승단한 뒤 도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풍양초등학교는 집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부친이 공무원이라 남들보다 좋은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1962년 몸이 약해 1년을 유급했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동창회에 가면 어떤 동창은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등굣길은 밭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솜이불을 만들기 위해 길가에 목화를 많이 심었다. 목화꽃이 피기 전 몽우리가 열리는데 그걸 따먹으면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었다. 5월쯤 보리밭을 지날 때면 덜 익은 보리를 솔가지 위에 얹어놓고 불을 지펴 구워먹곤 했다. 고소한 보리를 먹고 나면 손과 입술이 시커멓게 변했다. 가을에는 주로 무를 뽑아먹었다. 그렇게 먹다 보면 하루 종일 트림이 나고 속이 쓰렸다.
가을 농로에 핀 코스모스, 수업 마치고 실개천에서 잡던 가재와 송사리, 고무신으로 장구벌레를 잡던 일도 생각난다. 소에게 먹이는 풀을 하러 야산에 갔다가 고구마를 캐 구워먹던 추억, 소 등에 타고 놀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보름날에는 줄을 단 깡통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불을 붙이고 돌리다가 하늘 높이 던지곤 했다. 야산에서 오래 씹어 먹으면 껌처럼 되는 풀 ‘삐비’를 뽑아먹던 기억도 있다. 벼에 붙어 있던 메뚜기를 잡아 불에 구어 먹던 일도 그립다.
우리 집은 소록도에서 2㎞ 거리에 있었다. 당시엔 ‘문둥병 환자가 어린아이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환자들이 소록도에서 탈출해 보리밭에 숨어 어린아이의 간을 빼먹는다는 얘기였다. 나와 친구들은 그 얘기가 너무 무서워 연필과 책을 넣은 보자기는 어깨에 둘러메고 두 손에는 돌을 들고 학교로 향하곤 했다.
풍양중·고등학교는 집에서 6㎞ 떨어진 고흥 읍내에 있었다. 낡은 버스 한 대가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던 시절이라 왕복 12㎞를 걸어 다녔다. 내 인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태권도를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이다. 아파서 1년 유급하는 바람에 동급생들은 나보다 한 살이 적었지만 싸움을 했다 하면 얻어맞기 일쑤였다. 키만 컸지 약골이었던 셈이다.
1968년 4월 아버지가 어느 날 내가 맞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으신 것 같다. 아버지의 얼굴은 무척 상기돼 있었다. “동섭아! 나와 어디 갈 데가 있다. 따라 오거라.”
그렇게 간 곳이 고흥읍 서문리에 있는 연무관 전남본관이었다. “여기서 태권도 좀 배우거라.” “예?” 더 이상 1년 어린 동급생들에게 맞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태권도를 가르쳐준 이성형 관장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고흥에서 제일 부자였고 고흥군체육회장으로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항상 거론되던 분이었다.
태권도장에는 실력 있는 사범이 꽤 많았다. 서윤남 전 독일태권도협회장과 박종부 전 오스트리아태권도협회장을 사범으로 모셨다. 당시 태권도를 열심히 배웠다. 그 첫 번째 결과로 74년 전국체전 전남 예선전에서 우승했다. 그 덕에 나는 75년 인천체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고교 졸업생 200명 중 대학 진학은 3명에 불과했다. 고향 읍내에선 대학 진학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친지와 이웃들이 격려해줬다. 그해 6월 전투경찰 시험에 합격했고 9월 논산 훈련소에서 10주간 고된 훈련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 <3> 무도대회 우승자에 도전해 승리… ‘훈련소 스타’로
이튿날 신병교육대 중대장으로 발탁, 바라던 서울지역 공항경비대에 배치
1975년 태권도 실력을 인정받아 김포공항 경비대에 배치된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이 공항에서 항공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1975년 9월 논산훈련소 30연대에 배정됐는데 기합이 보통이 아니었다. 훈련소에서 나오는 급식 양도 매우 적었다. 배고프게 지내니 서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훈련병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찌꺼기를 건져 먹다가 교관에게 걸려 기합을 받기도 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왔다. 30연대 전체에서 무도(武道) 대회가 열린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K-1 대회쯤 될 것이다. “야, 사회 있을 때 태권도 합기도 유도 킥복싱 좀 한 친구 있나? 나와 봐.”
30여명이 손을 들었다. 곧바로 시합이 시작됐다. 30여명이 리그전을 펼쳐 2명이 최종 선발됐다. 다들 코피가 터지고 상처투성이가 됐다. 킥복싱 4단이었던 김모 훈련병과 합기도 4단이었던 김모 훈련병이 결승전에서 붙었다. 결국 킥복싱을 한 훈련병이 자유롭게 손발을 돌리면서 리드하다가 3회전에서 KO승을 했다.
“자, 박수!” 교관은 훈련병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했다. 박수소리가 끝날 무렵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교관님, 킥복싱 4단과 제가 한 번 겨뤄보겠습니다.” 훈련병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나는 태권도 3단이었다. 그렇게 시합이 시작됐다.
나는 방금 끝난 결승전에서 김 훈련병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그는 옆차기 기술이 좋았다. “퍽! 퍽!” 아니나 다를까. 그가 옆차기로 가슴과 배, 얼굴 부분을 계속 공격했다.
훈련병들은 킥복싱을 한 김 훈련병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2회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주특기인 돌려차기 뒤차기로 계속 그의 배와 허리를 공격했다. 김 훈련병은 아랫부분 방어에 주력했다. 이때 내 주특기인 돌려차기로 신화를 만들어냈다. 김 훈련병은 비틀거렸고 그 순간을 포착해 뒤차기로 재차 가격했다. 그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동섭! 이동섭! 이동섭!” 훈련병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합으로 신병교육대 30연대에서 일약 스타가 됐다. 이튿날 교관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이동섭! 앞으로 중대장을 맡으라.” 그 덕에 나는 신병교육대 교육과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신병들이 가고 싶어 했던 김포공항 경비대 전경대로 배속됐다. 다른 동기들은 대부분 해안초소에 배치돼 대간첩 경계임무를 맡게 됐는데 나만 서울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 서울에 있던 전투경찰은 우이동 전경대, 갈현동 전경대, 김포공항 전경대밖에 없었다. 나는 김포공항 전경대 본부 행정반에 배치됐고 전 대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교관이 됐다.
두 살 연하의 아내를 만난 것도 군복무 시절이었다. 1978년 5월 제대 말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김포공항 근처로 운동을 나갔는데 김포에 거주하던 아내도 공원으로 운동을 나왔다. 나는 아내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당시 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예쁜 처녀가 정말 천사처럼 보였다. 전율이 느껴졌다. ‘그래,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했지.’
줄넘기를 하고 있던 처녀에게 다가섰다. “저, 제 이상형이십니다. 한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저를 좀 만나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만난 지 3일 만에 “약혼을 해 달라”며 프러포즈를 했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 <4> 조용기 목사 ‘속사포 설교’ 들은 뒤 믿음 깊어져
공항경비대 인근 교회에 출석 시작, 대학 졸업-경찰임용-결혼 일사천리
이동섭 국민의당 의원(오른쪽)이 1980년 5월 제주도 신혼여행 때 아내 왕은옥씨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아내는 나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고 우리끼리 약식으로 약혼을 했다. 나는 매일 김포공항에서 그녀와 데이트를 즐겼다. 1978년 9월 마침내 대한의 남아로서 34개월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제대했다. 곧바로 인천체대에 복학했으며 졸업 전 취직을 한다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 대한전선과 경찰공무원 시험에 동시 합격했다. 그 기쁜 소식을 약혼녀에게 알렸다.
“은옥씨, 좋은 소식이 있어. 글쎄 내가 기업과 경찰시험에 합격했다니까.” 아내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동섭씨, 저는 동섭씨가 민중의 지팡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경찰 제복을 입은 멋진 동섭씨의 모습을 봤으면 해요.”
대한전선은 지금의 대우그룹으로 경찰공무원에 비해 월급이 많았다. 박봉인 경찰공무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대기업 신입사원이 될 것인가 고민이 됐다. ‘그래, 사랑하는 약혼녀의 바람대로 경찰관이 되자. 힘없고 소외된 국민을 돕는 경찰관이 되자.’ 아내는 나의 결정에 기뻐했다. 그렇게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형사기동대를 시작으로 경찰공무원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아내와는 김포공항 부근 공원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프러포즈를 한지 2년만인 1980년 5월 2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내가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다. 교회에 발길을 들여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회로 인도했던 소중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성순백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가 풍양교회를 세운 장로님이었다. 장로님은 매일 새벽 손수 종을 쳤는데, 그 종소리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편했다.
순백이는 늘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동섭아, 교회에 가면 공부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어. 맛있는 떡도 있고.” 순백이의 제안에 따라 처음 교회 문턱을 넘은 것은 크리스마스였다. 성탄절 찬양과 율동을 봤다. 맛있는 과자와 시루떡을 먹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았다.
무엇보다 장로님과 사모님이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내가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분들의 덕택이 컸다.
1975년 김포공항 경비대에 배치를 받으면서 부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울 공항동 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담임목사님은 김경한 목사님이었다. 어느 날 한 권사님이 나에게 다가와서 이런 제안을 했다.
“동섭 형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꼭 가보세요. 조용기 목사님을 뵐 수 있을 텐데 정말 세계적인 설교가예요. 조 목사님이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니까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요?”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느 주일 여의도로 향했다. 조 목사님의 설교는 속사포 같았다. 강단에서 흘러넘치는 말씀은 내 심령을 파고들었다. 예배 후 신유기도를 했는데 정말 목발을 짚던 장애우가 목발을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병자가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신다. 짧은 인생 주님을 높이는 신앙생활을 하자.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도 이 생명의 말씀을 꼭 전해야겠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아내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생, 장인어른, 장모님, 처제 등 가문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경찰생활에 보람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착실히 했지만 고난의 그림자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5> 14평 신혼집에서 10여명 식구가 빠듯한 살림
작은집서 동생 5명-처제 4명 거쳐가… 친구-선배들까지 집엔 늘 사람 끓어
1987년 이동섭 국민의당 의원이 서울 장안아파트에서 1남2녀의 자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형사기동대를 시작으로 서울 청량리 중랑경찰서 등 일선 경찰서를 거쳤다. 그리고 서울중앙지검과 서울북부지검 특수부, 강력부 등에서 주로 조직폭력배 검거와 지능범죄 수사 등을 전담했다.
신혼집은 장안아파트 14평에서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4년간 동생과 처제 등 9명이 그 작은 집을 거쳐 갔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대학시절을 보냈고 직장을 다녔다. 그렇게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가 살았다. 한 방에 서로 섞여 잠도 자고 식사도 했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없는 살림에도 동생과 처제 모두 시집·장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 덕분이다.
게다가 내가 친구, 선배들을 좋아한 탓에 우리 집은 365일 시장처럼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내가 1981년 서울 장안동에 유치원을 설립한 후에는 유치원 교사까지 함께 식사를 했다. 나는 근무가 끝나면 항상 청량리 수산시장을 거쳐 생선을 사왔다.
우리 집 사정을 아는 고흥출신 아주머니는 팔다 남은 갈치 등을 검은 봉지에 가득 담아 2000원만 받고 건네주었다. 그때는 자가용도 없을 때다. 53번 시내버스를 타면 버스 안은 항상 갈치 냄새로 진동했다. 승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곤 했다. 어떤 사람은 눈을 흘기면서 한마디씩 했다. “젊은 사람이 냄새나게 웬 갈치를 들고 다녀?”
그러나 박봉에 10명 이상의 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없는 살림에 돈을 모아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도 책임졌다. 아내는 치장도 하지 않았다. 스킨, 로션 말고는 일체 화장품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옷도 남대문 시장이나 재고상품을 판매하는 곳을 찾아다녔다. 아내는 3만원 미만의 옷만 샀다.
아내의 별명은 ‘콩나물 아줌마’였다. 남편 직장을 봐선 그럭저럭 사는 것 같은데 시장에 갈 때마다 콩나물과 두부만 사왔기 때문이다. 가끔 음식점에 들리면 아내는 남은 음식을 꼭 싸달라고 했다. 이처럼 절약과 검소가 체질화 된 아내의 헌신이 있었기에 모든 게 가능했다.
“여보, 미안해. 경찰 공무원을 한다고 박봉에 호강도 못 시켜주네.” “괜찮아요. 여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던 여인의 머리가 점점 희어지고 예쁜 입에서 흘러나오던 한숨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이 미어졌다. 죄책감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1988년 검찰청 특수부에서 근무할 때 노모 경감과 함께 했다. 노 경감은 탁월한 지혜와 실력을 갖춘 대한민국 최고의 수사관이었다. 특수범죄 쪽은 노 경감이 주로 맡고 나는 강력범죄 쪽을 담당했다. 특수수사 베테랑과 강력수사 베테랑이 함께 뭉쳤으니 우리 팀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당시 나의 별명은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번하면 정말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수많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많은 업적을 일궜다. 이런 실적은 검찰 공보에 실릴 정도로 타의 모범이 됐다. 경찰관으로서 정말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런데 1993년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특수부장으로 이모 검사가 부임했는데 사사건건 노 경감과 내가 호남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6> 검사의 지역 차별에 사표… “국회의원 돼 바로잡자”
경찰에 복귀 후 시각에 큰 변화… 20년 공직생활 접고 정치의 길로
1999년 3월 명예 퇴직한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앞줄 왼쪽 네 번째)이 서울 중랑경찰서에서 열린 퇴임식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1993년 검찰청 특수부에서 일하는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부장검사가 사건에 개입해 이유도 없이 수사를 지연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부장검사는 말끝마다 나와 전라도 출신 노모 경감을 비하했다. ‘뭐야? 전라도라는 이유로 우리를 하대하는 거야?’
초임 경찰 시절엔 지역색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경찰 조직의 밑바닥, 하부조직은 호남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경찰 간부직에 올라갈수록 특정 지역이 독식하다시피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승진할 수 없는 구조가 생겼다. 특히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탈락하는 일도 벌어졌다. 특정지역 출신인 특수부장은 빈번하게 모욕적 언사를 했다.
어느 날이었다. 참다못해 회식 자리에서 부장검사를 향해 한마디 했다. “사람 너무 괄시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사람을 무시합니까!” 부장검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다음날 사직서를 부장실 책상에 올려놨다. 사표를 내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고이 잠든 10살 큰 딸과 7살 둘째 딸, 5살 막내 아들이 눈에 밟혔다. 눈물이 다 났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사표를 내다니….’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집에 쉬고 있는데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가 우편물을 하나 건넸다. ‘이게 뭐지?’ 우편물 속에는 국회의원 수첩이 한 권 들어있었다. 한양대 행정대학원 동기 중 국회의원 보좌관이 있었는데 그가 보내준 것이었다.
나는 수첩 안에 적혀 있는 국회의원 249명, 비례대표 50명의 인적사항과 학력, 경력을 꼼꼼히 살펴봤다. 의원들은 경력이 정말 화려했다. 대부분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대학도 나오지 않고 경력도 시원치 않은 의원이 눈에 띄었다.
‘그래, 내가 지금부터 공부를 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잘못된 지역주의에 따라 차별 대우를 한 부장검사보다 기수가 아래일 것이다.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해 국회의원이 된다면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으로 잘못된 관행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곳은 국회, 즉 입법기관이었다. 누구든 지역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우수한 사람이 인정받는 정당한 사회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역 구도를 바꾸고 어려운 서민, 장애인, 소외된 이웃, 눈물을 흘리며 빵을 먹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들어서기로 했다.
사표는 반려됐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경찰관으로 복귀했다. 그때부턴 과거와 다른 삶을 살았다. 낮에는 공직 생활을 하고 밤에는 정치 공부를 했다. 주말에는 조직관리를 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정치인이 되기로 하면서 내가 가졌던 인식은 180도 변화됐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통일 국제 등의 관점은 물론 NGO, 시민단체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모든 것을 새로 재정립했다.
나는 2000년 4월 열리는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먹고 검찰에서 경찰로 복귀한 뒤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1999년 3월 서울 중랑경찰서 형사과에서 퇴직했다. 이로써 경찰 7년, 검찰 13년 등 총 20년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7> 두 번의 낙선 큰 교훈… 눈물의 기도로 마음 달래
더욱 겸손하고 덕으로 사람 대하고… 새벽·철야예배로 하나님께 매달려
2004년 새천년민주당 노원병 후보로 출마한 이동섭 국민의당 의원(왼쪽)이 임래규 노원을 후보, 추미애 선거대책위원장, 함승희 노원갑 후보와 손을 들고 있다(왼쪽 두 번째부터).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나는 우선 체육조직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1990년대 초 서울 노원구 태권도연합회를 조직하고 선거를 통해 회장에 선출돼 7년 동안 태권도와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때 태권도연합회장배 태권도대회를 육군사관학교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했다. 이후 노원구 체육회 이사로 10여년 봉사했다. 95년에는 지역의 축구 배구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볼링 연합회 회장 등 36개 단체와 협력해 노원구생활체육협회를 결성했다. 이 밖에도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운동본부장, 학원폭력감시단장, 검찰청범죄예방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정치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학생·노동·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 최후의 재야운동가로 추앙받던 장기표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97년경 무작정 서울 용산역 근처에 있는 장 선생님의 신문명정책연구소를 방문했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장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장 선생님의 국가관 가치관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게 장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연구원으로 새로운 정당을 건립하기 위해 힘썼다. 장 선생님과는 푸른정치연합을 창당해 대변인으로 활동했으며, 2000년 민주국민당 노원을 후보로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2002년 장 선생님은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고 나도 뒤따라 입당했다. 당시 나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청년실업특위 부위원장으로서 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2004년에는 17대 국회의원 후보에 공모했지만 다른 후보에 밀리고 말았다. 힘이 빠졌다. ‘아니, 어떻게 노원구에 살지도 않는 후보를 총선 후보로 내세운다는 말인가.’
중앙당에 여론조사와 재심을 요청했다. 초조하면서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국 총선 후보가 됐다. 모두들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사람들도 지구당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선을 며칠 앞두고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합세해 노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피땀 흘려 선거 현장을 뛰고 1만표를 얻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비통했다. 나는 곧바로 순복음노원교회로 달려가 손수건을 흠뻑 적실 정도로 주님께 기도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죄 없는 아내와 3남매에게 미안했다. 무조건 좌절하고 낙담할 순 없었다. 선거 다음날부터 교회를 찾거나 수락산 불암산 등산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재필 담임목사님의 위로가 컸다. ‘그래, 도전하는 자만이 도약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님이 늘 외치시는 절대 긍정, 절대 희망의 자세로 다시 시작하자.’
2차례의 낙선은 나에게 큰 교훈을 줬다. 더욱 겸손하고 덕으로 사람을 대하며 사랑으로 인간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제단과 철야예배, 주일예배를 이어가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에서 기도했다.
2008년이 다가왔다. 18대 총선 때는 당연히 공천이 되리라 믿었다.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주당에서 지역위원장을 맡아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치렀기 때문이다. ‘당 발전을 위한 공헌도가 있으니 당연히 공천을 받겠지. 삼세판에 분명 당선의 수가 있을 거야.’ 하지만 공천은 다른 사람이 받았다. 충격이었다. 그러나 나는 깨끗이 승복하고 중앙당에서 전국청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8> 총선 잇단 좌절… “남은 생애 태권도로 복음 전하자”
시드니올림픽 태권도선교단 활동… 39개국에 선교사 63명 파송 성과
국민의당 이동섭 의원이 2003년 6월 서울 노원구 서울산업대에서 개최된 ‘2003 할렐루야 미션컵 전국태권도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2008년 4월 18일. 총선 전날이었다. 오전에 뱃속이 쓰렸다. 서울 원자력병원으로 달려갔다. “위 괴사증세가 있습니다. 수술하셔야겠습니다.” 선거 날 수술실에 들어갔다. ‘아,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수술대에 누워 있으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오후 6시, 수술을 마치고 깨어나니 민주당의 완패 소식이 들려왔다. 공천도 못 받은 상태에서 사무실까지 빌려주며 적극 밀었던 같은 당 후보마저 낙선했다. 참담했다. 꼼짝도 못한 상태에서 피눈물이 났다. ‘그래, 인간의 생사화복은 모두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이제야 깨닫다니….’
총선 후 정치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나 이제 정치 그만해야겠어.” 아내는 얼굴색이 밝아지며 너무 행복해했다. 정치를 한다며 지난 10년간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갔던 아내 앞에서 나는 죄인이었다. 아내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예배시간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마치 수도꼭지에서 콸콸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났다. 기도를 해도, 찬양을 해도, 말씀을 들어도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항상 손수건을 갖고 다니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아마 국회의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아내와 가족, 나를 위해 힘쓴 당원들, 교회 성도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은 생애를 태권도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겠다. 태권도라는 문화유산을 통해 국위를 높이고 선교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자.’ 그동안 나는 정치인으로 활동을 했지만 태권도를 통한 선교에도 힘을 써왔다. 2000년 호주 시드니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을 때의 일이다. 유재필 담임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태권도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올림픽에 태권도 선교단을 파송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목사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박백희 장로, 조영배 부회장, 김희도 사무총장 등과 태권도 선교팀 100여명을 꾸려 시드니로 향했다. 각국에서 온 관광객과 선수들에게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며 선교활동을 했는데 인기가 대단했다. 귀국하자마자 다시 유 목사님께 달려갔다.
“목사님, 세계태권도선교협회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기 위해선 사단법인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부나 태권도계, 교계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태동된 게 ㈔세계태권도선교협회다. 명예총재에는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님, 총재에는 영적 아버지인 유재필 목사님을 모셨다. 나는 상임회장으로 16개 시도협회를 조직하고 시·군·구에 지회를 세웠다. 세계 39개국에 63명의 태권도 선교사를 파송했다.
2008년은 시련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감사의 시절이기도 했다. 그해 6월 28일 나는 순복음노원교회 장로로 장립됐다. 남성으로는 유일하게 전도왕을 받았을 정도로 많은 성도를 주님 앞으로 인도했다.
장로로 장립 받던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수많은 성도 앞에서 목사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으셨다. “주여, 우리 이동섭 장로를 귀히 쓰시고….” 유 목사님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세상적인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내려놓았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됐다. 그간의 교만을 회개했는데 성령님이 뜨겁게 임재 하셨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9> 야권연대 위해 총선-보선서 연거푸 후보 양보
안철수, 국회서 의원선서 직후 전화 “이 위원장과 맨먼저 점심하고 싶다”
2009년 아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다시 민주당 서울특별시당 상근 수석부위원장으로 돌아왔다. 당 정책 전반을 비교분석하고 위원장의 직무를 대행하는 자리였다. 정당의 궁극적 목표가 정권창출에 있기 때문에 정당의 정책은 매우 중요했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더욱 중요했다.
2012년 총선이 다가왔다. 민주당은 여대야소 정국에서 한나라당에 맞서기 위해 야권연대를 추진했다. 내가 출마하기로 한 노원병 지역도 거기에 속했다. 나는 통합민주당의 공천을 확정 받은 국회의원 후보였지만 선당후사(先黨後私) 차원에서 노회찬 후보에게 깨끗하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그리고 노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선거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문제는 당선 후 노 후보의 태도였다.
그는 나를 포함한 당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한번 없었다. 1년 후에는 통신기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형이 선고돼 의원직까지 박탈당했다. 이후 재보궐 선거가 치러지게 됐다. “이동섭입니다. 한번 만나서 보궐선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는 훗날 자신의 아내를 공천했다고 했다. 실망감이 느껴졌다.
반면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2013년 4월 보궐선거 때였다. 나는 19대 총선 당시 모 일간지 여론조사에서 49.4%를 얻을 정도로 높은 지지도를 갖고 있었다. 정치 입문 20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나와 무소속이었던 안 전 대표는 후보단일화 과정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동행으로 끝을 맺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날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아내가 입을 열었다. “여보, 할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좋은 선거전략이라도 있어요?”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의 앞길을 막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 당신이 안 후보에게 양보하면 어떨까요. 나라고 왜 당신이 출마해 국회의원 되는 게 싫겠어요. 하지만 안 후보는 대권 후보이고 당신은 국회의원 후보에요.” 아내와 나는 이 문제를 놓고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에서 금식까지 했다. 그리고 후보직을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안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기 강력한 대권후보인 안 후보께 총선 후보를 양보하겠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을 한두 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권의 역사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나는 안 후보의 선거운동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유세에 나서자 수많은 청중들이 몰려들었다. 지구당 사무실에서 각 동·통·반별로 조직을 가동했다. 각 직능단체, 시민·체육단체, 향우회, 종교단체의 핵심 관계자를 만나 안 후보의 지지를 호소했다. 안 후보는 몸에 밴 겸손함과 인사성, 근면성실함으로 유권자에게 다가섰다. 결국 안 후보는 당선이 됐다. 상대 후보를 여유롭게 따돌렸다.
안 전 대표가 국회에서 의원선서를 한 후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 위원장님 덕분에 제가 당선됐습니다. 많은 사람과 점심 약속이 잡혔지만 가장 먼저 모시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일정도 바쁘신데 나중에 하셔도 좋습니다.”
그 후 우리는 동지로서, 정치적 동반자로서 함께하게 됐다. 2014년 1월부터 나는 안 전 대표의 정무특보를 맡아 정치현안 등을 보필하며 정무기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10·끝> “6전7기의 힘든 도전에 늘 동행해주신 주님”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꿈 이뤄… 특권 내려놓고 약자 위한 의정 다짐
이동섭 국민의당 국회의원(왼쪽)이 지난달 영국대사관저에서 열린 5개국 대사 주최 20대 국회개원 축하 리셉션에서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와 기념촬영을 했다.2014년 12월 태권도인으로서 최고단자 시험인 9단 승단시험에 응시해 그랜드마스터 자격을 획득했다. 정치인으로선 실단 9단으로 세계 최초로 오른 것이다. 국민생활체육 서울특별시태권도연합회 회장직도 맡아 전국 17개 시도지부와 150만 회원과 함께 국기(國技)인 태권도 발전에 힘썼다.
지난 2월 국민들의 큰 기대와 한편으로는 염려 속에 탄생한 국민의당은 기존 양대 정당의 기득권 틀 속에서 각종 견제와 함께 선거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나는 국민의당 선거대책위원회 당대표 비서실장, 안철수 전 대표 정무특보, 대외협력위원장 등 당의 핵심요직을 맡아 무거운 책임감으로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비례대표로 출마하면 당에 대한 기여도와 문화체육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비례대표 신청을 했고 12번으로 공천을 받게 됐다. ‘아, 우연의 일치일까. 국민의당 3번은 삼위일체의 3자와 같다. 게다가 비례대표 12번은 예수님의 12제자가 연상된다!’ 숫자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비록 만족할만한 순번은 아니었지만,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다시 한 번 헌신하기로 했다.
드디어 지난 4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전국을 돌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되어 건강에 자신이 있었지만, 선거기간 내내 목이 많이 쉬고 고단했다. 그만큼 이번 선거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달라졌다. 국민들이 기존 양당체제에 느끼는 염증은 생각보다 컸다. 대다수가 제3 정당의 출현을 통한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변화를 열망하고 있었다.
호남에서 시작된 국민의당 지지세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전국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국민의당에 대한 지지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내 4월 13일 밤 총선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당투표 결과 국민의당은 26.7%를 득표해 일약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제3 정당’의 탄생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선거당일 저녁, 나는 아내와 함께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라가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했다. 지난 20여년의 정치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새벽 2시였던 것 같다.
“이 후보님,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뭐라고? 오, 할렐루야!” 당선 확정의 기쁜 소식을 듣고 아내와 나는 얼싸안았다. 마침내 6전7기의 도전 끝에 국회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이뤄주신 일이었다. 새벽부터 온 가족이 모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부터 드렸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다. 국회의원의 특권을 내려놓고 약자를 향한 주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한점 부끄럼 없는 정의로운 의정활동을 펼치겠다는 약속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힘들다고, 아프다고, 고난을 당한다고, 어렵다고 포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꿈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그리고 될 때까지 정진하며 인내의 세월을 주님과 동행하면 꿈은 꼭 이뤄질 것이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