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수업] 정병경.
ㅡ오찬ㅡ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뭉게뭉게 몽글몽글 피어있다. 푸들 강아지로 군락을 이룬 구름! 땅으로 떨어질 듯 뭉쳐 흐른다. 하늘에 스케치한 운치韻致가 멋스럽다.
구름이 퍼포먼스 하는 날은 집안에 있으면 마치 구속된 기분이다. 선배 지인과 점심을 먹기 위해 포천고속도로를 달린다. 자동차 경주하듯 뒤차는 정속으로 가는 내차 앞을 가로지른다.
소흘의 양고기집은 명절 연휴가 끝난 뒤여서 한가롭다. 가을 바람만 쐬어도 살이 찌는 느낌이다. 푸짐한 식단을 생각하니 체중 걱정부터 앞선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보니 보답할 일이 생겼다.
불암산이 마주 보이는 별내 '보나리베' 카페(제빵소)로 달린다. 후배인 용진의 친구가 운영하는 3천여 평 규모의 찻집이다. 주위의 풍광이 시간 도둑이다. 이야기 나누는 사이 오후 3시가 넘어간다.
다시 태릉 방향으로 향한다. 왕릉의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차를 돌려 태릉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ㅡ왕릉으로ㅡ
서울 생활을 오래했어도 태릉은 동네 이름으로 기억할 뿐 육사나 선수촌의 이미지가 더 각인되어 있다. 입장권을 받고 능으로 들어섰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 잠자리가 한가롭게 날아다닌다. 파란 잔디에서 귀뚜라미 연주 소리에 넋을 잃는다. 능참봉인 곤충의 선비들이 방문을 환영해준다.
섭정을 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조선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을 향해 걷는다. 홍살문을 지나면서 능 우측에 빽빽하게 솟은 장송이 눈에 비친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 능을 향해 하나같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사연을 물어볼 데가 없어 아쉽다.
열두 살에 왕이 된 자기 아들 명종 대신 8년 동안 권력을 손에 쥔 문정왕후. 연속극에서 보았듯이 섭정을 하는 동안 무소불위다.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의 세상이었다.
문정왕후가 생을 마감한 후 봉은사에 주석했던 허응당 보우대사의 운명도 막을 내린다. 불교를 부흥시킨 장본인들이다.
그가 누운 자리는 태릉泰陵(문정왕후)이다. 왕비의 능이라고 하기엔 상상외다. 클태泰의 뜻을 음미한다. 아들 명종 능을 능가할 만큼 크고 웅장하다. 아들과 며느리(인순왕후 심씨)가 누워있는 능은 언덕 너머 지척에 있다. 차를 돌려 강릉康陵으로 향한다.
ㅡ수업ㅡ
강릉 출입구가 태릉과 달리 자동차 진입이 불편하다. 자상한 태릉 안내원의 도움으로 쉽게 찾아 들어갔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경원대군)이다. 먼 발치에서 보니 쌍봉이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된 인순왕후와 나란히 누워있다.
배 다른 형(인종)의 짧은 치세(9개월)로 어린 나이에 등극한 명종. 외척을 배제하느라 22년의 세월 동안 고초를 겪은 왕이다. 명종은 삼육대 옆 강릉康陵에 묻혔다.
인종 모후인 장경왕후 윤씨(중종1계비)의 희릉은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에 있는 단릉單陵이다. 중종의 계비 중에 가장 단명(25세)한 왕후다.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는 71세를 살았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아이러니하다.
중종(진성대군)의 능호는 정릉靖陵이다. 아버지인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宣陵 옆이다. 중종을 비롯해 세 비妃 모두 각기 다른 장소에 단릉單陵으로 안장했다. 선ㆍ정릉宣ㆍ靖陵으로 부른다.
성북구 정릉貞陵은 태조계비(신덕왕후)의 릉이다. 자칫 능호를 착각할 수 있다.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인조)과 김포 장릉章陵(추존 원종), 영월 장릉莊陵(단종)을 혼돈하기 쉽다.
조선 개국 초대 태조가 묻힌 능은 건원릉建元陵이다. 나라를 세운 왕의 릉이란 뜻을 새겨 지은 능호다. 구리 동구릉東九陵에 있다. 봉분에 억새(갈대)를 심었다.
평소 고향을 그리워한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효자 노릇을 했다. 태종이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 왔다는 일화를 새긴다. 오래 전에 다녀온 동구릉 주위의 모습이 궁금하다.
ㅡ필담ㅡ
아직도 능에 대해 익힐 게 많다. 능호와 능형태, 보령과 재위, 위치 등이다. 조선 왕릉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문화재다. 잘 필독必讀해 익히고 지키는 것이 후손의 도리다.
왕과 왕비는 릉陵이다. 왕세자와 비, 후궁은 원園으로 부른다. 왕족은 묘墓로 표현한다. 폭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의 무덤은 묘로 부른다.
공이 많으면 조祖, 덕이 많으면 종宗을 붙인다고 한다. 명종은 덕을 많이 쌓은 임금이다.
현재 42기의 능陵 중 40기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왕릉 2기는 북한 개성에 있다. 태조 비 신의왕후(제릉齊陵)와 정종과 정안왕후(후릉厚陵 쌍릉)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왕릉에서 조선의 역사를 필독했다. 발품을 파는 만큼의 소득이다.
내 일기장에 시詩 한 소절 남긴다.
"오래 전 누운 조상
살피지 못한 후손
말 않고 다스리며
글 없이 가르친다
빛나되
눈부시잖은
지혜로운 필담서."
기억에서 사라진 조선 왕가의 역사를 지인과 함께 스터디한 날이다. 태ㆍ강릉에서 오후를 마감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달린다. 가을 구름은 여전히 무대를 펼친다.
2021.09.24.
보나리베 카페.
태릉泰陵.
문정왕후릉.
강릉康陵(명종ㆍ인순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