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김용진 기자가 제작한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결방된 것과 관련해 KBS본부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해를 돕고자 김용진 기자가 5월 27일 18시30분경 KBS 사내게시판(코비스)에 올린 '한나라당에 투항한 KBS 울산'이란 제목의
글도 함께 보내드립니다.
참고하시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나라당에 투항한 KBS 울산>*
특집 프로그램 결방에 즈음해...
지금 시각은 2010년 5월 27일 오후 6시다. 잠시 후엔 KBS 역사에 또 하나의 치욕이 더해진다. 당초 오늘(5월 27일) 저녁
7시 30분 KBS 울산 로컬로 방송될 예정이던 특집 프로그램 <지방자치 20년 특별기획-울산과 지바, 두 도시 이야기>가 결방된다.
박홍일 울산방송국장의 지시에 의해서다. 취재와 연출을 담당한 나의 동의는 물론 제대로 된 상의조차 없이 결정된 일이다. KBS에 해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해괴한 일의 반복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워낙 많은 문제점 들을 내포하고 있기에 굳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먼저 결방 결정에 이른 경과를 보자. 한나라당 울산시당은 지난 5월 25일, 즉 방송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울산지방법원에 이 프로그램에
대한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방송에 서 자당 후보들에 대해 불리한 내용들을 다룰 예정이기 때문에 방송을 선거일 이후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나라당 측이 자당 후보들에게 ‘불리한 내용일 것’이라고 적어놓은 것들에는 막연한 추정이나 심지어 피해망상에서 나온
상상의 산물로 가득 차 있다. 실제 신청서엔 이 프로그램이 한나라당을 ‘부정부패 및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하면서’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물론 내 프로그램엔 한나라당을 비리 온상으로 지목하는 내용이 없다. 다만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이 너무 세고, 지방의회가 견제와 감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내용은 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박홍일 울산국장이 이에 대해 의연하게 대응할 줄 알았다. 내가 데스크나 팀장을 할 때도 KBS 뉴스나
프로그램에 대해 외부의 간섭이나 침해가 있을 경우 취재기자, 데스크, 팀장, 법무팀, 자문변호사 등이 일치해 대응했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곧 깨졌다. 박 국장은 한나라당의 가처분신청을 빌미로 방송을 결방시키고, 선거 뒤로 미루자고 했다. 나는 가처분신청이 들어온 만큼
법원의 판단을 받아서 그 결정에 따르자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한나라당의 신청 이유가 사실과 다르다는 답변서를 작성하고, 관련 판례도
찾아서 울산 보도부 데스크에 전달하고 나도 심리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KBS울산방송국은 가처분신청에 대한 대응은커녕 제작진은
배제시킨 채 방송을 결방시키기로 한나라당과 합의했다. 한나라당은 어제(5월 26일) 오후 2시 30분으로 예정된 심리 일정 직전에
가처분신청을 취하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전달받지 못한 채 어제 서울에서 프로그램 제작의 마지막 단계인 내레이션 녹음을 마쳤다.
나는 이번 박 국장의 방송 불방 결정이 KBS에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심대한 피해를 끼쳤다고 생각한다. 먼저, 방송 내용에 불만을 품은
정치세력이 막연한 사유를 들이대며 KBS를 상대로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KBS가 적절하게 대응도 하지 않고 항복한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는 것이다. 방송의 ‘사전 금지’라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만 구제수단으로서
적용된다. 그런데도 명색이 국내 최고 공영방송인 KBS가 가처분 신청만으로 정치권력에 투항한 것이다. 특히 이번 한나라당 울산시당의
가처분신청은 KBS 김인규 사장을 상대로 제기된 것이다. 박국장은 결과적으로 김인규 사장을 투항의 대표자로 만들어버렸다. 두 번째, 이로
인해 언론기관으로서의 KBS의 위신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추락됐다는 것이다. 결방 소식은 곧 울산 지역 전체에 퍼질 것이다. 한나라당의
노리개 신세로 전락해서 한나라당의 귀여움을 받을 진 모르지만 나머지 시선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세 번째, 예고까지 나간 방송을
결방시킴으로써, 정치권력을 만족시킨 대신 KBS 울산의 시청자들은 무시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네 번째, KBS 울산국 내부의
편성제작 시스템이 국장의 독단적 행위로 인해 붕괴됐다는 것이다. 박 국장은 지난 3월 29일 이 프로그램 기획안을 직접 결재했다. 취재와
제작 과정에서 승인 받았던 주요 기획 내용이 변경된 것도 없다. 물론 본사편제회의도 통과했다. 절차상 아무런 하자 없이, 그리고 당초
승인된 기획 의도를 충실하게 담아낸 프로그램이 외부의 입김과 국장의 독단에 의해 방송 직전에 결방된다면, 우리 조직이 저잣거리 구멍가게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나는 내 프로그램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방송에 거론되는 여러 사례들에 대해 관련자들은 불만도 있을 것이고, 억울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 울산시당이 가처분신청을 낸 것도 그들의 당연한 권리 행사라고 생각한다. 난 오히려 한나라당에서 방송내용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내주길 내심 기대했다. 선거방송 기간 중에는 여러 가지 규정이 방송의 표현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규정이 굉장히 모호해서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 실제 이런 규정들은 언론의
감시기능이나 국민의 알권리를 축소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번 한나라당이 낸 가처분신청 심리를 통해서 선거 운동 기간에 방송이 어느 정도의
표현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고 싶었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 스스로가 개별적인 언론 침해 사례에 맞서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판례를 남겨가며 그 범위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정치권이 만든 ‘이어령, 비어령’식 규정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복종하는 것은 언론인의 자세가 아니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박홍일
국장이 왜 법원의 판단을 받는 것 자체를 포기했느냐이다. 나도 데스크와 팀장을 경험한 입장에서 게이트 키핑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안다. 나는 박국장이 게이트키퍼로서의 역할을 다 해 주길 기대했다. 문제되는 부분이 있으면 조언과 의견을 제시해서 제작자가 놓친 부분을
지적하고, 보완해 주길 원했다. 하지만 박 국장은 방송을 내지 말자는 입장만 되풀이 했다. KBS울산의 위신을 땅바닥에 추락시키고,
그래서 자신이 얻는 게 과연 무엇일까?
프로그램 제작을 마친 뒤의 이 시간대는 보통 테이프를 주조에 넘겨준 뒤의 홀가분함에, 곧 온에어 될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은
어떨까 하는 긴장감이 혼재된 감정으로 보내게 된다. 그제까지만 해도 나는 이 시간에 온에어를 앞둔 보통 때의 그런 감정 대신 내가 몸담고
있는 KBS에 대한 수치감으로 가득차서 이런 글을 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후배들이 걱정스레 물어본다. “프로그램 어떻게 되나요?”
하지만 나는 “나도 잘 몰라”라는 답변밖에 할 수 없다. 사실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KBS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됐는가? KBS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울산 보도부 사무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