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24》(26) 최정란 시인
발랄하고 우울한 슬픔의 상상력(『독거소녀 삐삐』)(도서출판 상상인, 2022)
최정란 시인의 시집은 상상력의 보고다. 『독거소녀 삐삐』에서 유기적 상상력은, 청소년이 가부장제 질서를 향해 발랄한 비판과 빈정거림(scarcasm)을 보이다가, 이후에는 성인 주체가 사회를 향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개별자(광대)들의 슬프고 우울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최정란의 시적 사유의 변화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시인의 시쓰기와 관련이 있는데, 시인은 ‘검은 시간’으로 비유되는 ‘허기의 시간’ 때문에 자신의 몫인 ‘흰 시간’이 저당 잡힌다고 한다. (「흰 시간 검은 시간」) 타인의 강요에 의한 침묵은 ‘허기’이고, 허구적인 시간이다. 시인은 말풍선뿐인 허풍쟁이 ‘광대’들을 아이러니로 비판하고, (「아침은 맑음, 오후는 모르겠어요」, 「막막광대」, 「회의광대」, 「위임광대」, 「달려라 하니」, 「버뮤다 제라늄」, 「독거소녀 삐삐」, 「사포」) 또한, 청소년들이 능동성의 힘으로 수동성의 힘인 가부장제 질서를 비판하며 비아냥거린다. 이처럼 시인의 상상력(imagination)은 경험에서 출발하는데, 경험은 정신 속에 저장되었다가 이미지의 활성화인 연상을 통해 발랄한 내적 원리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자유분방한 시인의 상상력이 주체를 앞세워 한결같이 행과 행 사이를 누비며 세계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별 주체는 부조리한 사회 집단의 전체성 때문에 ‘불가능한 이륙’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슬픔의 화살표인 ‘울음의 이정표’를 따라가게 된다. (「눈물광대」, 「전사의 시」, 「울음의 이정표」, 「숨죽여 우는 사람」) 따라서 『독거소녀 삐삐』에서의 최정란의 유기적인 상상력은 연상에 의한 능동적 세계와 수동적 세계의 창조다. 두 힘 사이에서 시인은 조화의 세계가 아닌, 부조화의 세계를 드러낸다. (「피노키오」, 「고군분투」, 「말과 투구와 노새와 랩」, 「목단꽃 무늬 접시」,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졸라 블라블라 졸라졸라 블라블라 어여쁜 소녀 떼가
졸라졸라 길을 간다 졸라졸라 팔짝팔짝 졸라졸라 즐거워
교실도 졸라 시험도 졸라 학원도 졸라 아빠도 졸라(밥맛
없어) 엄마도 졸라(밥맛없어) 집도 졸라 용돈도 졸라 알
바가 졸라 생리대가 졸라 말과 투구가 졸라 발랄해, 졸라
졸라 거슬려, 내가 졸라 밥맛이라는 증거, 학교와 부모를
졸라 존중하는 증거, jollyjolly 깔깔대며 졸라졸라 조잘대
는 소녀 떼, 투명한 새 탁구공처럼 졸리졸리 튀어 오르며,
입을 모아
졸라졸나 블라블라
존나 블라블라 존나존나 블라블라 씩씩한 소년 떼가
존나존나 길을 간다 존나존나 펄쩍펄쩍 존나존나 유쾌해
게임도 존나 급식도 존나 과외도 존나 선생도 존나 (병맛
이야) 형도 존나 (병맛이야) 축구도 존나 여친도 존나 꿈
이 존나 솜털 수염이 존나 말과 노새가 존나 경쾌해, 존
나존나 거슬려 내가 존나 병맛이라는 증거, 선배와 또래
를 존나 존중하는 증거, 尊나存나 낄낄대며 좋나좋나 진
지한 소년 떼, 보이지 않는 골대를 존나존나 돌진하
려, 발을 굴려
-⸀졸라졸라 블라블라」 일부분
시인의 유기적 상상력은 마침내 소년과 소녀들의 통합언어인 ‘졸라졸라’와 ‘블라블라’라는 비속어를 통해 기성세대 교육관과 수동적인 여성성, 그리고 가난한 부모의 무기력한 삶을 비판하며 비아냥거린다. 소녀들은 먼저 ‘교실’, ‘시험’, ‘학원’을 졸라, 그다음에는 ‘집’, ‘알바’, ‘용돈’ 등 가난을 물려준 부모를 졸라, 이 둘을 “졸라 존중”한다. 이때 ‘존중’은 표피적으로는 칭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심층적으로는 무능력한 교육관과 부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아이러니 장치이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생리대’로 상징되는 순종적인 여성성을 비판하고, ‘말’과 ‘투구’로 상징되는 가부장제 질서의 나약한 힘을 비판하기도 한다. 따라서 소녀들의 발랄하고 쾌적한 비속어는 세계에 대한 공격이다.
소녀들과 더불어 소년들은 ‘존나존나’와 ‘블라블라’ 비속어를 통해 가족과 여친, 놀이문화 그리고 학교생활 모두가 ‘병맛 없음’을 말한다. 그들은 ‘말과 노새가 존나 경쾌’하다고 하지만 심층에서는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가부장제 질서의 느림을 아이러니로 표현하는데, 그들에게도 문제의 양립성이 존재한다. 선배와 친구는 존중의 대상처럼 尊이어야 하는지, 存이어야 하는지, 자못 진지하다. 소년들은 소녀들처럼 “낄낄대며 존나존나” 경쾌한 비속어로 가부장제 질서에 대해 비판과 반어(Irony)적 의미를 내보이고 있다.
이처럼 최정란의 시가 탄생하는 것에는 학교와 가정, 가족, 사회라는 요소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인은 시의 자율성 개념을 통해 사회의 사회성 비판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견지하고 있다, 이때 시의 자율성이란 예술의 초석이 되는 사회성을 의미한다. 사회의 사회성에 관한 그녀의 상상력은 개별자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우울과 슬픔이다. (「울음의 이정표」) 이 사회는 이미 사회성이 멸종위기에 처한 세계이다. 입은 있지만 필요한 말을 못하고 모든 것은 위임으로 대체된다. (⸀위임광대」)
1
중요할 것 없어 더없이 중요한 약속이 생기지
위임할게요 바쁜 척, 유쾌하게
전체 의견에 따르겠어요
의견 없는 것도 의견
대세에 따르는 것으로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줄줄이 위임된 안건들과 나란히 몸을 웅크리지
아늑한 상자 속에 누워
위임으로 참석을 대신하는
위임으로 직접 참석한다고 가볍게 날아와 착지하는
외톨이 고양이
스스로 생을 결정한다고 착각하지
사다리와 물고기와 양지바른 남쪽 툇마루가
필요한데
위임은 옆길과 샛길에 핀 꽃들과 해찰하지
-「위임광대」 일부분
사회는 위임하는 자가 자기 의견과 제안을 내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이 사회는 힘 있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곳이다. 대다수 사람은 중요할 것도 없는데 더없이 중요한 것처럼 유쾌하게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반납한다. 그런데도 사회나 회사는 왜 회의해야 하는지, 주체조차도 회의에 참석하고 많은 회의를 하지만 회의가 든다. 이 회의하는 사회를 시인은 ‘회사’와 ‘사회’라는 유음이의어와 ‘희의’를 ‘회의’하는 동음이의어를 통해 사회의 사회성을 비판한다. 이 사회는 주체에게 성취감을 주는 게 아니라, 회의하게 하고 귀를 가시의 무덤으로 만들어간다. (「사슴뿔 선인장」) 이런 생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회인이라면 얼마든지 경험하게 되는 평이한 체험이다. 그 예로 입을 침묵으로 가둔 개별자가 자신의 발언을 반납하고 위임으로 전체 의견을 대신한다. 개별자는 “사다리와 물고기와 양지바른 툇마루”로 상징되는 어둠에서 빛으로, 생명의 재생과 따뜻한 정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개별자는 자신의 의결권을 위임하게 됨으로써 정도가 아닌 샛길의 꽃들과 해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회는 사회성의 멸종위기를 초래하는데, 그 이면에는 “슬픔의 힘을 믿고 끝까지 살아보기로 한 종족이 있다.” (「드디어」)
최정란 시인의 시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상상력의 하나는 ‘발랄’과 ‘우울’이다. 이는 세계를 비판하는 시의 미학적 특성과 관련이 있는데, 시인은 한 사회의 개별자가 수동성과 침묵으로 일관하기에 슬프고 우울한 심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 심리가 내포하는 의미는 사회에 대한 개별자의 인식과 사유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무성한 바람이 “뿌리와 머리”를 키운다는 뜻이다. (「무」) 다시 말해 사회는 개별자의 말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그들을 광대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주는 말의 ‘허기’와 ‘허구’에 대해 최정란은 모든 것이 변하고 유한한 외부 경험에서 시가 출발했지만 ‘순수한 기적’을 얻기 위해서는 시의 내부에서 본질을 찾는다고 한다. (「프롤로고스」) 시의 내부에는 죽은 것도 살릴 수 있고, 만물 또한 영원히 죽어 영원히 살 수도 있다. 이처럼 최정란 시의 주체는 시의 외부를 선택하여 이들을 보다 아이러니칼하게 만들기 위한 목표로 시의 외부에서 시의 내부로 변용시킨다. 결국 최정란 시의 화두는 발랄과 우울의 이정표를 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영원성으로 가고자 하는 말이다. 이는 이후 시쓰기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서 눈여겨볼 일이다.
출처: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시평 (26) 최정란 시인 - 포스트24 - http://www.post24.kr/57299
최정란 시인의 약력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계명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장미키스』,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외 발간,
□요산창작기금,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2020) 수혜, 세종도서 문학나눔(2017),
□<시산맥작품상> (2006), <최계락문학상>(2019)을 수상
□cjr1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