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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병은 해변에 진을 쳤다.
적병은 해변에 진을 쳤다. 울산(蔚山) · 서생포(西生浦)로부터 다시 동래(東萊) · 김해(金海) 웅천(熊訓) · 거제(巨濟)로 수미(首尾)가 서로 연해서 모두 열여섯 곳에 진을 쳤다. 그들은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양으로, 모두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껴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바다를 건너갈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이에 중국에서는 또 사천 총병(泗川總兵) 유정(劉綎)에게 복건(福建) · 서촉(西蜀) · 남만(南蠻) 등지에서 모집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나와서 성주(星州) · 팔거(八?)에 진을 치게 했다.
한편 남쪽 장수 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의 봉계(鳳溪)에 둔치고, 이녕(李寧) · 조승훈(祖承訓) · 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에 둔치고, 낙상지(駱尙志) · 왕필적(王必迪)은 경주에 둔쳐서 사면으로 에워싸고 서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식량은 모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공급하는데, 험한 고개를 넘어 여러 진에 나누어 주자니 민력(民力)은 갈수록 곤비(困憊)해질 뿐이었다.
제독은 또 심유경을 왜영으로 보내서 왜적을 달래어 빨리 돌아가라고 권했다. 한편 서일관(徐一貫) · 사용재(謝用梓)를 낭고야(郎古耶)에 보내어 관백(關白)을 찾아보고 교섭하게 했다.
그 뒤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왕자 임해군(臨海君) · 순화군(順和君)과 재신(宰臣) 황정욱(黃廷彧) 황혁 (黃赫) 등을 돌려보내면서, 심유경을 보내어 귀보(歸報)케 하였다.
한편으로는 진주(晉州)를 포위하고서 지난해에 패전한 원수를 갚는다고 떠들었다. 원래 임진년에 적병이 진주를 칠때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이를 막아 저당치 못하고 달아났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이런지 8일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목사 서예원, 판관 성수경, 창의사 김천일, 본도 병사 최경희, 충청 병사 황진(黃進), 의병 복수장 고종후 등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죽은 자는 관민(官民)을 합하면 6만여 명에 달했고, 우마(牛馬) · 계견(鷄犬)까지 남기지 않았으며, 적들은 성을 불태우고 참호와 우물을 메우고 나무도 베어 전날의 원한을 풀었다.
때는 6월 28일이었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적병이 남쪽으로 퇴군한다는 말을 듣고 모든 장수들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적을 빨리 쫓도록 지시했다.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 이하 관병 · 의병들이 모두 의령(宜寧)에 모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 싸움에 이긴 뒤라 자신을 가지고 기강(岐江)을 건너 전진하려 했다. 그러나 곽재우 · 고언백이,
“적세는 강성하고 우리 군사는 오합(烏合)이 많아서 싸움을 견딜 사람이 많지 못할 뿐 아니라, 앞에는 군량도 준비되지 않았으니 경솔히 전진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만류하여 모두 이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오직 이빈의 종사관 성호선이 공연히 용기를 내어 여러 장수들을 충동하여 놓고 권율과 의논해서 강을 건너 함안(咸安)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러나 함안성은 텅 비어 있고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군사들이 익지 않은 푸른 감을 따서 먹을 지경이었으니 싸울 용기가 날 리 만무하였다.
이튿날 첩보가 들어왔다. 적병이 김해(金海)로부터 크게 밀려온다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 편에서는 혹은 함안을 지켜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퇴병하여 정진(鼎津)을 지키자고도 하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느닷없이 적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삽시간에 인심에 흉흉해지기 시작하였다. 서로 앞을 다투어 성문을 빠져나가려고 서두르다가 적교(弔橋)에서 떨어져 죽는 자만도 수없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정진으로 퇴병하여 건너다보니 적병은 다시 수륙(水陸) 양로로 몰려오고 있었다.
들판을 덮고 내를 메워 밀려오는 적병을 바라본 제장들은 하나둘 흩어져 달아나 버리고, 권율 · 김명원 이빈 · 최원(崔遠) 등은 재빨리 전라도로 가버렸으나 오직 김천일 · 최경희 · 황진 등이 진주를 향해 들어가니 적은 이를 포위하였다. 목사 서예원, 판관 성수경은 중국 장수를 접대하느라고 오래도록 상주(尙州)에 머물러 있다가 적이 본주(本州)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돌아온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이 성은 사면이 모두 험악한 곳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는데, 임진년에 동쪽으로 옮겨 평지에 쌓았던 것이다. 이때 적들은 비루(飛樓) 여덟 개를 세워 그 위에 올라가서 성안을 들여다보고, 한편 성 밖 대숲을 베어다가 커다랗게 묶어서 가려 세워 시석(矢石)을 막고, 그 안에서 조총을 비오듯 쏘아댔다.
왜적들의 조총 소리에 성안 사람들은 감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또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전부가 서울 시정(市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요, 김천일 역시 군사의 일을 몰라 자기 멋대로 할 뿐 아니라, 더욱이 서예원과는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던 터여서 주객(主客)이 서로 시기하고 명령이 어긋나게 되었다. 이러고서야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황진만이 홀로 동쪽 성을 지키고 여러 날 싸우다가 총알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광경을 본 군사들은 맥이 빠지고 용기를 잃었다. 게다가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사기는 더욱 저하되기만 했다. 설상가상 격으로 때마침 심한 폭우가 내려 성이 무너졌다. 이때를 놓칠세라, 적병들이 개미떼 같이 몰려 들어왔다. 성안 사람들은 힘을 합쳐 이를 나무로 막고 돌을 던져 막아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야 말았다.
한편 김천일은 북쪽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성안이 필시 함락되었으리라고 미리 짐작한 그의 군사들은 여기저기서 흩어져 버렸다. 산 위에서 이 광경을 본 적병이 때를 놓칠세라 일시에 쳐 올라오니, 이로써 제군(諸軍)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때 김천일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너무나 어이가 없는지라, 최경회와 마주 손을 붙들고 통곡하다가 급기야는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 통에 살아남은 군민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왜변이 생긴 이래 이 싸움처럼 사람이 많이 죽은 때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이 의리에 죽었다 하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을 증직(贈職)했고, 또 권율은 용감히 싸우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여 김명원을 대신해서 원수(元帥)로 삼았다. 총병 유정은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팔거로부터 합천에 이르렀고, 오유충은 봉계로부터 초계에 이르러 모두 우도(右道)를 지켰다. 적들도 진주를 함락한 후 부산으로 돌아가서 말하기를,
“중국에서 강화 있기를 기다려 회군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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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임금의 행차가 환도(還都)했다.
10월에 임금의 행차가 환도(還都)했다. 12월에 중국 사신 행인사(行人司)의 행인 사헌(行人司憲)이 왔다. 이보다 앞서 심유경은 왜장 소서비(小西飛)와 함께 관백(關白)의 항표(降表)를 가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것이 관백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행장(行長)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심유경도 또한 자기들이 중국에 돌아오자마자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보매 이것을 진심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소서비를 요동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한동안 그에 대한 회답을 왜(倭)에 통보하지 않았다. 이때 제독과 그 밖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고, 다만 유정 · 오유충 · 왕필적 등이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팔거에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안팎이 모두 기근(饑饉)에 허덕이고 양식을 운반하기도 힘든데다가 노약(老弱)은 병들어 누웠고, 젊은 장정들은 모두 도둑이 되고만 형편이었다. 더욱이 질병이 심해서 쓰러져 죽는 자가 많아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부자(父子)와 부부(夫婦)가 서로 뜯어먹기에까지 이르렀다. 노천에 뒹구는 뼈만 짚단같이 늘어져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유정의 군사는 팔거로 부터 남윈(南原)으로 옮겼다가, 남원에서 다시 서울로 옮겨 웅거하였다. 거기서 10여 일을 머무르다가 그들도 천천히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적들은 그때까지도 해상에 머무르면서 돌아가지를 않았기 때문에 인심은 더욱 소요스러워졌다. 이때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탄핵을 받아 돌아가고, 새로 고양겸(顧養謙)이 경략이 되어 요동에 이르렀다. 그는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시켜 우리 군신들에게 이런 공문을 보내었다.
“왜적이 무단히 침입해서 파죽(破竹) 같은 형세로써 세 도회(都會)를 점령했고, 그대들의 토지와 인민을 열에 여덟은 빼앗았고, 그대들의 왕자와 중신(重臣)들을 사로잡는 등 많은 횡포를 자행하였다. 이에 우리 황상(皇上)이 노하사 군사를 일으켜 한 번 싸워 평양을 빼앗고, 두 번 싸워 개성을 도로 찾은 바 되었다. 마침내 왜적은 서울에서 달아나고 왕자와 중신을 돌려 보내고, 따라서 토지 2천여 리를 수복하였으나, 여기에 소비한 인마와 비용이 또한 적지 않았다. 우리 조정에서 조선을 대접함이 이와 같으며 황상의 망극한 은혜 또한 지나친 바 있도다.
그러나 이제는 식량도 더 운반해 올 수 없고 군사도 다시 진군시킬 수 없다. 다행히 왜적들도 황제의 위엄을 두렵게 여겨 항복하기를 청하고 또 조공(朝貢)할 것을 빌었다. 천조(天朝) 또한 이것을 허락하여 외신(外臣)으로 용납해 두고자 하고, 왜노(倭奴)들로 하여금 빨리 바다를 건너가서 다시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풀어 다시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대들 나라의 구원(久遠)한 계획을 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나라는 양식이 다 없어져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형편이라 하는데, 무엇을 믿고 다시 청병(請兵)하는가?
이제 우리가 졸지에 군사를 거두고 왜노의 봉공도 받지 않고 보면, 왜노는 필시 그대들에게 노여움을 두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어늘, 어찌 일찍이 방도를 차리지 않는가.
옛날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곤욕을 당할때에, 어찌 부차(夫差)의 살을 씹어먹고 싶지 않았으리요마는, 부끄러움을 참고 견딘 것은 후일을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몸이 부차의 신하가 되고 자기 처로 부차의 첩을 삼았거늘, 하물며 왜노에게 신첩(臣妾)이 되기를 청했다가 서서히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오히려 구천의 군신(君臣)의 꾀보다 낫지 않은가? 이것을 참지 못한다면 이는 못생긴 소장부의 의견일 뿐, 복수를 하고 치욕을 씻는 영웅의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대들이 왜(倭)에게 봉공을 청해서 다행히 이것을 들어 주고 보면, 왜는 반드시 중국 처사에 더욱 감동하고 조선에 대해서도 고마운 마음을 두어, 자연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다. 왜군이 돌아간 뒤에 그대들 군선들이 참으로 고심초사(苦心焦思)하고 와신상담(臥薪相膽)해서 구천의 옛일을 본받으면, 천도(天道)가 좋게 돌아와서 왜의 원수를 갚을 날이 어이 없으랴.”
그 글은 여러 천 마디 길었으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호택이 관역에서 석 달을 머물렀으나 조정의 의논은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임금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나는 병으로 누워 있을 때라 장계를 올려,
“왜에게 봉공을 한다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니 마땅히 근일의 실정을 자세히 중국에 알려서 그곳으로부터의 회답을 기다려 처리하옵소서.”
하고, 다시 계속해서 여러 번 글을 올리매 임금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진주사(陳奏使) 허욱(許頊)이 중국으로 떠났다. 고경략(顧經略)은 돌아가고 새로 손광(孫鑛)이 왔다. 중국 병부(兵部)에서 황제에게 아뢰어 소서비를 불러놓고 세 가지 약속을 받았다.
첫째, 봉(封)만을 받고 공물(貢物)은 요구하지 말 것.
둘째, 왜병 한 사람도 부산에 머물러 있지 말 것.
셋째, 앞으로 영구히 조선을 침노치 말 것.
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킨다면 즉시 봉(封)을 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자는 것이다. 이때 소서비는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심유경으로 하여금 소서비를 데리고 왜영(倭營)으로 들어가 선유(宣諭)하고, 한편 이종성(李宗誠) · 양방형(楊方亨)을 각각 상 · 부사(上副使)로 삼아 왜에 가서 평수길(平秀吉)을 일본 국왕에 봉하고, 다시 이종성 등은 그대로 우리 도성에 머물러 왜적의 퇴병이 끝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을미년(1599년) 4월에 이종성 등이 서울에 이르러 연달아 왜의 퇴병을 재촉했다.
왜병들은 먼저 웅천 · 거제 · 장문(場門) · 소진포(蘇津浦) 등에 있던 군사를 먼저 철수하여 신용을 보였다. 그리면서 전번 평양에서처럼 속지 않을까 겁내어, 황제의 사신이 하루바삐 왜영에 들어오면 약속대로 모든 것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8월에 양방형이 병부(兵部)의 분부로 먼저 부산에 이르러보니 과연 왜병은 천연하여 곧 퇴병치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상사(上使)에게 이 사실을 전하니 사람들은 모두 왜의 행동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심유경의 말을 믿었다. 그는 왜(倭)가 딴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여기고, 이종성을 보내어 퇴병을 재촉할 뿐, 비록 조정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자기가 책임지고 일을 진행하였다.
9월에 이종성이 또 부산에 이르렀으나 평행장은 바로 와서 보지도 않고,
“관백의 행동을 본 후에 황제의 사신을 맞겠노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 이듬해인 병신년(1596년) 정월에 돌아와서도 오히려 철병할 뜻을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이때 심유경은 두 사신을 머무르게 하고 자기 혼자 행장(行長)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는 장차 사신을 맞을 예절을 의논한다 했으나, 그 뜻은 남들이 알 수 없었다.
유경은 비단옷을 입고 배를 탔고, 뱃머리에는 ‘조집양국(調?兩國)’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달고 떠났는데, 간 지가 오래되도록 아무런 회보가 없었다.
이종성은 본래 명나라 개국공신(開國功臣) 문충공(文忠公)의 자손으로, 그 공으로 작(爵)을 받아 고이 자랐기 때문에 몹시 겁이 많은 성품의 사람이었다. 이때 어느 사람이 그를 보고,
“왜(倭)는 실상 봉(封)을 받을 의사가 없는데, 공연히 이종성 등을 유인해다가 가두어 두고 욕을 보이려 한다.”
하니, 이종성은 이 말을 듣고 두려운 생각이 불현듯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미복(微服)으로 밤중에 영을 나와 종복(從僕)과 인절(印節) 등을 모두 버린 채 도망해 버렸다.
이튿날 아침 이 사실을 안 왜적들은 길을 나누어 이종성을 쫓아 양산(梁山)의 석교(石橋)까지 이르렀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양방형은 혼자 왜영에 머물러 있으면서 왜군을 무마하는 한편, 우리에게 글을 보내어 조금도 경동치 말도록 부탁했다.
한편 이종성은 큰길로 가지도 못하고 산골짜기로 들어가 여러 날 먹지도 못한 채, 경주를 거쳐 서쪽으로 도망하였다. 이즈음 심유경과 행장이 돌아와서 서생포(西生浦) · 죽도(竹島) 등지의 왜병을 철퇴시키니, 남은 것은 부산의 네 곳에 있는 군사뿐이었다.
이때 다시 유경은 양 부사(楊副使)와 함께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우리 사신도 동행케 하라고 자기 조카 심무시(沈懋時)를 보내어 재촉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꺼리는 눈치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심무시는 기어이 같이 갈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할수 없이 무신(武臣) 이봉춘(李逢春)을 보내기로 했는데, 혹 무신은 저쪽에 가서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 사리를 아는 문관을 보내는 것이 옳다 하여 전에 심유경의 접반사(接伴使)를 지낸 황신(黃愼)을 보내게 되었다.
중국 사신 양방형과 심유경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양방형 등이 일본에 갔을 적에 관백(關白)은 관사(館舍)을 웅장하게 차리고 그들을 영접할 차비를 하였다. 그러나 난데없는 지진(地震)이 일어나 관사가 허물어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딴 집에서 그들을 맞았다.
관백은 두어 차례 중국 사신들과 만나는 동안 처음에는 봉(封)을 받을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노한 빛을 띠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조선 왕자를 놓아 보냈으니 의당 조선에서도 왕자를 보내어 사례할 것이어늘, 이렇듯 조선의 사신이 낮으니 이 또한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대드는 것이었다. 황신 등은 하릴없이 국서도 전하지 못한 채 양방형과 심유경을 재촉하여 본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적장 평행장은 부산포로 돌아왔고, 청정은 다시 군사를 거느려 서생포에 주둔하면서,
“왕자를 보내서 사례하지 않으면 군사를 풀지 않겠다.”
하고 위협했다. 이것은 관백이 바라는 것은 봉공뿐만이 아닌데도 중국에서는 봉(封)만을 허락하고 공(貢)을 허락하지 않은 까닭에서였다. 이 내용인즉, 원래 심유경과 평행장이 친숙한 터로, 자기들끼리 억지로 일을 성사시키다 보니 이렇듯 구차한 결과를 지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석성(石星)과 심유경은 본국에 득죄한 바 되었고, 중국 군사가 다시 나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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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이순신을...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이순신을 옥에 가두었다. 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하여 준 것을 고맙게 여겨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마침내 일을 끝내고 공을 다투는 마당에 가서는 그렇지 못했다. 본래 원균은 성품이 음험하고 간사했다. 그는 중외(中外) 인사들과 접촉이 많은 것을 기화로 이순신을 모함했다.
“이순신은 애초부터 우리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여러 번 청해서 부득이 왔던 것이다. 그리니 적을 물리친 공으로 하면 내가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
라고 했다. 원균의 말을 듣자 조정의 공론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기 때문에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은 원균의 편을 들어 이순신을 몹시 모함했다. 오직 우상 이원익만은,
“이순신과 원균은 그 맡은 바가 다 각각 있으니, 처음에 가서 구원치 않았다 해서 그것이 그다지 죄될 게 무어란 말이오?”
하고 그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보다 먼저, 적장 평행장은 자기의 사졸(使卒) 요시라(要時羅)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진에 자주 왕래시켜서 사이가 좋았었다. 다시 나오려는 청정을 보고 어느 날 요시라는 가만히 김응서를 대하여,
“우리 장수 행장이 말하기를, 이번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청정 때문인데, 자기도 이 사람을 미워한다합니다. 그리고 이번 모일(某日)에 청정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당신네 조선 군사는 수전(水戰)에 능한 터인즉, 이때를 타서 청정의 군사를 섬멸시키되 아예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김응서는 바로 이 일을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또한 이 말을 믿었고, 더욱이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는 좋아라고 뛰면서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연달아 임금께 아뢰어서 이순신을 재촉해 나가 싸우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간계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주저하기를 여러 날 했다. 이때 요시라가 다시 왔다.
“청정이 벌써 착륙했소이다. 조선에서는 왜 그를 쳐서 없애지 않는단 말이요?”
하고 거짓 안타까운 체했다. 이 말이 또 조정에 들어가자 조의(朝議)는 모두 이순신을 허물하기 시작했다. 대간(臺諫)에서는 이순신을 국문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또 현풍(玄風) 사람 전 현감(縣監) 박성(朴惺)이란 자는 그때 시론(詩論)을 따라서 상소를 올려 이순신을 베자고 주장했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보내어 이순신을 잡아 왔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統制史)로 삼았다.
그러나 임금은 이 일이 모두가 진실일까 의심하여 특별히 성균관 사성(司成) 남이신(南以信)을 보내어 한산(閑山)에 가서 사실을 알아오라 하였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자 군민들 중에는 길을 막고 이순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남이신은 이런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터무니없이,
“청정이 섬에서 7일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으니, 이때 우리 군사가 나가 싸웠더라면 그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인데, 이순신이 겁내어 머뭇거리는 바람에 아까운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하고 회보하였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대신들에게 명하여 이순신의 죄과에 대한 의논을 하도록 했다. 모두들 이순신의 죄를 맹렬히 공박하고 엄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홀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만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명장(名將)입니다. 절대 죽일 수 없습니다. 군기(軍機)의 이해는 보통 사람이 추측치 못하는 것이온즉, 이순신이 경솔히 나가 싸우지 않은 것은 무슨 짐작이 있어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뒷일을 생각하시어 그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이순신을 옹호하고 나섰다. 마침내 조정에서도 사형에 처하려던 주장을 누그러뜨려서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음, 관직만을 빼앗아 그대로 군중에 나가게 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牙山)에서 아들이 하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심려 끝에 애가 타서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 이순신은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나다가 겨우 성복(成服)을 하고, 바로 권율의 진으로 가서 종군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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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는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를...
중국에서는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를 총독 군문(總督軍門)으로 삼고, 요동 포정사(遼東布政司) 양호(楊鎬)를 경리 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삼고, 마귀(麻貴)를 대장으로 삼아서 양원(楊元) · 유정(劉綎) · 동일원(董一元) 등이 계속하여 우리나라로 나왔다.
정유년(1597년) 5월. 양원은 군사 3천을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무르다가 전라도로 내려가서 남원을 지켰다. 대개 남원은 호남과 영남의 요지인 동시에 성도 자못 견고했다. 게다가 지난번에 낙상지가 이것을 증축하여 가히 지킬 만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성 밖에는 교룡 산성(蛟龍山城)이 있어, 여러사람들이 이 산성을 지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본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성 위를 더 쌓고 참호를 더 팠다. 그리고 참호 안에는 양마장(羊馬墻)까지 설치하여 밤낮으로 역사를 독촉하니 한 달 만에 일을 마쳤다.
8월 초이렛날, 한산(閑山) 수병(水兵)이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전사하고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도망쳤다.
원균은 한산에 부임하자 이순신이 쓰던 전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에게 신임을 받던 부하들을 쫓아 버렸을 뿐 아니라, 이영남(李英男)이 지난번에 자기가 패하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다 하여 더욱 미워하는 등 지휘관답지 않은 통솔을 했다. 이로 인하여 군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자자했으니, 이 싸움은 처음부터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이순신이 한산에 있을 때에는 운주당(運籌堂)이란 당을 짓고, 밤낮으로 거기서 모든 장수들과 병사를 의논했을 뿐 아니라, 하졸(下卒)이라도 군사에 관한 의견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와서 군정(軍情)을 통하도록 했었다. 또 전쟁에 임할 때에는 모든 장수들을 모아 계략을 세운 다음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원균은 이와는 반대로 자기의 애첩과 이 당(堂) 안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자연 부하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고, 더구나 그는 술을 좋아해서 날마다 술에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는 술에 취하면 공연한 형벌로 군사들을 못 견디게 하였다. 그래서 병졸들은 서로 쳐다보며,
“만일 적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달아나는 수밖에 없지.”
하고 수군거렸다. 장수들은 장수들대로 또한 원균을 비웃어 마지않으니, 통제사의 위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명령이 설 리 없었다. 이때 적병이 다시 쳐들어왔다. 평행장은 요시라를 다시 김응서에게 보내어 허위 정보를 제공하게 했다.
“왜선(倭船)이 모일(某日)에 나올 것이니 조선 수군(水軍)은 이를 맞아 쳐 없애라.”
하고 꾀었다. 도원수 권율은 이 말을 그대로 곧이들었다. 더구나 지난번에 이순신이 주저하고 나가 싸우지 않다가 득죄한 것을 생각하니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원균을 시켜 즉시 나가 싸우라고 했다.
원균 역시 평소에 적을 보고도 나가지 않은 이순신을 탓해 왔던 터이라, 이제 그의 소임을 대신 맡은 마당에 왜적과 싸워 이길 승산은 적으나, 무엇이라 거절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는 배를 이끌고 군사를 거느려 바다로 나갔다.
이즈음 언덕 위에 있던 왜영(倭營)에서는 바다로 나오는 우리 배를 내려다보고, 그때그때 형세를 일일이 자기네 본영(本營)에 보고하여 정세를 낱낱이 탐지하고 있었다. 원균의 배가 절영도(絶影島)에 다다르자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왔다. 배를 대어 쉴 곳도 없는데 멀지 않은 곳에 왜선이 출몰하는 것이 보였다.
원균은 제군을 재촉해서 앞으로앞으로 나갔다. 군사들은 한산에서부터 종일토록 노를 저어 오느라고 힘이 빠져 피로하고 기갈이 심해 배를 저을 기운도 없었다. 모든 배들이 서로 앞서고 뒤서며, 옆으로 가로 방향없이 풍랑에 흔들려 가뜩이나 지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왜적들은 우리 군사를 더욱 피로하게 하고자 거짓으로 가까이 나타났다가 달아나는 체하면서 교전치 않고 피하기만 했다.
이때 밤은 점점 깊고 바람은 갈수록 드세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찾지를 못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원균은 간신히 남은 선척을 수습해서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다다랐다. 군사들이 기갈을 참지 못해 서로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마시느라고 부산했다.
이때 왜병들이 섬 속에 숨어 있다가 일제히 내달아 사로잡으니 이 싸움에 장병 4백여 명을 잃었다. 원균은 겨우 사지(死地)를 벗어나 거제(巨濟) 칠천도(漆川島)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고성(高城)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급히 원균을 불러 매를 때리고 다시 나가 싸우라 했다. 원균은 군중에 돌아와 홧김에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장중에 누워 버렸다. 더더구나 장수들이 군사일을 의논코자 했으나 만나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중에 왜선이 쳐들어왔다. 원균의 군사는 또다시 크게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이 꼴을 당한 원균은 도망해 해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비둔한 몸을 이끌고 걸리지 않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소나무 아래 이르러 잠시 숨을 돌릴 동안에 좌우 사람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원균이 이곳에서 혼자 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기도 하고, 혹은 여기서 피해 살아 달아났다고도 전하는데, 그 확실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배설(裵楔)은 원균의 계교가 그르다고 여러 번 간해 오던 터였다. 이때에도 칠천도란 데가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댈 곳이 못 되니 딴 곳으로 옮기자고 말했으나 원균은 한 번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배설은 생각다 못해 자기가 거느린 배 몇 척을 적병에 대비시키고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보고 항구를 벗어나 먼저 달아났기 때문에 유독 그 군사만은 화를 면하였다. 배설은 한산도에 다다르자 불을 놓아 군기(軍器)와 양곡, 여사(廬舍)를 불사르고 남아 있는 도민(島民)들을 피난하게 하였다.
우리가 한산도에서 이미 패하자 적들은 승세하여 서쪽을 향해 쳐들어가니 남해(南海) · 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몰되었다. 다시 적선은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육지에 올라 남원(南原)을 포위했다. 이 때문에 충청 전라 지방이 일시에 흉흉해졌다.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범한 이후로 오직 수전(水戰)에서만 여러 번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평수길(平秀吉)은 이를 항상 분하게 여겨 왔다. 그는 행장(行長)을 책망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풀이를 하라고 했다. 이에 행장은 김응서를 교묘한 방법으로 꾀어서 이순신으로 하여금 죄를 얻어 파면당하게 하고, 다시 원균을 유인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오게 해가지고 그의 허실을 낱낱이 탐지해 냈다. 그리고나서 그는 불시에 원균을 엄습했다. 계교가 그렇게도 간교해서 우리는 모두 그들의 계교에 빠졌으니 슬픈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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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