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자신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지인(혹은 친척)의 결혼식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식 피로연 중에 그만 포도주가 다 떨어지게 되어 하인들이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성모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예수는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냐며,[5]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면서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예수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자, 예수는 하인들에게 물통에 물을 부은 후 그것을 그대로 손님들에게 내어주라고 명했다. 하인들이 그대로 하자 놀랍게도 물이 포도주로 변해있었고, 그것도 전에 마시던 것보다 더 질이 좋아서 연회를 책임진 사람이 "보통 좋은 술은 먼저 내놓고 나중에는 덜 좋은 술을 내놓는 법인데[6] 아직도 좋은 술을 남겨뒀구려!"하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제자들이 놀라워했다는 이야기다.
결혼식 등 잔치에서 손님들에게 결혼식 행사에 걸맞은 좋은 음식과 술을 접대하는 것은 손님을 결혼식에 초청한 양가 가족들의 입장에서 꽤나 민감한 사안이다. 특히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하루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이나 계속 잔치를 벌였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특히 잔치에 술이 빠질 수 없기 때문에 손님들을 접대하는 입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난감한 경우였다.
가톨릭에서는 이 이야기를 성모 마리아가 전구를 실행한 대표적 사례로 해석한다.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을 파악한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를 알리고, 처음에는 예수가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냈음에도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해라"라고 지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관여함으로써, 결국 예수가 어머니의 뜻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첫 기적을 행하도록 이끄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일화를 전구 기도와 연관시키는 가톨릭의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이 일화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 아닌 이상 부모가 불필요한 것을 지시하더라도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완전한 새 몸을 입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가졌던 윗사람으로서의 지위가 없어[7]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성모 마리아에게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보며, 단순 기도 요청을 넘어 성모 마리아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가 있다고 믿고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 요청을 하는 것은 예레미야 17장 5절[8]에 따라 죄에 해당하고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얄팍한 꾀로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태도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기도를 들어주는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마리아의 기도빨(?)을 의지하는 것은 사실상 마리아를 신적인 존재로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며[9] 하나님은 물주 정도로 전락시킨다는 견해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하는 야고보서 5장 16절도, 개신교 측에서는 의인은 올바른 관점과 마음으로 기도를 하기 때문에 역사하는 힘이 큰 것이지, 의인 자체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다른 해석으로는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라는 문장의 원문(Τί ἐμοὶ καὶ σοί[발음])이 정확히 마르코의 복음서 1장 24절과 5장 7절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를 비난할 때 썼던 표현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해당 표현은 어떤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의지에 반해 억지로 무엇을 하게 될 때 적개심을 가지고 비난하는 표현[11]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질책하는 상황이다.[12] 이 해석에서는 해당 일화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가족과 절연 당하는 상황에서 공동체적 회개로 부름받은 것이 혈연관계를 대체함을 기억시키기 위해 해당 일화가 기억되었다고 보고 있다.[13]
해당 구절의 γύναι(여자여)는 공경의 의미를 담고 있으나, 어머니에게 하는 대답으로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14] 어머니를 부를 때에는 κυρία라는 호칭이 더 적절한 것이므로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이 대답이 다소 퉁명스럽다고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해당 본문은 요한 복음서 7:6~8과 확실히 평행을 이루는데, 그 본문에서 예수가 나중에서야 요청된 것을 하며 이는 예수가 자신만의 신적인 시간표를 따른다는 것을 함축한다.[15][16]
정경에 따르면 예수가 행한 첫번째 기적이다. 천주교 묵주기도의 빛의 신비 2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혼인잔치의 주인공인 결혼을 한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보통 성모 마리아가 직접 하인들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친척, 혹은 지인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좀 더 신앙적인 해석으로 파고 들어가면, 신랑신부는 정황상 포도주를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거나 즉시 구매할 수 있을 정도가 불가능한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포도주가 바닥나기 시작했을 때 손님들의 원성이 빗발치기 직전이었고 신랑신부와 운영진은 불안감과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전적으로 의지했을 때 그 모든 부정적인 것과 결핍, 인간의 무의미해 보이는 수고마저도 재료로 쓰여 거대한 선을 이루게 된다는 원리(로마서 8장 28절)이다. 즉, 인간의 능력과 계획으로는 나중에 질 낮은 포도주를 내어오는 식처럼 자원과 노력의 한계가 있지만 절대자의 역사는 훨씬 질 좋은 포도주를 내어오는 것 처럼 인간의 측정치와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내용으로 교회에서 설교되어지고 있다.
사실 요한 복음서에만 기록된 이 일화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단 이 당시 예수가 포도주로 변환한 물의 양은 현대식 계산에 따르면 자그마치 2,000L에 달하는데 이런 귀족적이고 향락적인 잔치를 암시하는 포도주의 생성은 초기 기독교 교회의 청빈 정신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연회장에서의 기적은 다른 복음서의 치유나 회생 등 예수의 다른 기적과도 차별되기 때문에 성격이 꽤나 다른 기적이고, 때문에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일화를 어떻게든 교회 정신(?)에 맞는 해석으로 교정(?)하기 위해 신학적 해석을 덧붙여야 했다.
실제 디오니소스 밀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환하는 기적은 디오니소스가 행하는 대표적 기적으로 알려져 있다. 대 플리니우스는 안드로스 섬 디오니소스 신전에서 1월 5일 밤부터 1월 6일까지 열리는 테오도시아 축제일에 원래는 물이 흐르던 샘에서 포도주가 솟았는데, 이 포도주는 신전 경계를 벗어나면 다시 물로 돌아갔다 기록하고 있다.(대 플리니우스, 《박물지》 2.231, 31.13), 파우사니아스나 디오도로스도 엘리스와 테오스, 코린토스 등의 디오니소스 신전에서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시연했다고 전하고 있다. 즉 포도주는 곧 디오니소스의 현현을 나타내는 계시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런 전승이 동방 각지에서 확인되고 '지팡이를 땅에 꽂자 포도주 샘이 터졌다'[17]라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디오니소스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포도주의 신' 이자 '포도주 그 자체' 로 인식되었다. 이는 예수가 복음서에서 포도주를 두고 '자신의 피'라고 '포도주를 자신과 일치시킨 행적'과도 유사하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사실 생각보다 헬레니즘 문화와 예수가 살던 시절 이스라엘은 꽤 접점이 있는 편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인 디아도코이 제국의 치세 수백여년간 유대 지역은 좋든 싫든 헬레니즘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18] 당장 예수의 고향인 갈릴리 지역 역시 그리스인의 도시와 유대인의 도시가 이웃하여 공존하고 유대인이 쓰던 아람어와 그리스인이 쓰던 코이네 그리스어가 같이 쓰이는 등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스몬 왕조가 주조한 동전에 포도송이, 담쟁이 장식 같은 디오니소스의 상징이 묘사되었고 마카베오기의 기록에도 디오니소스 숭배 강요 사례가 등장한다.[19]
또한 예수의 고향 나사렛에서 5km 거리의 그리스 도시 세포리스에서 디오니소스의 모자이크가 발굴된 바가 있고 여기서는 디오니소스의 음주 장면, 아리아드네와의 결혼식, 포도주 제조 같은 그리스 신화적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의 포도주 기적이 있었던 가나 역시 이곳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다. 이렇게 당대 팔레스타인-시리아 일대 레반트 도시들에서는 디오니소스 숭배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예수 본인이든 예수의 추종자인 기독교도들이든 이런 헬레니즘적 요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요한 복음서의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선언은 디오니소스에 대한 대체 담론이며, 기적의 과잉적 양상은 디오니소스를 초월한 예수의 권능을 강조하는 장치이다. 그리스-로마인들은 야훼를 바쿠스(디오니소스)와 동일시했는데, 애초에 구약의 야훼부터가 전통적으로 끊임없이 이교의 신의 도전을 맞아 그들과 자신을 대비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근동 신들의 호칭이나 위업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일화도 그와 유사하게 예수와 이교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대비하여 기적의 양상을 흡수하고 예수의 우월성을 증명한, 그런 성격의 일화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와 디오니소스의 유사함은 포도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는 예수와 유사한 내러티브를 가진 신이기도 했다. 둘 모두 인간 여성(성모 마리아, 세멜레)에게서 태어난 신의 아들이면서, 죽음을 겪은 후 부활한다. 지상에 강림한 예수는 믿음을 전파하려 하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에게 수난을 당하고, 지상에 강림한 디오니소스 역시 믿음을 전파하려 하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수난을 당한다.[20]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디오니소스 밀교(Mystery cult)에서 디오니소스는 제우스가 왕권을 넘겨줄 가장 아끼는 아들이면서, 티탄적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영혼을 사후에 구원해주는 영혼의 구원자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니소스는 '해방자'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런 디오니소스의 일화는 예수가 되었던 예수의 추종자들이건 '구세주 예수의 행적'으로써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화적 요인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 비슷했기에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예수는 생각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으며, 전도에 유리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디오니소스 밀교의 교리와 어휘는 유사한 교리를 가진 기독교를 설명하는 어휘로 치환되어 재활용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기독교를 비판하는 로마인들을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당화하고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만신전보다 예수가 더 우월하다는 식으로 반박하는데도 이용되었다.
그런점으로 봤을때 이 부분에서는 요한의 복음서를 편찬한 '요한 공동체'의 상황도 따져봐야 한다. 요한 공동체는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대표적인 디오니소스 밀교(Mystery cult) 성행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이방인 전도 시 디오니소스와의 차별화 내지 예수가 디오니소스보다 더 우월함을 강조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실제 이 시대 교부들의 반응들도 이런 목적으로써 이 일화를 두고 예수가 디오니소스보다 더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디오니소스의 기적을 두고 '악마가 야곱의 예언을 모방한 것'[21]이라고 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여성의 옷을 입은 미치광이 디오니소스'의 도덕성을 비판한다.[22]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는 '디오니소스의 포도주는 취하게 하되, 그리스도의 포도주는 절제를 준다'[23]고 말하며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의 기적이 디오니소스의 기적보다 훨씬 우월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바카이(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은 광기로 물든 의식을 치룬다'며 디오니소스 밀교 의식을 비난하고 기독교로의 입문을 권유한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에 의하면 디오니소스는 신도 아니고, 다만 미친 폭군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요한 복음서에만 존재하는 가나의 기적은 이교의 신이 가진 모티프들을 흡수한 예수가 디오니소스에 가지는 우월적 위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아이덴티티를 명징하게 나타내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 공동체는 변증적 목적으로 초기 교회의 이상에 반하는 기적을 삽입해야 할 정도로 디오니소스에 대한 응답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나의 기적은 거짓 포도나무인 디오니소스 대신 참포도나무(요 15.1)인 예수 그리스도의 등극을 알리는 예수 공동체의 종교적 패권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이상의 출처는 이 링크의 글을 요약하여 가져왔다.
영화 콘스탄틴에서도 콘스탄틴이 들렀던, 천사와 악마들의 중립지대인 미드나잇의 술집에서 천사 혈통의 반인이 입김을 불자 맹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장면이 있다.
세인트☆영멘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여인이시여."라고 한 것은 제자들과 친구들 앞에서 엄마라고 하기 부끄러워서라고 한다. 또 이 일화로 인해 예수는 하계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끔씩은 포도맛 환타도 만들어버린다.[24]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 퍼시 잭슨과 괴물의 바다에서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제우스가 내린 처벌로 인해 포도주가 든 잔을 집을 때마다 강제로 포도주가 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물을 마시면서 "기독교인들한테는 이를 반대로 할 수 있는 자가 있어. 그게 바로 신이지!"라는 대사를 한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신학 과목 학기말고사 논술시험 주제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에 담긴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서술하라"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이 그 창조주를 뵙고 얼굴을 붉혔다.
남들은 깜지 채우고 있는데, 답안지에 이 한 문장 쓰고 최고점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대학교 시험이라는 것이 무조건 양만 많이 쓴다고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수가 출제한 문제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교수가 원하는 답(문장, 단어 등)을 써내기만 하면 되는 것. 물론 위의 문장처럼 보기 드문 기발함이 아니라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고작 한두 문장 정도로 만점(A+)까지 받기는 힘들긴 하다. 양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하나 최소한의 분량은 채워서 써야 되니까. 위의 문장은 종교인이든 비 종교인이든 누가 봐도 엄청난 센스가 돋보였기 때문에, 교수라면 분량이 한 문장에 불과하더라도 충분히 최고점 줄 만했던 것. 인터넷에서는 여기에 한술 더떠서 학생이 낮은 점수를 받을까봐 굳이 옆에서 얼른 뭐라도 쓰라고 보채는 교수와 시험 시간이 충분한데도 굳이 멍때리면서 시간을 끌다가 시험 끝나기 직전에 저거 한줄 쓰는 바이런으로 각색되는 경우도 있는데 재밌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저거 한줄로도 이미 충분히 시적인 의미가 있는데 뇌절이라는 반응도 많다. 다만 원판부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미지수이며, 후대의 각색이라는 주장도 많다.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갈릴래아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이다. '가나안 혼인잔치'가 아니며, 아프리카에 소재한 가나 공화국 지역에서 벌어진 혼인잔치도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 MBC가 2008 베이징 올림픽 입장식에서 가나를 설명할 때 자막으로 이 가나의 내용을 쓰는 바람에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가나(Ghana)는 아프리카 쪽 국가명이고, 혼인 잔치의 가나(Cana)는 갈릴래아 쪽 지명으로 철자조차도 완전히 다르다.[25]경기도광주시와 광주광역시를 헷갈리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광주와 중국 광주(광저우)를 동일시하는 수준의 오류. 사실 1세기 경에 예수의 고향 이스라엘에서 서아프리카까지 갈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26] 이 상식만 알아도 하지 않을 실수. 좀 더 깊게 따지면 가나라는 이름은 1957년에야 나왔고 더 전에는 영국령 골드코스트 였다.
모나리자로 인한 최대 피해자이다.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작품임에도 하필이면 루브르 박물관에 그 모나리자와 함께 같은 방에 전시되어 있어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따르는 일부 교파에서는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즙으로 번역되는 게 맞다고 주장하며 금주 교리를 방어한다.#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 트로피코 4는 배경이 카리브해라서 주민들 중 종교인 진영이 있고, 당연히 only 가톨릭 신자들이다. 그런데 이 종교인 진영의 대변자라는 에스테판 신부는 불만이 생기면 라디오로 "트로피코가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온 트로피코의 럼주를 맹물로 바꿔버리실 겁니다."라고 화를 낸다.
탈무드 유머에 따르면 한 여행자가 공항에서 포도주를 물병에 넣고 몰래 나가려다가 세관원에게 들키자 성지에서 가져온 성수라고 둘려댔다. 그러자 세관원이 물병에 있는 액체를 마신 다음 거짓말을 한다고 하자 여행자가 "아, 하느님의 기적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개그 짤도 있다. 예수 다녀감
[1] 6.8m x 10m의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대작으로 루브르 박물관 소장 회화중에 가장 크다[2]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 제자를 모은 일이 있은 지 사흘째.[3] 원어로는 γύναι(gunai)라고 하며(γυνή의 호격), 직역하면 woman, 즉 여성이 된다. 이 단어가 어떤 늬앙스로 쓰였는가는 꽤 논쟁의 대상이다. '여인이시여'(가톨릭 성경)나 'Dear woman'(NIV)같이 존칭으로 번역한 곳도 있고, '여자여'(개역성경)나 'Woman'(KJV)같이 번역한 곳도 있다. 신학계에선 마담, Mrs. 정도의 존경을 담은 정중한 호칭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가톨릭에서는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창세기 3장 15절 공동번역 성서)"라는 구절과 연결하여 구원사적 의미를 가지는 호칭으로 보고 있다.[4] 이런 문제로 여기서 말하는 마리아가 그 마리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타인의 결혼식이라면 예수와 그 제자도 참가한 마당에 어머니 마리아가 나타나도 큰 문제가 없지만 마치 그 연회의 주체인 마냥 하인들을 시킨다던가 예수가 하인들을 부리는 것은 접대의 관습에 따라 그 잔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뭐 마리아의 재혼이나 예수의 결혼이든 구약을 읽어봤다면 문제될 것도 없긴 하다. 이 경우 어머니에게 쓰기에는 이상한 '여자여'라는 호칭을 쓴 이유도 설명된다.[5] 천주교 번역에서는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는, 좀 더 공손한 문장으로 썼다.[6] 취하면 술의 품질엔 보통 신경쓰지 않으니까.[7] 개신교는 가톨릭 보편 공의회의 결정이라고 하여 그 권위를 무조건 절대화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될 수 없기에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어머니이기도 하여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이 옳다고 결정한 칼케돈 공의회에 대한 시각은 개신교 안에서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교단 차원에서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리를 차용하고 있고, 성공회나 루터교회 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목회자의 견해에 따라 마태복음 22장 4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님이었던 자신이 어찌 다윗의 자손이 되겠냐고 말한 것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며 네스토리우스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고(가톨릭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명백히 이단이고 개신교 안에서도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이단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개신교에선 네스토리우스에 대해서 관심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네스토리우스주의 때문에 이단 시비가 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신교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사안이 아니면 의견이 달라도 적당히 넘어가려는 개신교 전반의 분위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개신교 안에서 보편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를 근거로 이단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미 개신교는 가톨릭 입장에서 이단이다.), 어떤 사람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부분도 마리아에게서 난 것이 없으니 마리아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조차 아니고 마태복음 22장 30절에도 천국에서는 지상에서의 부부 관계가 끝난다고 나와있으니 모자 관계도 끝나는 것이 맞다고 하는 등, 개신교 안에서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견해는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어떤 견해는, 인간은 단순히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인성이란 어떤 존재가 인간의 정의에 부합할 때에 파생되어 발생하는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고 신성과는 상관 없는 독립 변수여서 신성과 결합할 여지 자체가 없는데, 칼케돈 공의회가 용어의 정의 자체를 제대로 안 내리고 추상적 개념을 물질화 시켜서 인성과 신성이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었다는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하며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전반적인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천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가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것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다.[8]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9] 가톨릭 공식 교리는 성모 마리아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지만, 개신교 측에서는 교리적으로만 마리아가 신이 아니라고 한다고 우상숭배가 합리화되는 것이 아니라며, 교리적으로 신으로 믿지 않는 대상을 실제로는 신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오의 복음서 6장 24절
제 힘을 하느님처럼 믿다가 죄를 지은 자들은 바람에 날려가듯 사라지리라.-하바꾹 1장 11절[발음] 고대 그리스어: 띠 에모이 까이 소이, 코이네 그리스어: 띠 에미 깨 시[11] 대략 "내 일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자분, 당신 일에나 신경 쓰시죠!"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12] 해당 구절이 반드시 책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예로 열왕기하 3:13 및 호세아 14:8이 제시되기도 하나 이 구절들도 역시 불손 혹은 적대감을 보이는 대화이다. 크레이크 S. 키너, 요한복음 II, CLC, 1473p 이하 '키너 요한복음 II'로 표기[13] 앤서니 르 돈, 역사적 예수, 100, 2018 참고[14] 반가톨릭 보수 개신교에서 성모 공경에 반대하는 근거로 삼는다.[15] 키너 요한복음 II, 1470~1472p[16] 이런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서양의 음모론자들은 가나의 결혼식이 예수의 결혼식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음모론들이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에도 인용되어 있다. 뭐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존재와 행보는 각 파로 갈라진 교회에서도 서로 싸워대며 모독해댄 현재진행형이기도 하고.[17] (에우리피데스, 《박코스의 여신도들》 706-707).[18]시리아 전쟁의 결과로 셀레우코스 제국 지배하에 있었다.[19] 마카베오기 하 6:7.[20]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박코스의 여신도들'에서도 이런 모습이 묘사된다.[21] 《트리폰과의 대화》 69.2.[22] 《켈수스 비판》 3.42[23] 《말씀이 육신이 되심에 대하여》 49.[24] 참고로 예수는 오렌지맛이 취향이라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25] 그래서 천주교 표기는 원음을 살려 '카나'이다. 실제로 영어로 발음해보면 꽤 다른데, 아프리카 가나는 영어로도 '가나'지만, 갈릴래아의 카나는 영어로는 '케이너'에 가깝게 발음된다.[26]오리엔트 일대에서 서아프리카를 잇는 사하라 종단 무역로는 7세기에나 제대로 열리게 된다. 유대인들도 이 무역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