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복된 간증을 소유하라
10/29월(月)행 3:11-19
성도의 신앙 승리는 믿음의 확신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믿어도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이나 기적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복된 간증이 경험으로 쌓일 때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앉은뱅이 자신도 놀랐지만 주변 사람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과 베드로를 주목하자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 믿음이 낫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을 때 전도가 되어 지고 축복을 받게 됩니다.
기적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기적은 자연법칙에 반해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간의 이해나 상식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일을 말합니다.
기적이 여러번 반복되면 자연 법칙이 됩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인간의 믿음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믿음만 기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그 분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주님은 인간의 딜레마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인간의 영원한 적은 사망 세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고 병들고 망하는 것입니다. 사망 세력이 죄라는 무기를 가지고 인간을 영원한 파멸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 분만이 영원한 적인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 분을 주님으로 믿을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우리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당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뜻대로 예수를 믿기 위해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자기 뜻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천 년 전 현장에 있었다면 예수를 죽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해야 예수를 죽인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 믿고 영접해야 죄 사함 받고 유쾌한 날이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부터 이를 것이요”
(행 3:19)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회개를 전제하고 삶의 방향을 바꿀 때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죄 사함을 체험할 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창조시 원래의 삶으로 회복 됩니다. 이때 날마다 삶이 유쾌한 날이 됩니다. 부활의 증인에 대한 간증이 있는 사람을 통해 주님이 역사하심으로 기적,
표적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행 3:7) 베드로의 손은 주님의 손이 됩니다. 복된 간증을 소유하므로 유쾌한 날이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And...
다음 글은 송명희 시인의 어머니 되시는 남정임씨의 간증입니다.
“엄마, 엄마아가 결혼하아기 전에 주님께 악속을 했다고 그랬지?” 어느 날 명희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딸아이의 질문은 열여섯 살 때의 나를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그리스도인
인 어떤 여자 분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장애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계셨습니다. 조그마한 몸집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변치 않을 것 같은 굳은 의지가 서린 환한 얼굴의 그분이 사춘기 소녀였던 내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나도 저분을 닮아야지.
평생을 장애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도와야지 ..’ 그때 나는 이런 약속을 스스로에
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그런 약속도 시들해진 채 결혼도 하고 남을 돕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 명희야! 나의 거짓 약속 때문에 네가 이런 시련을 당하는지도 몰라.” 이 말을 하며 나는 조용히 웃었고, 명희도 따라 웃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명희는 순수함이 묻어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야 엄마, 나를 통해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잖아.” 명희의 이 한마디는 내가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실을 주었습니다. '처녀 시절 주님께 했던 약속, 지체 장애자들을 돌보면서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약속이 실현된것이 아닐까요? 그래, 나는 딸애를 통해서 그리고 딸애와 함께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거야. 단순히 내 딸만을 돌보는 엄마로서가 아니고...' 이런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나는 행복한 여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의 고생이 다 의미 있는 고생이라는 깨달음이 밀물처럼 내 가슴의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딸애의 뒤치다꺼리 하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입니다.
빨래하는 일, 밥 차리는 일, 휠체어를 끄는 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 특히 명희가 교회의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할 땐 자꾸만 비뚤어지는 그 애의 턱을 정면에 고정시키기 위해 내 억센 팔이 필요합니다
. 그러나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내가 내 딸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알기에 내 마음은 큰 감사로 젖어듭니다.
우리의 삶에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을 감사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은 나의 죄 때문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어떤 모양의 그릇이든 우리의 그릇에 주님을 나타내면 되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로 삶을 이겨낼 때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사명이요,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전하는 삶은 예수에 관한 지식이 아닌 내 삶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죽고 주님이 나타날 때 예수 증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의 모습은 보지 말고 내가 죽었을 때 나타나시는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복된 간증을 소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https://youtu.be/yfWzBI1pjg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