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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사람들이 모이고 소방차와 소방기구가 동원되었지만 맨 꼭대기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긴 사다리를 가져왔지만 그것 역시 너무 짧았습니다. 그때 한 선원이 사다리 위로 올라가서 맨 끝의 칸에서 몸을 굽혀 창문을 붙잡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밟고 건너서 사다리를 타고 내리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구출되고 그 선원도 내려왔습니다. 그의 얼굴은 심한 화상을 입었고 머리는 모두 타버렸으며 그의 손은 온통 물집 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한 생명들을 구했습니다. 비록 사다리가 거의 꼭대기까지는 닿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에는 한 사람의 키만큼의 높이가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얼굴의 화상과 위험을 무릅쓴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자를 구원하는 데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히 10:39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나를 희생하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네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어제는 법무부 갱생보호의 일을 맡아보시는 박수일 목사님이 저에게 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지금 한국에는 마약 복용자가 40만명이나 되고 중독자와 범죄자가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라 이것이 한국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뿐 아니라 온 세계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고통을 참거나 극기할 줄 모르고 도리어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드는 정신 상태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술과 담배를 먹을 뿐 아니라 마약을 사용하고 혼숙을 하는 등 음란 방탕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인,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극기나 타인을 위한 희생같은 것은 거리가 먼 단어들이 되고 웃기는 말로 들어 넘기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고 살리는 위대한 일들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루어져 왔고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들 또한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아무리 입에 달콤하고 시원한 것만 마시기 좋아하는 세대가 되었을지라도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어야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행복한 가정과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밀알이 거름 냄새 나고 습기찬 땅속에 들어가 죽기 싫다고 그대로 있으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없고 결국은 자기도 사는 것 같지만 죽는 결과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달콤해 보이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세상에 저주와 멸망이 들어 왔지만 제2의 아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쓰디쓴 잔을 받아 마심으로 세상에 죄사함과 용서와 사랑과 영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계신고로 이 십자가의 쓴 잔을 앞에 놓고 심히 고민하며 핏방울같은 땀을 흘리며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지만 곧 이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쓰디쓴 고통의 잔을 마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이 주신 쓴 잔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쓴 잔을 잘 받아 마셔서 자신을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성도가 많을 때 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이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 전쟁 때 중한 메시지를 적진에 들어가 전달해야 될 일이 있어서 한 사신에게 메시지를 들려서 병사와 함께 달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그 사신은 적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때 그를 따라갔던 병사도 큰 부상을 입었지만 얼른 그 메시지를 꺼내 가지고 부상입어 피가 흐르는 자기 옆구리에 집어 넣고 계속 달렸습니다.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른 병사는 피를 다 쏟아서 말은 하지 못하지만 웃는 얼굴로 간신히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그 병사는 죽었습니다. 치료하던 의사가 말하기를 '그의 상처는 죽을만큼 심하지는 않았는데 그 메시지가 들은 종이를 쑤셔 넣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병사의 용감한 희생으로 큰 전과를 올리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나라도 잘되고 교회도 부흥되고 많은 영혼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통의 쓴 잔을 마시며 희생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찾아왔고 수억만의 구원받은 성도들로부터 영원히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피로 속죄받은 천천 만만의 셀 수 없는 성도들이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스펄젼(Spurgeon)목사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면류관을 쓴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희생이 없는 면류관이 없습니다. 고통과 희생의 쓴 잔을 마시면 않고는 달콤한 축복의 잔, 영광의 잔을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희생의 쓴 잔을 마신만큼 영광의 면류관과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것 속에는 멸망과 파괴의 독이 들어있는 수가 많습니다.
잠 5:3-5에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달콤하고 미끄러울수록 나중에는 백배 천배 쓴 맛을 보게 되고 두 날 가진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까지 된 것은 아브라함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든 고향 본토 아비집을 목적지도 없어 떠날 때 얼마나 쓰디쓴 고통이었겠습니까? 젊고 예쁜 하갈과 처음으로 가져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할 때 그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그러나 쓴 잔을 마시며 냉정히 쫓아버렸습니다. 맨 마지막에는 100세가 되어 얻은 아들을 잡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애지중지하는 외아들을 잡아 바치는 심정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을 보신 하나님이 아들에게 칼을 대지 못하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양을 잡아 제사드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시험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서 기꺼이 하나님 편에 섰을 때 그를 온 세계에 뛰어난 인물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희생은 없이 달콤한 면류관만 받아 쓰려고 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을 배우려는 분들이 많은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을 위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교회가 성장하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요, 정욕입니다. 반드시 나를 희생의 도구로 사용해야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실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는 칭찬받고, 대접받는 일에는 빠지지 않고 앞장서서 나오는데 괴롭고 힘든 일에는 미꾸라지처럼 잘 빠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타산적이고 약삭빠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사람들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농속에 간직한 비단이 되지 말고 손쉽게 필요할 때 쓰여지는 걸레가 되자'고 했습니다. 괴로운 일, 궂은 일, 귀찮은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 7:4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음식 차려놓고 뚱땅거리고 노는 잔치집에는 모두가 가기 좋아하지만 송장냄새 나고 밤을 새우고 무거운 관을 메는 장례식 집에는 가기를 싫어 합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가는 것이 달콤한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장로를 택해서 세울 때 먼저 신앙상태, 인격과 성품 등을 다 살펴본 다음에는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좀 나오라고도 해보고 짜증나는 일들을 시켜본다고 합니다. 그럴 때 순종을 잘하면 장로로 세우고 핑계대고 약삭빠르게 굴면 안세운다고 합니다. 교사나 성가대원들 중에 날씨가 좋고, 기분이 신날 때나 먹을 일, 놀러 갈 일이 있을 때는 잘 나오는데 비오는 날, 추운 날, 귀찮은 날은 성가 연습도 안나오고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러도 안나와서 아이들이 어미닭 잃은 병아리떼처럼 흩어져 다녀도 그냥 내버려 두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난번 파라과이(Paraquay)에 갔을 때, 그곳의 어떤 권사님 한 분이 늘 웃는 얼굴로 힘든 일, 궂은 일,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그 권사님 칭찬하기를 '저 분은 말하는 것을 들을 수가 없는데 무슨 일이든 일꾼이 적을 때는 언제나 옆에 있곤 한다'고 칭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권사님입니다.
다윗왕은 이새의 막내 아들이며 천한 목동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이스라엘의 가장 훌륭한 왕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양떼를 지킬 때에도 밤잠을 제대로 못자가며 곰이나 사자가 나타날 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쫓아가 물리쳐 다른 형들이 귀찮아서 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양들이 맹수한테 잡혀가든 말든 낮잠이나 자고 게으름을 피웠으면 결코 그런 훌륭한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골리앗 장군을 때려 눕힌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모든 장수들이 다 무서워 나가지 못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 사자나 곰이 나타났을 때 싸우던 경험으로 물멧돌을 던져 맞추어 죽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괴롭고 고통스런 일에서 회피하지 맙시다. 민수기 32장에 오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요단 동편에 자리를 잡고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땅의 분배를 요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편안함만을 위한 이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책망하며 이르기를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복종케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의 앞에서나 이스라엘의 앞에서나 무죄히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산업이 되리라마는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번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2, 23)고 하였습니다. 달콤한 것만 찾아 먹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은 하지 않으려 하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베드로(Peter)의 순교사화를 다 잘 아시지요? '쿼바디스'란 영화를 봐서도 아실 줄 압니다. 로마의 박해시대 때 베드로는 순교하려고 했으나 그의 제자들이 강권하면서 '잠시 피했다가 복음을 더 많이 전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여 할 수 없이 로마 도성을 빠져나갈 때 알반 언덕에 이르자 환한 빛이 나오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로마성을 향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양떼를 버리고 도망가서 내가 다시 가서 십자가를 져야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에 들어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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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존재 목사님 함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