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랏님의 입 행보가 가열차다.
본인이 내뱉는 말이 무슨 신의 경지라도 되는 듯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함부로 가져다 쓴다.
그저 본인의 말 한마디면 "예스, 네네"거리며 절절매고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떤 의견도 개진하지 않으며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무능력의 극치를 보이는 나랏님을 보필한다는 좌우 팔들의 태도도 기가 막힌다.
어쩌다 말 한마디에 교육이 바꾸고 탈세 꼬투리까지 잡으며
국민들을 우왕좌왕하게 하고 혼돈에 빠지게 함은 물론 그동안 지켜오던 현장 교육은 떠나가는 배가 되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툭 내뱉고 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시키는대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에
국민들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지적인 생각을 1도 못하는 소인배로 본다는 말인지 그것도 궁금하다.
하여 지적인 것에 대한 글귀가 있어 옮겨온다.
우리 국민도 무지하지 않다는 것쯤은 아셨으면 한다.
저 윗전에서 국민의 녹을 먹는 자들이여......제발, 우리도 생각쯤은 한다고.
■ "지적 태도, 대한민국의 저력"/ 최진석
어느 모임에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몇 나라가 화제에 올랐다.
그 나라들에 다녀온 분께서 대화를 주도했는데,
대화 말미에 그런 나라들에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한 명만 있었어도 우리처럼 발전했을 것이라 하였다.
나는 속으로 그런 나라들에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열 명이 있었어도
우리나라처럼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문명은 어찌 되었건 생각의 결과라는 점에서 지적 산물이다.
지적 전통이 있는 민족이나 나라들만 발전할 수 있다.
의식은 본능적이기도 하지만, 생각은 의도를 따라 통제된 의식으로서 일부러 하는 것이며 매우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며 의도적이고 또 일부러 하는 활동 능력을 ‘지적(知的)’이라고 한다.
단순히 지식과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보다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사용한다.
‘지적’이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은 그런 거부감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그저 앞으로 나아간다.
지구는 둥근가? 아니면 평평한가? 별생각 없이 감각과 본능대로 얼른 보면 지구는 평평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구는 둥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하나의 검증된 믿음으로서의 지식이다(justified true belief).
지구를 평평한 것이라고 ‘감각’하는 사람들보다는 지구를 둥글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삶의 질과 양을 더 크게 가져가는 것은 이치상 매우 당연하다.
지적이지 않으면, 지구를 평평하다 여기고, 지적이면 지구를 둥근 것으로 인식한다.
‘지적’인 사람은 지적이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무엇이든지 인위적으로, 일부러 할 줄 안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지적 인내’라고 말한 데에서 우리는 ‘지적’이라는 개념의 쓰임새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력, 절제, 사랑, 자비, 배려, 대화, 타협 등등도 감각과 본능을 이겨낸 지적 행위들이다.
대화를 잘 못 하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고, 정해진 생각에 갇히고, 게으르고, 예의나 염치가 없고,
‘내로남불’에 빠지는 것은 다 지적이지 않아서이다.
조선 시대의 도덕은 자연의 운행 원리를 근본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자연을 태극, 음양, 오행, 이, 기 등의 범주로 해석하고 설명하였다.
이런 범주들로 우주 자연을 규정하는 것이 인위적으로 보이는가? 자연스럽게 보이는가?
일부러 한 것인가? 아닌가? 일부러 하고, 인위적으로 한 일이다.
다름 아닌 지적인 태도다.
조선 시대에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적인 삶을 살았다.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10명 있어도 우리나라처럼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던 나라들의 도덕은
인위적인 사유의 결과라기보다는 별생각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관습이나 전통에 많은 부분 의존한다.
문제는 우리가 살던 지적인 삶이 중국에서 수입한 주자학을 근거로 하였다는 점이다.
흔히들 조선 시대의 비효율과 탁상공론의 문제점을 주자학의 사유 구조 자체로 돌리는데 이는 틀렸다.
주자는 송나라의 산업혁명이었던 강남 농법을 보급하려 하면서,
거기서 새로 등장한 신흥지주층과 사대부를 중심 계급으로 해 송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실사구시의 철학자였다.
주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는 원래 이렇다.
철학이 추상적인 개념들을 다루기 때문에 현실과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철학은 울퉁불퉁하고 구체적인 현실에서 태어난다.
다만, 그것을 수입한 사람들은 울퉁불퉁한 구체성을 제거한 평평하고 추상적인 이론의 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철학과 현실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주자학이 우리에게 탁상공론의 요소가 많았던 것은 주자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자학을 수입해서 숭배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스스로의 노력을 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쉽게 수입해서 쓰는 나라들은 비록 지적인 전통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단계에서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이 한계 앞에 서 있다.
지적인 태도가 있어서 여기까지는 왔지만,
수입한 이데올로기로 단련한 지적 태도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지적인 태도가 생각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을 놓고 말한다면,
우리는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여 살았지 스스로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명이 생각의 결과이고, 지적 산물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현재를 억지로라도 일부러 자세히 생각하고 들여다볼 일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에 들어서고 싶은 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오래된 자신의 정해진 생각을 맹목적으로 지키려는 태도를 지적 활동으로 믿거나, 홍위병처럼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정의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생각 없이 지적이기는 불가능하고, 지적이지 않으면서 일류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최진석/ 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석학교수)
첫댓글 갈수록 정치 상황에선 머리가
돌아간다네 ...
국민을 무지의 소치로 아는지 원...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