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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한국태권도연맹 소속 남녀 도생이 무대에서 한국태권도를 시범보임(태권도로 시작하는 오늘의 그날)----------
최태성: 일자로 발이 쫙 올라가네! (칼 군무 저리 가라, 자로 잰 듯 똑같은 자세)
-----------(전 세계에 태권도를 널리 알린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 3 명이 연출 (순식간에 조각나는 송판들) (완벽한 멋진 시범을 보여준 세계태권도 연맹 시범단 (안진모, 김아라, 이찬민, 이재권, 유용준님) 감사합니다.
허준/방송인: (송판을 이시원씨에게) 쳐봐!
이시원/배우: 으악! (송판 격파) 성공!
----------이광용/아나운서: (무대에서) 태권! 저도 나름 태권도 2단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인을 매료시키고 있는 우리의 무예 태권도, 그런데 여러분, 조선 정조시대에 동아시아를 사로 잡은 종합 무예서가 있었다는 사실, 혹시 알고 있습니까?
이시원: 몰랐어요.
이광용: 자, 놀라지 마세요. 바로 이 책입니다. (김근식) 교수님, 너무 잘 아시는 표정이에요. 먼저 우리 엠씨님, 읽어 보시겠어요?
최원정/KBS 아나운서: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이광용: 武藝圖譜通志一(무예도보통지일), 一, 이거는 아시겠죠?
이시원: 일!
이광용: 이거는 총4권인데 1권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어떻게 읽느냐? 武藝圖譜通志一 (무예도보통지일)
허준: 무예도 보통~ 글자처럼 무예도 보통 사람들이 다 배워야 한다는 뜻(?)
이광용: (습관성 아무말) 경고 통지~이거 어떻게 읽느냐면 무예 도보 통지~ 두 자씩 끊어서 읽는 겁니다. 설명을 해드리면 무예가 담겨있는 그림과 설명(도보) 종합서적이라는 뜻이죠.
허준: 요즘 시대로 하면 무예 완전정복이네~
이광용: 책을 보시면 총24개의 무예 기술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림이 있어요. 조선의 무예백과사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신청으로 이 책이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됩니다. 또 이뿐만이 아니에요. 북한에는 이 책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습니다. 무려 600만 명이 관람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북한의 그 영화 지금부터 감상해 보실까요.
------(북한 영화 <평양 날파람>中 (동영상) 일제 강점기 일제 침략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던 대한제국,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택견 수련을 거듭하며 힘을 키워나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훈련을 하는 남자 주인공 정택, 택견의 계승자이기도 했죠. 훈련 한 것 좀 보십시오. 강철부대 뺨치는 수준입니다. 한편 조선의 전통 무예 택껸을 말살하려는 일본~
일본관리/代役: 택견 비서를 우리 손에 들어오도록 해주면 살 수 있다. 어서 내놓지~
해설: 택견이 담긴 무예 도보 통지를 빼앗으려 하죠.
조선여자: 이 비서를 지키려고 우리 아버님이 자결하신 겁니다.
해설: 하지만 결국 무예도보통지는 일제의 손에 넘어가고 맙니다. 여자 주인공 소견도 무예도보통지를 되찾기 위해 이들과 맞서 싸우게 되고 (동영상) 우리의 무예도보통지를 찾으러 나서게 되는 정택과 소견~ 일명 택견 커플~(동영상) 칼을 든 일본 사무라이에 맞서 택견으로 싸우게 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두가 정신 팔린 틈을 타서 빼앗겼던 무예도보통지를 다시 손에 넣게 되었다.
일본관리: 네 놈의 목을 내놓겠느냐 아니면 비서를 빼내간 지담을 내놓겠느냐?
정택/代役: 우리가 살자고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
해설: 결국 주인공들은 죽음으로써 무예도보통지를 지키고 지금까지 택견을 계승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시원: 우리나라 80년대 영화같은 느낌이 나고 약간 소림영화 보는 것 같지않아요?
이광용: 참고로 이 영화는 21세기 영화입니다. 놀랍게도 2006년 개봉작 <평양 날파람>
최원정: 아까 그 택견 커플이오? 정택과 소견, 택견 커플의 작명 센스가 너무나 대단하지 않아요? 근데 무예도보통지에 택견이 실제로 나와 있어요?
이광용: 네, 북한은 태권도의 역사적 뿌리를 택견에서 찾고 있는데요. 실제로 북한이 세계기록유산에 이 무예도보 등재신청을 할 때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 중 권법이 현재 북한 태권도의 원형이 됐다고 주장을 했다네요.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북한의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이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거든요. 그런데 북한 태권도하고 .우리 한국 태권도가 지금은 모양이 달라졌지만 실제는 한 집었어요. 또 여기 무예도보통지에 권법이라는 게 들어있거든요. 그래서 권법에서 이어져 오는 것으로 했을 때 그 원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애요. 다만 이제 현재 우리가 말하는 태권도는 1959년에 정립이 되거든요. 태권도란 편람도 그때 나오고 협회도 그때 만들어지기 때문에 1790년 무예도보통지 편찬 후 100년의 역사가 있잖아요. 그리고 일제 지배가 있고 그래서 일본의 공수도 라는 가라데 있죠. 이런 것도 우리 태권도가 준비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영향을 줘요 그래서 원류라고 하는 것은 맞고 그렇지만 순전히 그것만 라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보여 집니다.
이광용: 아까 제가 그림 보여 드렸잖아요. 圖譜의 圖에 해당하는 건 누가 그렸냐?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거 아닙니까?
김근식: 북한이 등재할 때 김홍도가 그렸다고 주장을 하고 그렇게 기록을 남겨 놨어요. 김홍도가 활동한 시대는 맞구요. 그런데 명확한 기록은 없고요. 제가 어제 기록을 찾았어요. 혹시 관련 기록이 있나 이 책이 만들어졌을 때 상을 받은 유공자 중에 화원이 있는데 (일성록 정조 14년 4월 29일 기사 中-장용영(壯勇營)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올렸다----화원 허감-한종일(韓宗一)-김종회(金宗繪)-박유성(朴維城)은 전례를 상고하여 시상하였다). 네 명의 화원 이름 중에 김홍도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광용: 아니~ 이분 누가 불렀어요? 앞에서 이렇게 감을 열심히 잡고 있는데~ 이렇게 태클을 거시면~
안석환/배우: 제가 바람의 황혼이라는 작품에 출연했었거든요. 근데 김홍도의 선배인 신한평 화백 역할을 했었는데~제가 김홍도가 그린 걸 봤어요.
일동: 폭소~
안석환: 그때 아마도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화백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화풍을 보면 김홍도의 화풍에 맞게 그려져 있고 그래서 아마 이북에서 그렇게 주장을 한 게 아닌가~
이광용: 두 분 자리 바꾸세요.
일동: 폭소
이광용: 김홍도가 그렸던 아니든 이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 아니지 않습니까? 충분히 훌륭한 책이다. 무예도보통지, 과연 이 책 안에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채널 고정!
최원정: 안석환님이 무예도보통지에서 무슨 역할을?
안석환: 제가 <무사 백동수> 라는 드라마에서 서유대 장군으로 출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무예도보통지 하면 무사 백동수가 어명을 받아서 이덕무, 박제가 세 분과 같이 만들었다는 건데 저는 사실 그 당시 삼군 사령관 정도 되는데 아마 저도 조금은 지분이 있지 않을까.
이시원: 그럼 직접 무술도 하셨어요?
안석환: 아니오, 저는 이상하게 무신인데도 불구하고 문신처럼 출연을 해서~무예 같은 데에 한번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최원정: 원래 진정한 고수들은 몸을 안 써요.
안석환: 말로~
최태성/한국사 강사: 그럴만 해요. 왜냐면 정조의 친위부대가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장용영을 이끈 장군이기 때문에~ 직접 칼을 들고 싸우지 않아도 될 정도 지위지~
김문식: 정조는 무예보도통지를 장용영 부대의 교본으로 사용하기도 해요. 그래서 장용영이 실제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로 성장하게 되는데 정조는 文을 강조했지만 武도 병행하게 합니다. 새의 양쪽 날개와 같다고 생각하고 또 군주로서 강력한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거기에 무예도 상당히 기여를 하는 책이죠.
허준: 지금으로 치면 707 특임부대 UDT 이런 곳에서 교본으로 사용했다는 거잖아요. 대체 무슨 내용이 있길래 굉장히 궁금해요.
-----(동영상) 붉은 도복을 입은 남자가 소라 껍질 나팔을 불다~ 갑자기 조선시대? 무술시범------
기창(旗槍)/무예보도통지1권-신호용 깃발과 공격용 창의 두 가지 용도를 겸하는 깃발 달린 창을 이용한 무예,
장창(長槍)/무예도보통지1권-근접전 공격의 주력을 담당하는 긴 창을 이용한 무예
이시원: 지금 보니까 박금수 박사님에요.
당파(鐺鈀)/무예보도통지1권-적의 무기를 걸어 잡을 수 있는 가짓 날이 있는 짧은 창, 일명 삼지창을 이용한 무예
쌍수도 (雙手刀)/무예도보통지2권-두 손으로 쓰는 긴 칼을 이용한 무예, 임진왜란 때 조총수들의 근접 무기로 도입됨
예도(銳刀)/무예도보통지2권-날카로운 칼이라는 뜻으로 우리 고유의 검법 중 하나
최원정: 발이 엄청 가벼워~ 날아다니는 것 같애,
이시원: 소리가 바람을 가르는 것 같애,
쌍검(雙劍)/무예도보통지3권-두 자루의 짧은 칼을 동시에 쓰는 검법, 조선 후기 쌍검무에 영향을 줌
최태성: 저길 어떻게 접근을 해~ 저렇게 휘두르는데~
등패(藤牌)/무예도보통지3권-등나무로 만든 가벼운 방패를 이용한 무예, 조총의 공격도 일부 막을 수 있었음
이시원: 멋 있다!
허준: 월도?
월도(月刀)/무예도보통지3권-긴 자루에 초승달과 같은 큰 칼날이 달려있는 무기를 이용한 무예
편곤(鞭棍)/무예도보통지4권-도리깨와 같은 모양의 무기를 이용한 무예로 갑옷과 방패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음
김근식: 저게 조선 최고의 무기 중의 하나라고~
최태성: 저기에 맞으면 그냥 작살 나는 거야
---------------교전: 단창 VS 쌍검-------------
--------------교전: 쌍수도 VS 장창-------------휘어버린 칼~
이시원: 칼이 휘었어요.
----멋진 시범 보여주신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박금수, 박권모, 이광원, 허대영님) 감사합니다-----
일동: 박수
최원정: 저게 인제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무예들을 고스란히 본 거죠?
박금수: 네, 그렇습니다. 창류가 6가지 도검류가 12가지 그리고 치기 무예가 4가지 그리고 거기에 격구 마상재 해서 총24가지의 무예를 담은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서가 되겠습니다. 이 무예도보통지서는 방금 보여드린 실기만 있는게 아니에요. 통지라고 붙은 이유가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서적을 총145본 정도를 참고로 삼아서 무예에 관련된 백과사전을 만든 겁니다.
이시원: 한 마디로 한 권으로 끝내기 이런 거네요?
최원정: 시험 기간에 보는 족보 같은 느낌~
박금수: 근데 그 족보가 그냥 만들어진 족보가 아니고요.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국제전쟁에서 한중일 3국 무예가 실제로 부딪쳤잖아요. 거기에서 효용이 있었던 거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것만 딱 골라 뽑은 최고의 족보라고 할 수 있죠.
최원정: 그 중에서 24가지 무예가 있다고 그랬는데 그중에서 우리나라 것은 몇 개가 있나요?
박금수: 사실 옛날 무예가 니네 나라 우리나라 큰 의미는 없었어요. 지금의 무기도 사실 쓸모있으면 가서 막 베껴와요. 그래도 따지자면 우리나라의 연원이 있는 것, 본국검(本國劍)과 예도(銳刀) 라는 두가지 검술이 우리나라 것입니다. (本國劍-우리나라 고유의 검법이자 가장 오래된 검법), 이 본국검은 정조 옆에 호위무사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반드시 익혀야 했던 필수과목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本國劍譜입니다.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그림입니다. 글과 그림이구나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죠. 한문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글 해석본인 언해본이 있습니다.
허준: 실제로 있는 거예요?
박금수: 실제로 있어요. 무예도보통지가 총5권으로 되어 있는데 다섯번째가 언해본입니다. (무예도보통지-본권 4권+언해본 1권으로 구성),
최태성: 저기 한자를 풀었네 초자 다음에 디검대적세(持劍對賊勢)랄 포대 이런 식으로~
허준: 어서 와 검 무술은 처음이디?
박금수: 오른편으로 한번 돌아 우족을 들어 안으로 스쳐 인하야 어렵죠? 머리 속에 안들어오죠~ 그래서 무예도보통지만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징이 있어요. 총도라는 것이 있어요. 홍도~ 보시면 동작에 명칭이 있죠. 자세도 있죠. 동선이 쫙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그런데 돌면서 들어와라 이걸 잘 보면 오른쪽으로 도는지 왼쪽으로 도는지 그렇게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이시원: 무예 동작 순간순간을 사진으로 순간 포착하여 붙여논 느낌이에요.
박금수: 제한된 지면을 최대한 활용해 가지고 압축적으로 담아논 오늘날의 인포그래픽과 같이 정리해 놓은겁니다. (인포그래픽(infographic)-정보와 그래픽의 합성어로 복잡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
최태성; 멋 있다!
박금수: 시간 관계상 다 보여드리기는 그렇고 요 카트를 보여 드릴게요. 돌고 돌고 그렇게 돼죠. 금계독립세 입니다.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금계가 한 다리로 섰다가 금방 날아가려는 자세), 좌우요격, (좌우요격세(左右腰擊勢)-검을 상대의 왼쪽이나 오른쪽 허리 윗부분에서부터 목 밑으로 베어 올라가도록 치려는 자세), 후일자, (후일자세(後一刺勢)-뒤쪽을 공격하기 위해 한 번 찌르는 자세), 돌려가지고 장교분수, (장교분수세 (長蛟噴水勢)-검을 똑바로 잡고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가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상대를 내리치는 것), 그 다음에 백원출동세 라고요 (백원출동세 (白遠出洞勢)-힘이 센 동물이 공격을 가하려고 동굴에서 뛰어나오는 듯한 자세), 원숭이가 동굴에서 나오듯이 좌우를 살피다가 여기서 도는 게 보이죠. (우찬격세(右讚擊勢)-오른쪽으로 꿰뚫어 찌르는 동작을 취하는 자세), 갑자기 돌아서 용약 일자로 찌르는 거에요. (용약일자세(勇躍一刺勢)-칼 등이 아래로 가게 하면서 앞을 향하여 곧장 찌르는 자세),
최원정: 저 그림에서 사람이 튀어 나온 것 같지 않아요? 총도 찢고 나온 사람~
박금수: 그럼 누가 한 번 배워보시겠습니까?
최원정: 안 배우님을 추천합니다.
안석환: 말도 안돼 예순이 넘었는데~
박금수: 조선시대는 60세까지 정군에서
안석환: 진짜 60이 넘었다구
허준: 안 배우님이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안석환; (테이블에서 일어나 무대로) 장군 역할도 말로만 했다니까~
박금수: 이렇게 무예도보통지는 누구나 말로만 배운 사람도 할 수 있게 만든 무에서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①뒤 돌아서~ 가 있어요, ②오른편으로 돌아~ ③오른 다리를 들고~ ④칼을 스쳐 올려~ 내려친다~ 다음 동작 보시면, ①왼 다리를 들고~ ②한 발 두 발 내려가서 친다.
일동: (안석환씨에게) 박수~
박금수: 너무 잘 하시는데요.
안석환: 진짜요 다행이다.
허준: 자세가 진짜 그림하고 똑 같았어요.
안석환; 진짜 비슷했어요?
일동; 너무 잘 하셨어요.
허준: 그게 뭐냐면 사람이 이동하고 중심에 다리가 들리는 게~ 누구나 그냥 흐름대로만 따라가면 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거죠.
이시원; 핵심만 그린 거잖아요. 정말 쉽게 따라 할 수 있게~
박금수: 이것만 갖고 있으면 처음 배우는 사람도 쉽게 접근 할 수 있구요. 그리고 사실 오군영에서 무예가 다 달랐거든요. 이러한 표준 무예서를 악보처럼 만들어놓은 겁니다.
이시원: 검하면 사무라이가 유명하잖아요. 무슨 차이가 있나요? ~
박금수: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들이 주로 긴 칼을 쓰기 때문에 길어지고 거리를 정확히 재고 상대를 가서 한 번에 일격 하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구요. 또 한 가지는 병서에 나와 있는 건 칼을 숨기는 특징이 있어요. 숨겨서 안 보여주다가 어디서 날아갈지 모르는 거죠. 위로 날라 갈지~ 이런 검술들을 처음 볼 때 대륙의 무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그래서 왜구의 검술을 중국이 받아 들여요. 근데 그게 우리나라로 들어와요. 무예도보통지에 나와 있는 쌍수도 라는 무예가 되겠는데요. 그러니까 메이드 인 차이나 재패니즈 검술이 쌍수도가 된 거죠. 그런 만큼 일본의 검술이 영향을 많이 준 거죠.
이시원: 쌍수도도 보여 줄 수 있나요?
박금수: 네, 이걸 잠깐 보여 드리면, 견적출검, 견적출검세 (見賊出劍勢)-도적을 보고 검을 뽑는 자세, 칼을 빼고 내려치죠, 향우방적세(向右防賊勢)-오른 쪽을 향하여 적을 막는 자세, 향좌방적세 (向左防賊勢)-왼쪽을 향하여 적을 막는 자세, 향상방적세 (向上防賊勢)-몸을 돌려 한 걸음 뛰어나가 위를 향하여 적을 막는 기세, 휘검향적세 (揮劍向賊勢)-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하여 치는 자세, 빠질 때 보면은 빠지면서도 방어를 하는 거예요. 이러한 동작이 있다는 것은 적이 전면에만 있다는 뜻이에요. 아까 본국검은 사방으로 돌죠.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반면에 예검이나 이런 쌍수도들은 전열을 짜고 적이 있을 때 한쪽으로만 공격하고 방어하라는 검술이다 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허준: 일본은 검을 창처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창처럼 길어서 저 검을 생각했을 때 우리나라 검을 생각하잖아요. 이렇게 쳤을 때 에이~ 저 멀리서 휘둘러 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실제 나한테 까지 닿는 거에요.
박금수: 지금도 유술이나 일본의 검도팔궤를 보면 일본 것은 간결하면서 힘이 있고 중국 것은 기예가 복잡하고 우리나라 것은 중간 정도 이디 쯤에 위치해 있는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이러한 우리만의 무예분만 아니라 외국 무예도 다 담아서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그리고 무예의 역사까지도 알 수 있는 그러한 서적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박금수 였습니다.
최원정: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무예서들이 존재하나요?
김문식: 다 있죠, 무예도보통지의 시작은 명나라 병서 거든요. 그래서 척계광이란 사람이 쓴 <기효신서>, 그 다음에 모원의가 쓴 <무비지>가 기본이구요.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다시 재편집을 해서 우리도 여기에 적당한 것을 끌어들인 상황인데요. 중국 책들은 무기 길이에 따라서 무예를 구분했어요. 그래서 장병 무예는 길이가 긴 무기고 단병 무예는 길이가 짧은 무기인데 이렇게 구분을 했는데 무예도보통지는 공격 스타일에 따라서 구분을 했어요.
최태성; 상황에 따라서~
김문식: 그렇죠, 처음에 창으로 찌르는 거죠. 창류-찌르기-刺, 그 다음에 칼로 쓰는 건 검류-베기-砍(감), 그 다음엔 주먹으로 치거나 아니면 곤봉으로 치거나 편곤으로 치거나 이렇게 맨손, 편곤 등-치기-擊 이렇게 분류해서 편집을 해놓은 게 특징입니다.
이시원: 책 보다가 이거 어디 있었지 그 내용 어디 있었지, 목차를 찾아보잖아요. 그때 딱 쉽게 떠 오를 수 있는 게 그 찌르는 방법 어떻게 했지 베는 방법 어떻게 했지 때리는 방법 어떻게 했지 그러면 쉽게 찾을 수가 있잖아요.
김문식; 더 나아가서 창이라고 하면 나무가 필요 하잖아요. 창 자루 그러면 나무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안석환: 어떤 나무로 만들어야 된다.
김문식; 그 다음에 칼을 만들 때는 철이 어디서 생산되고 시대가 어떻게 변해왔고 이걸 잘 정리를 해놨어요.
최원정; 일단 잘 만들어진 참고서 같은 거예요. 요점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부록도 있고~ 단원 평가도 되어 있고~
허준: 사실 이때 당시에는 직업 군인들을 계속 육성하기 힘드니까 평상시에는 자기 일을 하다가 갑자기 모여서 훈련을 하거나 전투를 치루어야 되는데 무예의 내용을 외우고 있는 사람이 어느날 모여도 똑 같은 무예를 할 수 있으면 전투에 너무 효율적이에요.
이시원: 그러면 이 무예서가 있으면 독학으로 무예를 배울 수가 있는 거예요?
최태성;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 했던 명나라의 무예서 같은 경우는 개인들이 만든 책인데 특히 무예도보통지의 역사적 의의라고 한다면 이게 누가 명한거냐면~ 정조~ 왕이 명한 거잖아요.
최원정: 국정교과서예요.
최태성: (최원정 아나를 향해) 아니 오늘 말을 그렇게 잘 해요. 그러니까 얼마나 체계적으로 만들었겠어요. 이러한 독창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최원정: 그런데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14년 후에야 이 무예서를 만든 거예요. 어떤 의도로 만들었을까요?
이시원: 우리 저번 시간에 난중일기 배웠잖아요. 그 난중일기에 이름을 부쳐준 게 정조였잖아요. 정조가 일기광이었데요. 기록을 좋아했던 왕이라서 무예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허준: 애민정신 하면 또 정조가 아니겠습니까.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그런 가족들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셨겠어요. 우리 국민들이 적어도 스스로 모였을 때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던 거죠.
이시원; 거기다가 또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서 어렸을 적부터 되게 위협이 많았잖아요.
허준: 아버지가 무예를 좋아했어요.
최태성; 피는 못 속여~
허준: 우리 시범 보여 주셨을 때 청룡언월도를 사도세자가 다루잖아요.
------------(동영상) 청룡언월도 사용시범, 정조/代役: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안석환: 정조가 등극하면서부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한 것처럼 이런 시그널을 주고 또 효자였기 때문에 늘 행차도 보면은 아마 사도세자의 것을 그대로 따서 계속 해서 발전시킬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최원정: 어쩌면 이렇게 왕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처럼 얘기하세요, 맞나요, 교수님?
김문식: 그러니까 역사저널 그날 패널 분들의 수준이 대단하시네요. 다 맞아요. 지금 말씀하신 게~ 기록 말씀하셨는데 조선시대 중에서 정조시대의 기록이 제일 좋거든요. 정조가 세손 시절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게 대한제국까지 간 게 일성록이었어요. (일성록(日省錄)-조정과 내외 신하에 관해 기록한 일기로 정조의 세손 시절에 시작되어 대한제국까지 이어짐), 그 다음에 수원에 행차하는 걸 상징화해서 쓴 것을 원행을묘정리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정조 시대 총8일간 화성행궁에서 벌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축제과정을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 그 다음에 화성을 쌓을 때 상세 기록한 건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정조시대, 수원 화성을 축성하며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 사항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 이게 전부 세계기록유산 이거든요. 그 다음에 또 전란을 두 번 거치잖아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무예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국방을 강화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병서, 무예서에 관심을 가지고 편찬한 책이 이 책 (武藝圖譜通志) 이고요. 다음에 또 이어져요. 사도세자가 영조 때 대리청정할 때 그때 무예신보라는 무예서를 편찬하거든요. 그 무예신보를 계승해서 연구 편찬한 것이 <武藝圖譜通志>죠.
허준: 영조께서 사도세자를 못 마땅하게 여기셨잖아요. 공부는 안 하고 무예에만 정신이 팔렸네,
---------------(동영상), 영화 <사도>中, 사도세자/代役: 너는 공부가 그렇게 좋으냐, 세손/代役: 예, 사도세자: 왜 좋으냐, 세손: 할바마마께서 기뻐하시니까요, 사도세자: 그러냐, 세손: 저도 그런 제가 싫사옵니다, 사도세자: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김문식: 정조의 입장에서는 부친께서 무예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셨고 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부친의 명예를 되찾아줄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을 해서 이 책을 편찬하기도 했어요.
최원정: 사도세자는 웬만한 무거운 월도도 15살 때부터 휘두를 줄 알았다면서요.
최태성; 힘이 장사였어요.
최원정: 월도를 막 휘둘렸던 게 아니고 체계적으로 무예서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죠.
최태성: 사도 세자는 무예 쪽에 덕후였나봐요.
허준: 현재 말로 하면 밀덕 (밀리터리 덕후),
최태성: 진짜 그러네,
---------------(동영상) 사도세자/代役; 그래도 부족한 13만 냥은 방만한 오군영에서 군사조직을 통폐합하여 절감하도록 하겠다.
대신/代役: 저하! 병권에 관한 문제만은 함부로 건드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사도세자: 어찌 군대 내에서 까지 당파를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대신: 저하! 그것은 당파가 아니오라, 오군영 무관들의 친목을 위한 모임일 뿐입니다.
사도세자: 이 나라 군대가 당신들 친목을 도모하는 곳이오? 임금의 군대에 어찌 당파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영조/代役: (불편한 기색)
사도세자: 오늘 부로 수어청,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훈련도감의 모든 당파를 혁파하고~
영조: (사도세자를 주시하다)
사도세자: 주상 전하와 병조판서, 오군영 사이의 모든 명령 체계를 단 하나로 통합하라!
최태성; 멋 있다.
이시원; 사도세자를 재평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최원정; 사도세자가 군사개혁을 했나요?
김문식; 부분적으로 맞고요, 영화는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장면이 있어요. 오군영을 통합하고 이걸 하고는 싶었겠지만 그렇게 세자로서 대리 청정하는 시절에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었고요. 당시 보면 군영마다 무예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통합하는 의미에서 18가지 무예를 표준화해요. 이게 <무예신보> 라는 책이고, 여기서 마상 무예 6가지를 보탠 것이 <무예도보통지>이에요.
이시원; 계속 추가된 걸 보면 그만큼 무예가 발전해서 그렇게 된 건가요?
최태성; 그런 측면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주적이 달라지잖아요. 조선군의 싸움 모습하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또 활 궁술 그런데 임진왜란 때 어땠습니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긴 칼로 근접전을 펼치고 들어오니까 당황한 거예요. 기록에 의하면 칼집에서 칼을 뽑을 겨를도 없을 정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최원정: 이제는 드디어 창검술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한 거예요.
최태성; 한 번 당하고 나서~
안석환: 그래서 그랬는지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총검술을 배웠었는데~(동영상-고등학교 군사훈련) 고등학교 때부터 교련복 입고 총검술했었는데~ 여러분들은 안 했나봐요.
이시원: 그게 뭐죠?
최원정: 시원씨는 이거 몰라 (교련-1969년~1997년 고교 필수과목으로 전투에 적응하도록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따위를 가르치는 훈련),
허준: 모형총 들고 훈련했던 기억~
최원정; (군사훈련 시간에) 여학생들은 붕대 감아주고 구급법 실습~
안석환: (허준씨를 향해) 군대 갔다 오셨죠?
허준: 특수부대를 갔다 왔습니다. 대한민국 지하철을 지키는 특수부대를~
이시원; 그 애기하고 있었잖아요. 적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싸우는 방법이 달라진다고,
허준: 요즘은 군대에서 총검술을 안 배운다고 하더라구요. 중단, 상단하고 찌르기 했잖아요?
최태성; 그걸 안 한다고요 (놀람)
이시원: 이제는 다른 무기로 싸우니까 총검술이 필요 없는 거예요?
허준: 요즘은 군에서 착검 자체를 안 한다고~
최원정; (안석환씨를 향하여) 어쩐지 아까 나가서 하셨던 게 뭔가 몸에 배어 있는 게 있으니까 본국검 시범을 훌륭하게~
최태성;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거 합니다.
최원정; 남자분들은 군대 갔다 오셨으니까 신나셨습니다. 군대 얘기 그만하고, 정조 왕조 때 군대 얘기합시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만든 장용영~
이시원: 당시에 이미 오군영이 있었잖아요. 근데 왜 추가적으로 그렇게 만든 거예요?
김문식;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한 사람이 연루된 사건이 있어요. 구선복 이라는 사람인데요. 이 분은 영조 때부터 30년 가까이 군영대장을 역임한 사람이고 이 사람이 정조 시대 중반기까지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정조가 완전히 병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정조 한테는 믿을 만한 친위부대가 필요했고 그것이 나타난 게 장용영인 거예요.
최태성; 정조는 근본적으로 구선복 하고 좋은 관계일 수가 없어요. 뒤주에 갇혔던 사도세자를 희롱했던 인물이에요.
김문식: 정조한테 이미 딱 찍힌 사람인데 그렇지만 현실적인 왕이 되었을 때에는 왕이 어떻게 제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이제 구선복의 아들이 연루가 된 거예요. 그래서 구선복까지~
최원정: 처형을 당해요?
김문식: 陵遲處斬(능지처참), 구선복이 제거가 되면서 사실은 정조가 병권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기존에 있던 무예청이 장용위로 변했는데 장용위를 더 키워서 장용영으로 만들어서 독립군영으로 친위부대로 강화를 시킨 거죠.
이시원: 동시에 복수도 하고 왕권도 강화하고~
김문식: 문반쪽에는 규장각이 있어요. 그리고 무반쪽에는 장용영이 있어서 이게 정조의 양 날개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문벌과 무벌의 정치적 결합을 타파하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게 이제 <무예도보통지>다 라고 봅니다.
안석환: 그래서 등장하는 게 무사 백동수다.
김문식: 이 사람이 본인의 능력도 있었지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규장각 검수관 출신이면서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가졌던 이덕무, 박제가가 동료에요. 그래서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이 세 사람이 주도를 합니다. 이덕무는 주로 자료를 찾아 가지고 고증하고 글을 쓰는 사람, 백동수는 아까 그림이 비슷하게 나오잖아요. 백동수와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 앞에서 시범을 보이면 화원들이 보고 그리는 거예요.
허준; 모션 캡쳐네요.
김문식; 그림은 백동수, 박제가는 이덕무와 같이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는 역할도 하고 책에 있는 글씨를 실제로 썼어요.
이시원: 문인과 무인의 컬래버인 거 같애요.
허준: 개인 초상화가 가장 많은 게 백동수네요.
최태성; 지금 말씀 하셨던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이 세 사람이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이 뭐냐면 모두?
안석환: 서자
최태성; 맞습니다. 역시~
안석환: 정조 드라마 많이 했어요.
이시원: 그 당시에 서얼이 요직에 진출하는 게 가능했어요?
최태성: 정조가 그 문을 열어주거든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정조 옆에서 보필하면서 고속 승진하는데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정조가 재위 1년(1777)에 반포한 법으로 서얼들도 정부요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내용), 특히 백동수 같은 경우는 정말 인생드라마입니다. 왜냐면 29살에 무과에 급제를 해요. 근데 자리가 없어 가지고 야인생활을 전전 하다가 17년 뒤 46살이 되어서야 초관에 임명이 돼요. 그리고 1년도 안 되어 가지고 정조에게 발탁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무예도보통지의 실제 모델이 되면서~
허준; 백동수는 시니어 모델이셨네~
이시원; 말년에 피셨네,
최원정; 얘기를 종합해 보니까 무예도보통지는 세대가 교체되고 시대가 전환되는 그 시점에서 나온 아주 귀한 결과물이에요.
이시원: 정조께서 고스톱을 치셨으면 진짜 잘 치셨겠어요. 일타 쌍피! 인재등용과 왕권강화를 동시에 해낸 정조!
최원정; 정조대왕을 고스톱에 비유하다니~ 근데 이 책에 파격, 개혁정신이 많이 깃들어져 있는 게 느껴지는 데 이런 책이 보급이 된다는 거는 조정이나 사회에도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 같네요.
김문식: 이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사람에 이덕무 라는 사람이 있잖아요. 이 책을 그냥 병서로 끝나는 게 아니고 군사는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도 볼 수 있는 실용(實用)의 병서, 실용을 굉장히 강조해요. 이 사람이 쓴 끝 부분에 실용이 여섯 번 나와요. 그래서 조정에서는 관리들이 실용이 있는 정치를 하고 백성들은 실용이 있는 직업을 지키고 그 다음에 문인과 학자는 실용이 있는 책을 만들고 군사는 실용적인 기예를 익히고 뒤에 또 있습니다. 상인은 실용적인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은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게 되면 우리나라는 부국강병의 나라가 될 수 있다.
최태성: 정답이네, 정답~
김문식: 이게 북학파예요. 북학파를 이용후생지학(利用厚生之學) 학파 라고도 얘기하죠. 그 정신을 여기에도 담고 있어요.
최태성; 제가 볼 때 무예도보통지는 어떤 개념이냐 하면 옛날에 어렵고 딱딱했던 무예서, 텍스트 기반의 무예서를 이렇게 영상과 한글 자막을 통해 가지고 쉽게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 아닐까. 한문을 모르면 따라 하지 못하고 뭘 할지 모르니까 장교들이 일일이 동작을 가르쳐 주어야 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에요. 그냥 그림을 보고 동작을 따라 할 수 있어요.
이시원: 충분히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사회가 된 거잖아요.
안석환: 독학으로 무과시험에 합격할 수 있고~ 서얼출신들도 중요 요직에 진출할 수가 있었다. 정조대왕은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최원정; 조선 후기는 무예도보통지 덕분에 무예가 일반화 되었다면서요. 그러면서 이것도 같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이광용/아나운서: 조선 후기 아름다운 검으로 정말 많은 무인들의 찬사를 받았던 밀양 출신의 기생이 있었습니다. 바로 운심이라는 이름의 기생이었는데요. 당시의 문인들은 이 운심의 검무에 푹 빠져서 정말 많은 글들을 남겼습니다. 특히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문인 박제가, 박제가는 문신도 아닌 운심의 제자들이 춤 검무에 감탄해서 그 춤사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검무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운심의 검무, 과연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당대의 문인들을 감탄하게 만든 걸까요?
--------------(스튜디오에) 두 검무 여인 등장하여 쌍칼을 들고 검무를 추다-(밀양검무-두 명의 무녀가 장검을 양 손에 들고 추는 춤, 무예도보통지의 쌍검보를 재현해 무예적 요소가 강함),-풍속화에 들어가 있는 느낌---------
일동: (시범을 보여주신 밀양검무보존회(한지윤, 이미나님) 감사합니다 박수!
이시원: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 같애요.
이광용: 조선후기 양반들이 기녀들의 검무공연을 즐겼다는 것은 혜원 신윤복의 그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쌍검대무/신윤복), 지금 이 검무를 추는 여인들 방금 보셨던~ 두 분~
최태성: 그림에서 튀어 나온 것 같아요.
최원정; 역시 신윤복의 그림은 생동감이 있네.
이광용: 이러니까 우리가 김홍도, 신윤복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예 중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내려오고 있는 검무~ 무예도보통지에 쌍검 총도(雙劍 總圖)의 동작과도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이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시원; 그러면 혹시 기녀들이 이걸 참고해서 춤을 출 수도 있겠네요?
김문식; 실제로 武藝圖譜通志가 체육학과, 무용학과 등에서 교재로 삼는 책이에요.
최태성; 제가 볼 때는 저거 아이돌들이 밤샐 것 같애~저걸 들어보면 독특한 춤이 나올 것 같애요.
이광용: 왕정에서 사신들 접대할 때 이 검무를 실제로 시연을 하면서 사신들에게 자랑하듯 보여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그 당시에 우리가 뽑낼만한 문화적 자산이었던 거죠. 이렇게 조선 후기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무예서 무예도보통지의 보급으로 무예는 더 이상 군인, 무사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드리면서 저는 물러갑니다.
최태성;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것 중에 또 다른 것에 마상재 라는 게 있어요 (馬上才-말 위에서 부리는 각종 곡예), 이 마상재를 의주 기생들이 기가 막히게 했답니다.
안석환: 의주? 신의주~
최태성: 네~ 무술하고 떠 올리면 멋 있을 것 같애요. 말 위에서 실제로 언월도를 든 무관들하고 말 위에서 기생들은 쌍검을 휘두르면서 일대일 대결을 할 정도로~
김문식: 의주 기생은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 갈 때도 보여주지만 중국 사신이 올 때도 보여주니까 우리가 여성들도 이 정도로 말을 잘 타고 활도 쏘고 칼도 쓴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최원정; 마상재가 우리나라에서 워낙 유명해서 통신사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해외공연을 한 거예요. 최초의 한류였던 거예요.
이시원: 정말 옛날부터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었네요.
허준: 근데 사실은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없고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라고 했잖아요. 조선 전체가 검무나 이런 걸 즐겼다는 건 이때 한번 다른 나라와 한 번 붙었다면 굉장히 강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시원: 근데 이렇게 강하니까 오히려 太平聖代가 이루어 진 거예요. 내가 강할 때 나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 침략이 없잖아요. 어찌 보면 무예도보통지 때문에 우리나라가 그만큼 르네상스를 꽃 피울 수 있지 않았을까.
김문식; 정조가 이제 무예도보통지나 장용영에 관련된 글을 쓸 때 쓰는 도장이 하나 있는데요. 정조의 생각을 말씀 드릴 수 있는 도장이 있는데 (무예도보통지 속 표지-御定武藝圖譜通志) 지금 이게 무예도보통지의 御定 이라고 왕이 정해준 책이라는 뜻이에요. 御자 임금 어자, 오른쪽에 있는 도장을 말씀 드릴려고 하는데 저게 지과위무(止戈爲武) 예요. 멈출 止자 창 戈자, 창을 멈추게 하는 글자가 武가 된다. 그러니까 무예가 뭐냐 武=止 (그칠지)+戈 (창과) 무예란 전쟁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런 얘기예요. 사전에 우리가 방비를 굳건히 해 가지고 전쟁을 멈출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전쟁에서 지지 않으니까 이길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게 일종의 요즘식으로 말하면 유비무환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이시원; 멋 있다.
허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단어가 자주국방입니다.
김문식: 자주국방의 개념도 여기 들어있죠.
최태성: 전쟁을 멈추는 것, 그것이 진정한 武藝다. 소름 돋는데~
최원정; 진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큰 거 같애요. 지구 저 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생각해 보면 武=그칠 지止+창 과戈, 저 정신을 우리가 전파해야 됩니다. 이런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무예도보통지가 충분히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단순히 무예를 보고 끝난 게 아니라 여기 담긴 참 뜻을 보니까 인류 보편적인 정신을 담은 위대한 유산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소회는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계속 펜으로 생각하면서 뭔가 했잖아요. 펜을 버리고 어떤 (동작?) 武로써 오늘의 소회를 표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석환: 동작으로?
이시원; (일어나서 동작) 나는 지금 아직 검을 뽑지 않았으나 여기 날카로운 검도 있고 검을 뽑아 당신을 한 순간에 벨 무예도 갖고 있소. 그러니 함부로 침략하지 마시오 (유비무환-준비된 자만이 나릴 수 있는 경고),
안석환; (일어나서) 저는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탁~~(공격만큼 중요한 방어)
최태성; (손을 모우고 칼로 베는) 신분제 폐지, 허례허식 폐지, 하면서 실용을 강조했던 서얼들이 썼던 그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는 베는 모습으로 해 보겠습니다.
김문식; 밀양 검무 보다가 받았는데요. 격렬하게 칼춤을 추다가 칼을 딱 내려놓고 손을 천천히 내려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격렬한 움직임 다음에 정~
최원정: (김문식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김문식: 그러니까 음양이죠. 동적인 것이 양이라면 정적인 것은 음이거든요. 이게 음양 (陰陽)이 같이 있는 동작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오늘 우리 프로그램도 마무리를 (칼춤에서 손을 천천히 내려 놓는 모양) 이렇게 할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9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② 무예도보통지에서 정리).
① 나는 조선조 정조 대왕에 대해 60여년전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게 전부였다. 또 많이 잊어먹었다. 이번에 KBS 역사저널 그날 369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② 무예도보통지를 시청하고 정조의 개혁 정치를 알게 되어 기쁘다. 그는 무예도보통지를 통하여 군사훈련을 효율적으로 하여 국방을 강화하였고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잘 하였다. 정조의 업적은 무예도보통지 외에 세 가지가 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있다고 한다.
② 우리의 무예 태권도는 1790년 조선 정조시대 종합 무예서 武藝圖譜通志(무예도보통지)에서 기원한다. 총4권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두 자씩 끊어서 읽는다. 무예가 담겨있는 그림과 설명(도보) 종합서적이다. 총24개의 무예 기술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무예백과사전이다. 이 책이 2017년에 북한의 신청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북한은 태권도의 역사적 뿌리를 택견에서 찾고 있다. 북한이 무예도보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신청을 할 때 무예도보통지에 권법이 북한 태권도의 원형이 됐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다. 북한과 한국 태권도는 모양이 달라졌지만 실제는 한 뿌리였다.
③ 우리가 말하는 태권도는 1790년 무예도보통지 편찬 후 100년의 역사가 지난 후 1959년에 정립이 되었다. 태권도란 편람도 협회도 그때 만들어졌다. 일본의 가라데는 우리 태권도가 준비되는 과정에서 영향을 주었다 북한은 圖譜의 圖를 김홍도가 그렸다고 주장을 하고 기록을 남겨 놨다. 김홍도가 활동한 시대는 맞는데 기록은 없고 관련 기록을 보면 네 명의 화원 유공자 중에 김홍도가 들어있지 않았다. 무예도보통지는 백동수 이덕무, 박제가 세 명이 만들었다.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은 무예보도통지를 부대의 교본으로 사용하였다. 장용영은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로 성장하게 되고 정조는 文을 강조했지만 武도 병행하게 했다.
④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한중일 3국 무예가 선보였다. 무예도보통지는 거기에서 효용이 있었던 것과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것만 골라 뽑은 최고의 족보다. 24가지 무예 중 우리나라 것은 본국검(本國劍)과 예도(銳刀) 두가지다. 本國劍-우리나라 고유의 검법이자 가장 오래된 검법, 이 본국검은 정조 호위무사들이 반드시 익혀야 했던 필수과목이었다. 무예도보통지가 총5권으로 되어 있는데 다섯번째가 언해본이다. 무예도보통지=본권 4권+언해본 1권,
⑤ 무예도보통지는 누구나 배울 수 있게 만든 무예서다. 누구나 그냥 흐름대로만 따라가면 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거다. 이것만 갖고 있으면 처음 배우는 사람도 쉽게 접근 할 수 있다. 사실 정조 때 오군영 무예가 다 달라서 표준 무예서를 만들었다. 왜구의 검술을 중국이 받아 들인다. 그게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와 있는 쌍수도 라는 무예다. 메이드 인 차이나 재패니즈 검술이 쌍수도가 되었다. 일본의 검술이 영향을 많이 주었다. 본국검은 사방으로 돈다.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반면에 예검이나 쌍수도는 전열을 짜고 적이 있을 때 한쪽으로만 공격하고 방어하라는 검술이다.
⑥ 유술이나 일본의 검도는 간결하면서 힘이 있고 중국 것은 기예가 복잡하고 우리나라 것은 중간 정도다. 무예도보통지는 우리만의 무예분만 아니라 외국 무예도 다 담아서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서적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명나라 병서에서 시작되었다. 척계광이란 사람이 쓴 <기효신서>, 모원의가 쓴 <무비지>가 기본이다. 이것을 우리가 재편집해서 여기에 적당한 것을 끌어들인 상황이다. 중국 책들은 무기 길이에 따라서 무예를 구분했지만 무예도보통지는 공격 스타일에 따라서 구분을 했다. 처음에 창으로 찌른다. 창류-찌르기-刺, 칼로 베는 건 검류-베기-砍(감), 주먹이나 곤봉이나 편곤으로 치거나 맨손, 편곤 등-치기-擊 이렇게 분류해 편집한 게 특징이다. 창은 나무가 필요 하다. 창 자루 나무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나무로 만들어야 된다. 칼을 만들 때는 철이 어디서 생산되고 시대가 어떻게 변해왔고 이걸 잘 정리를 해놨다.
⑦ 당시에 직업 군인들을 계속 육성하기 힘드니까 평상시에는 자기 일을 하다가 갑자기 모여서 훈련을 하거나 전투를 치루어야 되는데 무예의 내용을 외우고 있는 사람이 어느날 모여도 똑 같은 무예를 할 수 있으면 전투에 효율적이다. 독학으로 무예를 배울 수가 있다. 명나라의 무예서 는 개인들이 만든 책인데 무예도보통지는 정조 왕의 명령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국정교과서다. 체계적으로 만들어졌고 독창성이 인정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⑧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4년 후에 무예서를 만든다. 난중일기의 이름을 부쳐준 사람이 정조였다. 정조는 일기광이었다고, 기록을 좋아했던 왕이다. 거기엔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란을 겪으면서 그런 백성들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우리 국민들이 적어도 스스로 모였을 때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다. 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무예를 좋아했다. 사도세자가 청룡 언월도를 다루었다고, 정조가 등극하면서부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한 것처럼 효자였다. 사도세자의 것을 그대로 따서 계속 해서 발전시킬려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에서 정조시대의 기록이 제일 좋다고 한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게 대한제국까지 간 게 日省錄이다.
⑨ 정조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무예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국방을 강화해야 된다는 생각하니까 병서, 무예서에 관심을 가지고 편찬한 책이 武藝圖譜通志다. 사도세자가 영조 때 대리청정할 때 그때 무예신보라는 무예서를 편찬하였다. 그 무예신보를 계승해서 연구 편찬한 것이 武藝圖譜通志다. 정조의 입장에서는 부친께서 무예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셨고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였다. 부친의 명예를 되찾아줄 필요가 있다. 사도 세자는 무예 쪽에 덕후였다. 사도세자를 재평가 해야 되는 이유다. 당시 군영마다 무예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통합하는 의미에서 18가지 무예를 표준화한 게 무예신보다, 마상 무예 6가지를 보탠 것이 무예도보통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긴 칼로 근접전을 펼치고 들어오니까 조선군은 당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칼집에서 칼을 뽑을 겨를도 없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⑩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장용영을 만든다.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한 사람이 구선복 이라는 사람이다. 이 분은 영조 때부터 30년 가까이 군영대장을 역임한 사람이고 이 사람이 정조 시대 중반기까지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정조는 완전히 병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조한테는 믿을 만한 친위부대가 필요했고 그게 장용영이다. 구선복은 뒤주에 갇혔던 사도세자를 희롱했던 인물이다. 정조한테 이미 찍힌 사람인데 그렇지만 왕이 되었을 때 왕이 어떻게 제재할 수 없었다. 계속 보고 있었는데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에 구선복의 아들이 연루가 되었다. 구선복까지 陵遲處斬(능지처참)에 처했다, 정조가 병권을 강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⑪ 정조는 양 날개로 문반쪽에는 규장각을 무반쪽에는 장용영을 두었다. 문벌과 무벌의 정치적 결합을 타파하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게 무예도보통지다. 그때 무사 백동수가 등장한다. 그는 본인의 능력도 있었지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규장각 검수관 출신이면서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가졌던 이덕무와 박제가가 동료다. 세 사람이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주도한다. 이덕무는 자료를 찾아 가지고 고증하고 글을 쓰는 사람, 백동수는 훈련을 받은 군사들과 시범을 보이면 화원들이 보고 그리었다. 박제가는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는 역할도 하고 책에 글씨를 썼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서자출신들이라는 것, 당시 서얼은 요직 진출이 불가능했다. 정조가 그 문을 열어주었다.
⑫ 이 사람들이 정조를 보필하면서 고속 승진하는데 특히 백동수는 인생드라마다. 29살에 무과에 급제를 하나 자리가 없어 야인생활을 전전 하다가 17년 뒤 46살이 되어서야 초관에 임명된다. 1년도 안 되어 정조에게 발탁되어 무예도보통지의 모델이 되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세대가 교체되고 시대가 전환되는 그 시점에서 나온 아주 귀한 결과물이다. 이 책에 파격, 개혁정신이 많이 깃들어져 있는 데 이 책이 보급이 된다는 거는 조정이나 사회에도 어떤 영향을 끼쳤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사람 이덕무, 이 책은 그냥 병서로 끝나는 게 아니고 군사는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도 볼 수 있는 실용(實用)의 병서, 실용을 굉장히 강조한다. 이덕무가 쓴 끝 부분에 실용이 여섯 번 나온다. 조정에서는 관리들이 실용이 있는 정치를 하고 백성들은 실용이 있는 직업을 지키고 문인과 학자는 실용이 있는 책을 만들고 군사는 실용적인 기예를 익히고 상인은 실용적인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은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게 되면 우리나라는 부국강병의 나라가 될 수 있다. 이게 북학파다. 북학파를 이용후생지학(利用厚生之學) 학파 라고도 한다. 그 정신을 여기에도 담고 있다. 실제로 武藝圖譜通志가 체육학과, 무용학과 등에서 교재로 삼고 있다.
⑬ 조선 후기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무예서 무예도보통지의 보급으로 무예는 더 이상 군인, 무사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것 중에 마상재 라는 게 있다. 이 마상재를 의주 기생들이 기가 막히게 잘 했다. 마상재가 우리나라에서 워낙 유명해서 일본 조선통신사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일본공연을 하였다. 최초의 한류였다.
⑭ 나라가 강하니까 太平聖代가 이루어 진다. 내가 강할 때 나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 침략이 없어진다. 무예도보통지 때문에 정조 때 르네상스를 꽃 피울 수 있었다.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나 장용영에 관련된 글을 쓸 때 쓰는 도장이 있다. 정조의 생각을 나타낸다, 무예도보통지 속 표지-御定武藝圖譜通志, 무예도보통지의 御定이라고 왕이 정해준 책이라는 뜻이다. 御자 임금 어자, 오른쪽에 있는 도장은 止戈爲武(지과위무)다. 멈출 止자 창 戈자, 창을 멈추게 하는 건 武다. 무예가 뭐냐 武=止 (그칠지)+戈 (창과) 무예란 전쟁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사전에 방비를 굳건히 하면 전쟁을 멈출 수도 있고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전쟁에서 지지 않을 수 있다. 유비무환 자주국방의 정신이다. 그것이 진정한 武藝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다. 대통령은 마음에 새겨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