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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해안 일주 중 만난 사람들(1)
월10월6일 늑도대교 옆의 늑도항(?)
1.
여행 첫날(9월29일),
울산의 한 국밥 집에 도착 했을 때는 저녁 7시30분이었다. 115키로 정도를 달려왔고 배도 몹시 고팠다.
식당을 찾다가 간신히 눈에 띠인 집이었다. 돈을 주면 자신의 비법을 전수해 주겠다는 간판까지 내다 건 집이었다.
옳다구나 이런 집이 맛있지, 그걸 증명하듯 손님들도 많았다. 근데 자전거를 세워놓을 곳이 마땅치 않다.
꾀를 내다가 보니 출입구 앞에 테이블도 있고 의자도 네 개나 놓여 있었다. 식당도우미를 불러 사정을 설명하고 바깥 테이블로
밥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주인에게 물어보더니 못주겠단다. 이런 썩을 넘이.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아 다시 식당을 찾아 나섰다. 한 식경이나 헤매다 맞춤한 집을 찾았다. 돈 육천원주고 돼지 두루치기에 (배추한단에 일만오천원이라는데)
풀코스(상추, 깻잎, 고추, 배추)에 된장까지 곁들인 한 상을 푸짐하게 먹고 나왔다.
손님도 별로 없는 집이었다. 밥 한 그릇을 더 먹었다고 하자 그건 돈으로 안 친단다. 쩝, 인심이 돈에서 나오는 건 아니지.
10월7일 남해 충렬사 이충무공 사당
10월10일 흑산도 한다령 가는길
10월10일 흑산도 "이게 무슨고기요?" 묻다가 "조기도 모르요" 하고 타박을 맞은 곳이다.
10월10일 조기를 말리던 동네. 흑산도.
10월10일 흑산도 사리가는 길.
사리항 손암 정약전이 서당을 내어 살던 곳이다. 정약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박물지 자산어보를 쓴 사람
손암 선생의 유배지 집 앞. 안내판은 없고 잡초는 무성하고 대문은 벽이 허물어져 내린 상태였다. 정말 이 집이 맞는가 싶어 지도를 끄집어내어 확인을 했다.
손암선생의 집.
손암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촌서당. 이 동네 아이들이 그때 땡 잡았는 걸 그때 알았을까?
10월9일 흑산도 항
여행을 하며 나는 식당을 가리지 않았다. 나의 여행 노하우다. 밥 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제일 처음에 만나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 그 집에서 파는 것을 시켜먹었다. 설사 식당이 여러 집이 있어도 나는 고르지 않았다.
어디가 맛있는지는 어차피 모르니까, 이 원칙을 고수하다보면 이외로 좋은 집에서 맛있는 먹을거리를 발견 할 수도 있다.
품목을 따질 것도 없다. 된장찌개가 어쩌고 갈비찜이 어쩌고 하다가는 눈이 튀어 나올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다가 택도 아닌 곳을 만나기도 했다. 온양의 한 식당에선 소 내장탕 인 줄 알고 시켰더니
생선 내장탕이 나온 곳도 있었다. 쩝, 물론 나의 불찰로 돌리고 군말 않고 맛있게 먹었다.
10월 16일 온양온천을 출발해서 아산방조제를 넘어 39번도로를 타고 북상하다 아산휴게소의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넓은 식당 안은 텅 비어 있었고 허리가 고꾸라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식당 안을 청소 하고 있었다.
나는 사태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맛이란 것이 맛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가 권하는 것으로
한 그릇 시켜놓고 나니 국그릇 한 그릇 들겠나 싶은 할머니가 주방에서 달가닥 거리더니 육개장 한 그릇을 내왔다.
뭐 두말 할 것 있나.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정말 그렇게 먹는 것이지.
그런데 먹다보니 실실 웃음이 터진다. 국을 끊인지 오래 됐다는 것이야 각오한 것인데 할머니가 고기 몇 점 올리는 것도
잊어먹은 것이다. 뭐 우짜노 기냥 묵지. 반찬도 .쩝. 밥맛은 맛있게 먹으려는 자세에서도 나오는 거니까. 꼭꼭 씹어 묵었다.
그 식당에서 일이다. 내가 들어오고 나서 조금 지나 들어 온 기사 아저씨 한 분이 자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앉은 자리의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내 복장을 보더니 자꾸 말을 건다 .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며칠 째냐?
그러고도 마누라한테 맞아죽지 않냐? 하면서, 나도 그때는 이미 오래 동안 바깥으로 떠돈 여행막판이라
이리저리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기고 있었는데 기사아저씨가 밥을 먹다말고 내가 밥을 먹고 있는 의자 옆에
쪼그리고 앉더니 서슴없이 내 허벅지를 주무르는 것이다. 이 무신 팡당 시추에이션? 내가 황당해하자, 아저씨 왈
“우와, 힘도 안 줬는데 단단하네 잉”
나 정말 밥알이 코로 튀어 나올 뻔 했다. 충청도 사람들도 듣기보단 양반이 아닌 모양이다.
2.
9월30일
울산을 출발해서 태화교를 건너 공업로타리를 거쳐 문수, 온양공단 쪽으로 틀어 가다가 오르막을 올랐다.
완만한 업힐 구간이었지만 오르막이 길어서 나는 헉헉 댔다. 이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아무리 까마득한 오르막이라도
자전거를 끌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르막 정상에 도착하니 길옆에 배를 가져다 놓고 파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자전거를 세웠다.
“배 한 개 주소”
옆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냉큼 말을 받는다.
“맛 좃심다, 한 상자 사 가이소”
남편인가? 나는 배낭과 내 행색을 환기 시키며 한 개 먹고 갑시다. 고 말했다. 중년의 사내는 남편이 아니었다.
그는 내게 말을 함부로 하며 무례하게 굴었는데 그건 냉중에 이야기하고, 중년은 아주머니에게 작업을 걸고 있는지
뻥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아주머니가 배를 두 개 가져온다. 일단 허겁지겁 깎아 먹고 나서
“얼마에요?”
라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기겁을 한다.
“그걸 우에 돈 받심니까. 기냥 가이소”
배낭을 뒤적거려 비상식으로 가져다니는 쵸콜렛 두 개를 꺼내 주고는 자전거에 올랐다.
대변항으로가다 들린 용궁사. 9월30일
10월4일 거제도 해금강 전망대.
10월14일
충남 보령의 도심에서 트럭에 사과를 가득 실어 파는 아주머니도 사과 세 알을 봉지에 사서주고 다시 한 알을 더 주며
한 알은 여기서 얼른 먹고 가란다. 물론 돈은 받지 않았다. 아침에 변산을 나서 새만금 방조제를 건너 서천,
웅천을 거쳐 보령에 들어서니 저녁이었다. 게이지를 보니 112키로를 달려왔다. 배는 쪼르륵 거리는데 식당도
잘 곳도 눈에 띠지 않았다.
“배고픈데 기냥 잡수이소”
참,나, 내가 그렇게 처량하고 배고파 보이 남, 사과를 꿀처럼 달게 먹는데 아주머니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대구서 왔다니까.
“하이고, 고향까마귀네”
라며 엎어진다. 어둠이 내린 거리, 제법 설렁한 기운이 도는 저녁이었다.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야 말해 무엇해,
나는 서둘러 거기를 빠져 나왔다. 왜냐하면 아주머니가 만일 내 자전거 값을 물으면 어떡해. 그러나 물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십만 원 짜리도 안 되요.”
암, 십만 원도 안 되지, 그 사과 한 알 앞에서야 단돈 백 원도 안 되지.
왜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 하는가? 복기에 들어갔다. 사과는 낱개로 팔지 않고 묶음으로 판다. 10키로나 되는 배낭을 지고
다니는 터라 나는 그렇게 살수 없다. 그래서 사과를 팔지 않을까 염려해서 최대한 공손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주머니 여행 중이라 배가 고픈데 몇 개만 팔수 없을까요?”
아마도 이게 아주머니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 젠장,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러다가는 지능적인 과일 도둑이 되겠다. 다음번에는 파는 묶음을 사서 낑낑거리며 지고 다니며 먹더라도 그렇게 해야겠다.
아주머니들의 자비가 나를 골치 아프게 한다.
3.
10월9일 흑산도.
목포항에서 11시 40분에 출발 흑산도 항에 오후 3시5분에 도착했다. 일몰까지는 시간이 남아 일단 상라봉을 오르기로 했다.
마음도 급했다. 그 꼬불꼬불한 아름다운 길에 반해 흑산도를 찾지 않았던가. 귀에 이어폰을 꼽고 가는
키 큰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상라봉을 어디로 갑니까?”
길을 가리키며, 청년 왈
“상라봉으로 가야지”
말은 맞다.
“얼마나 걸려요?”
“이십분? 두시간? 몰라, 몰라”
그러면서 묻는다.
“아저씨 혼자야?“
그렇다고 하자, 청년은 픽 웃으며 말했다.
“정말 불쌍하군”
헉 이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녀석을 살피니 지적 장애아다. 씩 한 번 웃어주고 페달을 밟는데 뒤에서
‘아저씨’ 하고 소리쳐 부른다. 돌아봤더니 ‘아저씨 파이팅’하며 두 팔을 흔든다.
상라봉을 켁켁거리며 올라갔다가 벙개같이 내려와 어디에 잘까 하고 궁리하며 가고 있는데 길거리에 앉아
담소하고 있는 할머니 몇 분이 보였다.
“할매 이 근처 민박집 없어요?”
갑론을박, 설왕설래 끝에 한 할매가 나를 따라오란다. 자기 아들 방이 있는데 회사에서 자라하면 된단다.
자기 아들은 아직 장가를 못간 마흔이 된 총각이며. 노래자랑에 나가서 일등상을 몇 번이나 탄 카수란다. 카수.
순천만 민박집이 시설은 모텔에 비해 턱도 없으면서 값만 비싸든게 생각나서 할머니 얼마에요 했더니 원래는 삼만원인데
니는 특별히 이만오천원에 줄거란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 같응께로. 우리는 서로 큰소리를 해가며 상대의 눈을
살펴가며 대화를 나눴다. 왜냐하면 우린 서로의 말을 이십프로 정도 밖에는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방은 아들이 자던 요가 그대로 깔려있었고 머리카락 천지에 먼지가 풀풀 날았다. 할매가 가져온 수건이 걸레처럼 보여서
한숨이 나왔으나 궁리해 봐도 밥집도 없고 해서 저녁밥까지 부탁했다. 근데 쓱쓱쓱 하더니 어느새 내온 저녁은 생선국에,
나물 반찬에, 정갈하고 꿀맛 같았다. 나는 감격해서 소리쳤다.
“할매 낼 아침도 해줘요”
10월14일 새만금 방조제 갑문 변산에서4키로지점과약15키로지점에 있었다. 총연장 33키로
10월14일 새만금방조제
새만금 방조제 아래 내륙쪽 바다에 접한 도로
10월12일 하의도 항 전송나온 이선생과 함께.
10월18일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뒤에 보이는 강건너가 북한땅.
10월12일 하의도항
흑산도에서 산 담근 막걸리로 하의도 에서 한잔 하며 다다다다 수다중. 바다가 호수같다.
4.
10월11일
목포에서 신안페리호를 타고 아침 8시50분 하의도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이 선생님은 수업중이라 그녀가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 나는 큰바위 얼굴과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둘러보고 농민운동기념관으로 가는데
연락이 왔다. 농민운동기념관에서 만난 이선생님은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우리는 십년지기처럼 타타타타 수다를
떨다가 소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하의도를 둘러봤다. 그녀는 삼년째 이 섬에 갇혀(?)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선생질도, 아내의 역할도, 엄마의 역할도, 그리고 그림도…… 어떨 때는 정말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녀의 미간에 잠깐 쓸쓸함이 비쳤다. 그녀는 민중미술을 하는 화가다. 1990년 오월전(10일간의 항쟁 10년간의 역사)을
시작으로 수많은 개인전과 합동전을 가졌다. 남편과 딸은 광주에 살고 있고 토요일에 나가 일요일에 섬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삼년째 하고 있다. 전라도는 섬이 많아 순환근무는 의무이다. 그날 흑산도에서 사온 막걸리를 포함해 몇 병을 마셨다.
주민이 얼마 안 되는 섬 인 관계로 모두가 학부형이니 행동이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어 동네 사람 눈치코치 다 봐가며
이리저리 해변을 옮겨 다니며 마셨다. 선생님이 마련해준 민박집에서 자고 나오니 선생님이 부두로 전송을 나왔다.
바이바이 이 선생 유쾌했던 하루였습니다.
2010.10.30. 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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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걸 ㅎ
장도의 일지가 공개 됨니까~? 배낭 들고 그냥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기며
이런게 아름답지 아니한가 ~!
사는 게 다 그러네,
마음 날 때 한 번이지
금수강산 일주는 최고에 즐거움이죠 ...곳곳에 스친연들은 평생을 지울수가 없는 마음에 무지개라 할까요....ㅎㅎㅎ제생각임다
백호야 갈 수록 글이 느는구나. ㅎㅎㅎ
누구나할수없는전국투어?정말부럽군요그리고건강히완주해서다행입니다?난?어제쯤~~~?
좀 쉬어가며 글을 쓰라.
숨 넘어가겠다. ㅋ
새하 성님 부럽습니다. 전 몇달동안 잔차질도 몬하다가 몇일전 좀 타고 온몸이 쑤시고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귀환하심 무용담 들으러 가야겠습니다.
라이딩에 참석은 못하드라도 뒷풀이에라도 불러주심 달려가겠습니다.
어디 다치셨나요?
아니면 일이 너무 바빠서?
이제 우리 잔차로 사무실도 만들어 놓았으니 언제라도 나오세요.
쏘주 한잔 하면서 정이라도 나누게... 정은 내면 낼수록 넘치지 딿는게 아니니까.ㅎㅎ
쬐끔 바쁘다 보니 그렇게되었습니다. 사무실 축하도 할겸 함 들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