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북한에 대한 뉴스의 초점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국방위원장 김정은의 행보에 대한 것입니다. 그의 건강과 함께, 예측불허의 행동이 나올까 하는 염려 가운데 있습니다. 나이 어린 그를 우상화하고 있는 북한의 실정은 어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을 그처럼 우상화하고 그 속에서 어둠의 권력을 누리려는 것은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이요, 세상 신의 저주의 후예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축복받은 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뿌리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는 땅에서 태어났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난 자들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인생이 달라지고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 난 자가 누리는 권세와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죄와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빛의 사람이 됩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다 죄(罪)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어떤 각오나 의지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성향이 바뀔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 것도 무엇인가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뿌리가 사단이기에 거기에 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어둠을 싫어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영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밝은 빛을 좋아합니다. 속성이 바뀐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려 창기로서 어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 빛의 사람이 되고, 주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 가장 거룩한 여인이 됩니다. 어둠의 세력을 이긴 사람들, 영적으로 빛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빛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은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권세가 있습니다.
인간이 실패하여 불행한 것은 죄악으로 물든 자신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과 함께 못 박혀 죽으셨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주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난 자들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갑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권세가 있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음의 자아(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마음)를 이기지 못하여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실패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길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되지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 자신을 이기고 아버지를 주인으로 모시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힘으로 자신을 이기는 기도를 하고 주님을 모실 때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자들이 하나님께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난 자들은 세상을 이기고 축복의 환경을 만드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께 난 자가 되어 이미 저주는 끝나고 축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주의 나무에서 축복의 예수 나무로 접붙임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복은 환경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환경은 정확히 말하면 저주도 아니고 축복도 아닌 중성입니다. 그 환경에서 누가 사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도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롯은 물이 흐르고 목초지가 잘 발달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헤브론 산지를 택합니다. 물리적인 환경은 롯이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생명이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께 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께 난 자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운명을 바꾸는 권세가 있습니다. 아멘.
And... 독일의 아우슈비치 수용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쳐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 연합군이 탈환한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습니다.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 중 한 명이 한쪽 벽 후미진 곳에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인 것 같은 그 글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니? 그 연합군 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하나의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
아무리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환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주님이 지시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주인 된 삶에서 주님이 주인 된 삶으로 주재권을 바꾸기 원하십니다. 내가 주인이 되면 삶의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하지만, 주님이 주인이 되시면 그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