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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18-22>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칭찬할 게 하나도 없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여서 토해내고 싶은 라오디게아 교회이지만 19절 말씀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주님은 여전히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들이 집을 나갔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 아들을 미워하던가요? 망나니 같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섭섭하시고 화도 나시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미워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은 여전하시지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라고 말씀하는데 징계와 심판의 차이가 뭘까요? 징계는 잘못된 것을 돌이키려는 것이고 심판은 돌이키려는 게 아니라 잘못한 것에 대한 마지막 완전한 책임을 묻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 심판에 이르지는 않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매를 맞았다면 그건 징계를 받은 것이지 심판을 받은 건 아닙니다. 그러니 아직 돌아서 기회가 있는 거죠. 징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담겨 있지만 심판에는 사랑이 아니라 정의만 담겨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거죠.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아픈 것이지만 그럼에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받아야 하는 거죠. 징계를 통해 우리가 더 올바른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열심을 내는 겁니다. 열심을 낸다는 것은 어떤 일을 열심히 더 많이 행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열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을 말하는 거죠. 즉 나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하나님이 아니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의 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식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내가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거죠. 그래서 주님 그 자체에 더 집중하고, 더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겁니다. 그게 진정한 열심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지 않고 단지 신앙의 행위에만 열심을 내는 것은 속알맹이 없는 헛된 겉껍질일 뿐이지요.
열심을 내고 회개하는 것을 20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먼저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문을 두드리실 때에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못들은 체 하지 말라는 거죠.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양심을 통해 본문의 표현처럼 문 밖에서 우리를 두드리십니다. 지금도 오늘 주신 이 본문 말씀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요. 이 때에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과 손길을 받아드려야 하는 거죠.
특히 회개라는 것은 세상과 죄악을 향하던 방향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 아닙니까? 돌이키는 최고의 방법은 본문의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과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는 손길에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드리는 거죠. 그래서 믿음과 회개는 사실 같은 순간에 일어나는 겁니다. 믿음이 있으면 회개의 역사가 있는 것이고, 회개의 의지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믿음이 있지요.
그리고 주님을 내 안에 영접해서 주님과 함께 먹는다고 말씀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식구요, 동역자요, 동반자라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와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라는 찬송도 있는 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칭찬할 건 하나도 없고, 토해내고 싶을만큼 미지근한 상태여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여전히 이들을 사랑하시고,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한 식구로, 같은 동역자요 동반자로 지내기를 원하고 계시지요. 우리가 한없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식거나 멀어진 건 아닙니다. 언제든 우리 마음과 영혼을 주님께 향해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이기는 자, 즉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믿음의 길을 성실히 걷는 자들에게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역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게 아니라 예수께서 계시는 하늘의 영광된 보좌 함께 앉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지요. 그 약속의 나라를 향해 변함없이 한걸음씩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