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에]
ㅡ 꽃들의 질서 ㅡ
춘 사월!
봄빛에 쪼인 꽃 색이 샘난다.
잎이 돋아나고, 꽃이 벙그는 계절이라 헛봄은 없다. 봄이 되니 생기가 돋는다.
쉬는 날, 집안 구석구석 털고 닦을 일이 많지만, 겨울을 조금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할 일을 잠시 미루고 세상 구경에 나섰다.
4월이 시작되는 첫날! 40년 지기 김헌길 사장 부부와 강원도로 향했다. 점심은 무언의 약속이나 한 듯, 김밥과 과일, 식혜와 찐 달걀 등 뷔페 수준으로 각자 준비를 했다.
첫 코스는 오대산 상원사다. 지난해 추석날 이후로 4번째 순례다. 연초에 우연히 갔다가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연을 이은 사찰이다.
일요일인데 차 막힘 없이 잘 달렸다. 진달래와 개나리 목련 등, 다투지 않고 피는 꽃들이 매일 달리 보인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올봄의 대기는 좋지 않은 편이다. 마스크를 주머니에 챙겼는데 다행히 흐린 날에 비해 시야가 좋았다.
지난주 오대산 가는 산길에 수북이 쌓였던 눈은 간데없고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흙길은 보송보송하다.
ㅡ 균형 유지ㅡ
함께 다닐 때, 늘 앞서서 걷는 내가 모처럼 아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전처럼 흐트러짐 없이 고정된 모습이 아니었다. 어깨는 비틀어지고 왜소해 보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세월이 남긴 작품이다.
체중계와 친한 아내는 저울에 발을 올려놓기 전에 눈금이 내려가지나 않을까 궁금해하는 모습을 요즘 자주 보았다. 한동안 잘 유지하던 몸무게가 오르락내리락한다.
균형을 조금씩 잃어가는 듯하다. 당연한 이치라고 하지만 불현듯 노쇠함의 속도가 빨라짐을 느꼈다.
음식보다 약봉지 부피가 커지고 있다.
김숙이 님은 체지방으로 저울 눈금이 올라가는 것이 두렵다고 걱정한다.
심장ㆍ폐 수술로 덤으로 사는 김 사장은 정상의 길에 들어서서 다행이다.
허리띠가 한 칸씩 줄어드는 내 몸무게도 저울이 두렵다. 오래 전부터 체중 미달이다. 서로의 신체 리듬 불균형이 조화처럼 되었다. 여리박빙이다.
고목에서 소리 없이 피어나는 꽃들은 해마다 보아도 변함없이 어찌 그리 해맑고 싱그럽고 예쁠까!
사람들이 꽃을 닮기를 갈구한다. 작년의 기력과 다르고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이 순간순간 마음을 긴장하게 한다.
백련초해에서 한 수 옮겨본다.
"봄뜻을 머금고 있는 꽃들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데,
경물을 느끼는 사람의 감정에는 얕고 깊음이 있도다
(花含春意無分別
物感人情有淺深)." 꽃나무와 자꾸 비교가 된다.
상원사 주차장 모서리에서 펼쳐놓은 간식은 맛보다 정감이다.
따스한 햇살 받으며 마주한 자리에 계곡 물소리와 꽃내음이 함께 어울렸다.
ㅡ느낌을 담다ㅡ
진고개를 휘돌아 주문진으로 달렸다. 1천미터 정상은 미처 겨울을 못 보내고 있다.
사찰이나 하듯 어시장을 두루 살폈다.
예전같지 않은 분위기다.
어쩌다 맞이하는 손님은 상전이다.
대포항 골목 천막 뒤에서 들리던 파도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다. 메꾸어진 깊숙한 바다는 빌딩숲이 되었다.
싱싱한 회 한 접시로 시름과 정담을 나누던 우정들은 어디론가 떠났다. 바닷물이 출렁이던 그 자리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차들이 들락거린다. 격세지감이다.
바로 옆 외옹치항의 무한정 횟집 여사장은 이산가족이라도 만난듯이 반가워한다.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다리가 원수다. 아파하는 기색 없이 음식 맛 솜씨에 빠졌다.
정성을 들인 일품요리를 남기기 미안스러웠다.
식성이 예전같지 않다. 눈으로 먹는 맛이 더 좋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시력이 유지되어 핸들을 오래 잡을 수만 있어도 행복이다.
종합병원이 어렵사리 움직인 하루였다.
가벼운 거짓말은 애교로 봐준다고 나라에서 정해준 만우절이다. 오늘 쓴 글에 꼬투리 잡을 상대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써 본다.
2018.04.01.
첫댓글 정 시인님, 오랜만에 올리신 간결한 기행문입니다.
나이 들수록 여유 있게 산과 들을 즐기며 사는게 행복이지요.
4월 아카데미에서, 양재동에서 모이는 작가회에서도 자주
얼굴 뵈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